즐겨찾기 | 메인 로그인 | 회원가입 |  사이트맵 |  20 (회원 0)  

Home >  자료실 >  영화 해설

 
작성일 : 13-04-17 13:46
   "감독이 미쳤어요" - 북가주/원찬연 (기도)
트랙백
 글쓴이 : njsmyrna
    조회 : 10,894  


뒷담화:감독이 미쳤어요 (Behind the Camera, 2013.02.28) 예고편



[기도] 너희는 거기에 가만히 있어
글쓴이 : 북가주 서머나 원찬연


요즘 개봉한 한국 영화 중에서 "뒷담화, 감독이 미쳤다" 의 시놉시스를 살펴 보노라면, 이 세상에서 내노라하는
유명 배우들로 이루어진 영화를 제작하는 촬영장에 정작 감독은 나타나지 않습니다.
대신에, 감독이 모든 배우들과 소통할 수 있는 카메라와 모니터만이 주어져 있을 뿐입니다.

감독의 지시에 따라 움직여야 하는 배우들은 감독이 보고 있는 카메라 앞에서는 잘 따르지만, 정작 감독과 소통
하는 카메라가 설치되어 있지 않은 장소에서는 감독에 대한 불만과 분냄이 조금씩 표출되기 시작합니다.
그것은 자기 마음대로 드러내고 싶은 것을 감독으로부터 거절당하는 것에서 기인된 것이었습니다.
다른 말로, 자기의 존재 가치가 누군가로부터 무시되고 부정될 때 자기 상실감을 극복하려는 일종의 자기 방어
체계인 것이지요.

그러다가 감독을 볼 수 있는 모든 모니터가 꺼져 버리자, 마침내 모든 배우들과 스탭들은 일 순간에 감독에 대한
불만과 분냄이 폭발해 버리고 맙니다.
그러는 가운데 나의 나 됨을 보호하고 방어하기 위해 다른 사람들에게 서로 책임을 전가하는 가운데 그 영화
촬영은 그렇게 막을 내립니다.

그러나, 그 감독은 여전히 모든 카메라로 처음부터 끝까지 영화를 촬영하고 있었고, 감독이 의도한 모든 시나리오
대로 그 영화는 완성이 되어 개봉을 앞두게 된다는 내용입니다.

거기서 잠깐 드는 생각이,
"환상을 먹고 사는 배우들의 가면 쓴 연기가 아닌 그들의 내면에 숨어 있는 실체 그 삶 자체를 드러낸 그 영화가
과연 개봉될 수 있을까? 배우들이 가만히 있지는 않을 텐데 ..." 였습니다.

묵시의 그림자요 모형인 이 역사 가운데 살아가는 우리네 인생의 여졍은, 마치 혼돈과 흑암과 공허인 바다를
가르시고 벽을 세워 그 길로만 마른 땅을 밟고 가는 세례를 허락하시고, 사방이 트여 자기 마음대로 어디로든지
갈 수 있는 사 십년 광야의 여정을 통해 구름과 불 기둥으로 앞서 이끄시는 유다 지파의 그 깃대만을 바라보며
이 땅의 죽음으로의 그 길을 걸어가는, 창세 전에 택정된 하나님의 백성에게만 주어진 그 세례가 무엇인지를
알아가게 하시는 과정인 것 같습니다.

이제는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그 땅에 도착했다고 말하지만, 더 이상 하나님의 이끄심을 눈으로 볼 수도 없고
체감할 수도 없는 그 땅에서는 자기의 존재 가치를 증명할 수 없어 자기 상실감을 어떻게든 만회해 볼려는
시도가 나올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의 그 약속을 믿는 믿음에 의해서가 아닌 거기로 자기를 이끌고 온 그 무엇에 집중하는 자에게서 반드시
나오게 되는 근본된 흙의 본성 때문일 것입니다.

백 년마다 한 번씩 일어난 하나님께로 향하게 하는 '대각성 운동(Great Awakening Movement)' 은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는 말들이 드러나 죄인의 처음 자리로의 부르짖음을 이끄는 부흥으로 보여졌지만, 하나님께로만
향하도록 이끄시는 그 말들은 오랜 시간이 지나지 않아 죄인으로 폭로된 자기 상실감을 극복하려는 자기 방어
체계로 변질되어 나의 힘과 능력으로도 어떻게 할 수 없는 나 밖의 영역인 메타 형식 곧 자기의 존재 가치를
보호해 주는 '우상' 으로 곧바로 자리잡게 되어 버립니다.

그래서, 항상 대각성 운동 후에는 그 말을 추가한 더욱 지능적이고 체계화된 거짓 교리들과 이단 사설들, 그것을
추종하는 무리들이 더욱 기승을 부리게 되었던 것을 역사 가운데 어렵지 않게 대면할 수 있습니다.
그 이면에는 없음을 있음으로 창조하신 하나님께서 이끄시는 역사의 종착점이 죽음 곧 멸망 이라는 것을 부인
하고 싶은 두려움 때문일 것입니다.

우리네 살아가는 시간 가운데 오고 가는 대부분의 말들을 들어 보면, 그 모든 말들이 미래에 대한 불안과 염려,
그 미래가 나에게 미치는 영향과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 가에 대한 방법들 뿐입니다.

"오늘을 별일 없이 살기 위해서는, 내일 일은 내일이 염려하도록 그대로 두라" 라고 그토록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었건만, 나 스스로 주인이 되어 통치하는 그 나라는 하루에도 열 두번씩 하나님과 반대 방향으로 전력 질주
하면서도, '진리를 아는 나, 진리가 된 나, 하나님의 안식이 된 나' 라고 너스레 떠는 꼴은 참으로 우스울 뿐입니다.

"내가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라고 말씀하신 그리스도 예수께서 성령 그 분을 설명하실 때,
"죄에 대해서, 심판에 대해서, 의에 대해서, 너희가 너희 마음대로 선악의 두 마음으로 쪼개어 잘못 알고 있는
말을 책망하시며 가르치시는 분인데, 그 죄는 여호와 주 그리스도인 나를 모르는 것이요,
그 심판은 죄 없으신 그 하나님이 세상 죄를 지고 가는 그 세상의 왕으로 죄 있다고 정죄되는 것이요,
그 의는 더이상 나를 보지 못하는 것인데, 성령 그 분이 나의 것으로 가르칠 것이다."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성령의 그 사역은, 이 땅에서 성령께서 하나님께로 질질 끌고 가는 '아고' 의 삶 모든 인생의 여정 내내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를 알아 진리가 되었다' 라고 말할 수 있는 의인은 이 땅에서는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창세 전 묵시의 그 진리를 이 역사 가운데 던져져 알아가게 되어 마침내 그 진리로 함몰될 뿐입니다.

'말씀 육신' '로고스 사륵스' 로 오신 그리스도 예수, 그 말씀을 담은 그 육신으로 오신 것이 아니라 그 말씀 자체가
그 육신 그 자체이셨습니다.
그 육신은 그 주어진 목적이 이루어지면 쓸데없어 던져 버려져 그 말씀만을 오롯이 드러낼 뿐입니다.
그렇게, 그리스도의 영이신 성령께서 그 분의 것인 그 말씀으로만 혼돈과 흑암과 공허인 이 땅의 육신을 찾아
오셔서 하나님의 그 약속을 밝히 드러내 보이셨습니다.

선악의 두 마음으로 내 마음대로 하나님의 말씀을 곡해하는 혼돈과 흑암과 공허의 육신뿐인 나에게 성령께서
그리스도의 영으로 그 말씀을 불가항력적으로 심어 버리셨습니다.
이제 그 육신은 그 말씀을 설명하고 드러내는 목적으로 쓰여져 마침내 쓸모없어 던져 버려질 것입니다.

오늘도 그렇게 쓸모없어 던져 버려지고 있는 '나' 그 육신과 연합하신 그 말씀을 '나'로 여겨 주신다니, 이보다
더 크고 높고 넓고 깊은 위대한 은혜가 어디 있단 말입니까?!

하나님께서는 영원의 묵시 가운데 이 꿈같은 그 혼돈과 흑암과 공허의 역사를 허락하셔서 빛만 가득한 하나님과
연합된 그 하나님께서 사랑하시고 섬김으로 통치하시는, 그 하나님을 찬송하는 새 하늘과 새 땅, 그 하나님
나라를 계시하시기를 기뻐하셨습니다.

영원이신 하나님 아버지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신 그 말씀으로 시작하셔서, 주어진 목적이 다하면 쓸모없어
멀리 던져 버려질 이 땅의 모든 것들을 그 말씀으로 차서대로 창조하셨고, 하나님의 영 곧 그리스도의 영이신
성령께서 종국에는 불타 없어질 그 혼돈과 흑암과 공허를 덮어 그 말씀을 드러나게 하셨습니다.

성령이 아니고서는 하나님 나라인 그리스도와 연합된 '나' 가 새롭게 존재할 수 없었고, 그리스도 예수, 그 말씀이
아니고서는 성령께서 그 혼돈과 흑암과 공허를 덮어 새로운 존재로 거듭나게 하실 수 없었고, 하나님 아버지께서
그 아들로 시작하시지 않으시고는 하나님의 그 사랑은 흘러갈 수 없었습니다.

하나님께서 홀로 있는 것은 '로 토브' 그 선함이 아니라고 스스로에게 하신 그 말씀은 영원과 영원 사이의
궁창이요 교집합인 역사 라는 시간과 공간 가운데 놓여진 그 모든 것들로 합력하여 하나님의 그 선하심을
그리스도의 신부인 교회를 통해 밝히 드러내 보이셨습니다.

영원으로 존재이신 그 '하나' 라고 말할 수밖에 없는 그 분께서 성부 성자 성령 그 엘로힘으로 계시하시기를
부끄럽게 여기지 않으시고 마침내 드러나게 되는 그 기쁨을 멀리 바라보시며 그 부끄러움을 오래토록 참으
셨습니다.

그 분이 우리 아버지이시기에, 안심이 되고 위로가 되고 평안이 됩니다.


사실, 이 글을 쓰게 된 이유는,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실체는 아랑곳 하지 않고 그 말씀을 가리키는 표적에만 관심을 두는 이 세대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분명,
대각성 운동 때마다 아버지의 그 말씀을 드러내게 하시는 가르치는 선생을 함께 보내셨습니다.
그것은, 죽어 있지만 살아 있다고 착각하는, 생명에는 관심 없는 당신의 자녀에게 자기 죽음의 자리를
직시하게 하시고, 거기서 터져나오는 상한 심령으로 부르짖는 죄인의 절규를 통해 그 절망 가운데 피어나는
하나님의 긍휼로 덮으신 그 은혜를 드러내는 찬송하는 자로 이끄시기 위함입니다.

그러나, 그 가르치는 자에게서 나오는 생명의 그 말씀이 아닌 나의 그 유익만을 탐하는 자들은, 나를 이끌어
준 선생이 보이지 않게 되면 금새 나를 이끌어 줄 또 다른 선생을 찾게 되어 있습니다.
게다가 나를 이끌어 준 선생을 가르쳤다는 더 큰 선생이라는 자가 나타났다는 소문이 들리면, 잠시 한번
생각할 겨를도 없이 그 세대의 부류로 빠져들어 부하뇌동 하게 됩니다.

그것은 자기 안에 '나' 라는 하나로 연합된 그 말씀 그 씨가 없어 그게 무엇인지를 모르니까 당연히 나의
구원을 만족시켜 주는 그 진리가 되게 해 준다는 그 거짓말에 속아 넘어지는 것입니다.
성경은 그런 자를 가리켜, 처음부터 그리스도인이 아닌 가면을 쓰고 연극하는 죽은 자라고 말씀합니다.

지금도 여전히 ,
나를 위해 나를 이끌어 줄 금소 라는 우상인 '나' 를 만들어 놓고 결혼하는 나 자신을 보는 듯 합니다.
그러니, 그런 내가 없는 거기가 하나님 나라 임이 두 말할 나위 없이 동의되어 집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원의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 그리스도인에게 허락하신 일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넘겨
주신 죽은 흙의 그 처음 자리로의 자각과 거기에 가만히 있어 긍휼로 덮으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왜 찬송
하는가를 알게 되어 영원과 영원 가운데 놓여진 그 육신으로 그 말씀만을 알아가게 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는,
그 육신인 '나' 의 목적이 다해 쓸모없어 멀리 던져 버려지는 그 날,
그 말씀과 연합된 '나' 가 영원으로 남게 되겠지요.
그 날은 묵시 가운데 영원의 오늘이고, 역사 가운데 살아내야 할 우리네 인생 그 전부 이기도 합니다.

내일 일은 내일이 이루신다고 하셨으니, 이 땅에서 죽은 자는 말이 없을 뿐입니다.

그리스도, 그 진리가 여기 있다 저기 있다 하는 말이 들릴지라도,
이제 죽은 흙임을 알게 된 그리스도인은,
주어진 그 자리에 주검으로 가만히 있는 것이 하나님의 열심으로 홀로 일하시는 전도인 것을
입으로 몸으로 삶으로 증언하게 되는 것입니다.

귀 있는 자만 들으십시오.

아버지,
애통으로 슬피 우는 이 세대 가운데
죽은 흙 그 주검 위로 독수리 날개를 덮어 아들로 새롭게 세우시는 그 은혜,
하나님의 원수를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아들로 여겨 주시는 그 은혜만을 바라보게 하소서.



delta153 20-03-08 18:14
    
잘 읽었습니다. 감사합니다.
 
   
 

모임소개  |  로그인 
Copyright ⓒ 2023 뉴저지 교회 NJ Church, All rights reserved. Comment to nj.smyrna@gmail.com (T)201-658-376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