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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13-08-25 12:19
   (26) 한 말씀만 하소서
 글쓴이 : njsmyrna
    조회 : 7,253  




소설가 박완서 씨가 아들을 잃고 고통 중에 쓴 글입니다.
천주교 신자인 저자가 하나님께 묻는 항변이요,
본인의 말로는 포악과 저주라고까지 표현하는 몸부림입니다.

어느 날 그 분이 깨달은 신앙적 해답에 동의는 못합니다.
하지만, 길지도 않은 글을 보는 내내 마음이 많이 아팠던 이유는
고통의 문제 앞에 선 인간 존재에 대한 감정적 동의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아들의 죽음이라는 현실은
정작 그 사건이 일어난 시간을 기점으로 새로운 생명력을 띕니다.
죽음이라는 사건으로만 끝나지 않는 것이 성도가 대면하는 죽음입니다.
우리만 거기에서 참 생명으로의 소망을 읽어낼 수 있습니다.

사망은 죄의 생명력이 가장 충만하게 결과되는 현상 아닙니까?
그것을 대면하는 자에게 뿜어내는 사망이 주는 생명력을 아십니까?
그것은 고통이요, 아픔이요, 절망이요,
분노로 표현되는 인간이 느끼는 극한의 감정지대 그 어디입니다.

하나님의 생명력을 흉내 낸 죄의 생명력은 그 힘에 있어 얼마나 강하고 모질던가요?
그래서, 참 생명의 영원함을 모방한 그 힘 또한 끝날 것 같지 않은 심연의 추락 아닙니까?
누구에게나 그 지대에 발을 디딜 간섭이 주어지겠습니까?
죽음 앞에 산 자로 서는 것이 진정 어떤 의미인지 깨달아 지는 것이
누구에게나 주어지지 않듯이 말입니다.

그래서, 죽음을 대하는 성도의 시각은 달라야 합니다.
삶과 죽음의 문제가 아니라
살아도 죽어도 거기서 고통을 생산해 내는 인간의 유한함이
정작 모든 슬픔의 속성인 것을 알아야 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러니 함부로 삶과 죽음을, 고통을 말하지 말자 하는데 ...

타인의 아픔을 빌어 나의 고통을 덜어보려는 마음 근거는 참으로 추악합니다.
그런데, 또 드는 생각은 그 이면이 놀랍도록 솔직하다는 것입니다.
아픔이라는 건 철저히 주관적이어서
그 주체가 아니고서는 절대 감지할 수 없는 고유의 것인데,
아들을 잃은 저자의 이 글을 서점에서 발견 했을 때 왜 손이 갔을까요?

전 그 마음이 궁금했습니다.
추악의 면으로 짚어 보자면 나만 아프고 싶지 않은 거였습니다.
지금 내 아픔이 자식을 잃은 자의 아픔만큼이나,
아니 거기에 감히 견줄 수 있다고 여긴 것입니다.

아픔은 어차피 겪어내야 하는 자가 온전히 혼자 감당해야 하는 개인의 형국이라면서
너는 얼마나 아프더냐 확인해 보고 싶었던 거지요.
아픔을 객관화시켜 견주어 보려는 심산.
나도 아팠다고 스스로 마음의 정당성을 부여하며 그것에 너도 동의해 달라는 거였습니다.

그런데, 솔직함으로 들어가 보면,
그 또한 결국엔 추악함으로 변질되는 것이 자꾸 자기 방어를 한다는 것입니다.
난 괜찮다고, 아니 실상은 아프지 않은 거라고 자꾸 머리로 생각을 집어넣고 있다는 것입니다.
꾸역꾸역 빠져나오는 눈물과 원망과 분냄까지 섞여 있는 이 몹쓸 감정을
계속 죄의 증상이라고 되뇌이며 아니라고,
지금 내가 느끼는 감정이라는 것은 진실이 아니라고 주문을 외웁니다.

스스로, 시간이 해결해 준다고,
방법을 모르면 덮어도 보라는 스스로도 자신 없는 해결책을 자꾸 들고 나옵니다.
정작 한 번이라도 목을 놓아 피를 토하듯 울어 본 적이 있었습니까?
비록 후패한 마음의 결과래도
내 안에서 나오는 그것의 실체에 대해 두 눈 맞닥뜨려 씨름해 봤던가요?
외면하고 넘기기에 급급하진 않았습니까?

죽을 만큼 사랑한다고 말하는 존재의 부재는 나의 죽음을 결과해야 맞습니다.
그런데, 우리 누구도 그렇게 정직하지 않습니다.
그제서야 드러나는 나의 기만에 죽을 만큼은 아니었다는 부끄러운 고백을 해 보셨습니까?

그런데, 정말 죽고 싶은 그 마음이 정직하지 않다고 누가 돌을 던질 수 있겠습니까?
어줍잖은 위로를 내미는 사람들을 피해 도망가듯 딸 네 집으로 숨어 들어간 저자가
13층 아파트 베란다에서 정작 뛰어 내리지도 못하는 스스로를 자각하며 느낀 슬픔보다
더한 자괴감 어디에 욕먹을 성질의 것이 있습니까?

그 자리까지 내몰린 자의 몸부림이 꼭 진정성으로 가늠해야 하는 건 아니잖아요?
누구에게나 숨어 있는 그 극한의 감정지대가
사는 날 동안 건드려지지 않은 자들의 저주받은 여유가 우린 부럽지 않나요?
그냥 아프고 너무 힘든 거지요.

그러니 그 아들의 죽음이 아픈 건 내 자아 확장의 존재가 아들로 통해 보여졌을 뿐,
사실은 나의 죽음이라고 말하진 않으렵니다.
기껏 떠오르는 단점조차 아름다운 기억이 될 만큼 준수했던 아들은
그만큼 단단한 내 자아의 뿌리내림 조건이었다고도 말하지 않겠습니다.
그런 정답을 몰라 아픈 게 아니니까요.

'정작 한 말씀만 하소서 ...' 라고 부르짖으며 사생결단으로 들으려 했던 말은,
아니 그렇게 들린다고 생각한 말은 내가 내 스스로에게 주고 싶은 위로는 아닌가요?
전심으로 인간이 주는 위로에 목말라하면서 입으로는 신을 말하고 ...
그러니 제가 느끼는 슬픔도 모두 사기입니다.

이건 거대한 사기극입니다.
내가 전심으로 사랑한 존재는 결국 또 다른 '나' 였다는 정답을 안다는 것으로
변명하기에 급급한 나머지 진짜 토해내야 하는 것은 숨기고 감춘 것입니다.
이것이 먼저여야 합니다.

전쟁에서 죽은 자식의 주검 앞에
'감사해요' 를 외치며 손을 들고 찬양하던 어느 엄마의 기사에
우린 다 같이 역겨움을 느끼지 않았던가요?
그러니 이젠 좀 솔직해집시다.
생각이라 불러도 좋고 내면이라 불러도 상관없는 드러나지 않는
내 속 구석구석 그 어디에 자리잡은 믿음을 가장한 불경함에 치를 떱시다.

죽을 힘을 다해 버틴 나의 애씀 전부가 지적 동의 수준에서 나온 것일 수 있습니다.
피를 토하듯 고백한 하나님에 대한 사랑조차 거짓일지도 모릅니다.
그러니 섣불리 '괜찮습니다, 견딜만합니다' 라고 씩씩하지 맙시다.

아프면 아프다고 말합시다.
항변 한 번 제대로 하지 않은 채 벼르며 상해가는 마음이
순종과 열매인 것처럼 꾸미지도 말자고요.
이미 썩어 냄새가 나는지도 모르고 방긋방긋 웃는 코미디 그만 찍자는 것입니다.

그렇게 내 바닥이 완전히 드러날 때
비로소 아픔의 본질적 원인은 사라지고 거기에 신적 개입이 일어납니다.
그런데, 왜 그렇게 눌렀을까요? 참았을까요?
나의 이 감정에 대해 이해하지도 못하는 자들 앞에서는
울음도 보이고 싶지 않아서였습니다.
그래서, 울 수도 없었습니다. 솔직해지는 경계가 늘 흐릿했었습니다.

그런데, 생각할 시간이 주어졌습니다.
하나님이 이러 저러한 상황을 일부러 만들어 내게 주셨다고 믿어집니다.
처음엔 이런 시간들을 통해 죄의 증상으로 오는 그 고통과 슬픔이 다 걸러져
맑고 무게 없는 고요를 낳았으면 했습니다.

아버지가 그런 나를 원하신다고 생각했습니다.
참으로 부질없는 것이 인간의 욕심 아닙니까? 그게 가당키나 한 바램입니까?
내 안에 그렇게 걸러지고 받혀져 남아있을 게 있습니까?
어디 그런 선한 뭐라도 있었던가요?

전 끝까지 비겁합니다.
아버지는 '넌 누구냐' 를 언제나 물으십니다.
그러니 하나님과의 사랑 회복에 앞서 나의 완전한 붕괴를 먼저 경험합시다.
평생에 신에 대해, 인간에 대해, 사랑에 대해 오롯이 고민할 수 있는 생각과 여건이
지금처럼 주어진 때가 있었던가요?
이렇게 진한 고민으로 가득 차 있던 때가 있었던가요?

나와 하나님과의 독대, 거기서조차 꾸민 나를 보이고 싶어 하던 내 본질적 죄성,
지금은 그 들추임이 더 아픕니다.
그러니 울며 아파하고 마음껏 토해냅시다.
지금은 이 통곡이 기도요 찬송입니다.

내가 누구인지 보입시다.
그것이 관계 안에 있음이요, 거기에서 낳아지는 것이 참 사랑입니다.
죽음이 우리를 삼킬 수 없는 이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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