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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ome >  칼럼/책 >  그런 기독교는 없습니다
* 본 설교는 2004년도 개척 첫해에 기초교리 공부 내용입니다
 
작성일 : 13-04-15 20:55
   14. 기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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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글쓴이 : njsmyrna
    조회 : 3,449  


(마12:38-39)
38.그 때에 율법학자들과 바리새파 사람들 가운데 몇 사람이 예수께 대답하여 말하였다. "선생님, 우리는 선생님에게서  표적을(12:38, 39의 '표적'은 예수의 신성을 보여주기 위한 상징으로서의 기적) 보았으면 합니다.”
39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악하고 음란한 세대가 표적을 요구하지만, 이 세대는 예언자 요나의 표적 밖에는 아무 표적도 받지 못할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기독교를 체험의 종교라고 합니다. 어떤 면에서 맞는 소리입니다.
그러나 그 체험은 신비적인 것이나 기적적인 것의 체험이나 자기의 소원이 척척 이루어졌던 것에 대한 체험이 아닙니다. 우리의 신앙을 자라게 하는 기독교의 체험은 환난과 고난을 겪으면서 "이런 환난과 고난과 고통 속에서도 어떻게 내 마음이 이렇게 평안한가? 어떻게 나에게 여전히 소망이 있는가?"에 대한 체험입니다.
 
(빌4:12-13) 12    나는 비천하게 살 줄도 알고, 풍족하게 살 줄도 압니다. 배부르거나 굶주리거나, 풍족하거나 궁핍하거나, 그 어떤 경우에도 적응할 수 있는 비결을 배웠습니다.
13    나에게 능력을 주시는 분 안에서, 나는 모든 것을 할 수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집에다가 표구해서 걸어놓는 구절입니다. 이 말씀은 바울이 감옥에서 쓴 빌립보서에 들어 있는 것이라는 것을 잊으시면 안 됩니다. 하나님께서 능력을 주셔서 내가 감옥 같은 고난과 배고픔과 비천도 이겨낼 수 있는 자가 되었다는 것이지, 자기가 원하는 것은 뭐든지 다 이룰 수 있다는 것이 아닙니다. 기독교의 체험은 바로 그런 체험을 말하는 것입니다. 지난주에도 말씀을 드렸지만 신앙생활은 기분이나 느낌으로 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정확한 교리의 이해가 먼저 선행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믿음은 오직 들음에서만 말미암는 것이라고 주님이 말씀하지 않으셨습니까? 듣고 읽고 배워서 그것이 이해가 되면 그 이해가 가슴으로 내려오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혹시 조선소에 가보신 적 있으십니까? 조선소에 가면 배를 만드는 철판들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습니다. 그 철판을 보고 또 그 철판으로 만들어지는 엄청난 크기의 배를 보면 그 배가 물에 뜬다는 것을 상상할 수가 없습니다. 그것은 느낌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물리 시간에 부력이라는 것을 배웠습니다. 물속의 물체는 그것이 밀어낸 물의 양만큼 가벼워집니다. p=p0-pgh 이 아르키메데스의 원리에 대입해 보면 그 엄청난 크기의 배가 뜬다는 것을 확실하게 계산으로 알 수 있습니다. 만일 인류가 느낌으로 그들의 인생을 경륜해 왔다면 비행기나 배나 자동차 같은 것은 결코 생길 수 없었을 것입니다.
 
신앙생활도 마찬가지입니다. 느낌이나 기분으로 하는 신앙은 절대 진보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정확한 진리에 대한 이해가 반드시 선행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독교 신앙을 신비적인 체험이나 기복적이며 주술적으로 이해를 하고 정리를 하고 있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그들이 한결 같이 주장하는 것이 “예수님도 기적을 일으켰고 사도들도 기적을 일으켰다. 오늘날도 하나님은 기적을 통해 일을 하신다.”
“하나님은 우리가 행복하길 원하시기 때문에 믿음만 있으면, 그리고 하나님께 헌신하면 하나님은 병도 물리쳐 주시고 물질도 풍성하게 채워 주신다.“ 그래서 사람들을 쓰러뜨리고 병을 낫게 해 주고 심지어 죽은 사람도 살릴 수 있다고 주장합니다. 분명 하나님은 어제나 오늘이나 동일하신 분이십니다. 그 전지전능하신 능력의 하나님께서 오늘도 죽은 자를 살리실 수 있음을 우리는 부인 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우리가 행복하기를 원하시는 것도 사실입니다. 그러나 전에도 살펴 본 것처럼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고자 하는 복은 우리의 개념과는 아주 다른 복입니다. 이 땅의 것이 아닌 하늘의 것으로 즐거워하는 복입니다. 그리고 기적은 절대 인간을 변화시킬 수 없음도 지난주에 함께 공부해 보았습니다. 그러면 성경에 기록되어있는 기적은 우리에게 어떤 메시지를 주는 것일까? 여러분이 그 기적의 의미들을 잘 파악하고 계시면 그 엉터리 같은 신비주의나 기복 주의에 빠지지 않으실 수 있으실 것입니다. 사도들이 행한 기적의 내용과 의미에 대해서는 전에 설명을 해드렸으니까 오늘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행하신 기적의 의미에 대해서 공부를 해 보지요.
 
결론적으로 말씀을 드리면 예수님이 행하신 이적은 예수님의 신적 기원과 예수님의 하실 일과 예수 님 자신을 설명하는 sign이라는 것입니다.
 
(요5:36) 그러나 나에게는 요한의 증언보다 더 큰 증언이 있다. 아버지께서 나에게 완성하라고 내려 주신 일들, 곧 내가 지금 하고 있는 바로 이 일들이,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셨다는 것을 증언하여 준다.
 
먼저 요한복음에 나오는 예수님의 이적들을 간단하게 살펴보겠습니다. 요한복음에는 예수님께서 행하신 이적들 중에 딱 일곱 개가 등장합니다. 요한은 예수님이 행하셨던 그 많은 일들을 간추려서 어떤 목적을 가지고 요한 음을 기록했습니다. 어떤 목적입니까?
 
(요20:30-31)
30    예수께서는 이 책에 기록하지 않은 다른 많은  표적도(예수의 신성을 보여주기 위한 상징으로서의 기적) 제자들 앞에서 행하셨다. 31    그런데 여기에 이것이나마 기록한 목적은, 여러분으로 하여금, 예수가  그리스도요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게 하고, 또 그렇게 믿어서 그의 이름으로 생명을 얻게 하려는 것이다.
 
그러니까 예수님의 행하신 이적들은 하나님의 백성들로 하여금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게 하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게 하기 위해 행하신 것이지 우리의 문제 해결을 위해서 이적을 일으켜 주신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우리의 당면한 문제 해결을 위해서 예수께서 기적을 행하신 것이라면 왜 일일이 찾아다니시면서 병을 고쳐 주시겠습니까? 한번에 “병 걸린 사람들 다 나아라.” 그러면 전부 나을 텐데요.
 
우리는 그런 체험이 없어도 언제든지 예수님의 이름과 그 분의 하신 일로 인해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럼 차근차근 한번 보지요. 요한복음에 가장 처음 나오는 기적이 뭡니까?
가나의 혼인 잔치입니다. 물로 포도주를 만드신 사건이지요? 거기에 대해서는 여러 번 설교를 했습니다. 비어있던 여섯 항아리에 물을 가득 채우시고 그 물을 포도주로 만드신 사건은 위선적인 행위만 풍성했던 유대인들의 모습을 보여줌과 동시에 잔치가 진짜 잔치가 되기 위해서는 반드시 예수 그리스도의 피가 필요하다는 것을 보여주는 이적이라고 했지요? 항아리는 유대인들이 정결 예식을 행할 때 몸을 닦는 물을 담는 항아리입니다. 그것이 비어있었다는 것은 그들이 형식적인 정결 예식을 행하고 있었다는 것이지요?
그 이적 뒤에 예수님께서 그 이적의 본질을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요2:11) 예수께서 이 첫 번  표적을 갈릴리 가나에서 행하여서 자기의 영광을 드러내셨다. 그래서 그의 제자들은 그를 믿었다.
 
예수님께서 이적을 행하시고 그것이 예수님의 영광을 나타내신 것이라고 하십니다. 그 말은 그 이적은 단순히 세상의 잔치를 흥겹게 해 주시기 위한 것이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그들에게 부족한 포도주를 채우시는 데에 목적이 있으셨던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말미암아 참 기쁨과 풍성이 오게 될 것을 sign으로 주신 것입니다.
 
두 번째 이적은 왕의 신하의 아들을 고치신 사건입니다. 예수님께서 질병을 치유하신 것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오게 될 천국에는 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오게 된 그 질병이 없어지게 된다는 것을 상징적으로 보여 주시는 것입니다. 참 천국이신 예수님께서 오셨더니 그 질병이 물러가 버리는 것입니다. 인간에게 왜 질병이 생긴 것입니까? 타락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부터 영원히 공급되어야 할 “바라크”“생명력, 복”이 차단  되었기 때문에 병이라는 것이 생기는 것입니다. 질병은 궁극적인 죽음의 맛보기입니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생명력이 꽉 차있지 않은 증거, 이미 뿌리가 뽑혀버린 나무라는 증거, 점점 죽어 가는 증거로 우리에게 나타나는 것입니다.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주어질 그 천국에서는 하나님과의 관계가 완전히 회복되어 영원한 하나님의 복“바라크”가 우리에게 주어질 것이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오시자 질병이 물러가는 것입니다.
 
 
세 번째 이적은 38년 된 병자를 고치시는 사건입니다. 예수님께서 오신 목적 중에 하나가 병자를 고치시는 것이라면 왜 그 베데스다 못 가의 수많은 병자 중 38년 된 병자 하나만 고치셨겠습니까? 그 이적은 우리 죄인들의 영적 상태를 표현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영적으로 그런 불능자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를 만나기 위해 일어설 수조차 없습니다. 우리가 소경이요, 절름발이요, 혈기 마른 자들이라는 것입니다. 그런 자들에게 예수님께서 찾아오셔서 그들을 일으켜 세우시는 복음의 시놉시스 인 것입니다.
 
네 번째 기적이 오병 이어의 기적입니다. 그 내용만 가지고 네다섯 번은 설교한 것 같습니다. 이 기적은 예수님께서 참 생명의 떡이시며, 그 떡으로만 우리는 영원히 굶주리지 않고 살 수 있다는 복음을 보여 주신 것입니다. 예수님만이 우리 인간의 영혼의 굶주림을 해결하실 수 있는 분이라는 것을 설명하시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왜 굳이 오병 이어를 가져오라 하셨을까요? 그냥 “모두 배 불러라”하면 배가 부르게 하실 수 있는 분입니다. 그런데 왜 그 물고기 두 토막(옵사리온)과 떡 다섯 개라는 아이의 도시락을 필요로 하셨습니까? 거기 있는 사람들 아이들과 여자들을 합쳐서 2만 명이 넘는 그 사람들을 먹이기 위해서는 적어도 200데나리온(노동자의 1년 치 임금)도 모자란다고 빌립이 계산을 했습니다. 거기에 이 오병이어는 도저히 불가능함을 상징하는 소품으로 등장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힘과 능력으로는 도저히 이루어 질 수 없는 하나님 나라 , 오직 우리 주님의 은혜로만 이루어지는 하나님 나라를 가시적으로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다섯 번째 기적이 물위를 걸으신 이적입니다. 그런데 이 기적은 네 번째 오병 이어의 기적과 연결이 되는 기적입니다. 마가복음에 보면 오병이어의 기적 바로 다음에 이렇게 나옵니다.
 
(막6:45) 예수께서는 곧 제자들을 재촉하여, 배를 태워, 자기보다 먼저 건너편 벳새다로 가게 하시고, 그 동안에 무리를 헤쳐 보내셨다.
 
예수님께서 오병 이어의 기적 현장에서 즉시 제자들을 배를 태워 벳새다로 보내십니다.
날은 이미 저물었고 밤이 되었습니다. 제자들은 이미 십여 리를 간 상태입니다. 그런데 반대편에서 역풍이 불었습니다. “바람이 거스리므로“ “아네모스 에난티오스”역풍, 반대편에서 불어오는 바람이라는 뜻입니다. 그렇게 역풍이 부니까 제자들이 괴로워했다고 성경은 설명을 합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그것을 보시고(에이도) 그들에게 오셨다고 하십니다. 한 밤중에 등불도 없는 바다 한 가운데에서 역풍에 표류하는 배를 예수님께서 보셨다고 하십니다. 십여 리면 4km가 넘는 거리인데 한 밤중에 어떻게 보셨을까요?
 
예수님은 오병이어의 기적으로 어깨에 힘이 들어간 제자들에게 무엇인가를 가르치시기 위해서 황급히 바다로 내 모신 것입니다. 당시 한 부락의 인구가 평균 3000명 정도 되었습니다. 그런데 2만 명이 넘는 사람들이 모였다는 것은 당시로서는 몇 개 부락이 동시에 모인 것으로 아주 혼잡했었습니다. 사실 그들은 그들에게 나누어주는 빵과 물고기가 어떻게 해서 생긴 것인지 잘 모르는 사람들도 많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직접 그 빵과 물고기를 떼어서 나누어주던 그 제자들은 똑똑히 보았습니다. 그들은 자연스럽게 어깨에 힘이 들어갔을 것입니다. 첫째로 예수께서는 그 제자들의 어깨에 들어간 힘을 빼시기 위해 바다로 내 몬 것입니다. 모든 것은 하나님의 능력으로 하나님에 의해 이루어지는 것이지 절대 너희들의 힘과 능력으로 된 것이 아니라는 것을 바다 위의 폭풍 속에서 제자들에게 깨닫게 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그들이 떠나자 그들에게서 눈을 떼지 않으시고 지켜보고 계셨던 것입니다. 아니, 엄밀히 말하면 지켜보고 계셨던 것이 아니라 그들이 배로 벳새다로 떠나실 때 그들과 함께 떠나셨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이 역풍을 만나자 주님은 그들에게로 걸어오셨습니다. 여기서는 우리 주님의 신적 능력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인생이라는 폭풍의 바다를 건너 약속의 땅인 가나안에 도착하는 데는 너희들의 힘이 보태지는 것이 아니라 오직 나의 능력으로만, 나의 은혜로만 되는 것이라는 것을 주님께서 물 위를 걸으시는 것으로 나타내신 것입니다. 마치 노아의 방주처럼 모두가 빠져 죽어야 할 폭풍 위를 주님께서 밟으시는 것입니다. 그 풍랑에서 빠져나오기 위해 2만 명이 넘는 사람들에게 빵을 떼어주던 손으로 열심히 노를 젓던 제자들은 그 때 주님의 능력과 그 능력을 의지해야만 살아날 수 있다는 복음의 메시지를 배우게 된 것이지요.
 
우리 하나님의 백성들이 인생을 살아내는 동안 수많은 내적 외적 역풍을 만나게 됩니다.
수많은 문제들에 노출됩니다. 사업이 망하고 자식이 속을 썩이고 병이 들고, 우리 인생은 끊임없는 외풍에 시달립니다. 그리고 자기 안에서 끓어오르는 죄로 인한 역풍도 늘 우리를 괴롭힙니다. 모난 성격, 불안, 우울, 근심, 염려, 욕심.. 계속해서 우리를 거스리는 외풍과 내 풍에 우리는 시달립니다. 그 때에 우리 주님은 우리의 사정을 다 아시고 우리와 함께 계신다는 것을 보여 주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스스로 빠져 나올 수 없는 그 어두움과 고통의 세상에서 주님께서, 오직 주님의 능력으로 우리를 건져 내신다는 것입니다.
 
(시139:15-16)
15    은밀한 곳에서 나를 지으셨고, 땅 속 같은 곳에서 나를 조립하셨으니 내 뼈 하나하나도, 주님 앞에서는 숨길 수 없습니다.
16    나의 형질이 갖추어지기도 전부터, 주께서는 나를 보고 계셨으며, 나에게 정하여진 날들이 아직 시작되기도 전에 이미 주의 책에 다 기록되었습니다
(사41:10) 내가 너와 함께 있으니, 두려워하지 말아라. 내가 너의 하나님이니, 떨지 말아라. 내가 너를 강하게 하겠다. 내가 너를 도와주고, 내 승리의 오른팔로 너를 붙들어 주겠다.
 
(사43:2) 네가 물 가운데로 건너갈 때에, 내가 너와 함께 하고, 네가 강을 건널 때에도 물이 너를 침몰시키지 못할 것이다. 네가 불 속을 걸어가도, 그을리지 않을 것이며, 불꽃이 너를 태우지 못할 것이다.
 
여러분이 지금 어떤 상황 속에 던져져 있다 할지라도 우리 주님은 지금 여러분과 함께 계시고 여러분을 지켜보고 계십니다. 그 풍랑 속에 함께 계십니다.
함께 있기만 하면 뭘 해요? 능력이 있어야지요? 그래서 주님은 물 위를 걸어오시는 것입니다.
피조 세계에 제한 된 인간은 자연 법칙을 거스릴 수 없습니다. 자연을 창조하시고 법칙을 만드시고 그 법칙으로 운영하고 계십니다. 하나님은 자연 법칙을 만드시고 그 법칙에 스스로 매이십니다. 그것을 “공의”라고 하십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창조주이시고 때때로 그 자연 법칙을 유보하십니다. 수10장에 보면 이스라엘이 기브온 민족하고 전쟁을 합니다. 이기고 있었는데 해가 지려고 합니다. 그래서 여호수아가 하나님의 분부를 따라 태양을 멈추게 명령합니다. 그랬더니 정말 태양이 멈춥니다.
 
또 히스기야 왕의 이야기에서도 하나님께서 해시계의 그림자를 뒤로 10도 물러가게 만들어 주십니다. 이렇게 하나님께서 자연의 법칙을 초월하신 적이 여러 번 있으십니다. 그것은 하나님만 하실 수 있는 것입니다. 오병이어의 기적은 질량 불변의 법칙을 초월하신 것이고 물위를 걸으신 것은 만류인력을 초월하신 것입니다. 즉 우리와 함께 계신 그 예수님께서 바로 피조 세계를 초월해 계신 분, 자연법칙을 극복할 능력을 가지고 계신 하나님이시라는 것을 보여 주는 것입니다. 그런데 아주 재미있는 구절이 나옵니다.
 
(막6:48) 그런데 예수께서는, 그들이 노를 젓느라고 몹시 애쓰는 것을 보셨다. 바람이 거슬러서 불어왔기 때문이다. 이른 새벽에 예수께서 바다 위를 걸어서 그들에게로 가시다가, 그들을 지나쳐 가려고 하셨다.
 
예수님께서 물위를 걸어오셔서 그냥 지나가려 하십니다. 성경이 왜 그런 표현을 쓸까요?
성경에서 하나님께서 지나가신다는 표현을 쓰는 곳이 몇 군데 나옵니다. 그 표현은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났을 때 쓰는 표현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이 뭐라고 했습니까? 하나님의 하나님다우심, 하나님의 속성이 드러나는 것을 하나님의 영광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실 때 거기에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났다고 하는 것입니다.
어떻게 십자가에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났습니까? 십자가에는 죄를 가까이 하실 수 없는 하나님의 거룩이 나타났습니다. 죄는 그렇게 저주하여 죽여 버리실 수밖에 없으신 하나님의 거룩입니다. 십자가에는 하나님의 공의가 나타났습니다. 하나님은 죄를 용서하실 수가 없으신 분이십니다. 십자가에는 하나님의 신실하심이 나타났습니다. 창세기부터 약속해 오신 하나님의 언약이 신실하게 이루어지는 장면이었습니다. 십자가에는 하나님의 긍휼하심과 사랑하심이 나타났습니다. 그래서 십자가가 하나님의 영광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속성이 그대로 투영된 것이 바로 십자가입니다. 성경에서 하나님이 지나가신다는 표현은 바로 그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난다는 표현입니다.
 
(출34:6) 주께서 모세의 앞으로 지나가시면서 선포하셨다. "주, 나 주는 자비롭고 은혜로우며, 노하기를 더디하고, 한결같은 사랑과 진실이 풍성한 하나님이다.
 
하나님께서 모세 앞으로 지나가시면서 그 분의 속성을 말씀하십니다. 그 분이 지나실 때는 그 하나님의 속성이 뚝뚝 떨어지는 것입니다.
 
(왕상19:11) 주께서 말씀하셨다. "이제 곧 나 주가 지나갈 것이니, 너는 나가서, 산 위에, 주 앞에 서 있어라." 크고 강한 바람이 주 앞에서 산을 쪼개고, 바위를 부수었으나, 그 바람 속에 주께서 계시지 않았다.
 
왜 역풍이 부는 풍랑의 현장에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나는지 아십니까? 우리의 인생의 고난과 환난, 그리고 죄로 인한 고통은 정말 우리가 견디기 힘든 것들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 현장에서 하나님을 체감할 수 있습니다. 세상 모든 사람들이 나를 버린 상황에서도 하나님은 내
곁에 계심을 느낄 수 있습니다. 여전히 하나님은 나를 사랑하시고 나를 긍휼히 여기시고 계시는 구나.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잘 못을 저질렀을 때 우리를 향한 징계의 채찍을 맞으며 우리는 하나님의 공의를 보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입니다. 우리는 세상의 역풍 속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느끼고 배우게 되는 것입니다. 구약에서 하나님의 영광이 구체적으로 묘사된 대표적인 곳이 어디입니까?
 
(사6:1-3)
1    웃시야 왕이 죽던 해에, 나는 높이 들린 보좌에 앉아 계시는 주님을 뵈었는데, 그의 옷자락이 성전에 가득 차 있었다.
2    그분 위로는 스랍들이 서 있었는데, 스랍들은 저마다 날개를 여섯 가지고 있었다. 둘로는 얼굴을 가리고, 둘로는 발을 가리고, 나머지 둘로는 날고 있었다.
3    그리고 그들은 큰소리로 노래를 부르며 화답하였다. "거룩하시다, 거룩하시다, 거룩하시다. 만군의 주님! 온 땅에 그의 영광이 가득하시다.
 
웃시야 왕이 죽고 유대가 영적으로나 국가적으로 위기 상황을 맞고 있을 때입니다.
 
(겔1:26-28)
26    또 그들의 머리 위에 있는 창공 모양의 덮개 위에는, 청옥처럼 보이는 보석으로 만든 보좌 형상을 한 것이 있었고, 그 보좌 형상 위에는, 사람의 모습과 비슷한 형상이 있었다.
27    또 나는 그의 허리처럼 보이는 그 위쪽에서 금붙이의 광채와 같은 것이 불꽃처럼 안팎으로 그를 둘러싼 것을 보았는데, 그의 허리처럼 보이는 그 아래쪽에서도, 나는 불꽃과 같은 모양을 보았다. 이렇게 그는 광채로 둘러싸여 있었다.
28    그를 둘러싼 광채의 모양은, 비 오는 날 구름 속에 나타나는 무지개 같이 보였는데, 그것은 주의 영광이 나타난 모양과 같았다. 그 모습을 보고, 나는 얼굴을 땅에 대고 엎드렸다. 그 때에 말씀하시는 이의 음성을 내가 들었다.
 
이스라엘이 바벨론으로 모조리 끌려가고 처참하게 황폐하게 된 상황에서 바벨론 그발 강가에서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납니다. 이렇게 우리의 인생의 역풍 속에서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납니다. 20C 위대한 설교자 중의 한 사람인 “랄프 카이퍼”가 아주 눈이 나빴다고 합니다. 설교자가 눈이 나쁘다는 것은 아주 치명적입니다. 공부할 때도 힘들고 설교 원고를 볼 때도 아주 힘이 듭니다. 랄프 카이퍼는 하나님께 열심히 기도했다고 합니다. “하나님, 제가 다른 이유로 그런 것도 아니고 설교를 하는데 불편해서 그러니 눈을 좀 고쳐 주세요.“
 
십 수 년을 기도했는데도 눈은 계속 더 나빠졌습니다. 어느 날 요한복음 14장을 묵상하는데 하나님께서 이런 마음을 주셨답니다. 카이퍼야, 너는 네가 눈이 온전히 치료되는 것과 하나님의 영광이 네 삶 속에서 드러나는 것 중 어느 것을 택하겠느냐? 카이퍼는 두 말할 나위 없이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나는 것이 좋지요’ 하고 마음속에 대답을 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내 마음속에 “내가 너의 삶을 통해 내 영광을 드러내려고 하는데 너는 왜 그것을 막으려 하느냐” 하는 하나님의 책망이 떠오르더랍니다. 그래서 카이퍼는 그 다음부터 자기 눈을 고쳐달라고 한 번도 기도하지 않았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처지나 상황을 통해서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고자 하십니다. 우리는 은연중에 진화론에 많이 물들어 있습니다. 그래서 “적자생존, 뛰어난 자가 살아남고 존경 받는다“ 이런 진화론적인 삶을 추구합니다.
 
그래서 가난하고 못생기고 안 되고 못 난 사람은 교회 안에서도 실패자로 낙인을 찍어 버립니다. 우리는 창조 을 진리로 믿고 있는 자들입니다. 창조론은 이 땅의 모든 창조물은 하나님께서 목적을 가지고 지으셨다는 것을 믿는 것입니다. 가난한 사람은 가난한 대로 부자인 사람은 부자대로 예쁜 사람은 예쁜 대로 못난 사람은 못 난대로, 마른 사람은 마른대로 뚱뚱한 사람은 뚱뚱한 대로 하나님의 목적과 계획안에서 창조 된 것입니다.
우리 하나님의 백성들은 그 자체를 인정하고 귀하게 여겨 줄줄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 안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여섯 번째 기적이 소경으로 난 자가 보게 되는 이적입니다.
9장에 보면 날 때부터 소경된 자가 나옵니다. 그런데 주님은 그 소경이 왜 소경이 된 것이냐고 묻는 제자들의 질문에 부모의 죄도 아니고 그 사람의 죄도 아니고 단지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나타내기 위함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소경은 예수님이 누구신지 그 분이 지금 지나가고 계신지 전혀 모르고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그 소경을 찾아가십니다. 그리고는 땅에 침을 뱉어 진흙을 이겨 그 소경의 눈에 바르십니다. 그리고는 실로암 못에 가서 씻으라고 하십니다. 이 이야기도 영적 소경인 죄인들에게 주님께서 찾아오셔서 자신이 저주  받은 흙에 이겨지셔서 그 저주받은 흙이 되어버린 죄인과 연합되어 그 예수 님 자신이 실로암 못에 씻겨 짐으로 우리가 구원을 얻게 되는 복음을 설명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전부 그 진흙과 실로암 못이 효험이 있는 것을 생각들을 합니다. 왜 그렇게 많은 신유 은사 자들이 인기인들이 되어있습니까? 어떤 사람은 전화 예약까지 하고 가야 겨우 만날 수 있고 아니면 전화로 치료해 주고 헌금은 온라인으로 받기도 한다고 합니다.
 
설사 신유의 은사를 받아서 병을 고쳤다고 해도 자기는 우리 주님의 능력의 통로 역할을 한 것뿐입니다. 그런데 왜 신유 은사 자들이 그렇게 어깨에 힘을 주고 다닙니까? 복음이 뭔지 정확히 이해도 못한 사람들입니다.
 
마지막 일곱 번째 이적이 죽은 나사로가 살아난 사건입니다. 거기서도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나사로가 죽은 것은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시기 위한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요11:3-4) 3    그 누이들이 사람을  예수께로 보내서 "주님, 보십시오, 주께서 사랑하시는 사람이 앓고 있습니다" 하고 말하였다.    4    예수께서 들으시고 말씀하셨다. "그 병은 죽을 병이 아니다. 그것은 오히려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낼 병이다. 이 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아들이 영광을 받게 될 것이다."
 
이 사건 역시 부활이요 생명이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죄와 허물로 죽어있던 죄인들이 죽음을 이기고 승리를 하게 되는 최종적인 정리를 해 주신 것입니다.
요한복음의 기적은 이것으로 끝입니다. 각 기적에는 예수 그리스도의 신적 기원과 그 분의 하실 일과 십자가와 복음이 상징 적으로 설명이 되어 있는 것입니다.
마태복음의 기적을 몇 가지 보겠습니다.
 
(마8:1-4)
1    예수께서 산에서 내려오시니, 많은 무리가 그를 따라갔다.
2    나병 환자 한 사람이 예수께 다가와 절하면서 "주님, 하고자 하시면, 나를 깨끗하게 해주실 수 있습니다" 하고 말하였다.
3    예수께서 손을 내밀어 그에게 대시고 "그렇게 해주마. 깨끗하게 되어라" 하고 말씀하시니, 곧 그의  나병이 나았다.
4    예수께서 그에게 "아무에게, 아무 말도 하지 말아라. 가서, 제사장에게 네 몸을 보이고, 모세가 명령한 예물을 드려서, 사람들에게 증거로 삼도록 하여라" 하고 말씀하셨다.
 
예수님께서 문둥병자를 고치시는 장면입니다. 3절에 보시면 예수님께서 문둥병자에게 “내가 원 하노니 깨끗함을 받으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께서 지금 누구의 역할을 하고 계신 것입니까?
 
 (레14:2-9)
2    "다음은 악성 피부병에 걸린 환자를 정하게 하는 날에 지켜야 할 규례이다. 사람들이 악성 피부병에 걸린 환자를 제사장에게로 데려가면,
3    제사장은 진 바깥으로 나가서, 그를 살펴보아야 한다. 그 환자의 악성 피부병이 나았으면,
4    제사장은 사람들을 시켜서, 그 환자를 정하게 하는 데 쓸, 살아 있는 정한 새 두 마리와 백향목 가지와 홍색 털실 한 뭉치와 우슬초 한 포기를 가져 오게 한다.
5    그리고 제사장은 사람들을 시켜서, 그 두 마리 새 가운데서 한 마리를 잡아서, 생수가 담긴 오지그릇에 담게 한다.
6    그렇게 한 다음에, 제사장은 백향목 가지와 홍색 털실 한 뭉치와 우슬초 한 포기와 그리고 그 살아 있는 나머지 새를 가져다가, 생수가 섞인 죽은 새의 피에 찍어서,
7    악성 피부병에 걸렸다가 정하게 된 그 사람에게 일곱 번 뿌린다. 그런 다음에, 제사장은 그에게 '정하다'고 선언하고, 살아 있는 새는 들판으로 날려보낸다.
8    정하다는 선언을 받은 그 사람은 옷을 빨고, 털을 모두 밀고, 물로 목욕을 하면, 정하게 된다. 그리고 진으로 돌아온 뒤에, 그는 이레 동안 장막 바깥에서 살아야 한다.
9    이레째 되는 날에, 그는 다시 털을 모두 밀어야 한다. 머리카락과 수염과 눈썹까지, 털을 다 밀어야 한다. 그런 다음에, 옷을 빨고 물로 목욕을 하면, 그는 정하게 된다.
 
레위기 율법에 문둥병이 정결케 되기 위해서는 제사장에게 살아있는 새 두 마리를 가지고 가서 한 마리를 죽여서 그 피를 다른 새의 날개에 묻히고 그 새를 날려 버리는 의식을 합니다. 죄가 죽고 그 죽은 자의 생명을 산새에게 묻혀 자유롭게 날려 보내는 것이 레위기의 의식입니다. 복음이지요? 옛 몸이 죽고 새 몸이 되어 자유롭게 날아가게 되는 복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지금 제사장으로서 문둥병자로 대표되는 저주받은 죄인의 죄를 사하여 주시는 장면입니다.
 
(마8:5-13)
5    예수께서 가버나움에 들어가셨을 때에, 한 백부장이 다가와서, 그에게 간청하여
6    말하기를 "주님, 내 종이 중풍으로 집에 누워서 몹시 괴로워하고 있습니다" 하였다.
7    예수께서 "내가 가서 고쳐 주마" 하고 말씀하셨다.
8    백부장이 대답하여 말하였다. "주님, 나는 주님을 내 집에 모셔 들일 만한 자격이 없습니다. 그저 말씀만 해주십시오. 그러면 내 종이 나을 것입니다.
9    나도 상관을 모시는 사람이고, 내 밑에도 병사들이 있어서, 내가 이 사람더러 가라고 하면 가고, 저 사람더러 오라고 하면 옵니다. 또 내 종더러 이것을 하라고 하면 합니다."
10    예수께서 이 말을 들으시고, 놀랍게 여기셔서, 따라오는 사람들에게 말씀하셨다. "내가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나는 지금까지 이스라엘 사람 가운데서는 아무에게서도 이런 믿음을 본 일이 없다.
11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많은 사람이 동과 서에서 와서, 하늘 나라에서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함께 잔치 자리에 앉을 것이다(그, '기대어 누울 것이다'. 유대인들이 식사할 때 가지는 자세).
12    그러나 이 나라의 아들들은 바깥 어두운 데로 쫓겨나서, 거기에서 울며 이를 갈 것이다."
13    그리고 예수께서 백부장에게 "가거라. 네가 믿은 대로 일이 될 것이다" 하고 말씀하셨다. 그런데 바로 그 시각에 그 종이 나았다.
 
백부장의 하인의 병을 낫게 하시는 것을 잘 보면 이 장면에서는 예수님께서 율법과 은혜를 설명하시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예수께서 가서 네 하인을 고쳐 주리라 하시니까 백부장이 뭐라고 합니까? “내가 감당치 못 하겠습니다“ 합니다. 마치 베드로가 ”주여, 내가 감당치 못하겠사오니 나를 떠나소서.“ 한 것과 같습니다. 그리고는 자기도 부하가 있어서 오라 하면 오고 가라하면 가며 하라하면 한다고 자기에게도 그렇게 해 달라고 합니다.
 
잘 보시면 백부장은 하인의 병을 낫게 하겠다는 목적보다 예수께서 어떻게 하시든 그것에 따르겠다고 이야기하고 있는 것입니다. 병을 낫게 해 주시지 않으면 그대로 만족할 것이고 낫게 해주시면 감사하며 만족하겠다는 것입니다. 그 때 예수님께서 그 백부장을 칭찬하시면서 동서로부터 많은 사람이 이르러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함께 천국에 앉으려니와
 
12    그러나 이 나라의 아들들은 바깥 어두운 데로 쫓겨나서, 거기에서 울며 이를 갈 것이다."
 
동서로부터 많은 사람들이 와서 즉,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믿음을 가진 자들이 와서 천국에 앉을 것이라고 말씀하시고 율법과 혈통의 선민의식을 가진 이스라엘의 믿음을 꾸짖으시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 백부장의 하인을 고치신 이적은 은혜로 얻는 구원과 행위를 의지한 외식을 날카롭게 지적하시는 것입니다.
 
이제 마가복음의 기적을 몇 가지만 살펴보겠습니다.
 
(막8:22-26)
22    그리고 그들은 벳새다로 갔다. 사람들이 눈먼 사람 하나를 예수께 데려와서, 손을 대어 주시기를 간청하였다.
23    예수께서 눈먼 사람의 손을 붙드시고, 마을 바깥으로 데리고 나가셔서, 그 두 눈에 침을 뱉고, 그에게 손을 얹으시고서 "무엇이 보이느냐?" 하고 물으셨다.
24    그 사람이 쳐다보고서 말하기를 "사람들이 보입니다. 나무 같은 것들이 걸어 다니는 것 같습니다" 하였다.
25    그 때에예수께서는 다시 그 사람의 두 눈에 손을 얹으셨다. 그런 다음에, 그가 뚫어지듯이 바라보더니, 시력을 회복하여 모든 것을 똑똑히 보게 되었다.
26    예수께서 그를 집으로 돌려보내시며 말씀하시기를 "마을로 들어가지 말아라(다른 고대 사본들에는 '마을 안에 있는 어느 누구에게도 말을 하지 말아라'가 첨가되어 있음) " 하셨다.
 
예수님께서 칠(七)병(餠) 이어로 4000명을 먹이시자 바리새인들이 또 하늘로서 오는 표적을 보여 달라고 요구합니다. 그러니까 주님께서 한탄하십니다.
 
(막8:11-12) 11    바리새파 사람들이 나와서는, 예수에게 시비를 걸기 시작하였다. 그들은 예수를 시험하느라고 그에게 하늘로부터 내리는 표적을 요구하였다.
12    예수께서는 마음 속으로 깊이 탄식하시고서 말씀하셨다. "어찌하여 이 세대가 표적을 요구하는가! 내가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이 세대는 아무 표적도 받지 못할 것이다."
 
그렇게 한탄을 하시고 제자들과 함께 배에 오르셔서 제자들 더러 “바리새인들의 누룩과 헤롯의 누룩을 조심하라고 하십니다.” 그 말씀은 조금 전에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에게 또 표적을 보여 달라고 하신 것을 경계하여 말씀하신 것입니다. 누룩이라는 것은 해로운 죄를 가리키는 것입니다. 바리새인들은 민속 메시야, 그러니까 정치적이고 경제적인 힘 있는 메시야가 와서 다시 화려한 다윗 왕국을 재건 할 것이라는 희망을 갖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예수님께서 진짜 메시아라면 그에 걸 맞는 힘의 표적을 보여 달라고 요구 한 것입니다. 그들이 요구하는 그런 표적은 예수께서 보여 주시지 않겠다고 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제자들에게 그런 잘 못된 메시야 관을 조심하라고 경고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제자들이 예수님께서 누룩 이야기를 하시니까 자기들이 빵을 한 개밖에 안 가져 와서 나무라시는가 보다 하고 자기들끼리 수군 거렸습니다. 그러니까 예수님께서 아직도 깨닫지 못하느냐? 하시면서 그 소경을 고쳐 주시는 사건이 이어지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오병이어나 칠(七)병(餠) 이어로 많은 군중들을 먹이신 것은 바리새인들이나 제자들의 생각처럼 이제 이 땅에서 잘 먹고 잘 살게 해 주실 메시아 왕국의 전주곡이 아니라 참 떡이신 예수 그리스도로만 영적 굶주림이 해결 될 수 있다는 것을 설명해 주시려 했던 것인데 제자들이 여전히 이 땅의 떡으로 다투는 것을 보시고 그들에게, 아니 우리 교회에게 교훈을 주시는 것입니다. 소경의 눈을 뜨게 해 주시는데 역시 침을 뱉어서 그 눈에 바르시고 (그 죄인과 연합 되셔서) 그 눈을 고쳐 주십니다. 그런데 처음에는 그 소경이 잘 보지 못합니다. 사람을 보고도 나무 같은 것이 걸어간다고 합니다. 예수님께서 두 번째 안수해서 또 치료해 주십니다. 그제 서야 잘 보이게 된 것입니다. 우리 주님께서는 그렇게 우매하고 더딘 제자들의 영적 진보에도 포기하지 않으시고 기다려 주신다는 것을 메시지로 주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반드시 그들을 환하게 얼굴과 얼굴을 맞대어 보는 것처럼 진리 앞에 세우실 것을 천명하시는 사건입니다.
 
그리고 마가복음 5장의 거라사 광인의 이야기가 나오지요? 그 이야기는 단순히 예수님께서 귀신을 쫓아내시는 기적을 행하신 것을 설명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 거라사 광인의 이야기도 역시 demon possession귀신들의 소유였던 죄인들을 예수께서 건져내셔서 제자를 삼으시는 복음에 대한 진술입니다.
 
(막5:1-8)
1    그들은 바다 건너편 거라사(다른 고대 사본들에는 '겔게사' 또는 '가다라' 또는 '가자라')
 사람들의 지역으로 갔다.
2    예수께서 배에서 내리시니, 곧 악한(그, '더러운') 귀신 들린 사람 하나가 무덤 사이에서 나와서, 예수와 만났다.
3    그는 무덤 사이에서 사는데, 이제는 아무도 그를 쇠사슬로도 묶어 둘 수 없었다.
4    여러 번 쇠고랑과 쇠사슬로 묶어 두었으나, 그는 쇠사슬도 끊고 쇠고랑도 부수었다. 아무도 그를 휘어잡을 수 없었다.
5    그는 밤낮 무덤 사이나 산 속에서 살면서, 소리를 질러 대고, 돌로 제 몸에 상처를 내곤 하였다.
6    그가 멀리서 예수를 보고, 달려와 엎드려서
7    큰소리로 "가장 높으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 나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제발 나를 괴롭히지 마십시오" 하고 외쳤다.
8    그것은 예수께서 이미 그에게 "악한 귀신아, 그 사람에게서 나가거라" 하고 명하셨기 때문이다.
 
그 귀신 들린 사람에 대한 묘사를 잘 보시면 첫째로 그 사람은 옷을 벗고 있었습니다. 그러면서도 부끄러운 줄 모르고 살았습니다. 그게 죄인들의 공통점입니다.
죄인들은 부끄러운 죄를 지으면서도 그게 부끄러운 것인지 모릅니다. 심지어 그런 것을 자랑삼아 이야기합니다. 교도소에 가보면 모여 앉아서 자랑하는 게 얼마나 많은 돈을 사기 쳤나? 얼마나 많은 여자를 울렸나? 얼마나 비싼 물건을 도둑질했나? 내가 얼마나 잔인하게 사람을 때렸었나? 이런 것들을 자랑삼아 이야기합니다. 그게 얼마나 부끄러운 일인지 모르는 것입니다.
 
두 번째로 그 귀신들린 사람은 무덤 가운데 삽니다. 무덤에는 죽은 사람밖에 없습니다. 무덤에서는 사람 썩는 냄새밖에 나지 않습니다. 죄인들은 예수 그리스도가 없이 자기들의 의만 드러내는 썩어 가는 시체들 틈에서 살고 있는 것입니다.
 
세 번째로 그 귀신들린 사람은 힘이 있습니다. 쇠사슬을 끊어내는 힘이 있습니다. 아무도 그를 제어하지 못합니다. 죄인들은 힘이 있습니다. 돈, 권력, 명예, 지식 이런 것을 자기만을 위한 힘으로 씁니다. 그런데 그 힘은 자신을 파괴해 가는 힘입니다.
 
5절에 보시면 ‘늘 소리 지르며 돌로 제 몸을 상하게 하고 있더라.’ 는 구절이 있지요?
인류의 문명이 결국은 인간을 아주 가치 없고 값싼 존재로 만들어 버렸습니다. 인간이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키운 힘은 결국 자신을 파멸시키고야 마는 것입니다.
 
결국 하나님 이외에 자신이 힘이라고 여기고 있고 자신의 존재의 안전과 행복을 맡기고 있는 모든 것은 다 마귀의 속임수 인 것입니다. 그것을 다른 말로 우상을 섬기는 자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을 섬겨야 할 자들이 우상에게 자기 존재의 안전과 행복을 맡겨 버리는 것, 그것을 우상을 섬긴다고 하고 그런 자들을 무덤 사이에 사는 자들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사65:1-5)
1    "나는 응답할 준비를 하고 있었지만, 아직도 내게 요청하지 않았다. 누구든지 나를 찾으면, 언제든지 만나려고 준비를 하고 있었지만, 아무도 나를 찾지 않았다. 내 이름을 부르지도 않던 나라에게, 나는 '나 여기 있다. 나 여기 있다' 하고 말하였다.
2    제멋대로 가며, 악한 길로 가는 반역하는 저 백성을 맞이하려고 내가 종일 팔을 벌리고 있었다.
3    이 백성은 동산에서 우상에게 제사하며, 벽돌 제단 위에 분향하여, 내 앞에서 늘 나를 분노하게 만드는 백성이다.
4    그들은 밤마다 무덤 사이로 다니면서, 죽은 자의 영들에게 물어 본다. 돼지고기를 먹으며, 이방 제삿상에 올랐던 고기 국물을 마신다.
5    그러면서도 그들은 다른 사람들에게 '멀찍이 서 있어라, 우리는 거룩하니, 너희가 우리에게 닿아서는 안 된다. 가까이 오지 말아라' 하고 말하는 백성이다. 이런 자들을 내가 참지 못한다. 그들을 향한 나의 분노는 꺼지지 않는 불처럼 타오른다.
 
이렇게 우상을 섬기는 자들을 가리켜 무덤 사이에 사는 자들이라고 표현을 합니다.
그리고 우상을 섬기는 자들은 자기 몸을 상하게 합니다. 어디서 봤지요?
갈멜 산에서 바알과 아세라 선지자들이 자해를 하면서 바알의 대답을 기다립니다.
그러니까 귀신들린 자는 바로 세상의 가치인 우상 속에서 그 것이 진짜 가치인 줄 착각하고 살아가는 모든 죄인들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러한 demon possession 된 자에게 예수께서 오십니다. 예수가 오셔서 그 귀신들을 돼지 떼에다 몰아 넣으셔서 바다에 넣어 몰살을 시키십니다.
어디서 많이 본 듯한 장면이지요? 홍해에서 애굽이 모두 빠져 몰살당하는 장면입니다.
왜 이스라엘만 구원하시면 되지 애굽을 다 몰살시키십니까? 애굽은 당시 세계 최강의 나라였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가치 있고 매력 있는 것의 상징입니다. 충분히 인간들이 자신의 힘이라고 여길 수 있는 것들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그 모든 것들을 바다에 넣어 몰살시키시는 것입니다. 왜 하필 돼지인지 아세요? 유대인들에게 있어 가장 부정한 짐승이 돼지였습니다. 그래서 안티오쿠스 에피파네스가 돼지피로 성전에서 제사를 드리고 했던 것입니다. 그 돼지 같은 우상들, 세상의 가치들을 모조리 바다에 몰살시키시는 것입니다. 이 이적은 우리의 구원은 그렇게 거짓 가치들로부터 벗어나서 참 가치를 찾게 되는 것이라는 것을 보여주시는 사건인 것입니다. 
 
(사41:21-24)
21    주께서 말씀하신다. "민족의 신들아, 소송을 제기하여 보아라." "너희는 확실한 증거를 제시하여 보아라."
22    이리 와서, 장차 무슨 일이 일어날 것인지, 우리에게 말하여 보아라. 지난날에 있었던 일들이 어떤 것이었는지, 말하여 보아라. 그러면 우리가 그것들을 살펴 그 결과를 알아보겠다. 아니면, 앞으로 올 일들을 우리에게 말하여 보아라.
23    장차 올 일들을 말하여 보아라. 그러면 우리가, 너희들이 신이라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복을 내리든 화를 내리든, 좀 하여 보아라. 그러면, 우리가 모두 놀라며 두려워하게 될 것이다.
24    참으로 너희는 아무것도 아니며, 너희가 하는 일도 헛것이니, 너희를 섬겨 예배하는 자도 혐오스러울 뿐이다.
 
우리가 가치라고 여기고 있는, 힘이라고 여기고 있는 우상은 전부 신기루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께서 오셔서 그 모든 우상들을 일거에 몰살시키시고 우리를 참 진리 앞에 서게 하시는 것이 바로 구원이라는 것입니다. 그렇게 건짐을 받은 자들이 바로 “제자“라는 것입니다.
 
(막5:18-20)
18    예수께서 배에 오르실 때에, 귀신 들렸던 사람이 예수와 함께 있게 해 달라고 애원하였다.
19    그러나 예수께서는 허락하지 않으시고, 그에게 말씀하셨다. "네 집으로 가서, 가족에게, 주께서 너에게 큰 은혜를 베푸셔서 너를 불쌍히 여기신 일을 이야기하여라."
20    그는 떠나가서, 예수께서 자기에게 하신 일을 가볼리에 전파하였다. 그러자 사람들이 다 놀랐다.
 
주님께서 귀신을 쫓아내시거나 병을 낫게 하신 후에 한번도 “나가서 너에게 일어난 일을 자랑하라“고 하신 적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유독 이 사람에게만 가서 주께서 네게 어떻게 큰일을 행하셨는지 고하라고 하십니다. 그랬더니 이 사람이 이방인 데가볼리에서 전도를 합니다. 20절의 ”전파하니“라는 말”케릿소“는 ”설교하다, 전도하다”라는 뜻입니다.
전에는 누구에게 그러한 일을 맡기셨지요?
 
(막3:14)
 예수께서 열둘을 세우시고  [그들을 사도라고 이름하셨다.] 이것은, 예수께서 그들을 자기와 함께 있게 하시고, 또 그들을 내보내어서 말씀을 전파하게 하시며
 
제자들에게 맡기셨던 그 일을 이 거라사 광인에게도 맡기시는 것입니다.
 
(고후4:5)
5  우리는 우리 스스로를 선전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선포합니다. 우리는 예수를 따르므로, 우리를 여러분의 종으로 내세웁니다.
 
같은 단어입니다. 그는 최초로 이방에 복음을 전하는 사도 바울의 모형으로 서게 되는 것입니다. 이게 귀신을 쫓아내신 예수 그리스도의 기적이 갖고 있는 메시지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하나님 나라가 임하면 빛에 어둠이 물러가듯이 마귀의 세력은 쫓겨 가고 그 세력에서 건짐을 받은 자들이 하나님의 백성,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들이 되더라는 것입니다.
 
(마12:28)
그러나 내가 하나님의 영을 힘입어 귀신을 내쫓는 것이면, 하나님의 나라가 너희에게 왔다.
 
그리고 같은 마가복음 5장에 열두 해 혈루 증을 앓던 여인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막5:25-34)
25    그런데 열두 해 동안 혈루증으로 앓아 온 여자가 있었다.
26    여러 의사에게 보이면서, 고생도 많이 하고, 재산도 다 없앴으나, 아무 효력이 없었고, 상태는 더 악화되었다.
27    이 여자가 예수의 소문을 듣고서, 뒤에서 무리 가운데로 끼어 들어와서는, 예수의 옷에 손을 대었다.
28    (그 여자는 "내가 그의 옷에 손을 대기만 하여도 나을 터인데!" 하고 생각 했던 것이다.)
29    그런 다음에 곧 출혈의 근원이 마르니, 그 여자는 몸이 나은 것을 느꼈다.
30    예수께서는 곧 자기에게서 능력이 나간 것을 몸으로 느끼시고, 무리 가운데서 돌아서서 "누가 내 옷에 손을 대었느냐?" 하고 물으셨다.
31    제자들이 예수께 "무리가 선생님을 에워싸고 떠밀고 있는데, 누가 손을 대었느냐고 물으십니까?" 하고 반문하였다.
32    그러나 예수께서는 그렇게 한 여자를 보려고 둘러보셨다.
33    그 여자는 자기에게 일어난 일을 알므로, 두려워하여 떨면서, 예수께로 나아와 엎드려서 사실대로 다 말하였다.
34    그러자 예수께서 그 여자에게 말씀하셨다. "딸아,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안심하고 가거라. 그리고 이 병에서 벗어나서 건강하여라."
 
혈루 증이라는 것은 정상적인 생리현상이 아닌 지속적인 자궁 출혈(disfunctional uterine bleeding)을 말하는 것입니다. 당시 철분이 함유된 비타민도 없었을 것이고 먹는 것도 부실한 시대에 12년 동안 하혈을 했다고 생각해 보세요. 그 여자는 거의 시체나 다름없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여인은 많은 의원을 찾아다녔지만 그 병은 더 중하여 졌습니다.
 
26    여러 의사에게 보이면서, 고생도 많이 하고, 재산도 다 없앴으나, 아무 효력이 없었고, 상태는 더 악화되었다.

돈도 다 써버렸습니다. 당시에는 그 혈루 증에 좋다는 약으로, 타조의 알을 갈아서 베옷에 넣고 다니면 된다거나 흰 암나귀의 똥 안에 들어있는 보리알을 지니고 다니면 낫는다거나 하는 민간 처방이 있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타조나 흰 암 나귀는 구하기가 너무 어려운 것이어서 돈이 많이 들어갔다고 합니다. 그 모든 것을 다 해 보았지만 허사였고 병은 더 중하게 되었다고 기록한 것은 가장 최악의 상태라는 것을 마가가 강조하는 것입니다.
게다가 레위기 율법에 보면 혈루 증을 앓는 여인들은 부정한 여인으로 취급을 받았습니다.
 
(레15:6-8)
6    고름을 흘리는 남자가 앉았던 자리에 앉는 사람들도, 그 옷을 빨아야 하고, 물로 목욕을 하여야 한다. 그래도 그는 저녁때까지 부정하다.
7    고름을 흘리는 남자의 몸에 닿는 사람들도, 모두 그 옷을 빨고 물로 목욕을 하여야 한다. 그래도 그는 저녁때까지 부정하다.
8    고름을 흘리는 남자가 뱉은 침이 깨끗한 사람에게 튀면, 침 묻은 그 사람은 옷을 빨고 물로 목욕을 하여야 한다. 그래도 그는 저녁때까지 부정하다.
 
이렇게 혈루 증을 앓는 여자는 문둥병자처럼 마을에서 함께 살수도 없었고 하나님을 예배  하는 자리에도 나올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그 여인이 사력을 다해서 엉금엉금 기어서 예수님의 겉옷 가를 만졌습니다. 병행구절인 마태복음으로 가보겠습니다.
 
(마9:20) 그런데 열두 해 동안 혈루증으로 앓는 여자가 뒤에서 예수께로 다가와서, 예수의 옷술에 손을 대었다
 
겉옷 가가 어디냐면 겉 옷 맨 아래의 옷 술을 말하는 것입니다. 당시 유대인 성인 남자들이 입던 겉옷은 그 옷 맨 아래에 술을 달았습니다. 그 옷 술은 율법을 상징하는 것이었습니다. 그 옷 술을 보면서 율법을 다시 상기하고 묵상하고 하기 위하여 옷 술을 달았던 것입니다. 그런데 율법에 의해 정 죄를 받아야 하는 한 부정한 여인이 그 율법을 잡은 것입니다. 그 여인은 그 율법에 의하면 정 죄를 받아 죽어야 합니다. 그런데 그 여인에게 믿음이 있었습니다.
 
(막5:34) 그러자 예수께서 그 여자에게 말씀하셨다. "딸아,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안심하고 가거라. 그리고 이 병에서 벗어나서 건강하여라."
 
어떤 믿음이었습니까? 자신은 부정하여 죽을 수밖에 없지만 예수님의 거룩을 의지하여 살 수 있으리라는 믿음을 그 여인은 가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30절을 보시면
 
(막5:30) 예수께서는 곧 자기에게서 능력이 나간 것을 몸으로 느끼시고, 무리 가운데서 돌아서서 "누가 내 옷에 손을 대었느냐?" 하고 물으셨다.
 
그 여인이 예수님의 옷 가를 만지자 예수님에게서 능력이 나갔다고 기록을 합니다.
예수님은 능력을 100정도 충전하고 다니시면서 병을 고치실 때마다 능력이 조금 씩 조금씩 나가는 그런 능력을 갖고 계신 분입니까? 여기서 말하는 “능력“”뒤나미스“는 ”예수 그리스도의 권세” “메시아로서의 권세”를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죽어야 할 부정한 자가 죽고 예수 그리스도의 권세로 새 사람으로 살아나는 부활을 설명하는 것이 바로 이 열두 해 혈루 증을 앓던 여인의 이야기입니다. 그 여인은 그 영광의 주님의 권세를 그 자리에서 본 것입니다. 그래서 그 여인의 혈루증이 나았는데도 그 여인은 그 예수 그리스도의 권세 앞에서 벌벌 떱니다.
 
(막5:32-33) 32    그러나 예수께서는 그렇게 한 여자를 보려고 둘러보셨다.
33    그 여자는 자기에게 일어난 일을 알므로, 두려워하여 떨면서, 예수께로 나아와 엎드려서 사실대로 다 말하였다.
 
왜 병이 나았는데 기쁘게 펄펄 뛰지 않고 두려워 떱니까? 베드로가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고 그물 한 가득 고기를 잡았을 때 기뻐서 펄펄 뛰지 못하고 “주여 나를 떠나소서.”라고 이야기 한 장면하고 똑 같지요? 아까 백부장이 “주여, 내가 감당치 못 하겠나이다”하고 말한 것과 같은 것입니다. 죄인들은 그 하나님의 영광을 경험하게 되면 경외감이 생기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이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죄인들에게 주어질 새 생명, 구원의 이야기를 혈루 증 여인을 통해 하고 계신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이 혈 증 여인을 만나실 때 어디로 급히 가고 계시던 중이었습니다. 바로 회당 장 야이로의 딸이 죽어가고 있었기 때문에 그리고 급히 가고 있던 중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여인과 이야기하는 도중에 그만 그 야이로의 딸이 죽고 말았습니다.
 
(막5:34-35) 34    그러자 예수께서 그 여자에게 말씀하셨다. "딸아,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안심하고 가거라. 그리고 이 병에서 벗어나서 건강하여라."
35    예수께서 말씀을 계속하고 계시는데, 회당장의 집에서 사람들이 와서, 회당장에게 "따님이 죽었습니다. 이제 선생님을 더 괴롭혀서 무엇하겠습니까?" 하고 말하였다.
 
예수님께서 이미 병이 나은 혈루 증 앓던 여인에게 굳이 ‘딸아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평안히 가라 네 병에서 놓여 건강할 지어다‘라고 말씀하신 것은 바로 조급해하는 야이로에게 말씀하신 것이었습니다. 36절에서 한 번 더 야이로에게 믿음을 강조 하십니다.
 
(막5:36) 예수께서 이 말을 곁에서 들으시고서, 회당장에게 "두려워하지 말고 믿기만 하여라" 하고 말씀하셨다.
 
자, 이 이야기는 어떤 메시지를 주는 것일까요?
야이로가 어떻게 예수 을 알았습니까? 어떻게 그 분이 죽어 가는 자기 딸을 살리실 것을 믿고 그 분을 모시고 가는 것입니까? 야이로는 예수님에 대한 소문을 들었습니다. 그리고 그 소문이 믿겨졌습니다. 이처럼 믿음은 먼저 들음에서 시작됩니다. 그리고 그 믿음은 역경을 통해서 살아있는 믿음으로 자라납니다. 야이로는 믿고 자기 집으로 가는 길에 믿음의 시련을 만나게 됩니다. 그 바쁜 와중에 혈루 증 앓는 여인이 나타나서 예수님의 갈 길을 지체하게 만들었습니다. 바로 그 시간에 야이로의 딸이 죽습니다. 야이로는 허탈했을 것입니다. 이제 다 끝났구나. 나는 이제 절망이구나. 그 때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두려워 말고 믿기만 하라“ ”아니, 믿는 것도 어느 정도 실낱같은 것이라도 남아있어야 믿는 것이지 이제 딸이 숨이 끊어졌는데 뭘 믿으라는 것입니까?” 왜 이런 생각이 안 들었을까요? 생각해 보세요.12살 먹은 딸이 이제 곧 시집도 가야하고 손자도 보여주고 할 그런 딸이 죽을병이 들어서 마지막 희망을 가지고 찾아간 예수라는 사람이 오는 길에 지체하는 바람에 자기 딸이 죽었습니다. 야이로는 이제 완전한 절망 속으로 빠져들어 간 것입니다.
 
그런데 그 상황에서 주님은 믿음을 요구하십니다. 나사로의 누이들에게도 일부러 늦게 가시고는 “너희가 믿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보리라”하고 말씀하셨지요? 왜 주님은 그런 절망 속으로 몰아넣으시고 거기서 믿음을 요구하실까요?
 
우리의 믿음은 자라야 하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믿음은 자라고 자라서 죽음을 이기는 믿음으로 자라야 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뭉개서 없애버리신 그 사망을 이기는 믿음을 우리가 우리 안에 실력으로 가져야 하는 것입니다. 그 죽음을, 사망을 이기는 믿음은 역경을 통해서 자라나는 것입니다.
 
도저히 절망적인 상황인데 하나님이 개입하시니까 됩니다. 우리의 믿음은 그렇게 자라나는 것입니다. 세상 모두가 너희를 버려도 하나님은 안 버리신다는 믿음이 바로 그러한 역경 속에서 자라나게 되는 것입니다. 왜 아브라함에게 자식을 주마고 약속하시고 그가 100세가 될 때까지 기다리십니까? 도저히 가망이 없는 상태까지 끌고 가시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의 믿음을 위해서입니다. 왜 한나의 태를 그렇게 오랫동안 닫으셨다가 여시는 지 아십니까? 한나의 믿음을 위해서입니다. 야이로에게도 절망 속에서 그러한 믿음이 요구됩니다. 야이로는 절망 속에서도 끝까지 주님을 모시고 자기 집으로 갑니다. 그 믿음이 딸을 살리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그 소녀에게 가셔서 “달리다 굼“ ”소녀야 일어나라“ 하고 아람어로 말씀하셨습니다. 그랬더니 소녀가 살아났습니다.
 
그렇게 역경을 통해 자라난 믿음이 사망을 이겨낼 수 있다는 것을 메시지로 주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야이로의 딸과 혈루 증 앓던 여인의 이야기에서 한 가지 더 짚고 넘어가야 할 사실은 하나님 앞에서는 빈부귀천이 없다는 것입니다. 누가 더 소중하고 누가 덜 소중하고의 차이가 없다는 것입니다. 둘 다 믿음으로 치유가 된 것입니다. 그 믿음에는 유지인 회당장의 것이나 저 부정하고 가난한 혈루 증 여인의 것이나 차이가 없다는 것을 이 두 이야기를 통해 주님은 우리에게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수로보니게 여인의 딸의 귀신을 쫓아주신 사건과 귀먹고 말이 어눌한 자를 고치시는 사건입니다.
 
(막7:24-30)
24            예수께서 거기에서 일어나셔서,  두로지역으로 가셨다. 그리고 어떤 집에 들어가셨는데, 아무도 그것을 모르기를 바라셨으나, 숨어 계실 수가 없었다.  25    악한 귀신 들린 딸을 둔 여자가 곧바로 예수의 소문을 듣고 와서, 그의 발 앞에 엎드렸다.  26    그 여자는 그리스 사람으로서, 수로보니게 출생인데, 자기 딸에게서 귀신을 내쫓아 주시기를 예수께 간청하였다.
27    예수께서 그 여자에게 말씀하셨다. "아이들을 먼저 배불리 먹여야 한다. 아이들이 먹을 빵을 집어서 개들에게 던져 주는 것은 옳지 않다."
28    그러나 그 여자가 예수께 말하기를 "주님, 그러나 상 아래에 있는 개들도 아이들이 흘리는 부스러기는 얻어먹습니다" 하였다.
29    그래서 예수께서 그 여자에게 말씀하셨다. "네가 그렇게 말하니, 돌아가거라, 귀신이 네 딸에게서 나갔다."
30    그 여자가 집에 돌아가서 보니, 아이는 침대에 누워 있고, 귀신은 이미 나가고 없었다.
 
먼저 24절을 보시면 예수님께서 자신을 숨기시려고 하시는 대목이 나옵니다. 왜 이런 표현이 나왔을까요? 지금 마가는 예수께서 바로 하나님이시라는 것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사45:14-15)
14    주께서 말씀하신다. "이집트가 수고하여 얻은 재물과 에티오피아가 장사하여 얻은 이익이 너에게로 넘어오고, 키 큰 스바 사람들이 너에게로 건너와서 네 밑으로 들어와 너를 따를 것이며, 사슬에 매여 와서 네 앞에 엎드리고, 너에게 기도하는 것처럼 이르기를 '과연 하나님께서 당신과 함께 계십니다. 그 밖에 다른 이가 없습니다. 다른 신은 없습니다' 할 것이다."
15    구세주, 이스라엘의 하나님, 진실로 주께서는 자신을 숨기시는 하나님이십니다.
 
15절에 하나님은 숨어서 이스라엘을 지키시는 하나님이라는 대목이 나옵니다. 왜 하나님은 숨어서 이스라엘을 지키십니까? 죄인들이 하나님의 영광을 보게 되면 즉사해버리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성막으로 그들과 함께 계시기로 하셨습니다. 성막 안에 숨어 계신 것입니다. 그 하나님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그 수로보니게 여인이 알아본 것입니다. 마태복음의 병행구절에 보면, 그 여인이 예수님을 가리켜 “다윗의 자손 예수여”라고 부릅니다. 그리고는 자기 딸에게 들린 귀신을 쫓아 달라고 간청합니다.
 
예수님께서 아주 매몰차게 “자녀의 떡을 취해서 개에게 주는 것이 합당치 않다고 말씀하십니다. 이것은 전에도 설명해 드렸지만 구속사의 진행상 유대인에게 먼저 구원이 있다는 것이지 유대인과 이방인을 차별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구속사를 진행시키시면서 유대인을 먼저 택하셔서 그들을 데리고 교회를 설명하시고 그들의 실패로 전체 인간의 실패를 보여주시고 이제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유대인이나 이방인의 구별 없이 교회가 구원을 받게 되는 것이 구속사입니다. 그렇지만 구약 시대에는 어찌 되었든 이스라엘 민족 안으로 들어와야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으므로 예수께서 이스라엘을 자녀라고 하시고 이방인을 개라고 표현하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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