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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13-08-12 15:12
   (23) 비가 오네요
 글쓴이 : njsmyrna
    조회 : 7,003  




이른 새벽입니다. 비가 내리네요.
이곳 LA 에서는 좀처럼 들을 수 없는 처마를 흘러내리는 빗소리를 듣습니다.
청아하다는 표현, 이럴 때 어울리는 군요.
오랫동안 메말라 있던 땅에 빗방울이 듣기 시작할 때
풋풋하게 올라오는 땅의 향기가 이내 후각으로 재생이 됩니다.

참 신기하지요?
어떻게 후각과 미각까지 재생이 가능한 것인지, 이런 것을 마음의 되새김질이라 불러도 되겠지요.
이런 날이면 저 청아한 빗소리를 우울함 속에서 듣고 있을 이들이 생각이 납니다.
다름 아닌 혼돈스러운 신앙의 여정을 가고 있는 일련의 사람들 말입니다.

신앙생활 하기 힘드시지요?
잡은 것 같다가도 손을 펴 보면 아무 것도 없는 것 같고,
꼭 품어 안은 듯 싶었는데 허공에 허우적대고 있는 팔을 발견하고, 망연자실 해 본 적 없으세요?
그런 시간들이 오래 지속되면 이내 허탈감에 빠지게 되고, 그 허탈감은 게으름으로 이어지게 되지요.

문득 '토마스 머틴' 의 '칠층산' 의 한 대목이 생각이 납니다.
"그런데 내가 이미 도착한 당신 안에서 나는 당신을 찾기 위해 얼마나 더 가야 합니까!
나의 하나님, 다른 이는 아무도 내 말을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에,
내가 여쭐 수 있는 이는 오직 당신 뿐입니다.
이 지상에 있는 어느 누구도 당신의 빛 속에서,
즉 당신의 어둠 속에서 길을 잃고 쩔쩔매고 있는 나를 이 구름 속으로 데리고 올 수가 없습니다.

나는 어느 누구에게도 당신의 기쁨인 고뇌를, 당신의 소유인 상실을,
당신께 도달함인 만사로부터의 격려를, 당신 안의 출생인 죽음을 설명할 수가 없습니다.
나는 그 어느 것도 내 스스로는 알지 못하며 내가 아는 것이라고는 내가 이것이 끝나기를 바란다는 것 -
이것이 시작되기를 바란다는 것 - 뿐이기 때문입니다.
당신은 모순되게 하셨습니다. 당신은 나를 무인지(無人地)에 가두어 버렸습니다."

제목이 가물가물한,
아내를 잃고 하나님을 향해 삿대질을 해 대던 C.S. 루이스의 어떤 책도 생각이 납니다.
그리고 힘겹게, 힘겹게 실오라기 같은 신앙의 끈을 잡고 하루 하루를 지탱하고 있는
사랑하는 우리 청년들의 모습도 떠오르네요.
그래도 그 끈을 꼭 붙들고 있는 그들의 분투가 대견스럽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의 신앙은 언제나 확신 속에 갈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믿음' 을 요구하시기 때문입니다.
믿음이라는 것은,
보이지 않는 것을 보며 만져지지 않는 것을 만지는 자들에게서 나오는 신비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바로 그 '믿음' 을 허락하셨고,
그 믿음을 이 시간 속에서 경험하게 하시고 발휘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꼭 붙들었던 것 같은 실체를 가끔 허상처럼 흐려 버리시고
꼭 안았던 것 같은 형상을 신기루처럼 날려 버리시기도 하시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앙의 끈을 놓지 않는 것을 우리는 '믿음' 이라 하고,
그러한 믿음을 소유한 자를 '믿음이 있는 사람', '신자' 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하나님을 붙들고 계신 여러분은 잘 가고 계신 '신자' 인 것입니다.

혹시 그런 자신을 향해 '불신자' 라고 스스로 판결을 내리시지는 않으셨나요?
그래서, 비라도 내릴라치면 괜히 예민해지고 우울해 지는 경험을 해 보지 않으셨습니까?
아닙니다.
그게 바로 우리의 믿음을 성숙시키시는 하나님의 배려 속에 있는 모든 군상들의 공통된 경험들입니다.

나만 약하고 엉터리인 줄 아셨지요?
모든 이들이 그렇게 혼란과 혼돈 속에서 신앙의 여정을 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 조약돌 같이 가벼운 우리의 믿음을 근거로 천국을 소망하는 것이 아니라
반석처럼 든든한 하나님의 열심을 근거로 천국을 소망하기에 안심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처럼 나약한 우리에게 우리의 구원을 맡기셨다면
우리는 언제든지 탈락할 수밖에 없는 자들이었는데,
하나님께서 그 구원의 주도권을 우리에게 맡기지 않으시고 하나님이 쥐고 계심을
오히려 감사하며 안심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약할 때 하나님의 강함이 드러난다는 것을 여러분은 아시잖아요.
그런데, 왜 우리의 약함이 드러날 때 절망하십니까?
우리는 원래 그런 존재입니다. 그러니까 그냥 인정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은혜의 십자가 뒤로 숨으시면 되는 것입니다.

이른 새벽 빗소리를 들으며
세상을 먹이시며 입히시는 하나님의 은혜와 열심을 다시 한 번 실감합니다.
요즘 창세기에 빠지다 보니 왜 이렇게 모든 만물과 현상이 신비로운지 모르겠습니다.
어느 것 하나 기적이 아닌 것이 없네요.
그 창조의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이끌고 계십니다.

낙심하지 마세요. 절망하지 마십시오.
창조의 하나님은 지금 여러분을 새롭게 창조하고 계신 것입니다.
그리고, 그 분은 절대 실수하거나 실패하실 수 없는 분이십니다.
그러니까 힘을 내십시오.
과거에 우리가 하나님을 전혀 알지 못했을 때를 기억하세요.
그 때는 정말 어찌나 답답했던지, 생각하고 싶지도 않네요.

오래 전 공지영의 '수도원 기행' 이라는 책을 읽은 적이 있습니다.
거기에 한숨처럼 묻어 있던 작가의 고백이 이러했습니다.

"밝은 대낮에도 깊은 우물에는 별이 비친다 한다.
그 아스라한 깊이, 어두워 적막한  그 곳에 별이 떠 있다.
이 때 우물은 하늘이 된다.
사람들은 누구나 가슴 속에 우물 하나를 간직하고 있다.

그런데, 그 우물에 문제가 생겼다.
더 이상 하늘의 별이 보이지 않게 된 것이다.
오랫동안 사용하지 않은 우물은 온갖 오물로 가득 차 있고,
샘물은 더 이상 솟아오르지 않는다.

살아 있는 것이라고는 장구벌레의 춤 뿐이다.
변신을 기다리는 음습한 욕망 말이다.
어쩌다 이 지경이 되었나?
어둠과 고요함에 대한 두려움 때문이 아닌가 싶다.

밤이 되어도 도시의 불빛은 꺼지지 않는다.
소음은 우리 존재의 조건인양 확고히 우리를 둘러싸고 있다.
지난 시절 등화관제로 도시가 온통 어둠에 잠겨 있을 때
가난한 달동네 위로 등싯 떠오르는 보름달을 보면서
무릎 사이에 얼굴을 묻고 울었다던 어느 로맨티스트의 둥근 울음은
이제 더 이상 들려오지 않는다.

세상은 이제 어둡지 않다.
그리고, '있기' 보다 '하기' 에 길들여진 우리 몸과 마음은
더 이상 우리 속에 있는 어둠을 응시하지 않아도 된다.
인공의 불빛이 온 세상을 훤히 비추고 있으니까.
딴청 부릴 생각 그만두고 세상의 북소리에 따라 일사불란하게 앞으로 나가기만 하면 된다.

그런데 이상하다.
많이 가져 보아도, 많이 누려 보아도 행복하지 않다.
파시스트적인 속도로 돌아가는 원심분리기 같은 세상에서
내 속의 어느 한 부분이 떨어져 나간 것 같다.
그래, 목마름이다.
속도가 더해 갈수록 어지럼증과 더불어 목마름은 깊어간다.
어디 이 갈증을 풀어 줄 샘물이 없을까?
자기 속에서 샘물 긷기를 잊은 사람들은 남의 샘을 기웃거린다."

적어도 우리는 그 어둠 속에서는 나온 사람들 아닙니까?
적어도 우리는 인공의 불빛이 언제까지나 영원할 것이라고는 믿지 않잖아요.
그럼 된 것입니다. 일어나십시오.
피곤한 손과 연약한 무릎을 일으켜 세워 다시 한 번 힘내서 가 봅시다.
이렇게 가다 보면 찬란한 영광의 날이 반드시 오게 될 것이니까요.

나의 천국 가족들, 사랑합니다.
그리고, 여러분을 위해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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