- 일어나 벧엘로 올라가 단을 쌓으라
<창세기 12:10-20, 13:1-4>
우리는 지금 아브라함을 구원하시고 아브라함의 인생여정동안
모든 사건과 생활에 개입하시어 하나님이 원하는 방향으로 이끌어 가신
하나님의 열심에 대해 배우고 있는중이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복을 줄 것이다, 본토 친척 아비집을 떠나라,'하시고,
그의 자손이 하늘의 별처럼 많아질 것이라고 약속하셨다.
그러면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땅이 무엇이었지?
“가나안땅이요~”
표피적으로, 모형적으로는 가나안땅이었지만, 우리가 산상수훈에서 온유한 자가 받는 땅이 무엇인지
배웠던 것처럼 하나님이 주시고자 하는 그 하나님 나라가 무엇이었나 생각해 봐야해.
하나님은 하나님의 통치에 순종하는 자로 만드셔서 "걸어다니는 하나님 나라"로 아브라함과 그 자손을 만들겠다는 의지를 가지고 계셨다.
아브라함이 하나님 명령에 순종하여 세겜에서 벧엘과 아이 사이로,
벧엘과 아이 사이에서 남방으로 점을 찍듯 찍으며 가나안 땅을 통과하였는데,
그곳에 이르렀을 때 가나안 땅은 기근이 들었어.
아마도 아브라함은 가나안 땅에서 하나님이 주실 풍요와 자손의 축복이 흘러넘칠거라고 기대했을텐데,
그 기대를 품고 들어갔던 가나안땅은 기근으로 말라버리고 있는거야.
그것은 하나님이 약속하신 땅은 우리 눈으로 볼 수 있는 풍요와 다산과는 상관없는 곳이라는 의미겠지.
그당시 고대에 기근이란 신의 저주를 받은 거라는 인식이 만연했대.
아브라함은 그 기근속에서 머물 수 없어, 기근을 피해 나일강의 삼각주 땅인 애굽으로 내려갔다.
성경에서는 이 “내려갔다”라고 하는 “야라드”라는 말을 하향, 즉 신앙의 퇴보를 의미하는 뜻으로 쓰였어.
같은 표현을 삼손이 블레셋 여자를 만나러 딤나로 내려갔다, 또 요나가 하나님이 명령하신 곳을 피해 욥바로 내려갔다, 라고 할 때도 이 단어가 쓰였거든.
그럼 애굽에서 아브라함에게 어떤 일이 벌어졌을까?
그 당시 고대에는 힘있는 자, 특히 왕이나 권력자가 다른 집의 처자가 마음에 들면
그의 힘으로 그 처자를 자신의 것으로 삼을 수 있었어.
만약 그 여인에게 남편이 있으면 남편을 죽여서 내것을 삼기도 했고...
그 때 사라의 미모가 무척 출중했는지, 그곳의 많은 사람들이 칭찬할 정도였대.
“헐~ 65세 할머니가요? 이해가 안가요. 아무리 이뻐도...ㅋㅋㅋ”
글게 말여..(정말로 이해가 안간다는 표정들이어서, 잠깐 딴데로 샜다가~)
본문의 내용을 보면, 아브라함은 자신의 목숨유지를 위해 사라더러 여동생이라고 하라고 거짓말을 시켜 보냈어.
그러나 사라를 취하려던 애굽 왕에게 하나님은 큰 재앙을 내리셔서 바로왕은 아브라함에게 사라와 함께 은금과 육축을 더해서 주었단다. 어째서 내게 이런 일을 행했느냐는 원망을 듣고...
세상의 왕보다 훨씬 강한 어떤 존재앞에 혼비백산하게 되었지.
아브라함은 그 일 후로 애굽에서 나와 벧엘과 아이 사이에 장막을 쳤어.
벧엘은 “성전, 하나님의 집”이라는 뜻이고, 아이는 “쓰레기더미”라는 뜻이다.
하나님은 이 아브라함의 사건을 통해 우리성도는 쓰레기더미 속으로 쳐박힐 수 있지만,
그 쓰레기 더미를 하나님의 집이 삼켜버린다는 것,
또 우리 성도는 지옥같은 더러움을 발견하는 이 땅에서 하나님 나라를 품고 살아야 함을
가르쳐 주신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실수와 자기자신의 왕됨을 추구하는 죄인의 모습까지도 선용하셔서
하나님의 주권을 확인시켜 주시고, 결국 하나님이 약속하신 땅, 하나님 나라가 되기까지
하나님이 끌고 가신다는 믿음을 가지도록 몰아가셨다.
이런 과정을 겪은 후, 아브라함은 조카 룻에게 눈에 보기에 더 좋은 땅을 양보하는 관용도 믿음의 폭도 성장하게 되었다.
지금 우리의 모습이 아브라함이 가나안에 처음 입성했을 때처럼 초라하고, 무기력하고, 연약하고, 힘겨워 보인다 할지라도 우리안에 시작된 하나님나라 건설은 반드시 하나님이 완성하실 것이라는 기대와 소망을 놓치면 안된다.
우리 안에 시작된 하나님의 선한 일은 반드시 예수 그리스도의 날까지 이루실 것이니까...
<빌 1:6>
너희속에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이루실 줄을 우리가 확신하노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