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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ome >  칼럼/책 >  그런 기독교는 없습니다
* 본 설교는 2004년도 개척 첫해에 기초교리 공부 내용입니다
 
작성일 : 13-04-16 09:01
   45. 교회(13) - 교회! 무엇을 위해, 무엇을 하며 살아야 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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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글쓴이 : njsmyrna
    조회 : 6,616  




(엡2:1-10)
1    여러분도 전에는 범죄와 죄로 죽었던 사람들입니다.
2    그 때에 여러분은 범죄와 죄 가운데서 이 세상의 풍조를 따라 살고, 공중의 권세를 잡은 통치자, 곧 지금 불순종의 자식들 가운데서 역사하는 영을 따라 살았습니다.
3    우리도 전에는 그들 가운데서 모두 육신의 정욕대로 살고, 육신과 마음이 바라는 대로 행하여,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날 때로부터 진노의 자식이었습니다.
4    그러나 하나님은 자비가 넘치는 분이셔서, 우리를 사랑하신 그 큰 사랑으로,
5    범죄로 죽었던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려 주셨습니다. 여러분은 은혜로 구원을 받았습니다.
6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를 그분과 함께 살리시고, 하늘에 함께 앉게 하셨습니다.
7    그것은,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자비로 베푸신 그 은혜가 얼마나 풍성한지를, 앞으로 올 모든 세대에게 드러내 보이시려는 것입니다.
8    여러분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은혜로 구원을 받았습니다. 이것은, 여러분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9    구원이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님은, 아무도 그것을 자랑할 수 없게 하려고 하시는 것입니다.
10    우리는 하나님의 작품입니다. 선한 일을 하게 하시려고,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를 만드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이렇게 준비하신 것은, 우리가 선한 일을 하면서 살아가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제가 지난 번 수요 성경 공부 때 모든 인간은 누구나 마음속에 네 가지 질문을 갖게 된다고 말씀드렸습니다. 그 첫 번째가
1)우주와 세상의 기원과 구조가 무엇인가?
2)인간은 어떤 존재이며 나는 누구인가? (What is man? who am I?)
3)인간과 이 세상이 당면하고 있는 큰 문제가 무엇인가? (What is our problem?)
4)그 문제에 대한 해결책은 있는가? 있다면 그것은 무엇인가? (What can we do about it?)
 
이 질문들을 한 마디로 요약하면 무엇이겠습니까? “우리는 어떻게 해야 우리가 당면한 문제로부터 구원을 받을 수 있는가?“입니다. 모든 인간은 자신들의 문제를 인식하고 있으며 그 문제의 해결책을 나름대로 내 놓고 있습니다.
모든 인간이 품고 있는 이 질문들에 대한 대답으로 나온 것들이 바로 종교이며 이념이며 사상입니다.
 
춘추 전국 시대를 살았던 공자는 인간의 문제를 예의 결여로 보았습니다. 임금과 신하간의 예가 결핍이 되어 끊임없는 쿠데타가 일어나고 또 부자간의 예와 형제간의 예와, 사제 간의 예와 이웃 간의 예의 결핍으로 인간 세상이 이렇게 평화를 잃게 된다는 것이 공자의 해석이었습니다.
그래서 유교는 예를 회복하는 것이 인간이 당면한 고통에서 해방되는 유일한 길이라고 가르쳤습니다. 유교에서 말하는 구원은 예의 회복입니다. 그래서 유교에서는 “수기(修己) 치인(治人)” “자신의 도덕적 수양을 쌓는 것”을 최고의 덕목으로 삼습니다.
 
유교에서 인간에게 꼭 필요한 수양의 덕목으로 꼽는 것이 “사덕 오상”이라고 해서 “인 의 예 지 신“입니다. 그리고 대인 관계에서는 항상”삼강 오륜”에 입각해서 행동해야 한다고 가르쳤습니다.
삼강은 “부위자강”(아들은 아버지를 섬기는 것이 근본이다)
“군위신강“(신하는 임금을 섬기는 것이 근본이다)
“부위부강”(아내는 남편을 섬기는 것이 근본이다)
오륜은 “부자유친” “군신유의” “부부유별”(남편과 아내는 분별이 있어야 한다) “장유유서” “붕우유신”(친구 사이에는 믿음이 있어야 한다) 이러한 삼강오륜에 입각해서 대인관계를 가지게 되면 평화가 온다는 것이죠. 이렇게 잘 살아내면 우리 인간이 겪고 있는 고통과 악의 문제가 해결이 될 것이라는 것이 유교입니다.
 
우리 한국에도 이미 BC3  세기경에 위만 조선으로부터 한사군이 설치되는 과정에서 유교가 전래되어졌습니다. 그러니까 벌써 2,000년 넘게 유교의 그늘 아래 살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정말 우리 인간의 문제가 이 “예의 문제”입니까? 우리 힘으로 그것이 되던가요?
이 유교가 가장 폭 넓게 전파되고 나라의 국교처럼 되었던 때가 언제입니까? 조선시대입니다. 예가 가장 강조되었던 시대입니다. 그러나 그 조선왕조 500년 동안 우리 조상들은 가장 많은 내분을 겪었습니다. 공자의 가르침을 받들었던 중국의 왕조도 세계 어느 나라 못지않게 당파 싸움과 피 비린내 나는 쿠데타로 점철된 나라입니다.
그 것으로는 문제가 풀리지 않습니다.
 
고타마 싯타르타(석가모니)는 우리 인간이 당면하고 있는 고통의 문제를 힌두교 적인 관점에서 바라보았습니다. 힌두교는 기원전 3,000년경부터 존재했던 것입니다. 이 힌두교는 종교라기보다는 생활양식이나 철학에 가까운 것이었습니다. 이 힌두교는 창설자도, 선지자도, 교리체계도 알려져 있지 않습니다. 그냥 다산과 성장에 관심을 두고 사는, 타락한 인간들의 생활양식이 종교화 된 것입니다.
 
힌두교에서는 인간 세상에 나타나는 고통과 행복과 선과 악 같은 것들은 모두 우주의 중심에 존재하는 브라만 이라는 진리의 투영이라고 봅니다. 그 브라만 안에는 고통과 행복과 선과 악의 개념이 없습니다. 그런데 그 것이 인간 세상에 투영이 되면서 인간들이 그 현상들과 사건들을 고통으로, 행복으로, 선으로, 악으로 느끼는 것일 뿐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러한 인간의 감정들은 다 허상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러한 가짜 느낌에 속지 말고 그 모든 것들이 허상이라는 것을 깨닫고 브라만 안으로 자신을 일치시키라는 “몰아 일체”의 사상이 힌두교의 가르침입니다. “무념무상”
BC600년경에 그 힌두교에 개혁 운동이 시작되었습니다.
그래서 개혁 힌두교가 나왔습니다. 그 하나가 “마하비라”라는 사람이 창시한 “자이나 교”이고 다른 하나가 “고타마 싯타르타”가 창시한 “불교”입니다. 이 두 종교는 개혁 힌두교입니다.
고타마 싯타르타는 힌두교에서 희생제사와 카스트 제도를 없애고 불교를 창시했습니다.
그러나 힌두교나 불교나 자이나교 모두 그 맥은 같습니다.
인간은 인간이 처한 고통의 문제에서 벗어나기 위해서 “대오각성(大悟覺醒)” “견성(見性)오도(悟道)” 그 모든 것이 허상이라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도 “반야심경”이라는 것을 한 두 번씩은 들어보셨을 것입니다. “마하반야 바라밀다 심경 관자재보살...색즉시공 공즉시색” 모든 현상은 “공”"허상“이라는 것을 깨달아야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말입니다. 그래야 ”반야 바라밀“ 지혜를 얻어서 열반에 이를 수 있다는 것입니다.
 
힌두교나 불교에서 말하는 인간의 구원은 이렇게 모든 것이 허상이라는 깨달음입니다.
그리고 또 한 가지 방법은 윤회와 환생을 통한 업보로도 구원에, 즉 불교 용어로 열반에 이를 수 있다고 합니다. 업보라는 것은 “카르마” 전생에 지은 악행을 이생에서 갚는 것을 말합니다. 계속해서 다시 태어나서 그 업을 하나하나 갚아나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급기야 열반에 이를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 중간에 대오각성을 하게 되면 윤회의 사슬에서 벗어나게 되고 극락왕생하게 되는 것입니다.
 
정말 우리 인간의 문제가 깨달음에 의해 해결이 되나요? “우리가 겪는 모든 악과 고통은 다 허상이라는 것만 깨달으면” 인간은 구원을 받게 되는 것입니까?
 
세 번째로 물질주의와 성공주의를 포함하고 있는 자연주의를 한번 생각해 보지요. 자연주의는 무엇을 자연주의라고 한다고 했습니까? 초월적인 영역과 초월적인 존재를 인정하지 않고 모든 것의 근본은 물질이라고 보는 사람들이라고 했습니다.
 
이 눈에 보이는 물질은 영원 전부터 어떠한 모양으로든 존재해 왔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물질과 역사는 점점 더 발전하고 진화해서 마침내 유토피아가 이루어 질 것이라고 기대하는 것이 자연주의입니다. 거기에 어떤 초월적인 존재가 개입해서 도움을 준다거나 초월적인 존재가 역사를 운행한다거나 하는 것을 어리석은 자들의 맹신이라고 비웃는 사람들입니다.
 
그 자연주의가 본 인간의 문제가 무엇입니까? 인간은 아직 충분히 교육받지 못했고 충분히 발전하지 못했기 때문에 아직 평화를 못 누린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더 많이 교육하고 더 많이 훈련시키고 더 많이 노력하면 분명 유토피아는 온다는 것입니다. 인간이 당면한 고통의 문제는 인간의 힘으로 해결할 수 있다는 것이지요.
그 자연주의 시대정신의 정점에 있는 아주 중요한 이데올로기가 바로 공산주의입니다.
 
19세기 중반에 독일의 칼 마르크스에 의해 주창이 되었던 이데올로기입니다.
여러분, 공산주의가 무엇인지 아십니까? 언뜻 생각하기에 공산주의는 물질주의와는 아주 반대되는 이념인 것처럼 보이지만 공산주의야말로 물질주의, 자연주의의 정점에 있는 이데올로기입니다.
 
칼 마르크스는 유대인입니다. 그리고 독일 국교회 목사님의 가정에서 태어난 사람입니다. 그의 할아버지가 루터 교 목사님이셨고 아버지도 독실한 그리스도인이었습니다. 칼 마르크스도 신학을 공부했고 신학생 시절에 그가 쓴 요한복음 15장의 포도나무 비유에 관한 논문은 유명합니다. 그는 천재적인 철학자였고 사회학자였습니다. 헤겔과 루드비히 포이에르 바하에게 가장 큰 영향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대학 때는 청년 헤겔학파들의 모임인 “박사클럽”에서 활동하기도 했습니다.
여러분도 아시다시피 헤겔의 변증법은 정반합의 개념에 대해 이야기를 합니다.
정반합이라는 것은 어떠한 이론이 나오면(these) 언젠가 그에 대한 반대 이론이(anti these) 나오게 되고 그리고 양쪽을 적절히 수용하는 합의(syn these)결과가 도출된다는 이론을 말합니다. 그러니까 “합”은 “정반”의 결점을 털어 내고 장점을 통합하는 것입니다.
 
헤겔의 역사관은 바로 이 정반합 역사관입니다.  어떠한 시대정신이 오랫동안 세상에 존재하다보면 반드시 그 시대정신에 반하는 시대정신이 나오게 되고 그 두 시대정신의 장점을 모두 품고 있는 새로운 시대정신으로의 발전, 이것이 반복되는 것이 바로 역사라고 보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인간의 역사는 반드시 발전할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우리가 어려운 말로 변증법이라고 하지요. 칼 마르크스는 헤겔로부터 이 변증법을 배웠습니다.
 
그리고 루드비히 포이엘 바하로부터는 유물론을 배웠습니다. 포이엘 바하는 인간의 존재를 인간이 먹는 것으로 정의했던 사람입니다. 그가 남긴 유명한 말이 있지요? “Human is what he eats" 잘 본거죠. 타락한 인간들이 무엇을 추구하면서 사는지 정확하게 인식한 사람입니다.
포이엘 바하가 지적한 것처럼 우리 타락한 인간은 전부 자기 먹을 것을 위해서 존재하는 것처럼 삽니다.
 
우리가 일상에서 쓰는 언어들을 잘 생각해 보세요. 어른을 만나면 하는 인사가 뭡니까?
“식사 하셨어요?” “친구들에게 흔히 하는 인사가 뭐죠?” “언제 밥 한번 먹자”
자기의 경제 상태나 상황을 남에게 말할 때는 “먹고 살만 합니다” 그러죠?
타락한 인간은 이렇게 전부 먹는 것, 자기 배에만 관심을 가지고 있습니다.
포이엘 바하도 인간에게 가장 중요한 것이 물질, 먹는 것이라고 본 것입니다. 아주 극단적인  물질주의자였습니다.
 
그리고 포이엘 바하는 종교를 정의하기를 “종교는 한계 상황에 봉착한 인간이 그 한계 상황을 극복하기 위해서 인위적으로 만들어 낸 것”이라고 정의를 했습니다.
 
극단적인 물질주의자였던 포이엘 바하는 생각하기를 한계상황에 봉착한 인간이 그 문제를 풀기 위해서는 많은 물질을 생산해 내야 하는데 종교에 심취한 인간들은 자기들이 열심히 노력해서 많은 물질을 창출함으로 그 한계 상황을 극복하려 하지 않고 전부 신에게 매달려 자기들이 할 일을 게을리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종교는 민중의 악이다” “종교는 아편이다”라고 서슴없이 외쳤습니다.
 
철저한 물질주의자인 포이엘 바하는 초월적인 영역과 초월적인 존재에게 나약하게 매달리는 인간들이 어리석고 무지하게 보였던 것입니다.
이렇게 헤겔에게서는 변증법을 그리고 루드비히 포이엘 바하에게서는 유물론을 배운 칼 마르크스는 새로운 변증법적 유물론인 “공산주의”를 만들어낸 것입니다.
 
마르크스는 헤겔의 변증법, 정반합에 등장하는 시대정신 대신에 “경제“와 그로 말미암아 파생되는 ”계급“을 집어넣었습니다. 그래서 인류의 역사는 경제와 계급의 정반합에 의해 발전해 간다는 주장을 폈습니다.
마르크스의 역사발전 5단계를 보면 역사가 이렇게 발전될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원시 공산사회, 고대 노예사회, 중세 봉건사회, 근대 민주사회, 미래(또는 현대)공산사회
원시 시대에는 계급도 없고 경제적 불균형도 없는 공산사회였다는 것입니다. 공동으로 생산하고 공동으로 분배가 되는 사회였다는 것이죠. 그러다가 직업이 분화가 되고 산업이 발달하면서 노동을 하지 않고 노동자들을 다스리고 착취하는 어떤 무리가 생겨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마르크스는 그것을 계급이라고 불렀습니다. 그렇게 계급이 생기게 되면 하부 계급에 있는 사람들의 불만이 점점 커지게 되고 그들의 불만이 폭발하게 되어 혁명이 일어나게 되고 다시 그들이 지배계급이 되고 그리고 또 다른 계급이 지배계급으로 등장하는 계급의 정반합을 역사의 발전 과정이라고 본 것입니다. 그래서 마르크스는 역사의 진행과정을 “계급투쟁”이라고 말한 것입니다.
 
마르크스가 잘 본 것입니다. 잘 생각해 보세요. 프롤레타리아와 부르주아의 계급이 나뉘어져 있는 계급사회를 우리가 자본주의 사회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그 자본주의의 약점은 점점 부가 소수의 계급에게 편중이 되고 노동자들은 점점 힘을 잃게 되는 것입니다. “빈익빈 부익부“가 자본주의의 대표적인 특징입니다. 이게 마르크스가 본 자본주의에 대한 평가였습니다. 정확하죠. 한국을 비롯한 전 세계 자본주의 국가들이 점점 그렇게 확연하게 변화하고 있습니다. 상위 1%의 계급을 위해 나머지 99%가 죽을힘을 다해 노력 봉사하는 모양으로 변해가고 있습니다. 그렇게 되면 프롤레타리아 계급은 점점 증가하게 되지요? 그로 말미암아 생산을 담당하는 사람은 점점 늘게 되는데 부가 한 쪽으로 편중이 되다보면 어떻게 됩니까? 살 사람이 별로 없으니까 재화의 수요가 줄어들겠죠? 상품의 수요가 줄어들면 당연히 실업이 늘어나게 됩니다. 밥을 굶는 자식들을 위해 한 조각 빵을 훔친 사람들이 감옥으로 가고 있는 동안에 한 쪽에서는 수 억 원 짜리 물방울 다이아가 매진이 되는 그런 현상이 실제로 벌어지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힘이 없는 프롤레타리아 계급이 그 빈곤의 악순환을 깰 수 있는 방법이 무엇이겠습니까? 아무리 열심히 일을 해도 그 성과의 대부분은 자기 위의 계급인 부르주아가 가져갑니다. 그래서 빈부의 차가 점점 심화됩니다. 그 빈곤의 악순환을 무엇으로 깰 수 있지요? ”혁명“입니다. 혁명으로 프롤레타리아가 부르주아를 밟고 일어서는 것입니다. 그 프롤레타리아는 숫자가 많기 때문에 그 프롤레타리아가 혁명에 성공을 해서 그들이 지배계급이 되면 부가 공평하게 분배가 되고 이 땅은 다툼과 시기와 경쟁이 없는 유토피아가 될 것이라는 것이 마르크스의 이론입니다.
 
그래서 마르크스가 엥겔스와 함께 공동으로 집필한 ”공산당 선언“의 마지막에는 ”만국의 노동자들이여, 단결하라“로 끝을 맺는 것입니다. 단결해서 뭐 하라는 거죠? 혁명을 일으키라는 것입니다. 6.25를 전후해서 공산당들이 왜 지주들을 그렇게 죽창으로 처참하게 죽였는지 아시겠지요?
 
칼 마르크스는 공산주의 혁명을 이렇게 예찬합니다.
“혁명을 통해 세상이 바뀌면 생산을 할 수 있는 기술은 이미 충분히 발달해 있어서 생산물은 계속해서 많아지고 또 부를 손에 쥐고 있던 일부 소수의 계급이 없어지게 되므로 모든 사람이 공평하고 행복하게 살게 되는 그런 사회, 경쟁과 투쟁과 악재가 없는 그러한 지상 천국이 오게 될 것이다“ 마르크스는 그러한 공산사회에서 살게 될 인간을 ”새로운 사회주의 적 인간“이라고 불렀습니다. 경쟁과 시기와 다툼을 버리고 나를 죽여 남을 살리는, 남을 위해 사는 그러한 인간군이 생겨나게 될 것이라는 것이죠. 그 새로운 사회주의 적 인간이 마치 그리스도인을 말하는 것 같지 않습니까? 그리고 실제로 프랑스 대혁명의 결과로 프랑스의 프롤레타리아 계급이 혁명에 성공하고 지배계급으로 자리 매김을 하게 되는 것을 보게 됩니다. 그 프랑스 대혁명의 성공으로 마르크스는 자신의 공산주의 이론에 더욱 더 확신을 갖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공산주의에 전 유럽과 아시아, 아메리카, 전 세계의 지식인들이 빠져들게 되었습니다. 우리나라에서도 일제 말기부터 조선의 지식인이라고 하는 사람들은 거의 모두 이 공산주의에 심취해 있었습니다. 이론상으로는 너무 좋으니까요. 이 이론처럼 인간의 존엄성을 강조하는 이론이 어디 있습니까? 그러니까 거의 대부분의 가난한 지식인들이 거기에 열광한 것입니다.
마르크스의 장례식에서 엥겔스가 읽었던 조사가 그것을 입증해 줍니다.
 
“유럽의 정부들은 절대 왕정과 공화정을 막론하고 그를 추방하였고 부르주아들은 보수파와 급진파를 막론하고 날조된 비방을 그이게 가했습니다. 그는 그 모든 것을 거미줄처럼 옆으로 밀쳐 버리고 무시해 버렸으며 오직 어쩔 수 없는 경우에나 대답했습니다. 그리고 그는 죽어서 시베리아의 광산 노동자들로부터 유럽 전체와 아메리카 대륙을 넘어 캘리포니아에 이르는 수백만 혁명 동지들의 존경과 사랑과 애도를 받고 있습니다. 이제 나는 감히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그에게 많은 적대자들이 있었는지는 모르지만 개인적인 적은 단 한 사람도 없었습니다.” 실제로 칼 마르크스는 방법을 잘 못 선택했던 사람이지만 그의 인간의 존엄성에 대한 열정은 누구도 따라 갈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마르크스는 그렇게 인간의 문제를 가난과 물질적인 궁핍과 계급의 갈등으로 보았습니다.
그것만 없어지면 인간은 그들이 갖고 있는 탐욕과 경쟁과 갈등의 문제로부터 구원을 받게 되고 행복하게 될 것이란 것입니다. 정말 그렇습니까? 마르크스가 놓친 게 뭡니까? 인간은 죄인이라는 것입니다. 죄인들은 절대 자기를 죽여 남을 위해 살 수 없습니다. 계급투쟁으로 옛 계급을 몰아내면 모든 사람이 평등한 사회가 되는 것이 아니라 또 다른 상위 계급이 나타납니다. 김일성 김정일을 비롯한 공산당 간부들이 그들 아닙니까? 그들이 정말 새로운 사회주의 적 인간이 되어서 자기를 희생해서 남을 살리는 사람들인가요?
 
그리고 또 한 가지 인간의 문제가 정말 돈과 물질의 부족과 계급의 갈등에서 오는 것입니까?
만일 그 것이 사실이라면 공산주의도 하나의 구원의 방법일 수 있지요? 예수가 왜 필요합니까? 돈만 충분히 주고 공평한 사회만 만들어 주면 구원이 되는데...
 
이 미국의 수많은 부자들이 정말 행복합니까? 대학 때 제 친구들 중에 그런 친구들이 많았습니다. 돈이 주체할 수 없을 만큼 많아요. 부모가 집 안 곳곳에 엄청난 현금을 감춰 두어서 자기가 필요할 때마다 빼다 쓰는데도 부모가 얼마가 빠졌는지 모를 정도로 엄청난 부자들이 여럿 있었습니다. 물론 환경도 좋았지요. 그런데 그 아이들 중 한 명은 자살했고요. 두 명이 마약 사범으로 감옥에 갔다 왔습니다. 인간은 그런 것으로 행복해지지 않습니다. 물질적인 필요나 명예가 채워진다고 해서 행복해지지 않습니다.
 
우리 한국의 역대 대통령들 보세요. 힘을 추구하는 사람들 중에 가장 성공했다고 하는 사람들이 대통령 아닙니까? 그 분들 지금 다 뭐하고 사세요? 혹시 돌 맞아 죽을까봐 지금도 경호원들 데리고 다니면서 삽니다. 가고 싶은 곳을 마음대로 갑니까? 남들 눈 때문에 사고 싶은 것을 마음대로 삽니까? 그 자식들 다 어떻게 되었습니까?
인간은 환경을 윤택하게 바꾸어 준다고 해서 절대 행복해지지 않습니다.
왜 한진, 두산, 현대, 쌍용 이런 재벌 그룹 자식들이 서로 형제간에 법정투쟁까지 하면서 멱살잡이를 하고 있습니까? 인간은 그렇게 좋은 환경을 만들어 준다고 해서 행복해지지 않다는 것을 역사가 보여주는 것입니다.
 
여러분 천국 가고 싶으시죠? 왜 가고 싶으세요? 만일 여러분이 천국 가시고 싶은 이유가 “거기는 나에게 너무나 좋은 집과 환경과 거처가 제공 될 곳이기 때문에 가고 싶다“라고 생각하고 계시다면 그건 너무나 가난한 소망입니다. 그건 자연주의자들이나 공산주의자들의 관심과 조금도 다르지 않은 것입니다. 여러분 좋은 차 좋은 집 가져 보신 적 있으시지요? 아니면 정말 갖고 싶었던 것을 가져 보신 경험이 있으실 거예요. 그 기쁨과 행복이 얼마나 오래가던가요? 물질과 재화는 우리에게 궁극적인 만족을 가져다주지 못합니다. 만일 천국이 그렇게 금으로 은으로 만들어진 좋은 환경을 제공하는 곳이기만 한 것이라면 우리는 거기서도 이내 싫증이 날겁니다. 싫증이 나는 곳이 어떻게 영원하겠습니까?
 
천국은 하나님이 계신 곳이지 내가 원하는 환경이 제공되고 내가 원하는 모든 것이 채워지는 그런 곳이 아닙니다. 공산주의의 구원관은 그렇게 물질적인 것입니다.
 
과학문명주의는 어떻습니까? 그들은 인간의 문제를 풀 수 있는 길은 과학 문명의 발달  뿐이라고 믿는 자들입니다. 과학문명이 더욱 더 발달해서  더 많은 재화의 생산이 일어나게 되고 인간의 질병이 극복이 되면 인간은 그 고통의 굴레에서 해방될 것이라고 믿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리스도인인 여러분의 구원관은 무엇입니까?
what is our problem? 우리의 문제가 뭡니까?
 
우리는 죄인이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죄로 말미암아 타락을 하게 되어서 하나님과의 관계가 단절이 된 것입니다. 그게 우리의 문제입니다. 우리 인간은 영적인 것과 육적인 것이 combine되어 지어진 존재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육적인 양식도 먹어야 하지만 영적인 양식도 먹어야 합니다. 그 영적인 양식은 하나님으로부터만 주어집니다. 그런데 그 양식의 공급 통로가 죄로 인해 막혀 버린 것입니다. 그게 문제입니다. 그게 뚫려야 합니다. 그 관계가 회복되는 것을 우리는 구원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기독교가 제시하는 인간이 당면한 문제의 유일한 해결책입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예의 회복을 목표로 삼고 사는 사람들도 아니고, 인간의 모든 고통은 허상이며 가짜라는 것을 깨닫는 것을 목표로 삼고 사는 사람들도 아니고, 풍족한 물질을 목표로 삼고 사는 사람들도 아닙니다. 그럼 우리는 무엇을 목표로 사는 사람들입니까?
하나님과 화해 한 자로 영원히 그 분과 함께 살게 되는 초월 적인 저 하나님 나라를 목표로 삼고 사는 사람들입니다. 우리가 힘과 물질을 목표로 삼고 사는 한, 절대 우리에게 안식과 평안은 주어지지 않습니다.
우리가 살펴 본 것처럼 세상의 종교와 시대정신과 이데올로기가 힘과 권력과 자기 자랑을 좇아 사는 것이라면 우리는 그와 정 반대의 시대정신으로 살아야 하는 사람들인 것입니다.
 
예전에는 대구 경북 소위 TK가 힘을 쓰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그 때는 TV연속극에도 호남 사투리가 안 나왔습니다. 그 때는 호남 사람들이 마음대로 고향을 밝히는 것도 힘들 정도로 지연이 힘을 썼던 때였습니다. 그런데 세상이 바뀌었습니다. 정권이 바뀐 뒤에는 호남 사람들이 힘을 쓰는 시대가 되었죠.
 
제가 미국에 오기 전에 국민회의라는 정당에서 잠깐 일을 했었습니다. 청년특위라는 곳에서 일을 했습니다. 그 청년특위에 부산 출신인 친구가 하나 있었습니다. 나중에 대선이 끝나고 청와대 비서실로 들어간 친구인데, 당시 청년특위를 관할하고 있던 분이 이름만대면 여러분도 다 아시는 당의 실세였습니다.
 
그 분이 첫 회의를 주관하시면서 돌아가면서 특위 위원들의 고향을 물어보셨습니다. 제 옆에 있던 그 친구는 분명 고향이 부산이었는데 “자네 고향이 어딘가?” 그러니까 “저 목포 옆입니다” 그러는 거예요. 그걸 물어 본 분이 고향이 목표였거든요. 그러니까 그 분이 “그래 목포 옆 어디야?” 그러니까 “목포에서 배타고 3시간 거리입니다” “그래 거기가 어디지?” 그러니까 머뭇머뭇 거리면서 대답을 못하더라고요. 그냥 “부산“그러면 되지 왜 목포 옆이라고 그래요? ”목포에서 배타고 세 시간” 어떻게 해서든지 그 힘에 붙어보려고 하는 것이지요.
 
힘을 좇아 사는 사람들은 그렇게 피곤해요. 잘 들여다보면 참 우스워요.
정치인들 보세요. 무슨 정치 철학이나 소신 같은 것은 찾아볼 수가 없어요. 철이 바뀔 때마다 힘 있는 쪽에 붙는 거예요. 여러분도 그런 삶을 사시겠습니까?
우리는 어떤 삶을 살아야 하지요? 무엇을 하면서 살아야 합니까?
내생을 준비하며 살아야 하는 것이 그리스도인들이라고 했는데 우리는 구체적으로 무엇을 어떻게 준비해야 합니까?
 
(딤전4:6-8) 6    그대가 이런 교훈으로  형제자매를 깨우치면, 그대는, 믿음의 말씀과 그대가 지금까지 좇아온 좋은 교훈으로 양육을 받아서, 그리스도 예수의 좋은  일꾼(또는 '집사')이 될 것입니다.
7    망령되고 허탄한 신화를 물리치십시오. 경건함에 이르도록 자기를 훈련하십시오.
8    육체의 운동은 약간의 유익이 있으나, 경건 훈련은 모든 면에 유익하니, 이 세상과 장차 올 세상의 생명을 약속해 줍니다.
 
(딤전6:6-10) 6    자족할 줄 아는 사람에게는, 경건이 큰 이득을 줍니다
7    우리는 아무것도 세상에 가지고 오지 않았으니, 아무것도 가지고 떠나갈 수  없습니다(다른 고대 사본들에는 '없다는 것도 확실합니다').
8    우리는, 먹을 것과 입을 것이 있으면, 그것으로 만족해야 합니다.
9    그러나 부자가 되기를 원하는 사람은, 유혹과 올무와 여러 가지 어리석고도 해로운 욕심에 떨어집니다. 이런 것들은 사람을 파멸과 멸망에 빠지게 합니다.
10    돈을 사랑하는 것이 모든 악의 뿌리입니다. 돈을 좇다가, 믿음에서 떠나 헤매기도 하고, 많은 고통을 겪기도 한 사람이 더러 있습니다.
 
(딛2:11-14) 11    모든 사람에게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가 나타났습니다.( 또는 '모든 사람을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나타났습니다')
12    그 은총은 우리를 교육하여, 불경건함과 속된 정욕을 버리고, 지금 이 세상에서 신중하고 의롭고 경건하게 살게 합니다.
13    또 그것은 우리로 하여금 복된  소망을 갖게 합니다. 곧 위대하신 하나님과 우리의 구주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이 나타나기를 기다리게 합니다.  14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위하여 자기 몸을 내주셨습니다. 그것은, 우리를 모든 불법에서 속량하시고 깨끗하게 하셔서, 선한 일에 열심을 내는 당신의 백성이 되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벧후2:9) 주께서는 경건한 사람을 시련에서 건져 내시고, 불의한 사람을 벌하셔서, 심판 날까지 가두어 두실 것입니다.
(벧후3:10-13) 10    그러나 주님의 날은 도둑 같이 올 것입니다. 그 날에 하늘은 요란한 소리를 내면서 사라지고, 원소들은 불에 녹아 버리고, 땅과 그 안에 있는 모든  일은*(다른 고대 사본들에는 '것은 타 버릴') 드러날 것입니다.
11    이렇게 모든 것이 녹아 버릴 터인데, 여러분은 어떠한 사람이 되어야 하겠습니까? 여러분은 거룩한 행실과 경건한 생활 가운데서,
12    하나님의 날이 오기를 기다리고, 그 날을 앞당기도록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 날에 하늘은 불타서 없어지고, 원소들은 타서 녹아 버릴 것입니다.
13    그러나 우리는 그의 약속을 따라 새 하늘과 새 땅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거기에는 정의가 깃들어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약속하신 새 하늘과 새 땅을 바라보며 하루하루 경건을 연습하며 살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경건”이라고 번역이 된 “유세베이야”는 “거룩”입니다.
우리는 세상 사람들처럼 힘을 좇고 명예와 권력을 좇아 그 것으로 나의 만족을 삼는 사람들이 아니라 거룩함을 연습하고 훈련하며 새 나라를 준비하며 살아야 하는 사람들입니다. 거기에 진정한 평화와 안식이 있다는 것을 맛보며 또 세상에 보여주며 살아야 하는 사람들인 것입니다.
그러나 작금의 교회는 어떻습니까? 신앙생활마저도 자기의 이익을 위해 합니다.
남들에게 나를 자랑하고 싶고, 인정받고 싶은 마음에 신앙생활을 한다면 그것은 자연주의자들이나 성공주의자, 물질주의자, 공산주의자들과 조금도 다름없는 생활입니다.
 
(딤전6:5) 그리고 마음이 썩고 진리를 잃어서, 경건을 이득의 수단으로 생각하는 사람 사이에 끊임없는 알력이 생깁니다(다른 고대 사본들에는 '그런 사람들과는 상종을 하지 말아야 합니다'가 더 있음)
 
자기의 거룩조차도 자기 자랑과 자기 이익을 위해 이용한다는 것입니다. 그게 죄인입니다.
여러분, 이제 2006년 새해가 밝아옵니다. 하나님께서 왜 이렇게 새달 새해, 새 시간을 나누어 주셨을까요? 어차피 이날이 저 날 다 나은 것이 없고 다 같은 날인데 왜 이렇게 금을 그어주십니까?  우리에게 자꾸 새롭게 시작할 수 있는 기회를 주시기 위해서입니다.
 
우리 지난 2005년 송구영신 예배 때에 “하나님이 주시는 새 도화지”에 대해 말씀을 나누었었지요? 한 해 동안 그 새 도화지에 어떤 그림을 그리셨습니까?
한번 마음속에 펴 보세요. 대부분 망치셨죠? 구겨 버리세요. 그리고 다시 새 도화지를 받아서 시작하십시오. 그리고 그 새 도화지에는 이런 그림을 그리세요. 우리 함께 유다서를 큰 목소리로 읽고 마치죠.
 
(유1:1-25) 1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요 야고보의 동생인 나 유다는,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 곧 하나님 아버지께서 사랑하시고(다른 고대 사본들에는 '거룩하게 해주시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지켜 주시는 이들에게, 이 편지를 씁니다.
2    자비와 평화와 사랑이 여러분에게 가득하기를 빕니다.
3    사랑하는 여러분, 나는 여러분에게 우리가 함께 나눈 구원에 관해서 편지를 써 보내려고, 여러 가지로 애써 준비를 해 왔는데 이제 여러분에게, 간곡한 권고의 편지를 쓸 필요가 생겼습니다. 그것은 성도들에게 한 번 결정적으로 전해진 그 믿음을 지키기 위하여 여러분이 힘써 싸우라는 것입니다.
4    어떤 침입자들이 여러분 가운데 몰래 들어왔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옛날부터 정죄를 받기로 미리 기록된 자들입니다. 그들은 경건하지 못한 자들로서, 우리 하나님의 은혜를 남용해서 방종한 생활을 하고, 오직 한 분이신 통치자요 우리의 주님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부인하는 자들입니다.
5    여러분이 이미 다 알겠지만, 내가 다시 여러분의 기억을 일깨워 드리려는 것은 이것입니다.  주께서는 백성을 이집트에서 한 번 결정적으로 구원해 내시고서, 그 다음에 믿지 않는 자들을 멸하셨습니다.
6    또 자기네가 통치하는 영역에 머무르지 않고 자기들의 거처를 떠난 천사들을, 그 큰 날의 심판에 붙이시려고, 영원한 사슬로 매어서 어둠에 가두어 두셨습니다.
7    그리고 소돔과 고모라와 그 주위의 성들도, 그들과 마찬가지로 음란함에 빠져서 다른 육체를 좇았으므로, 영원한 불의 형벌을 받음으로써, 사람들에게 본보기가 되었습니다.
8    이와 마찬가지로, 이 사람들도 몽상에 빠져서 육체를 더럽히며, 권위를 업신여기며,  영광스러운 존재(또는 '천사들을')들을 모독하고 있습니다.
9    천사장 미가엘은 모세의 시체를 놓고 악마와 다투면서 논쟁을 할 때에, 차마 모욕적인 말로 단죄하지 못하고 '주께서 너를 꾸짖으시기를 바란다'고만 말하였습니다.
10    그런데 이 사람들은 무엇이든지, 자기들이 깨닫지 못하는 것은 욕합니다. 그들은 이성이 없는 짐승과 같이, 무엇이든지 본능으로만 알고, 바로 그 일로 멸망합니다.
11    그들에게 화가 있습니다. 그들은 가인의 길을 걸었으며, 삯을 바라서 발람의 그릇된 길에 빠져들었으며, 고라의 반역을 따르다가 망하였습니다.
12    이 사람들은 자기들만을 생각하면서, 염치없이 먹어 대므로, 여러분의 사랑의 식탁을 망치는 암초입니다. 그들은 바람에 밀려다니는 구름 곧 비를 내리지 않는 구름이요, 가을이 되어도 열매 하나도 맺음이 없이 죽고 또 죽어서 뿌리째 뽑힌 나무요,
13    자기들의 수치를 거품처럼 뿜어올리는 거친 바다 물결이요, 길을 잃은 별들입니다. 짙은 어둠이 영원히 그들에게 마련되어 있습니다.
14    이런 사람들을 두고 아담의 칠대 손 에녹은 이렇게 예언하였습니다.  "보아라, 주께서 수만 명이나 되는 거룩한 천사들을 거느리고 오셨으니,
15    이것은 모든 사람을 심판하시고, 모든 불경건한 자들이 저지른 온갖 불경건한 행실과, 또 불경건한 죄인들이 주님을 거슬러 말한 모든 거친 말을 들추어내서, 그들을 정죄하시려고 하는 것이다."
16    이들은 불만에 쌓여서 불평을 늘어놓는 사람들이요, 자기들의 욕심대로 사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입으로 허풍을 떨다가도, 이익을 챙기기 위해서는 남에게 아첨을 합니다.
17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들이 예고한 그 말을 기억하십시오.
18    그들은 여러분에게 말하기를  "마지막 때에는 여러분을 조롱하는 자들이 나타나서, 자기들의 경건하지 못한 욕정을 따라 살 것입니다" 하였습니다.
19    이 사람들은 분열을 일으키는 자들이며, 성령을 받지 않고 본능대로 사는 자들입니다.
20    그러나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은 가장 거룩한 여러분의 믿음을 터로 삼아서, 스스로를 세우고, 성령으로 기도하십시오.
21    하나님의 사랑 안에 머무르면서 스스로를 지키고, 영원한 생명에 이르게 하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자비를 기다리십시오.
22    의심을 품는 사람들을 동정해 주고,
23    불구덩이에 빠진 사람들을 끌어내어 구원해 주십시오. 또 본능적인 욕정에 빠진 사람들에 대해서는 욕정으로 더럽혀진 그들의 속옷까지도 미워하되, 그들에게는 조심스럽게 자비를 베푸십시오.
24    여러분을 넘어지지 않게 지켜 주시고, 흠이 없는 사람으로 자기의 영광 앞에 기쁘게 나서게 하실 능력을 가지신 분,
25    곧 우리의 구주이시고 오직 한 분이신 하나님께, 영광과 위엄과 주권과 권세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영원 전에서부터 이제와 영원까지 있기를 빕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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