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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13-06-02 14:29
   (02) 그런 기독교는 없습니다
 글쓴이 : njsmyrna
    조회 : 6,482  




백 여 년 전 조선 땅에 기독교가 들어왔습니다.
이 천 년 기독교 역사 속에서 백 년의 역사는 그리 자랑할 만한 것이 못되지요.
역사의 깊이로만 따진다면,
아직 우리 조국 대한민국의 기독교는 유아기를 벗어나지 못한 상태입니다.

많은 선교사들과 현지 순교자들의 피를 먹고, 이 땅의 기독교는 조금씩 조금씩 성장해 왔습니다.
아직 위험하고 미개했던 동방의 작은 나라에
오직 복음을 전하겠다는 일념으로 목숨을 걸고 들어온 선교사님들의 노고를
어찌 말로 다 표현할 수 있겠습니까?

어린 시절, 집안의 장손이었던 저는
할머니와 할아버지가 살고 계시는 경기도의 작은 마을에서 대부분의 시간을 보내곤 했습니다.
다섯 살 때쯤이었나 봅니다.
할아버지와 할머니가 살고 있는 동네에 외국인 선교사님이 들어오셨습니다.
그리고는 학교도 제대로 다녀 보지 못한 피난민 출신이 대부분인 그 마을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해 주셨습니다.

물론, 그 분들이 무속신앙에 물들어 있던 마을 사람들 모두에게 환영을 받은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래도 동네 어귀의 작은 집에 성경을 가르치고 배우는 사랑방이 생겨났습니다.
당시에는 TV도 없었고 라디오도 흔치 않던 시절이라,
사람들이 모여 함께 공동의 주제를 가지고 이야기를 나누는 그런 자리가
동네 아주머니들에게는 한적한 시골의 무료함을 달랠 수 있는 유일한 공간이 되었습니다.

그곳에는 피부가 아주 하얗고 고운 어느 할머니가 성경을 가르치고 계셨고,
우리 할머니는 저를 등에 업기도 하고, 걸리기도 하시며, 거의 매일 그 곳을 출입하셨습니다.
그곳에서 아담과 아브라함과 모세와 다윗과 삼손의 이야기를 처음 들었습니다.

마을의 사랑방이 그렇게 동네 아주머니들에게 인기를 끈 이유는,
단순히 성경 이야기의 쏠쏠한 재미와 매력 때문만은 아니었습니다.
평생 한 번도 들어본 적 없는 팔레시타인의 역사와 인물, 사건들이 흥미 있기도 했지만,
그와 함께 더해지는 '복' 이야기가 가난한 시골 마을 아주머니들의 마음을 흥분케 했던 것입니다.

나중에 할머니로부터 전해들은 이야기지만,
그 사랑방에서 복음을 전하시던 고운 할머니와 간간이 그 사랑방을 찾아오시던 선교사님들께서
예수를 믿으면 자기들 나라 미국처럼 하나님께 복을 받아 부자가 되고,
병도 낫고, 자식들도 출세를 한다고 하셨답니다.
그러니 쌀을 아끼기 위해 일주일에 서너 번은 밀가루를 밀어 장국을 해 먹어야 했던
그 시골 마을 사람들의 귀가 어찌 솔깃해지지 않았겠습니까?

어떤 분들은 성경 이야기보다 그 사랑방에 앉아있기만 해도 복을 받을 수 있다는 신념하에
피곤한 몸을 이끌고 매일같이 그 사랑방을 찾기도 했습니다.
그러한 복음과 복의 동반(同伴)은
백 년 전 조선 땅에 벽안의 선교사님들이 처음 들어오셨을 대부터 있어 왔던
선교학적 접근이었던 것 같습니다.

백 년 전 조선은 서양 사람들에게는 닫혀 있는 미개한 나라였습니다.
오죽하면 선교 본부의 명령으로 조선 땅으로 가게 된 어떤 선교사님의 편지에
'가장 위험한 곳으로 떠나게 되었으니 많은 기도를 부탁한다' 는 내용이 왕왕 보고되곤 했으니까요.

당시에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농사를 짓고 있었습니다.
그것도 거의 천수답에 가까운 농사였지요.
관계시설도 형편없었고, 농사에 대한 지식도 일천했던 때였습니다.
그래서 추수가 끝나고 농한기가 되면,
농민들은 그 긴 겨울을 무엇을 하며 보내야 할지 전전긍긍했습니다.
남자들은 대부분 노름방에 모여 투전에 시간을 보내고, 저녁이면 막걸리로 잠을 청하곤 하던 때였습니다.

그들에게 무슨 희망이 있었겠습니까?
하루 세끼 꼬박 꼬박 챙겨먹는 것도 호강이라 여기던 때에 기독교가 그들에게 들어온 것입니다.
기독교는 배고픈 그들에게 희망이라는 매력적인 당근을 던지기 시작했습니다.
예수를 믿으면 그들이 처해진 가난과 나약함과 무료함에서 해방이 될 수 잇다는 행복한 소식이었습니다.

그러한 접근은 요즘도 신학교에서 배우는 효과적인 선교학적 방법론입니다.
어떻게 해서든 사람들을 만나고 모아야 복음도 전할 수 있는 거라는
선교 학자들의 작업 가설적 아포리즘(Aphorism 격언) 입니다.
분명, 선교에는 방법론이 필요합니다.
그러나, 적어도 그 문제만큼은 제게 자꾸 복음이라는 제품을 팔기 위해
'현세의 복' 이라는 화려한 과대포장을 덮어 눈속임을 하는 불량한 상인의 이미지로 읽혀집니다.

그 이후로 기독교는 그저 어떤 힘 있는 존재의 힘을 빌려 자신의 소원이나 이루고
문제해결이나 하는 무속신앙의 모습과 섞여서 우리 조국 대한민국을 광란의 도가니로 만들어 버렸습니다.
어떤 신학자의 말처럼 한국의 기독교는 비빔밥 종교가 되어 버렸습니다.
한국의 기독교는 기독교가 아니라 기복교가 되었다는 웃지 못 할 농담이 정설이 되어버린 듯합니다.

그처럼 구복(求福)자가 어떤 큰 힘을 가진 존재에게 힘을 빌려 자신의 소원을 이루고,
자신이 당면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샤먼(Shamon)이라는 무당을 중재자로 세우고,
그를 통해 치성을 드리는 것을 샤머니즘(Shamonism)이라 합니다.
오늘날의 기독교는 목사라는 샤먼을 중재자로 세우고
하나님이라는 힘 센 존재를 달래고 닦달해서 복이나 받아내려는 무당종교가 되어가고 있는 것 같습니다.

성경은, 예수를 믿게 되면,
첫 번째로 찾아오는 것이 '고난(Suffering)' 이라고 제시하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오늘날의 수많은 샤먼들은 자신의 세(勢)를 늘리고 과시하기 위해
그 '고난' 이라는 기독교 신앙의 정수를 어줍지 않은 '복(福)' 으로 포장을 해서 전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을 놓치지 않기 위해서는 그 청중이 듣기 싫은 소리는 안해야 하는 법입니다.
그래서 어느 순간 교회의 강대상에서 '죄' 와 '회개' 와 '고난' 과 '심판' 그리고 '자기부인' 과 십자가의 삶'
같은 주제들이 자취를 감추어 버렸습니다.
그 대신 그 자리를 차고앉은 것들이 '만사형통', '질병치유', '신바한 체험' 같은 것들입니다.

과학적 논리로 무장한 현대인들은
과학으로 증명이 되지 않는 신기한 현상 앞에서 맥을 못 차리고 넘어갑니다.
물질주의, 실용주의, 역사 낙관주의, 성공주의, 소유 지향성, 맘모니즘에 젖은 현대인들은
만사형통의 당근 앞에서 허리를 조아리고 연신 '주옵소서' 를 외칩니다.

기독교는 하나님의 은혜를 떠나 스스로 왕이 되고 싶어 하는 아담의 자리가
얼마나 어리석은 자리인지를 깨닫고 하나님의 은혜의 장중(掌中)으로 회귀하는 것을
그 목적으로 하고 있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힘을 의지하지 않고 스스로를 지켜보겠다는
타락한 인간들의 수많은 시도들과 열매들이
얼마나 부질없는 것인지를 이 역사 속에서 올바르게 인식할 수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그러한 목적을 위해 하나님께서 택한 백성들이 자신의 추악함을 직시할 수 있도록
실수와 실패와 더러운 범죄도 때로 허락하시고,
하나님의 은혜를 떠난 인간은 절대 영원한 왕이 될 수 없다는 것을 증명해 보이시기 위해
질병도 허락하실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따뜻한 사랑과 은혜로 충만한 참 행복의 새 하늘과 새 땅을 소망하게 만드시기 위해
이 옛 하늘과 옛 땅이라는 물질과 공간에 정나미가 떨어지게도 만드십니다.

그러한 사건과 상황과 정황들 속에서
우리는 보이지 않는 하나님과 하나님 나라만을 소망하는 하나님의 백성으로 성숙되어져 가는 것입니다.
그게 바로 '자기부인(self-denial)' 이라는 것입니다.

그렇게 타락한 '자기' 가 부인되기 시작하면,
지금까지 왕처럼 섬기기 위해 하나님을 이용하고 다른 이들을 밟아왔던 옛 사람들이
자기 자신이 아닌 하나님과 다른 이웃들의 유익을 위해 자신을 불태우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그게 바로 '십자가의 삶' 인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살다 가신 그 하늘나라의 삶의 원리가
진정 하나님의 형상을 가진 자들에게 참 행복을 가져다 줄 수 있다는 것을
이 땅에서 배우는 것이고, 그렇게 지어져 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십자가의 삶을 기꺼이 사는 사람들이 모여 사는 곳을,
성경은 '천국' 이라 부르는 것입니다.

이 땅에서 그렇게 자신의 손해로 남의 유익을 챙기는 삶이
과연 만사형통이요 일사천리로 나타날까요?
하나님께서 우리 성도들이 치성(致誠)을 드려 강청(强請)하기만 하면
모든 소원을 들어주시는 것이 기독교라면,
그 탐욕스런 기도 속에서 과연 우리가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십자가의 삶을 달게 사는
그리스도인의 장성한 분량으로 자라날 수가 있겠습니까?

어떤 이들은,
오늘날의 기독교가 날로 부흥하여 이 땅에 지상 낙원이 이루어질 것이라고,
낙관적인 희망을 피력하기도 합니다.
그리고, 실제로 기독교는 날로 날로 부흥하고 있다고 합니다.
 
그런데, 제 눈에는
오직 예수의 은혜만을 찬양하고, 그 은혜의 장중을 사모하며,
십자가의 삶조차도 목숨 걸어 살아보겠노라고 화형대와 카타콤도 마다하지 않았던,
참 기독교만이 점점 더 선명하게 보여지니 이 어찌 슬프지 않겠습니까?

여러분은 진정 성경이 말하는 예수를 믿고 계십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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