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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13-11-07 08:47
   (40) 나는 저에게로 가려니와
 글쓴이 : njsmyrna
    조회 : 7,023  


아이의 죽음 앞에 땅에서 일어나 몸을 씻고 기름을 바르고 의복을 갈아입은 다윗은
여호와의 전에 들어가 경배를 합니다.
 
그리고, 궁으로 돌아와 밥을 먹습니다.
참담하게 일어난 일로 왕의 훼상함을 걱정하는 신하들 앞에
다소 당황스러운 반응을 보이며 내어놓는 말이 '시방은 죽었으니' 입니다.
솔직히 뭐 이런 아비가 다 있습니까?
그러면서 하는 말이 '나는 저에게로 가려니와' 입니다.

이 말을 보는데 마음이 아픕니다.
여기서 서둘러 하나님의 주권에 모든 것을 맡긴 다윗의 믿음으로 넘어가지 맙시다.
나단의 지적에 두 번 고민도 없이 '하나님 앞에 죄를 지었사오니' 를 고백한 다윗에 대해서도
너무 미화시키지 맙시다.

성경이 말하는 그 진의에 대해 몰라 그런 것이 아닙니다.
우리 너무 성경 앞에서 거룩의 흉내를 낼 준비부터 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그래, 밥은 먹었겠지요. 살라 하시니까요.

죽음이라는 죄의 삯 앞에 성경이 내어놓은 인물들의 믿음을
그들조차 붙들려야 토해낼 수 있었던 말 따라 하기로 먼저 가지 맙시다.
이건 비극입니다.
 
가족의 붕괴를 가져오는 인간사 극한 슬픔이라는 것 앞에,
치고 들어와 장악하는 믿음의 간섭이 정말 그렇게 발휘되어 나오던가요?
하나님 찬양으로 우선하여 나오던가요?
사유되기는 커녕 기억에 요청한 적도 없는데,
내게 들어와 나를 장악하는 힘에 순순히 동의되던가요?

아벨의 죽음이 동산에서 쫒겨난 아담과 하와에겐 그 옛날 선악과에 손을 댔던,
아니면 손을 뻗어 생명나무를 탐했던 그들의 죄악에 대한 또 다른 징계로 보이진 않았을까요?
가죽옷을 입힌 하나님을 기억은 하고 있었을까요?
자식이 죽인 자식의 죽음 앞에서요?
주변인 모두의 사라짐을 경험하는 노아의 상실감은 어땠을까요?
그가 포도주에 취해 누워 잤다고 누가 비웃을 수 있나요?

갈 바를 알지 못하고 길을 나선 아브람의 인생이
이삭의 가슴에 칼을 꽂아야 하는 아브라함의 자리로 오기까지
험난하기로 치면 야곱에 비길까요?
사랑하는 아들과의 오랜 분리는 어미 리브가에겐 쓴 물의 경험입니다.
옥에 갇힌 요셉의 발리 착고에 상하며 몸이 쇠사슬에 매인 것은,
혼이 쇠사슬에 찍혀 정신이 나간 상태라 했습니다.
완성된 성도의 모습은 언제나 상징으로 주어지고 삶은 그 과정으로 질문을 던지며 몰아칩니다.

이 모든 인간의 트라우마를 잠식시키는 하나님의 의는 도대체 그 가늠의 범위가 어디까지인가요?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아들의 사지를 찢어 나를 살리셨다는 그 은혜가 내게 체감됩니까?
언제부터 어떻게 지속적으로 고백되던가요?
간혹 터져 나오는 기쁨의 고백이
대부분 견뎌내야 하는 시간들의 공격 앞에 무색해진 기억은 없으십니까?

그래서, 저는 밤을 세운 다윗의 기도에 먼저 마음이 갔습니다.
아이를 살릴 수만 있다면 ...
먹는 것을 포기한다는 것은 나의 죽음을 담보하여 내어놓는 것입니다.
나의 열심과 진정입니다.
거기에 하나님의 응답은 '장자의 죽음을 내어 놓아라' 입니다.
모든 부정과 죄를 짊어지고 칠 일을 앓다 죽은 아이의 죽음입니다.

그러니까 이미 십자가가 내포된 그 죽음에,
그래서 다시 주신 생명으로 살아나는 솔로몬에게서 그 죽음이 위로될 수 있나요?
가슴에 묻는 겁니다, 자식은.
그리고 돌아서서 웃어야 하는 겁니다. 그렇게 살아내는 겁니다.
겨우 머리로만 이해되는 일에 다윗이 자리를 털고 일어나 밥을 먹었다고요?
그래요, 밥은 먹었겠지요.

목숨을 걸고 죽을 힘을 다해 기도한 일에 아니라고 하시는 하나님의 응답을 순전히 받은 다윗!
물론 따르고 싶습니다.
하지만, 평생에 그 아이를 그리워하고 아파하고 울었을 다윗이 더 좋습니다.
다윗이라면 그랬을 겁니다.

그가 하나님을 몰라 그랬겠습니까?
허락하신 솔로몬의 이름에서 여호와께서 사랑을 주셨다고 성경은 말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에 인간의 반응 유뮤는 기록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그렇게 사랑하셨습니다.
사랑의 본체이신 분의 선포일 뿐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이 말하고자 하시는 일에 쓰임을 받고 있을 뿐입니다.
인간의 사유와 감정의 무용함은 결국 살으라고 주어진 인생길 가는 동안
버려지거나 삭제될 일인 것만 알게 하셨습니다.
그건 믿음이라는 것으로 내게 부어져 알게 됩니다.
하지만, 죽어 완전한 몸으로 완료되기 전까지 나와 묶여 썩은 냄새를 내는 이 육의 결과들에
우리가 내도록 그렇게 담대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우린 비극에 먼저 노출되는 백성입니다.
이 땅에선 편히 웃을 수도, 웃을 일도 없는 자들이라 그렇습니다.
하지만, 땅이 정의하는 희극도 비극으로 해섣되는 우리들이라 해서
이 땅의 비극이 다반사를 말하며 일반화 될 수 있습니까?
결국에 죄의 증상인 결과물들 앞에서 약속된 영원 속의 완전함을 보아낸다는 것이
살으라고 하시는 날 동안의 마음앓이에 무감해진다는 것은 아니잖아요?

어느 날 아침 말씀을 묵상한 후 기도를 하는 중에 이 죄라는 것에 치가 떨리며 울음이 터졌습니다.
점점 선명하게 보이는 죄의 실체 앞에,
그래서 정말 은혜가 아니고는 내가 살 방법이 없다는 사실 앞에
왜 그렇게 죽음이 떠올려 지던지요.

은혜에 대한 목마름이 극에 달할 때 죽음이 함께 느껴지던 통증,
그 자리에서 부르짖던 하나님을 향한 사랑으로 너무나 강하게 소망 되던 천국으로의 회귀.

그래서, 다윗이 일어나 하나님께로 갑니다.
밤새도록 땅에 엎드려 기도하던 다윗이 땅에서 일어나 여호와의 전으로 들어갑니다.
성경이 굳이 땅을 반복하여 말합니다.
인간의 열심과 노력이 완전히 부정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다윗의 죽음입니다.

그는 이미 하나님 앞에 그 생명력이 차압당한 것입니다.
그가 그 사실을 알았습니다.
그의 생명은 하나님께 있습니다.
그래서, 죽음으로 드러난 아이의 생명도 이미 하나님께 있음을 알아차린 것입니다.

아비의 애통은 하늘나라에서의 연합으로 위로됩니다.
살아도 그 소유는 하나님께로 속한 생명을 알라, 연합된 그 날을 기다리며
저에게로 가야 하는 것을 말합니다.
이미 살아난 아이는 죽음을 결과하는 이 땅에 올 수 없음을 안 것입니다.
보내진 솔로몬으로 아비는 이 땅을 살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살아도 죽은 자의 삶을, 죽어도 산 자의 약속을 가진 성도의 삶을, 그리고 저의 삶을 대입해 봅니다.
그 삶을 다윗이 살다 갔습니다.
제게 주어진 시간들이 어떻게 갈 것인지 너무 선명하게 보입니다.
그래서, 힘들고 겁이 납니다. 저는 못할 거니까요.

분연히 털고 일어난 다윗이 이 땅에서 행복했다는 기록은 없습니다.
늘 하나님이 무엇을 하셨다는 말만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밥은 먹겠지요. 살아야 하니까요.
그리고, 옷기도 하고, 울기도 할 것입니다.
하지만, 이제 아는 나의 결국은 '내가 그리로 가려니와 ...' 입니다.

너무나 오래 입어 줄이 없어진 바지르 입고도 전혀 그 입성에 부끄러워하지 않고
화려했던 시절의 옛 친구를 만나 예수의 이야기를 하는 그런 사람, 저는 그이를 사랑합니다.
 
넉넉지 않은 바지 주머니를 연신 만져 보며 어색한 여자 옷가게에 들러
오랜만에 사랑하는 아내의 치마를 고르며, 고생하는 아내에게 눈물겹게 고마움을 전하는
그 가난하지만 아름다운 마음을 저는 사랑합니다.

자기가 제일 싫어하는 것이 파충류임에도 불구하고
아이가 그토록 원하는 작은 도마뱀을 하나 사서 아이 앞에서 그것을 손에 올려놓고
좋아라하는 아이의 얼굴을 보라보는 떨리는 아빠의 손을 저는 사랑합니다.

힘든 하루 일과를 마치고 돌아와 아내와 차 한잔, 맥주 한잔을 놓고
'오늘도 내 사랑하는 가족들을 위해 열심히 살았노라고'
도란도란 하루를 이야기하는 정겨운 그 모습을 저는 사랑합니다.

그게 진정 위대함인 것입니다.
미국에 살며 미국의 위대함에 젖지 않으려는 이 애씀도 역시 위대함일 것이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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