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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ome >  칼럼/책 >  그런 기독교는 없습니다
* 본 설교는 2004년도 개척 첫해에 기초교리 공부 내용입니다
 
작성일 : 13-04-16 08:58
   41. 교회(9) - 교회와 복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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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글쓴이 : njsmyrna
    조회 : 5,358  


(창12:1-3)
1    주께서 아브람에게 말씀하셨다. "너는, 네가 살고 있는 땅과, 네가 난 곳과, 너의 아버지의 집을 떠나서, 내가 보여 주는 땅으로 가거라.
2    내가 너로 큰 민족이 되게 하고, 너에게 복을 주어서, 네가 크게 이름을 떨치게 하겠다. 너는 복의 근원이 될 것이다.
3    너를 축복하는 사람에게는 내가 복을 베풀고, 너를 저주하는 사람에게는 내가 저주를 내릴 것이다. 땅에 사는 모든 민족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받을 것이다."
 
 
설교는 구사되는 단어가 다르고 전개되는 내용은 다를지라도 모두가 한 곳으로 수렴되어야 합니다. 바로 예수 그리스도와 십자가라는 복음으로 결론이 나야 합니다.
서머나 교회가 개척되고 제가 많은 설교를 했지만 그 모든 설교는 복음을 설명하기 위한 것들이었습니다. 제가 몇 차례 복음의 개요를 이러저러한 각도에서 설교를 했습니다만 오늘은 조금 더 자세히 히브리 문화와 언어, 사상, 그리고 관습 등을 살피면서 여러분들에게 정확하게 개념 정리를 해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성경에 나오는 “생명, 삶, 죽음, 복, 의” 이런 철학적이고 추상적인 개념들을 좀 더 실제적이고 실존적인 관점으로 정의를 내려 드리겠습니다.
제가 최대한 쉽게 설명을 하려고 노력을 하겠습니다. 그래도 조금 힘들 수도 있을 것입니다. 여러분이 처음에는 조금 이해하시기 힘드시더라도 여러 번 들으시고 완전히 이해하실 때까지 열심히 공부하세요.
 
우리가 성경을 잘 이해하기 위해서 꼭 필요한 것이 히브리 사람들의 언어와 사상 그리고 문화와 습관, 그들의 배경을 잘 알고 있어야 합니다.
먼저 히브리 사람들의 삶과 죽음에 대한 개념을 우리가 살피고 넘어가겠습니다.
성경에는 “살았다” 혹은 “죽었다”는 말이 많이 나옵니다.
“우리는 죄와 허물로 죽어있었다“ ”우리는 예수 안에서 다시 살았다“ 그렇게 얘기합니다.
히브리 사람들의 삶과 죽음에 대한 개념은 우리의 것과 조금 다릅니다.
이러한 히브리 사람들의 삶과 죽음에 관한 개념을 먼저 알아야 성경이 이야기하는 복음을 좀 더 쉽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창2:7) 주 하나님이  땅(히, '아다마')의 흙으로  사람(히, '아담')을 지으시고, 그의 코에 생명의 기운을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생명체가 되었다
 
하나님께서 흙으로 사람을 지으셨습니다. 그리고 그 지으신 존재에 생기를 불어넣으셨습니다. 창세기 2장에서 쓰인 생기라는 단어는 (네솨마)인데 여러분이 잘 아시는 “르와흐”와 같은 말입니다.
생기를 불어넣었더니 그 존재가 살아있는 존재가 되었습니다. “생령이 되었다“는 말을 히브리 원어로 보면 ”하이 네페쉬 하야“입니다 /하이는 “살아있는”의 뜻이고 네페쉬 하야는 being "존재“의 의미입니다. 그래서 영어 성경에는 생령이 되었다 는 말이 became living being라고 번역이 되어있습니다.
 
우리는 헬라 문명의 영향을 많이 받았습니다. 알렉산더의 팍스 로마나가 이 시대까지 영향을 미칩니다. 그래서 헬라의 이원론으로 많은 사고를 합니다. 그것은 히브리 사상과는 많이 다릅니다. 그래서 우리가 성경을 이해하는 데 조금 어려움을 겪을 때도 있습니다.
헬라의 사고방식에 영향을 받은 우리는 어떻게 이해하고 있는가 하면 하나님께서 티끌로(흙으로)(아파르) 사람을 만들어 놓으셨습니다. living 네페쉬가 되기 전의 네페쉬를 만들어 놓으신 거죠.
그 사람은 그냥 인형에 불과했습니다. 눈동자도 안 움직이고 그냥 마네킹 같은 것이었는데 거기에 생기를 불어넣으시니 그 존재가 살아서 말도 하고 피도 통하고 그렇게 된 것으로 이해를 합니다.
 
그러나 히브리 사람들이 쓰는 이 “네페쉬”라는 말의 의미는 그런 움직이지 않는 인형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닙니다.
히브리 사람들이 쓰는 이 “네페쉬” “존재”라는 이 말의 개념은 육신과 정신, 성품, 인격 등 사람이 사람이기 위해 필요한 모든 영적, 육 적 요소를 다 포함해서 네페쉬(존재)라 이야기  합니다.
 
우리 조상들이 어떤 사람의 사람됨을 판단할 때 무엇을 근거로 합니까? “신언서판”이라고 하지요. 그 사람의 신수(육신)과 언변, 그 사람의 글과 판단력  이 모든 것은 그 사람의 성품과 인격을 나타내지요. 그 것이 그 존재를 특징짓는 요소들이라고요. 그러니까 김성수가 김성수이기 위한 모든 외양, 성품, 인격, 의식, 무의식 모두를 가리켜 “네페쉬”“존재”라고 한다는 것입니다.
 
히브리 사람들은 이 “네페쉬”라는 단어를 우리가 종종 spirit이라고 번역하는 “르와흐”라는 단어와 heart라고 번역하는 “레브”라는 말과 혼용해서 씁니다. (네페쉬,르와흐,레브)라는 단어들을 히브리 사람들은 생명, 생기, 호흡, 영혼, 기운, 존재 이런 뜻으로 혼용을 해서 씁니다. 그렇다고 그 말들이 정확히 동의어는 아닙니다.
 
좀 더 정확히 그 단어들의 뜻을 보면 “르와흐” spirit은 “네페쉬, 존재”가 어떤 일을 수행할 때 그 일을 수행하는 힘, 즉 operation power을 말합니다. 그리고 히브리 말 “레브, heart”는 네페쉬가 어떤 것을 기획하고 의도하고 계획하는 역할을 합니다. 네페쉬는 르와흐나 레브를 다 포함한 전체 존재를 가리킵니다. 그러니까 기능적인 면에서 조금 다릅니다. 그런데 네페쉬, 르와흐, 레브가 혼용되어 쓰입니다. 생명, 생기, 호흡, 영혼, 기운, 존재 이렇게 같이 쓰인다고 했습니다.
 
조금 이해하기 편하게 제가 설명을 해 드리면, 삼위일체의 하나님이 계십니다. 성부 하나님, 성자 하나님, 성령 하나님이 계십니다.
그 세 분 하나님은 우리의 구원에 있어서 각기 다른 기능으로 일을 하셨습니다. 성부하나님께서는 계획을 하셨고 성자 하나님은 실행에 옮기셨고 성령하나님께서는 적용을 해 나가셨습니다. 그런데 이 세분 하나님은 그냥 “하나님”으로 대표됩니다. 그러나 기능이 같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하나이십니다. 그리고 그 하나님은 “예수님”으로도 불립니다. 그 하나님은 “성령님”으로도 불립니다.
 
히브리 사람들의 존재에 대한 개념이 이런 것입니다. “존재”는 네페쉬 라고 불리지만 그 네페쉬는 spirit, heart를 포함하고 대표하는 단어입니다. 그 네페쉬는 르와흐라고도 부를 수 있습니다. 그 네페쉬는 레브라고도 부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존재” 하면 “네페쉬”라고 대표하여 부르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히브리인들에게 있어서 “네페쉬, 존재”는 육신과 영혼, 정신, 생각 모든 것이 포함 된 종합 적인 것입니다.
 
이런 사상 때문에 그들에게는 삼위일체 하나님의 개념이 쉽게 이해가 갔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이 “안다”라고 하면 그냥 피상적으로 어떤 대상을 조금 안다는 정도가 아니라 부부 관계처럼 그 대상을 완전히 이해하고 자기 네페쉬 속으로 끌어들인 것을 “안다”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아주 깊은 우정과 사랑의 관계를 “안다”고 합니다. 육체와 영혼과 생각을 따로 떨어뜨려 생각하지 않습니다.
 
“묵상을 한다.”는 개념도 마찬가지 입니다.
우리는 “묵상”하면 “단순히 눈으로 보고 생각하고 고민하는 것” 정도로 알고 있습니다.
시편1편에 복 있는 사람은 여호와의 율법을 주야로 묵상한다고 나와 있지요? 그것을 우리는 단순히 성경을 깊이 읽고 생각하고 고민하는 것으로만 생각합니다.
히브리 사람들이 묵상을 한다고 하는 것은 그냥 눈으로 보고 생각하는 것만을 이야기하지 않습니다. 그것을 적용하고 실천하는 것까지를 모두 포함한 것을 “묵상 한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네페쉬” “존재”는 의식과 무의식 그리고 육신을 포함한 모든 것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서구 사상은 무의식 상태에서 죄를 지은 것은 죄라고 인정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어떤 범죄를 저지른 사람이 무의식 상태에서 범죄를 저질렀다는 것이 입증만 되면 형량이 조금 가벼워집니다. 그러나 히브리 사람들은 생각이 다릅니다. 의식이건 무의식이건 그것은 모두 네페쉬, 존재 의 것이기 때문에 그 존재가 책임을 지어야 합니다. 그들은 생각과 행동을 따로 떨어뜨려 생각하지 않습니다. 생각을 했으면 이미 그 네페쉬는 그 존재가 생각을 한 바로 그 죄를 지은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지나가는 여자를 보고 음욕을 품은 것이 이미 간음한 것” 이라고 말씀 하셨을 때 그들은 쉽게 이해를 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렇게 히브리 사람들에게 있어서 네페쉬 , 존재는 그냥 죽어있는 인형이 아닌 것입니다.
그러니까 인간은 “하이 네페쉬 하야”“living being"이 되기 전에 그냥 인형이었다는 것이 아니라 ”지금 예수 믿지 않는 사람들처럼 보고 말하고 생각하고 하는 능력을 갖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창세기 1장에서도 하나님께서 하늘의 새와 물고기를 창조하시는데 그들을 가리켜서도 “네페쉬”라는 단어를 씁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생기를 불어 넣으셨나요? 아닙니다. 그런데 그들은 하늘을 날고 물에서 헤엄을 쳤습니다. 인간도 역시 그렇게 존재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생기를 불어넣으셨더니 그 존재가 “하이 네페쉬” 살아있는 존재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럼 보고 말하고 생각하고 있다고 해서 그 것이 살아있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 되지요?
 
히브리 사람들에게 있어서 죽었다는 개념은 이러합니다.
이 존재“네페쉬”가 존재하기 위해서 필요한 모든 것(그러니까 건강, 지식, 지혜, 인격, 성품 등등)그 모든 것을 그들은 “생명”이라고 부릅니다. 그리고 존재가 그 생명력을 100% 소유하고 있는 상태를 “happiness"(행복)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모든 인간은 그 행복을 추구하게 되어 있습니다. 처음에 창조되었을 때에 생기가 불어넣어져서 인간이 하이 네페쉬 하야(living being)생령이 되었습니다. 100%의 생명력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 상태가 행복한 상태였습니다. 비록 죄를 지을 가능성은 있었지만 죄를 짓기 전에는 100%의 생명력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죄를 지었습니다. 그 죄로 말미암아 인간에게 질병과 고난과 죽음이 들어왔습니다. 인간에게  질병과 다툼, 고난 등이 닥치게 되면 인간은 아프고 고통스럽고 슬픕니다. 100%의 만족한 생명력을 소유하지 못하게 됩니다. 부족한 상태가 되는 것입니다.
 
인간은 나면서부터 죄인으로 나기 때문에 질병과 고통과 사망에 노출이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늘 뭔가가 부족합니다. 가슴 한 구석이 뻥 뚫린 것 같습니다. 그래서 인간은 그 것을 채우기 위해 노력을 합니다. 돈도 벌고 공부도 하고 일도 하고 사랑도 합니다. 그러나 그 부족은 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주어진 것이기 때문에 그 죄가 해결되지 않으면 절대 그 구멍은 메워지지 않습니다.
 
인간은 죄로 말미암아 육신의 죽음을 맞이하게 되었습니다. 나이가 들고 늙어가면서 생명력은 점점 줄어들지요? 힘도 빠지고 외모도 늙어갑니다. 결국에는 모든 생명력을 쏟아 내어버린 시체가 되게 되어버린 것입니다.
히브리 사람들은 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주어진 죽음을 향해 생명력이 조금씩, 조금씩 소진되는 그 죽음을 향한 전체의 과정을 “죽었다”라고 표현합니다.
 
예를 들어 이스라엘이 가나안에 들어가기 전에 길갈에서 할례를 행합니다. 남자들이 고통스러워합니다. 여호수아 5장8절에 “그들이 낫기를 기다리매” 거기서 쓰인 단어가 역시 “하야”입니다. 그들이 “살아나기를 기다리매” 라는 뜻입니다.
이렇게 히브리 사람들은 생명력이 꽉 차 있지 않고 죽음으로 향해 가는 모든 과정에 있는 사람을 “죽은 자”혹은 “약한 자” “병든 자”라고 이야기를 합니다.
 
아담 이후의 모든 인간은 죄의 삯으로 “사망”이라는 저주를 받았습니다. 그래서 모든 인간은 죽게 되어있습니다. 누구도 그 죽음을 피해갈 수 없습니다. 그 죽음을 향해 하루하루 늙어가고 생명력을 소진해 가고 있는 자들을 가리켜 히브리 사람들은 “죽은 자”라는 표현을 썼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우리 죄인들을 가리켜 “죄와 허물로 죽은 자”라는 말을 쓰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약해졌던 생명력이 다시 회복되어 지면서 100%의 만족, happiness로 향해 가는 길을 “살았다”라고 합니다. 모두가 죽어야 하는데 어떤 한 무리가 그 죽음의 길에서 돌이켜 살아났다고 성경은 이야기합니다. 그러니까 이 지구상에는 두 부류의 사람이 존재하는 것입니다. “죽어 가는 자, 죽은 자“들과 ”살아난 자“ 겉으로 보기에는 아무도 모릅니다. 마치 대구역에 있는 우동 집에서 우동을 먹고 있는 사람들 중에는 같은 모양을 하고 같은 행위를 하고 있지만 어떤 사람은 부산으로 내려가고 있는 사람이 있을 것이고, 어떤 사람은 서울로 올라가는 사람이 있는 것처럼 어떤 사람은 죽어가고 있고 어떤 사람은 살아나고 있는 것입니다. 죽어 가고 있는 도덕적으로 윤리적으로 선한 사람이 있는가 하면 살아나고 있는 악당이 존재  한다는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그가 살아난 자인가가 중요한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또 한 가지 우리가 잘 알아두어야 할 개념을 짚고 넘어가야 합니다.
히브리 사람들은 그렇게 어떤 존재가 살아있는 존재가 되기 위해 필요한 모든 생명력을 가리켜 “바라크” “복”이라고 합니다. 우리가 생각하는 복의 개념하고는 완전히 다릅니다.
창세기 1장22절에 하나님께서 새와 물고기를 창조하시고 “그들에게 복을 주셨다”라고 합니다.
 
 
(창1:22) 하나님이 이것들에게 복을 베푸시면서 말씀하시기를 "생육하고 번성하여 여러 바닷물에 충만하여라. 새들도 땅 위에서 번성하여라" 하셨다.
 
새하고 물고기한테 무슨 복을 주신 것입니까? 재물을 주셨나요? 자식을 많이 낳게 해 주셨나요? 좋은 대학을 들어가게 해 주셨나요?
성경이 말하는 복은 “ 하나님께서 어떤 존재를 만드실 때 그 존재가 하나님께서 의도하신 존재로서 존재하기 위해 필요한 모든 것”을 복(福)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새에게 있어서 복은 원래 하나님께서 창조하실 때 의도하신 대로 하늘을 잘 날아다니면 “복을 받은 것”입니다. 물고기가 원래 하나님께서 의도하신 대로 물에서 잘 헤엄쳐 다니면 그 존재는 복을 받은 것입니다. 그래서 새와 물고기를 만드시고 그들에게 복을 주셨다고 말씀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존재가 존재하게 되는 “생명” “복” “바라크”라는 것은 누가 주십니까? 하나님께서 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히브리 사람들에게 있어서 “복을 받았다”라는 말과 “하나님께서 함께 하신다”라는 말은 정확하게 동의어입니다.
 
모든 존재는 하나님께서 주신 그 복으로 말미암아 행복하게 되어있었습니다.
그래서 구약에서는 하나님께서 네페쉬에게 주신 복, 그 생명력으로 말미암아 파생되는 것을
부유함이라든지, 건강이라든지, 자식이 많아지는 것이라든지, 오래 사는 것으로 표현을 해 놓은 것입니다. 분명 그것은 하나님께서 주신 복의 결과입니다. 오해하지 마시고 잘 들으세요.
사람들은 그런 것이 있으면 잠깐이지만 행복해 합니다. 그런데 그 복은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실 때에만 참 복인 것입니다. 히브리 사람들에게 있어서 복을 받았다는 말과 하나님께서 함께 하신다는 말이 정확하게 동의어라고 했지요? 그래서 복은 하나님이 함께 계실 때 참 복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인간이 죄를 짓자 하나님께서 떠나가 버리셨습니다. 그러나 인간을 바로 죽여 버리지 않으시고 인간에게 여전히 한시적인 생명력은 남겨두고 떠나버리셨습니다. 그래서 그 인간이 살아있는 동안에는 하나님께서 주신 그 복의 파생물인 복의 모양이 나타납니다. 끝까지 인내심을 가지고 들으세요.
 
하나님께서 인간을 창조하시고 인간들에게 복을 주셨습니다.
 
(창1:28)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베푸셨다. 하나님이 그들에게 말씀하시기를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여라. 땅을 정복하여라.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땅 위에서 살아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려라" 하셨다.
 
하나님은 인간을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하셨고 인간들에게 “너희는 이렇게 살아라.”라는 의도하심이 있으셨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그  “네페쉬”에게 그렇게 살 수 있는 능력도 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의도하신 대로 살아내기 위해 필요한 모든 것, 그것이 바로 “복”입니다. 그것을 그들은 생명이라고도 표현합니다.
그런데 인간이 사탄의 유혹에 빠져서 타락을 해 버렸습니다.
하나님은 그들에게서 떠나셨습니다. 원수가 되어버렸습니다.
 
이제 그들은 하나님께서 선악과를 주시면서 약속하신 대로 “너희가 이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를 먹으면 정녕 죽으리라”하신 그 죽음을 향해 가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약속대로 인간을 떠나 버리셨지만 육체적인 생명을 끊어버리지는 않으셨습니다. 여러분이 아시다시피 선악과를 따먹은 아담과 하와를 금방 죽이지 않으셨습니다. 그러나 히브리 사람들의 사상에서는 그 것이 바로 죽음입니다. 그들에게는 자기 존재 안의 생명력이 모두 쏟아져서 시체가 되어지는 그 곳을 향해 가는 과정이 모두 “죽음”이라고 한다고 했습니다. 인간은 하나님과 갈라져서 원수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인간은 참 복을 잃었습니다.
 
왜요? 참 복이 뭐라 했습니까? 하나님이 함께 하실 때 복음 비로소 참 복이 된다고 했습니다.
모든 인간은 죽음을 향해 가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 죽음에 이르기까지 인간에게는 한시 적인 생명력이 부여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인간들에게는 하나님께서 주신 생명력에서 생기는 부와 건강과 장수 같은 것이 남아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하나님이 떠나버린, 죽음을 향해 돌진하고 있는 소멸되어 가는 복의 모양일 뿐입니다. 그렇게 소멸되어 가고 불타버릴 것들을 우리는 진정한 복이라고 하지 않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떠난 복의 모양들은 제로섬의 법칙 아래 있게 됩니다. 누군가가 부자가 되기 위해서는 저기 저편의 누군가가 가난해지게 되어있습니다. 누군가가 높이 올라가기 위해서는 누군가를 밟아야 하는 것입니다. 누군가가 시험에 붙기 위해서는 누군가가 떨어져야 합니다. 그것은 복이라고 하지 않고 오히려 “악”이라고 합니다.
하나님이 떠난 그 모든 것들은 “악”인 것입니다. “죄”인 것입니다.
 
왜 하나님께서 죽어 가는 이 세상, 우리 주변에 풍요한 사람, 건강한 사람, 멋진 사람들을 두어서 우리로 하여금 부러움으로 몸서리치게 하시는지 아십니까? 참 복을 회복한 자가 누릴 것은 “너희가 지금 부러워하는 것을 다 합쳐서 거기다가 억만 배를 곱한 것 이상의 행복이다”라는 것을 가르쳐 주시기 위함입니다. 참 복을 받은 자들은 그 어마어마한 것들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거기서는 제로섬의 법칙이 없습니다. 모두가 풍요하고 모두가 왕입니다. 모든 교회가 예수님과 함께 만물을 다스릴 것입니다. 우리는 그 참 복에 대한 힌트만 얻으면 되는 것입니다.
 
모든 인간은 그렇게 “죽음을 향해 갈 수밖에 없는 자” “죽은 자”가 되어버린 것입니다.
껍데기뿐인 복을 진짜 복인 줄 알고 착각하며 희희낙락(喜喜樂樂)하며 살아갑니다. 그러나 결국에는 모두 불타 버릴 것들이지요.
 
그 복을 잃은 인간에게 하나님께서 어떤 무리를 택하셔서 다시 그 진짜 “복”을 주시기로 하셨습니다.
모든 인간이 죽음을 향하여 가고 있는 “그 죽은 삶”을 살고 있는데 어떤 자들을 살리시기로 하신 것입니다. 그 처음 시작을 가시적으로 보여 주시는 곳이 바로 오늘 본문인 창세기의 아브라함 이야기입니다.
 
하나님께서 메소포타미아 문명의 발상지인 갈대아 우르에서 잘 먹고 잘 살고 있는
아브람에게 찾아가셨습니다. 오늘날 이라크 지방이지요, 이미 그 때 당시 수세식 화장실이 있었던 풍요로운 곳이었습니다. 그 역시도 풍요는 누리고 있었지만 우상을 만들어 팔던 죽어 가는 자, 죽은 자였습니다. 그에게 찾아가셔서 내가 복을 줄 테니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서 하나님이 지시하는 땅으로 가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복의 개념으로 보면 아브람은 이미 충분히 “복”을 받은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내가 네게 복을 줄 것이고, 너를 복의 근원으로 만들겠다고 하시고는 삭막한 광야로 내 모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성경은 삭막한 광야로 내 몰린 아브라함을 복의 근원이며, 복 받은 자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땅의 눈에 보이는 풍요와 안락함을 주시기 위해 아브라함을 갈대아 우르에서 건져내신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땅에서의 번영과 번성을 주시기 위해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건져내신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비옥한 갈대아 우르와 삼각주 땅인 애굽에서 건져내셔서 먹을 물도 제대로 없어서 바닷물을 끓여 먹어야 하는 가나안으로 데리고 들어가십니다. 무엇을 주시려고요? 복을 주시려고요. 진짜 복을 주시려고요.
 
아까 히브리 사람들의 복의 개념이 뭐라고 했습니까? “하나님께서 처음 창조하셨을 때 의도하신 대로 충만한 생명력을 가지고 하나님과 함께 거하는 것”을 복이라 한다고 했지요?
바로 그 복을 주시기 위해서입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이 땅에서 조금 못 배우고 못 살고 못 생겼다고 해서 “아이구, 지지리도 복도 없는 놈” 하면 그 사람은 성경이 말씀하고 계시는 “복”이 뭔지 정말 모르시는 겁니다.
 
 
산상수훈을 한번 보겠습니다.
 
(마5:3-10) 3    "마음이 가난한 사람은 복이 있다. 하늘 나라가 그들의 것이다.
4    슬퍼하는 사람은 복이 있다. 그들이 위로를 받을 것이다.
5    온유한 사람은 복이 있다. 그들이 땅을 차지할 것이다.
6    의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은 복이 있다. 그들이 배부를 것이다.
7    자비한 사람은 복이 있다. 그들이 자비함을 입을 것이다.
8    마음이 깨끗한 사람은 복이 있다. 그들이 하나님을 볼 것이다.
9    평화를 이루는 사람은 복이 있다. 그들이 하나님의 자녀라고 불릴 것이다.
10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은 사람은 복이 있다. 하늘 나라가 그들의 것이다.
 
우리가 산상 수훈을 보는 관점을 조금 달리 보아야 합니다. 우리가 산상 수훈을 볼 때에 복 있는 자는 애통해야 하고, 마음이 가난해야 하고, 마음이 청결해야 하고, 핍박을 받아야 한다는 관점에서 보는 것 보다 “누가” 복을 받을 수 있느냐의 관점으로 눈을 돌려야 합니다.
 
세상 적인 시각으로 볼 때 애통하고,  마음이 가난하고, 핍박을 받고, 그러한 상태에 있는 사람들, 다른 사람들이 보기에는 천하에 복도 없고 재수 없는 사람처럼 보일지라도 그가 하나님과 함께 동행 하는 복 받은 사람일 수 있다는 관점으로 보아야 합니다.
 
 “나는 구원받았는데 왜 마음이 가난하지 않지? 나는 구원받았는데 왜 마음이 청결하지 않지? 열심히 노력해야해“ 이런 짐을 지우려는 것이 아니라 복이라는 것은 너희가 생각하는 이 세상의 것과는 완전히 다른 것이라는 것을 설명하시기 위함입니다.
 
사람이 자비하게, 깨끗하게, 청결하게, 온유하게 살면 세상에서는 바보 취급을 당합니다.
사업을 할 때 온유한 마음으로 사업을 하면 손해를 보기 마련입니다. 자비를 베풀면 어차피 자기 것에서 나누어주어야 하기 때문에 자기의 소유가 줄어드는 것입니다. 의에 주려하면서 의롭게 살려고 하면 “그래 너 잘났어.” 하는 소리밖에 못 듣습니다.
 
한마디로 산상 수훈의 내용처럼 살면 세상에서는 바보 취급받습니다. 그러나 세상 사람들이 볼 때 그렇게 바보 같고, 슬프고, 애통하고, 미련해 보여도 그는 복 받은 사람일 수 있다는 것을 우리는 배워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들을 보고 “지지리도 복도 없는 인간”이라고 섣불리 이야기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왜요? 복이라는 것은 이 땅의 풍요를 말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복 받은 자로 완벽한 삶을 살다 가신 분이 누구십니까? 예수님이십니다. 그 예수님의 삶이 어떠셨나요? 이 땅에서 풍요와 번영을 누리다가 가셨나요?
 
성경의 복은 우리가 태초에 지어진 그 복 받은 자로 회복되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처음에 의도하신 대로 순종하는 자가 되어, 하나님과 동행하며, 하늘의 모든 것을 누리게 되는 것을 복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시편128편:1) 주님을 경외하며, 주의 명에 따라 사는 사람은, 그 어느 누구나 복을 받는다.
 
무엇이 복이라고요?
여호와와 관계가 회복되어 그 분을 알아보고 그 분의 크심을 알게 되고, 그 분을 경외하며, 그 분의 뜻에 순종하며, 살게 되는 것을 우리는 복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의”라는 것은 무엇인지 공부하겠습니다.
우리가 “의”하면 도덕적이고 윤리적인 면으로 많이 해석을 하지요? 성경이 말하는 “의”는 그런 의미와는 조금 다릅니다.
성경은 타락한 모든 인간을 가리켜 불의한 자라고 이야기합니다. 우리가 지옥에 간다면 “불의” 때문에 가는 것입니다.
 
(벧전3:18) 그리스도께서도 죄를 사하시려고 단 한 번 결정적으로 고난을 당하셨습니다. 곧 의인이 불의한 사람들을 위해서  죽으신 것입니다(다른 고대 사본들에는 '고난을 받으신'). 그것은 그가 육으로는 죽임을 당하시고, 영으로는 살리심을 받으셔서,  여러분을(다른 고대 사본들에는 '우리를') 하나님 앞으로 인도하시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불의(不義)” 때문에 돌아가셨습니다.
 
(히8:12) 나는 그들의 불의를 긍휼히 여기고, 더 이상 그들의 죄를 기억하지 않겠다.'"
 
도대체 “의”가 무엇이고 “불의”한 것이 무엇이기에 그 것 때문에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죽으셨어야 했는가 말입니다. 그 의를 설명하기 위해서는 창세기 15장으로 가야합니다.
 
창세기 15장에 보면 하나님께서 오늘 본문 창세기 12장의 내용을 조금 더 자세히 설명을 해 주십니다. 네 자손이 저 하늘의 별처럼 바다의 모래처럼 될 것이라고 하시니까 아브라함이 믿습니다. 그랬더니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의롭다 칭하십니다.
아브라함에게 복을 주시면서 그를 의롭다 칭해 주십니다.
 
(창15:6) 아브람이 주를 믿으니, 주께서는 아브람의 그런 믿음을 의로 여기셨다.
 
아브라함이 이 장면에서 무엇을 했기에 하나님께서 의롭다 하셨습니까? 아브라함이 죄를 멀리하고 윤리적으로 도덕적으로 하나님의 정하신 수준까지 잘 살아냈기 때문에 그가 의롭게 된 것입니까? 왜 아브라함에게 복을 주시면서 거기서 의를 이야기하실까요?
우리가 알고 있는 서구 사상의 영향을 듬뿍 받은 “의”가 뭡니까? 어떤 도덕적 윤리적 수준을 정해놓고 거기에 맞게 살아내는 것을 우리는 의롭다고 하고 그 수준에 못 미치는 것을 불의 하다고 합니다. 그래서 믿는 사람들조차도 “의” 하면 “예수님이 우리 죄를 다 사해 주셨기 때문에 우리는 죄가 없어졌고 그래서 우리는 “의”를 얻었다“라고 도덕적이고 윤리적인 차원에서 이해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히브리 사람들에게 있어서 “의”라는 것은 그런 서구의 사고에서 나온 “의” “justice"와는 많이 다릅니다. 히브리 사람들의 의에 대한 개념은 이러합니다.
 네페쉬, 존재는 항상 관계를 갖고 살게 됩니다. 네페쉬와 네페쉬와의 관계, 자연과의 관계, 하나님과의 관계, 네페쉬는 그런 관계 속에서만 존재 할 수 있습니다. 그 관계의 대상이 나에게 요구하는 것이 있게 됩니다. 그러니까 부모 자식 간의 관계에서는 부모가 자식에 대해 기대하는 것이 있지요? 마찬가지로 자식은 부모에게 기대하는 바가 있습니다. 자식은 부모에게 순종을 해야 하고 부모는 자식을 보호하고 양육해야 합니다.
인간과 하나님과의 관계는 어떤 요구가 있습니까?
인간은 하나님께 순종하고 그 분을 의지하고 의뢰하며 살아가야 하고 하나님은 그 인간을 보호하시고 사랑하시는 관계의 요구가 있습니다.
바로 그 관계가 요구하는 바대로 살아 내는 것, 그 관계에 걸 맞는 행위를 하고 그 관계의 대상이 원하는 대로 살아 주는 것을 ”의“라고 합니다.
 
그래서 성경에서는 “의”라고 하는 것이 이상한 데에 쓰일 때가 많습니다.
예를 들어 유다의 며느리인 다말이 시아버지인 유다를 속이고 후사를 얻기 위해서 시아버지와 동침을 합니다. 그런데 유다가 나중에 며느리가 후사를 얻기 위해 그랬다는 것을 알고 “네가 나보다 의롭다” 히브리어로는 “짜다크”라고 이야기합니다. 다말이 도덕적이고 윤리적으로는 화형에 처해 질 일을 했습니다. 유다가 화형을 해버리려고 하지요?
그러나 다말은 하나님과의 언약의 관계 속에서 최선을 다한 것이기 때문에 그것을 “의롭다”라고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의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은 의로우시다”라고 말할 때 “하나님은 죄가 없으시고 도덕적으로 윤리적으로 완전하신 분이시다”라는 것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의로우시다”라는 것은
“하나님께서는 어떤 대상과 맺은 언약의 관계를 끝까지 지키신다.”는 말인 것입니다. 즉 하나님은 그 언약의 관계에서 하나님의 역할을 실패치 않으시고 끝까지 해 내신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과 언약의 관계로 묶여있었습니다. 하나님은 영원히 의로우신 분이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하나님의 의를 보이십니다. 어떻게 보이십니까? 이스라엘의 대적들을 몰살시키십니다. 이스라엘 이외의 다른 민족들에게는 피도 눈물도 없는 분처럼 대하십니다.
그런데 히브리 사람들은 그것을 “의롭다”라고 표현을 합니다.
 
사사기5장에서 하나님께서 가나안 왕 야빈과 시스라와 그의 군대를 모두 몰살시키신 후에 드보라가 찬양을 합니다. 이른 바 “드보라의 노래”입니다. 거기에서 드보라는 하나님께서 하신 일을 가리켜 “의로우신 일”이라 합니다. 우리의 의에 대한 개념으로 따지면 어떻게 어린아이, 부녀자까지 모두 몰살시키는 하나님을 “의롭다”고 말할 수 있습니까?
이렇게 히브리 사람들의 의에 대한 개념은 “관계를 맺고 살아가는 네페쉬 들이 그 관계에서 요구되는 삶을 성실하게 살아내는 것을 ”의“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당연히 그 “의”에는 관계 당사자에 대한 이해와 순종과 경외감이 따라오게 되어 있습니다.
 
모든 인간이 타락을 하고 하나님께서 그들을 떠나셨습니다. 그들은 진정한 복을 잃어 버렸고 썩어짐의 종노릇을 하게 된 사망의 지배를 받는 죽은 자들이 되어버렸습니다.
아브라함도 그 중의 하나였습니다. 그가 어떤 요구도 하지 않았고 어떤 노력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그의 마음을 여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알아보게 만드셨습니다. 그리고 그에게 복을 주시겠다고 그 갈대아 우르를 떠나라고 하셨습니다.
 
아브라함이 어떤 힘에 의해 그것을 믿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말씀에 순종하게 되었습니다.
모든 인간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어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습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이 순종을 하게 된 것입니다. “네”라고 대답을 했습니다. 그 관계가 요구하는 것을 아브라함이 순순히 따르겠다고 대답을 했습니다. 그것을 하나님은 “의로 여기셨다”고 하시는 것입니다.
 
우리도 하나님과 언약의 관계에 있습니다.
“우리가 언제 하나님과 언약을 맺었습니까?”하고 질문하실 분이 계실 겁니다.
하나님은 인간을 만드실 때 목적이 있으셨습니다. 의도가 있으셨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복을 주시면서 “생육하고 번성하고 땅에 충만 하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라”고 명령하셨습니다. 우리는 그렇게 살아야 했습니다. 그렇게만 하면 우리는 영원한 나라를 상속받을 수 있었습니다.
 
(신6:25) 우리가 주 우리의 하나님 앞에서, 그가 우리에게 명하신 대로 이 모든 명령을 충실하게 지키면, 그것이 우리의 의로움이 될 것이다.'"
 
그 언약은 인류의 대표인 아담에게 하셨지만 우리 전 인류에게 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호세아서에서도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이 아담이 그랬던 것처럼 언약을 어겼다고 말씀하십니다.
(호6:7) 그런데 이 백성은  아담처럼(또는 '아담에서' 또는 '사람처럼') 언약을 어기고 나를 배반하였다
 
아담은 그 하나님과의 언약의 관계에서 자신이 해야 할 몫을 해내지 못했습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성경은 그것을 “불의”라고 이야기합니다. 관계를 가지고 살아가는 “네페쉬”가 그 관계에서 요구되는 행위를 하지 못했을 때 우리는 “불의하다”고 한다고 했지요? 그래서 우리는 불의한 자가 되어버렸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그 불의한 자들 중에 어떤 무리를 “의롭게” 만드시기로 했습니다. 그러니까 원래 하나님과 인간이 서로의 관계가 요구하는 삶을 살 수 있게 회복을 시키시기로 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 첫 모델을 바로 아브라함으로 삼으신 것입니다. 그래서 그를 믿음의 조상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인간은 이미 타락을 했기 때문에 인간이 다시 의롭다 하심을 얻기 위해서는 어떤 능력이 필요했습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방법으로 인간을 의롭게 만드시는데 그 것을 아브라함에게 미리 보여 주십니다.
 
창세기 15장에서 아브라함에게 너의 자손이 “하늘의 별처럼 바다의 모래처럼 될 것이다“하고 하시고 아브라함이 그것을 믿자 그를 의롭게 여기십니다.
그리고는 그것을 어떻게 이루실 것인지를 아브라함에게 보여주시는데 제물을 쪼개놓고 하나님께서 언약을 하십니다. 그리고는 하나님께서 홀로 그 쪼갠 고기 사이로 지나가십니다.
히브리 사람들 언약, 계약을 할 때 쪼갠 고기 사이로 언약의 당사자가 함께 손을 잡고 걸어가게 되어 있다고 했지요?
 
하나님은 하나님의 백성을 다시 원래의 하나님과의 관계로 회복시키시기 위해서 자신의 목숨을 내 놓으신 것입니다. 하나님 아들 예수님은 하나님이십니다. 삼위일체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이 아들을 죽이시기로 결정하시면서 까지 그 언약의 관계를 지켜내시기로 했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자기의 목숨을 끊으시겠다는 결정을 하신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그 하나님은 그 약속대로 십자가에서 죽으셨고 그 언약은 끝까지 지켜진 것입니다.
 
(히6:13-14) 13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실 때에, 당신보다 더 큰 분이 계시지 않으므로, 당신 스스로를 두고서 맹세하여
14    말씀하시기를  "내가 반드시 너에게 복을 주고, 너를 번성하게 하겠다" 하셨습니다
 
그렇게 하나님의 목숨을 걸고 우리를 의롭게 만들어 주신 것입니다.
 
(롬4:25) 예수는 우리의 범죄 때문에 죽임을 당하시고, 또한 우리를 의롭게 하시려고 살아나셨습니다.
 
(롬3:24) 그러나 사람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속량을 힘입어서,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게 하여 주심을 받습니다.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다가 우리를 붙여 버리셨습니다. 그리고 그 예수의 목숨을 끊어버리셨습니다. 그리고 다시 살리셨습니다. 우리는 그것을 믿기만 하면 하나님과 관계회복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의롭다 하심을 입는다.”는 말의 진의 인 것입니다.
 
이렇게 자신의 목숨을 끊으시면서 까지 언약 관계 당사자들을 건져내시는 그 하나님을 우리는 “의롭다”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왜 전 인류를 다 건지시지 않으셨나? 그것은 아무도 모릅니다.
그 절망에서 건져주신 하나님께 감사하자고요.
 
(롬5:1) 그러므로 우리는 믿음으로 의롭게 하여 주심을 받았으니,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더불어 평화를 누립니다
 
(롬4:2-3) 2    아브라함이 행함으로 의롭게 되었더라면, 그에게는 자랑할 것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 앞에서는 자랑할 것이 없습니다.
3    성경이 무엇이라고 말합니까?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니, 하나님께서 그것을 의로움으로 인정하여 주셨다" 하였습니다.
 
(갈3:6-7) 6    그것은,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었더니, 하나님께서 그것을 그에게 의로움으로 여겨 주신 것"과 같습니다. 7    그러므로 여러분은 믿음으로 사는 사람들이 아브라함의 자손임을 아십시오
 
하나님은 우리에게 의를 선물하시는 데에 다른 방법을 쓰실 수도 있으셨습니다. 그런데 왜 예수님께 붙여 놓으신 줄 아십니까? 그것은 다시는 그 “의”의 상태가 “불의”의 상태로 되지 않게 하시기 위해 예수님께 붙여 놓으신 것입니다. 아예 연합 시켜버리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을 배신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은 다시 타락할 수 없으신 분이십니다.
그래서 이제 우리는 영원히 그 “의”를 소유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이 살라고 하시는 대로 영원히 살 수 있게 된 것입니다. 다시는 타락을 할 수 없게 되어버린 것입니다.
우리는 복을 받았습니다. 하나님과 관계가 회복되었습니다. 이제 의롭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이제 창세기에서 하나님께서 인간을 만드시고 인간에게 요구하시고 의도하신 내용을 지켜낼 수 있게 되었습니다. 어떤 명령이지요? 우리가 문화 명령이라고 하는 내용입니다.
 
(창1:28)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베푸셨다. 하나님이 그들에게 말씀하시기를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여라. 땅을 정복하여라.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땅 위에서 살아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려라" 하셨다
 
바로 이 요구가 복을 받고 의롭게 되어진 영생을 얻은 자들에게 다시 요구되어지고 있습니다.
이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말미암아 그렇게 살 수 있는 능력이 주어졌거든요.
 
(마28:19-20) 19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서,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20    내가 너희에게 명한 모든 것을 그들에게 가르쳐 지키게 하여라. 보아라, 내가 세상 끝 날까지 항상 너희와 함께 있을 것이다.
 
너희들은 이제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어 하늘나라를 선포하라. 하나님을 증거 하라 “복음으로 그들을 정복하고 다스리라” 고 지상 대 명령이 주어진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말미암아 이제 우리가 하나님의 목적하신 대로 완전하게 재창조되어진 것입니다. 우리는 그렇게 하나님 나라의 백성으로서 그 나라를 자랑하고 그 나라만을 소망하며 그 나라로만 위로를 받는 참 복을 받은, 의롭다 하심을 받은, 하나님과의 관계가 완전히 회복된, 영원한 생명을 소유하게 된 교회인 것입니다.
 
여러분, 이제 죽었다는 것이 무엇인지, 살았다는 것이 무엇인지, 복이 무엇이며, 생명은 무엇인지, 의는 무엇이며, 우리를 의롭다 하시기 위해 하나님께서 어떤 일을 하셨는지, 그 은혜와 사랑의 깊이를 아시겠습니까? 그것을 아시는 분들을 그리스도인이라 하는 것입니다.
그 들은 바로 이 복음으로만 위로를 받습니다. 다른 위로는 거절하는 자들입니다. 그것들은 겉으로는 화려해 보이지만 곧 소멸되어버릴 것이고 불 타 버릴 것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의 마음속에 이 복음이 돋을새김으로 양각되어 있으면 된 것입니다.
 
저는 바로 이 복음을 더 깊이 더 명확하게 여러분 마음속에 새겨 드리기 위해 수많은 설교를 던지는 것입니다. 교회인 여러분, 여러분이 어떤 상황에 처해 있다 할지라도, 여러분이 생각할 때에 “내가 세상에서 제일 불행한 것 같다” 고 느낄 만큼 힘이 들 때에도 여러분은 이 복음  만으로 기뻐하시고 행복해 하시는 분들이 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감옥에 있을 때 찬양을 하고, 실컷 두들겨 맞고 나오면서 하늘을 보며 기뻐했다는 우리 신앙의 선배들이 가지고 있었던 진정한 행복과 기쁨을 여러분이 정말 아시게 되길 원합니다.
 
그리고 아직까지 예수 그리스도를 알지 못하시는 여러분 예수님께서 지금 여러분을 초대하고 계십니다.
 
(요5:24-25) 24    내가 진정으로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나의 말을 듣고 또 나를 보내신 분을 믿는 사람은 영생을 얻고,  심판(또는 '정죄')을 받지 않는다. 그는 죽음에서 생명으로 옮겨 갔다.
25    내가 진정으로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죽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아들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온다. 지금이 바로 그 때이다. 그리고 그 음성을 듣는 사람은 살 것이다.
 
지금이 바로 그 때입니다. 여러분에게 지금 생명과 복과 의가 무엇인지 , 우리는 어떤 지경으로 떨어져야 할 존재인지 그 자들에게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보내셔서 하신 일이 무엇인지 선포가 되었습니다. 그 말씀을 받아들이십시오. 예수를 믿으십시오.
죽은 자들이 생명의 말씀을 들을 날이 오나니 듣는 자는 살아나리라. 예수님의 그 초청을 받아들이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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