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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13-08-12 15:13
   (24) 선암사의 흰 매화
 글쓴이 : njsmyrna
    조회 : 7,298  




정말 진리가 기독교에만 있는 것일까를 고민하던 대학 시절,
전국의 고승들을 찾아 다니던 때가 있었습니다.
합천 해인사를 찾아 성철 스님의 자취를 더듬어 보기도 했고,
화엄경의 대가 탄허 스님을 찾아 사흘 동안 강원도의 사찰들을 헤매던 적도 있었지요.
그렇게 진리를 알 법하다 추측되어졌던 분들을 찾아 전국의 사찰을 참 많이도 찾아 다녔었네요.
 
그 중 잊혀지지 않는 곳이 남도의 선암사입니다.
그 곳 원통전 뒤에 있는 늙은 매화는 지금도 눈에 선합니다.
시원하고 향긋한 산바람에 우수수 매화 꽃잎을 떨어버리는 그 나무 아래
한참을 앉아서 그 향기와 소리를 즐겼었습니다.

언제든지 그 향기와 그 풍광은 저의 뇌에서 재생이 됩니다.
그 곳에서 아제아제 바라아제의 마지막 장면이 촬영되었다는 것은 나중에 안 일이었습니다.
그 선암사가 제 기억에 그토록 또렷이 남은 이유는
제가 그 원통전 뒷마당의 늙은 흰 매화 아래에서 불교의 허구를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정말 착하게 살고 싶었고, 남들에게 유익이 되는 삶을 살고 싶었으며,
진리를 깨닫기 위해서는 소지 공양까지는 한 번 해 보겠노라는 결심이
그 곳에서 무참하게 산산 조각이 났었습니다.
마치 흐르는 물을 막아 가득차게 된 댐이 일순간에 무너지듯이
저는 진리를 찾아 헤매던 그 여정을 멈춰 버렸습니다.

'난 도저히 불가능한 인간인데, 어떻게 나보고 그 고행을 통과하란 말인가? 정말 자신 없다'
아마 그 뒤부터 저는 제 몸뚱아리를 세상의 부귀와 영화, 그리고 쾌락 속으로 던져 버렸던 것 같습니다.

그 때 누군가가 저에게 '예수 그리스도라는 분이 너의 그 죄를 모두 짊어지고 너를 위해 죽으셨다' 라고
한 마디만 해 주었더라면, 그 방황의 시간이 그렇게 길지 않았을 텐데, 그토록 교회를 오래 다녔건만
저는 복 받아 잘 사는 방법 외엔 들어본 적이 없었기 때문에
진리에 대한 배신감에 긴 방황의 시간을 보내야만 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그러한 제게 찾아오셨고, 저는 드디어 진리를 찾았습니다.
오래 앓던 충치가 쑥 빠져버린 홀가분함, 아니 너무 힘겹던 숙제를 다 마친 후
팝콘과 콜라를 들고 편안한 의자에 앉아 좋은 영화의 시작을 기다리는 평안함이랄까,
오랜 방황의 시간이 끝나던 그 날을 저는 지금도 잊을 수가 었습니다.

그런데, 그 때부터 하나님의 자식 만들기 프로젝트가 시작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자기 자녀에게 남아 있어서는 안 될 것들을 하나 하나 제거하시고,
그 자식이 숙지해야 할 하늘의 법도를 하나 하나 가르치십니다.
만일, 진리를 깨닫지 못한 상태에서 그 시간들을 맞이했다면,
아마 저는 스스로 목숨을 끊어버렸을지도 모릅니다.
 
그토록 하나님의 자식 만들기는 힘겹습니다.
제 안에 여전히 존재하는 죄의 오염과 부패성과 덕지덕지 붙어있는 교만과 이기를
하나님은 하나 하나 끊어내십니다.
그런데, 그 오염과 부패성과 교만과 이기는 저와 함께 평생을 지내 온 저의 옛 몸이니,
그 몸을 오관을 가진 상태에서 죽여가시니 그 고통이 얼마나 심했겠습니까?

그런데, 주님은 그 시간을 견디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지금도 그 손으로 꼭 붙들고 계십니다.
여전히 잘라내고 버려야 할 것들이 제 안에 많이 남아 있기 때문이지요.
그러다 가끔 뒤를 돌아다보면,
그 신앙의 여정에 흘렸던 눈물이 얼마나 큰 복이었는지를 실감을 합니다.

그래서, 오늘의 눈물을 견딜 수 있는 것이지요.
그리고, 하나님의 약속을 떠 올립니다.
'네가 흘린 그 눈물은 네가 나를 만나는 날, 내가 손수 닦아 주마'
분명 하나님은 눈물을 흘리지 않게 해 주겠다고 약속하신 것이 아니라
'네가 흘린 눈물을 내가 닦아 주겠다' 는 약속을 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눈물을 흘리면서도 그 약속이 믿겨지기에 기쁠 수 있는 것입니다.

이라크의 대통령이었던 사단 후세인 교수형 동영상이 인터넷에 떠 돌아 다닙니다.
목이 90 도로 꺾여 버린 그 처참한 최후를 누군가가 카메라 폰에 담아 유포를 해 버렸습니다.
걸프전을 비롯한 수많은 전쟁을 유발했던 그의 최후가 그렇게 허무하고 끔찍하게 끝나리라고는
그 누구도 상상하지 못했던 일이었습니다.

그가 죽기 전 철권을 휘두르던 장부답지 않게
감옥에서 흰색 팬티 바람으로 옷을 개고 있던 모습을 보았습니다.
그가 그 때 무슨 생각을 했을까 궁금했습니다.
 
'와신상담(臥薪嘗膽)을 생각했을까?
그래, 인간은 끝까지 자기의 인생은 해피엔딩으로 끝날 것이라는 기대를 놓지 않는다잖아.
아니, 그도 상식이 있는 사람인데, 그냥 죽지 못해 사는 것일 거야.
차라리 히틀러처럼 깨끗하게 사라지든가,
챠우세스쿠처럼 잡히지 말고 사살되는 편이 나을 뻔하지 않았을까?'
결국, 그 생각의 끝은 '자기의 유익만을 위한 이기적인 삶의 말로는 처참할 수밖에 없다' 였습니다.

우리는 기독교를 통해 바로 그 사실을 배우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세워 놓으신 질서를 어기고 자기 자신을 우주의 중심에 올려놓고
자기만을 위해 살던 자들은 모두 그렇게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서 처참하게 스러져야 하는 것인데
하나님은 그 분의 백성들에게 찾아오셔서
그들을 건져내시고 그 못된 버릇을 이 땅에서 고쳐 내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 하나님께 순종하는 자로 살게 되도록 그 분은 그 자녀들을 설복시키시는 것이지요.
그걸 사람들은 '고난' 이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의 고난은 결코 절망으로 이어질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이 역사 속에서도 고난은 항상 걸작을 낳았다는 것을 아십니까?
불멸의 고전 '사기(史記)' 를 남긴 사마천은 패전 장군인 이릉을 도와주려고 하다가
오히려 자신이 죄인으로 몰려 48 세에 남근을 거세당하는 궁형(宮刑)을 당하였습니다.
남자에게 가장 치욕스러운 형별이 궁형입니다.
그래서, 왠만한 장부들은 궁형을 당하면 즉시 자살을 하고 말았지요.
하지만, 사마천은 자살하지 않았고 50세부터 '사기' 를 쓰기 시작하였습니다.

그에게 궁형이라는 고난이 없었다면, 그는 절대 사기를 기록하려는 마음을 먹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는 기록을 후세에 남겨 후세에 자신의 입장을 알리기 위해서
자살하지 않고 살아서 사기를 기록한 것입니다.
그러면서 사마천은 자신의 심경을 피력한 '태사공자서(太史公自序)' 에서
자살하지 않고 저술에 몰두했던 선례들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옛날 주문왕도 은나라의 감옥에 갇혀 있는 동안 '주역' 을 만들었다.
공자는 진나라에서 곤경에 처했을 때 '춘추(春秋)' 를 썼다.
굴원은 초나라에서 추방되자 '이소경' 을 지었다.
좌구명(左丘明)은 한쪽 눈이 실명되고 나서부터 '국어(國語)' 를 쓰기 시작하였다.
손자는 다리가 끊기는 형벌을 받고 나서 '병법(兵法)' 을 완성하였으며,
여불위는 촉나라로 귀양 갔기 때문에 '여람(呂覽)' 을 남길 수 있었다.
한비는 진나라에 붙들렸기 때문에 '세난(說難)', '고분(孤憤)' 을 쓸 수 있었다."

이처럼 모든 역사적인 저술들은 곤경의 산물이었습니다.
사도 바울의 서신서들이 대부분 감옥에서 쓰여진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닌 것입니다.
고난은 결코 저주가 아닙니다.
오히려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배려라고 해야 옳을 것입니다.

잘 참으십시오. 잘 견뎌 내십시다. 장성한 분량까지 잘 자라나십시다.
서로 서로 위로하고 격려하면서, 그 선암사 원통전 뒷마당의 희 매화 아래
오래 오래 앉아 바람을 맞고 싶은 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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