즐겨찾기 | 메인 로그인 | 회원가입 |  사이트맵 |  22 (회원 0)  

Home >  칼럼/책 >  수필집-집으로 가자
 
작성일 : 13-07-14 12:26
   (17) 임을 위한 행진곡
 글쓴이 : njsmyrna
    조회 : 6,867  




'사랑도 명예도 이름도 남김없이
한 평생 나가자던 뜨거운 맹세
동지는 간 데 없고 깃발만 나부껴
새 날이 올 때까지 흔들리지 말자
세월은 흘러가도 산천은 안다
께어나서 외치는 뜨거운 함성
앞서서 나가니 산 자여 따르라
앞서서 나가니 산 자여 따르라'

25 년 전 신림동 어느 막걸리 집에서 열린 신입생 환영회에서
뜨거운 눈물과 함께 선배들이 불러 주었던 노래입니다.
그들의 진지함에 우리도 모두 함께 따라 울었습니다.
그 후로 대학을 졸업할 때까지 참 많이 불렀네요.

'조국', '민족', '민중', '자유', '민주' 이러한 말만 들어도 가슴이 아려오던 때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제가 그런 거창한 사랑을 할 수 없는 존재라는 것을 깨닫는 데는
그리 긴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습니다.
저에게서 나오는 사랑은 '나' 라는 한계를 넘어설 수가 없음을 저 자신을 알고 있었습니다.

구로 공단에 위장 취업했던 학우가 분신을 하고,
아끼던 고등학교 후배는 아크로폴리스 광장에 창자를 던지며 '민주주의여 만세' 를 외치며 투신을 하던 때,
저는 그들의 용기에 그저 박수를 보낼 뿐이었습니다.
'나' 가 아닌 '타인' 을 위한 지고한 사랑이 왜 나에게는 없는 것일까?
아마 그 오기에 조국과 민족과 민중에 대한 사랑을 더 위장했는지도 모릅니다.
어줍지 않은 연극이었습니다.

요즘 어떤 조직신학자의 설교 비평이 화제가 되고 있습니다.
한국의 유명한 목사님들의 설교를 자신의 신학으로 신랄하게 비판을 해 놓았습니다.
많은 부분 수긍이 가기도 했지만, 저는 그 분의 주장 중에 받아들일 수 없는 부분이 더 많았습니다.
그 중 하나가 '민중 신학적 관점에서의 비판' 이었습니다.

그가 칭찬해 놓은 설교자들은 하나같이 자유주의 신학의 냄새가 물씬 풍기는 그러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 책에서 꽉 찬 설교라고 추켜세운 설교를 인터넷을 통해 여러 편 들어 보았습니다.
하나같이 교회가 나서서 자연을 보호하고 사회를 변혁하여 밝고 깨끗한 세상을 만들자는
그러한 내용이었습니다.

일견 옳은 주장 같습니다. 아니, 맞습니다.
우리 성도들은 그렇게 이 땅의 빛과 소금으로 살다가 가야지요.
그러나, 마치 그것이 성도의 삶의 궁극적 목표인 듯 외치는 것은 내심 못마땅합니다.
정말 우리가 이 땅에서 그러한 것들을 하다가 가야 하는 것일까요?
그게 우리 성도의 최종 목표지점입니까?

우리의 목표지점은 각자가 하나님의 백성으로 성숙되어지는 것입니다.
그 길에서 사회 참여가 나올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그 길에서 나오는 사회참여는 그렇게 요란한 꽹과리 소리를 내지 않습니다.

그런데, 요즘 기독교의 사회 참여를 외치는 사람들을 보면 너무나 요란합니다.
거기에는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는 비집고 들어갈 틈이 없어 보입니다.
아니, 기독교인들의 사회 참여 현장에서 복음이 먼저 선포되어지는 것을 저는 본 적이 없습니다.
그냥 도덕적 윤리적인 선동만이 보입니다.

자유주의 신학자의 거두인 슈바이처 박사의 뒤를 그대로 답습하고 있는 그들의 주장이
정말 올바른 기독교인의 삶입니까?
'예수님은 이 땅에 오셔서 모범을 보이시고 올바른 교육을 통하여 죄인들을 계도하시려 하셨는데,
사람들이 들어주지 않아서 자기의 목숨까지도 아끼지 않고 숭고한 죽음의 본까지 보여주고 가셨으니,
그 예수의 삶을 본받아 열심히 경건하게 살자'
과연 이러한 주장이 여러분에게 복음, Good news 로 받아들여지십니까?
아니면, 무거운 짐으로 여겨지십니까?

저를 보고 '역사 허무주의자' 라고 불러도 좋습니다.
그래도 할 말은 해야겠습니다.
성경은 분명 이 옛 하늘과 옛 땅의 역사가 담지하고 있는 것을 파멸이라 말하고 있습니다.
인류의 역사는 하나님을 떠난 자들의 추악함과 교활함과 이기심이
얼마나 더러운 것인가를 폭로하고 있는 것이며,
왜 인간은 하나님의 은혜 속으로만 숨어야 하는 지를 증명하는 대하 드라마 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안다고 하는 사람들 속에서도
그 더러운 육체의 찌꺼기들이 스물 스물 기어 나오게 놔두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 그렇게 단독자로 서서 실패와 좌절과 실수를 거듭하며
자신의 거룩을 소망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 거룩으로 향하는 길에서 봉사와 선교와 구제와 순교가 자연스럽게 열매로 맺혀지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 앞에서의 자신의 모습은 헤아려 보지도 않고,
무조건 떼를 지어 촛불 들고 광화문으로 나가는 것이 기독교의 본질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바울이 당시의 노예들을 선동해서 노예 제도를 없애자고 외첬나요?
아니요, 오히려 '종들아, 네 상전을 주님 모시듯 하라' 고 가르쳤습니다.
노예의 자리에서 하나님의 자녀로 잘 성숙되어질 수 있다면, 노예도 괜찮다는 것입니다.
이 땅의 상황과 계급과 빈부 같은 것은 이미 사도의 관심 밖이었던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열심당원들을 선동해서 로마를 치고 하나님 나라인 이스라엘의 독립을 쟁취하라고
부추긴 적이 있나요? 아니요,
식민지 국민으로 살더라도 그 고난의 상황이 우리의 자녀 됨을 이루어 내는 데에 기여가 된다면,
식민지 국민으로 살자는 것이 사도의 가르침이었습니다.

그래서, 사도는 로마에 세금 꼬박꼬박 내라고 가르쳤던 것입니다.
사도는 로마 황제가 자기들이 낸 그 세금으로 기독교인들을 핍박하는 데 쓸 거라는 것도 알았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러한 고난과 환난을 통해
당신이 백성들을 양육하시고 성숙시킨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사도는 '하나님이 세우신 권세이니 인정하라' 고 한 것입니다.

공산주의를 타도하면 정말 기독교인들이 늘어나게 되나요?
구 소련이 붕괴되고 공산주의가 해체되었을 때
그 곳에 숨어서 선교를 하시던 선교사님의 탄식을 벌써 잊으셨습니까?
공산주의 치하에서는 그래도 목숨 걸고 하나님을 섬기는 참 성도들을 자주 만날 수 있었는데,
공산주의가 무너지고 서구 교회의 돈이 흘러 들어오면서
소련의 기독교는 완전히 망했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정말 기독교의 목표 지점이 사람들을 이 땅에서 잘 먹고 잘 살게 해 주는 것인가요?
교회가 그 일에 앞장 서야 하는 것입니까?
아닙니다. 교회는 어떠한 역경 속에서도 복음으로, 하나님의 은혜로, 하늘에 대한 소망으로
믿음을 발휘하여 살아내는 하늘의 용사들을 키워내는 일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거기에 공산주의가 쓰일 수 있는 것이고, 노예 제도가 쓰일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 인간의 의지는 지식에 종속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인간이 타락을 한 이후 그 지식은 세상 권세 잡은 자의 다스림 속으로 들어가 버렸습니다.
우리 인간은 그 이후로 모든 선택을 '자신' 을 향해 하게 되어버린 것입니다.
사랑도, 용서도, 인내도, 아량도 모두 자기 자신을 위한 '이기' 에서 출발되는 것이
타락한 인간의 본성입니다.
우리는 신앙 생활을 통해 그 사실을 처절하게 인정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되는 것입니다.
우리의 몸을 불살라 세상을 살기 좋은 낙원으로 바꾸는 것이 우리의 목표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눈물을 흘리며 '님을 위한 행진곡' 을 불러 주었던 선배가 연거푸 감옥에 들어갔습니다.
우리는 그의 삶 속에서 자신을 돌보지 않고 민족의 앞날만을 생각하는 살신성인을 보았습니다.
그 선배는 나중에 컴퓨터 사업을 하면서 군소 업자들에게 사기를 쳐서 큰 피해를 입혔다는 죄목으로
긴 수형 생활을 했습니다. 그가 사랑한 민중은 누구입니까?

지금까지 정치에 대한 꿈을 버리지 못한 어떤 선배는 술자리에서
'내가 꿈꾸는 야망을 이루기 위해 용산에서 방배동까지 혀로 핥아서 청소를 하라고 한다면
기꺼이 그렇게 하겠노라' 는 무서운 살기까지 보였습니다.

우리 모두가 존경하던 어떤 시인은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도피를 하던 기간 동안에
세 여자를 만나 여러 차례의 낙태를 시켰다는 인터뷰를 어떤 여성 잡지에 올림으로
우리를 탄식케 했습니다.
우리 인간의 사랑의 한계입니다.
그는 누구를 위해 그 수많은 시를 썼던 것입니까?
그가 사랑했던 민족과 민중 속에는 그렇게 버림받은 여자들과
태어나지도 못하고 산부인과 수술대 위에서 죽어버린 아기들은 포함되지 않았던 것입니까?

우여곡절 끝에 유명한 인권변호사로 성공한 한 선배는
날마다 이어지는 접대에 이미 '민족' 과 '나라' 라는 단어조차 가물가물한 속물이 되어 있더라는 소식을
후배로부터 전해 들었을 때 저는 확신했습니다.
이 세상에 하나님이 요구하는 '사랑' 은 없는 것입니다.

그 사랑은 오직 하나님에게서만 나온다는 것을 저는 확신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누구를 사랑할 수 있나요?
우리가 누구를 용서합니까?
우리가 정말 진정으로 나 아닌 다른 존재를 나처럼 사랑할 수 있습니까?
그런데, 만물의 창조주이신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 이 땅에 오셔서 자신을 향해 돌을 던지며
'너 같은 건 필요 없다' 고 외치던 그 원수들을 위해 사랑을 베푸셨습니다.
용서를 보여주셨습니다.
끝까지 인내하셨습니다.
우리는 믿음으로 그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이제 '나' 를 넘어선 사랑을 할 수 있는 자들이 된 것이지요.
먼저 이 진리가 여러분에게 각인되어 있어야 합니다.
그러면, 그 때 비로소 세상을 향한 진정한 눈물을 흘릴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거 먼저 하자는 것입니다.

저는 요즘 '님을 위한 행진곡' 이라는 노래를 자주 흥얼거립니다.
피비린내 나는 살육이 저질러졌던 5월이 다가 오기도 하거니와
이제 그 노래에 다른 의미를 담을 수 있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저는 이제 이 땅의 명예와 이름을 남김없이 버릴 준비가 되어 있기 때문이고,
한 평생 주님의 뜻만을 위해 나아갈 준비가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이제 깨어나서 외치는 뜨거운 함성으로
'산 자들이여 나를 따르라' 는 감격의 외침을 발할 수 있는 자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이제는 '나' 가 아닌 '하나님과 내 이웃' 을 위해 내 몸을 불 사를 각오가 되어 있기 때문인 것입니다.

요즘 우리 서머나 교회가 예배당 이전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자리가 비좁을 뿐 아니라 아이들이 공부할 교육관이 태부족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저희가 그간 모아 놓은 헌금은
한국의 미 자립 교회 목사님들의 예배 처소를 마련하는 데 모두 보내 드렸습니다.
우리의 헌금으로 예배 처소가 없었던 일곱 교회가 예배 처소를 마련했습니다.
너무나 가난하고 너무나 외소해서
목사님들이 농사를 지어야 하고 목사님들이 탄광의 막장에 들어가 일을 하셔야 했기에
하나님의 말씀을 전할 장소가 없었던 것입니다.

우리는 그 소식을 듣고 흔쾌히 그 분들에게 우리가 가진 전부를 보내 드렸습니다.
그리고, 지금도 점심 시간이면 주린 배를 움켜쥐고 뒷산으로 향한다는 신학교 학생들의 점심 값을
매달 송금하고 있습니다.
그러다 보니 이제 우리의 필요가 닥치게 되었을 때 우리가 난감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저는 조금도 의심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그렇게 '나' 를 넘어선 사랑을 조금이나마 보여 주었듯이
전 세계에 퍼져 있는 하나님의 백성들이 또 다시 우리에게 '나' 를 넘어선 사랑을 보여 줄 것이라는 것을.

이미 우리 서머나 교회 교인이 아닌 여러 분들이 한국에서, 독일에서, 브라질에서,
우리 예배당 이전 소식을 들으시고 함께 동참하시겠다는 의사를 표명해 주셨습니다.
그 분들은 우리 얼굴도 모릅니다.
그러나, 우리와 한 길을 가는 하늘나라 백성이라는 그 사실 하나 만으로 우리를 돕겠다고 나서신 것입니다.
자신의 유익과 아무 상관없는 그러한 곳에 자신의 소중한 것을 던질 줄 아는 그러한 사람들이야말로
하나님의 사랑이 무엇인지를 정확하게 아는 사람들 아니겠습니까?

마게도니아 교회 교인들이 극한 가난 속에서도 예루살렘 교회를 위해 연보를 하게 해 달라고
바울 사도에게 졸랐다던 그 말씀이 오늘 이 땅에서 그대로 재현이 되고 있는 것입니다.
복음이 먼저입니다.
그러면 이렇게 요란을 떨지 않아도 세상 사람들이 자기의 목숨처럼 여기는 재물을 털어
알지도 못하는 가난한 자들에게 구제의 손길과 사랑의 손길이 닿게 되는 것입니다.





 
   
 

모임소개  |  로그인 
Copyright ⓒ 2023 뉴저지 교회 NJ Church, All rights reserved. Comment to nj.smyrna@gmail.com (T)201-658-376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