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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ome >  칼럼/책 >  그런 기독교는 없습니다
* 본 설교는 2004년도 개척 첫해에 기초교리 공부 내용입니다
 
작성일 : 13-04-15 20:51
   12. 성령(III) 성령 충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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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글쓴이 : njsmyrna
    조회 : 2,989  


(엡5:15-27)
15    그러므로 여러분은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를 조심하여, 지혜롭지 못한 사람처럼 하지 말고, 지혜로운 사람처럼 하십시오.
16    세월을 아끼십시오. 때가 악합니다.
17    그러므로 어리석은 자가 되지 말고, 주님의 뜻이 무엇인지를 깨달으십시오.
18    술에 취하지 마십시오. 거기에는 방탕이 있습니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으십시오.
19    시와 찬미와 신령한 노래로 서로 화답하며, 여러분의 마음으로 주님께 노래하며 찬송하십시오.
20    모든 일에, 늘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하나님 아버지께 감사를 드리십시오.
21    여러분은 그리스도를 두려워하는 마음으로 서로 순종하십시오.
22    아내이신 여러분, 주님께 순종하는 것같이, 남편에게 순종하십시오.
23    그리스도께서 교회의 머리이심과 같이, 남편은 아내의 머리이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그분의 몸인 교회의 구주이십니다.
24    교회가 그리스도께 순종하는 것같이, 아내들도 모든 일에서 남편에게 순종하십시오.
25    남편이신 여러분,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셔서 교회를 위하여 자기를 내주신 것같이, 아내를 사랑하십시오.
26    그리스도께서 그렇게 하신 것은, 교회를 물로 씻고, 말씀으로 깨끗하게 하여서, 거룩하게 하시려는 것이며,
27    티나, 주름이나, 또 그와 같은 것들이 없이, 아름다운 모습으로 교회를 자기 앞에 내세우시려는 것이며, 교회를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우리는 지난 시간까지 성령 세례란 무엇인가에 대해서, 그리고 성령의 사역은 어떤 것인지에 대해서 살펴보았습니다. 성령세례란 창세전에 하나님께서 부르신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그 구원 사역이 완성됨으로 성령을 보내셔서 그들의 눈을 뜨게 하시는 것을 성령 세례라 하며 그 눈을 뜬 자들에게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예수에 대하여 구원과 은혜에 대하여 알게 하시는 것이 바로 성령의 사역임을 성경에서 찾아보았습니다.
 
따라서 성령세례라는 것은 우리가 요구한다고 해서 주어지는 능동적인 것이 아니라 다분히 수동적이며 하나님의 주권에 달려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시중에서 이야기하는 것처럼 사람들이 성령세례를 사모하며 기도한다고 해서 성령이 오시는 것도 아니고 구원받은 자들이 성령세례를 받아야 능력 있는 그리스도인이 된다고 하면서 그 성령 세례를 사모하면 성령이 임하신다는 말도 어처구니없는 말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에는 “성령세례를 받으라.”는 요구나 명령이 한군데도 없는 것입니다. 성령세례를 받아야 비로소 능력 있는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말은 성경에 없다는 것입니다.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이미 성령 세례를 받은 것이니까요.
 
(고전12:13)  우리는 유대 사람이든지, 그리스 사람이든지, 종이든지, 자유인이든지, 모두 한 성령으로  세례를 받아서 한 몸이 되었고, 또 모두 한 성령을 마시게 되었습니다.
 
여기서 ‘세례를 받아‘는 헬라어 ’밥티조‘’세례를 받다‘라는 단어의 과거시제입니다. 헬라어의 과거 시제는 한순간에 일어나고 그친 것을 의미합니다. 성령세례는 과거에 우리가 거듭 날 때에 한번 받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라는 말입니다. 그 후에 성령이 나갔다 들어왔다 하는 것 아니라 계속해서 성령은 우리 안에 계신 것입니다.
이렇게 성령 세례는 하나님의 주권으로 하나님의 백성에게 단번에 주어지는 선물인 것입니다.
성령은 그렇게 하여 우리를 예수그리스도라는 머리에 몸으로 붙여버리는 구원을 이루어 주시는 것입니다.
 
(엡4:1-6)                           
1    그러므로 주님의 일로 갇힌 몸이 된 내가 여러분에게 권합니다.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불러 주셨으니, 그 불러 주신 뜻에 합당하게 살아가십시오.
2    언제나 겸손함과 온유함을 지니십시오. 사랑으로 서로 용납하면서, 오래 참으십시오.
3    여러분은, 성령이 여러분을 평화의 띠로 묶어서 하나가 되게 해주신 것을, 힘써 지키십시오.
4    여러분이 부르심을 받았을 때에 한 희망으로 부르심을 받은 것과 같이, 몸도 하나요, 성령도 하나요,
5    주님도 하나요, 믿음도 하나요,  세례도 하나요,
6    하나님도 한 분이십니다. 그분은  만유의(또는 '천지 만물') 아버지이시며, 만유 위에 계시고, 만유를 통하여 일하시고, 만유 안에 계십니다.
 
이렇게 세례는 단 한 가지밖에 없습니다. 우리를 구원하시는 그 순간 우리와 예수님을 연합시키시는 성령세례, 그것 한 가지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의 “성령 충만을 받으라.”는 현재시제입니다. 헬라어의 현재시제는 현재 진행의 뜻이 있다고 했습니다. 반복적이고 계속적이라는 것이지요. 그러니까 성령 충만은 계속해서 받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받고 또 받고, 받고 또 받는 것이 ‘성령 충만’인 것입니다.
 
그러니까 성령세례는 positional한 것이며 ‘성령 충만’은 experiential, 경험적인 것입니다. 성령 세례를 경험적인 것으로 오해하면 안 됩니다. 성령이 오셔서 우리가 구원을 얻었다는 것, 우리가 의인이 되었다는 것은 경험적인 것이 아니라 사실적인 것입니다. 어느 날 보니까 나의 신분이 그렇게 바뀌어 있는 것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령 충만은 계속해서 우리가 우리의 삶에서 경험하고 체험해 나가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럼 성경이 말하는 성령 충만은 무엇인가에 대해 구체적으로 살펴보겠습니다.
성경에서 성령 충만을 받은 사람들이 무엇을 했으며 어떤 경험을 했는지를 살펴보면 성령 충만이 무엇인지 금방 알게 될 것입니다. 몇 군데만 살펴보지요.
 
(행4:8~12)
8    그 때에 베드로가 성령으로 충만하여 그들에게 말하였다. "백성의 지도자들과 장로 여러분,
9    우리가 오늘 신문을 받는 것이, 병자에게 행한 착한 일과, 또 그가 누구의 힘으로 낫게 되었느냐 하는 문제 때문이라면,
10    여러분 모두와 모든 이스라엘 백성은 이것을 알아야 합니다. 이 사람이 성한 몸으로 여러분 앞에 서게 된 것은, 여러분이 십자가에 못박아 죽이고, 하나님이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살리신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힘입어서 된 것입니다.
11    이 예수는 '너희, 집 짓는 사람들에게는 버림받은 돌이지만, 집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신 분' 입니다.
12    예수 밖에는, 다른 어떤 이에게서도 구원은 없습니다. 우리가 구원 받을 이름은 사람들에게 주신 이름들 가운데 하늘 아래에 이 이름 밖에는 달리 없습니다."
 
베드로가 성령 충만해서 무엇을 합니까? 구원에 대해 설명하고 예수님이 누구신지를 전합니다.
사도행전의 다른 곳으로 가보지요.
 
(행4:31)  빌기를 다하매 모인 곳이 진동하더니 무리가 다 성령이 충만하여 담대히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니라
 
역시 이곳에서도 성령 충만한 이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전합니다.
 
(행6:3~4)
3  형제들아 너희 가운데서 성령과 지혜가 충만하여 칭찬 듣는 사람 일곱을 택하라 우리가 이 일을 저희에게 맡기고
4  우리는 기도하는 것과 말씀 전하는 것을 전무하리라 하니
 
일곱 집사들의 자격 조건이 ‘성령 충만‘입니다.
 
(행7:54~56) 55 스데반이 성령이 충만하여 하늘을 우러러 주목하여 하나님의 영광과 및 예수께서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고
56 말하되 보라 하늘이 열리고 인자가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노라 한대
 
스데반은 성령이 충만하여 예수께서 하나님 우편에 서 계신 것을 보았고 그것을 증거 하였습니다.
 
(행9:17~18) 17    그래서 아나니아가 떠나서, 그 집에 들어가, 사울에게 손을 얹고 "사울 형제, 형제가 오는 도중에 형제에게 나타나신 주 예수께서 나를 보내셨습니다. 그것은, 형제가 시력을 회복하고, 성령으로 충만하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하고 말하니,
18    곧 사울의 눈에서 비늘 같은 것이 떨어져 나가고, 그는 시력을 회복하였다. 그리고 그는 일어나서  세례를 받고
 
사울이 성령이 충만하여 세례를 받고 복음을 전하기 시작합니다.
 
(행13:8~11)
8    그런데 이름을 엘루마라고 번역해서 부르기도 하는 그 마법사가, 그들에게 훼방을 놓아서, 총독으로 하여금 믿지 못하게 하려고 애를 썼다.
9    그래서 바울이라고도 하는 사울은 성령이 충만해서, 마법사를 노려보고 말하였다.
10    "너, 속임수와 악행으로 가득 찬 악마의 자식아, 모든 정의의 원수야, 너는 주님의 바른길을 굽게 하는 일을 그치지 못하겠느냐?
 
여기서도 바울이 성령이 충만하여 당당하고 담대하게 복음을 전합니다.
 
(행11:24)
24 바나바는 착한 사람이요 성령과 믿음이 충만한 자라 이에 큰 무리가 주께 더하더라
 
초대 교회의 지도자였던 바나바도 성령이 충만하여 그의 일을 수행 할 수 있었습니다.
 
(행13:49-52)
49    이렇게 해서 주의 말씀이 온 지방에 퍼져 나갔다.
50    그러나 유대 사람들은 경건한 귀부인들과 그 성읍의 지도층 인사들을 선동해서, 바울과 바나바를 박해하게 하였고, 그들을 그 지방에서 내쫓았다.
51    그래서 바울과 바나바는 그들에게 발의 먼지를 떨어 버리고, 이고니온으로 갔다.
52    제자들은 기쁨과 성령으로 가득 차 있었다.
 
바울과 바나바를 비롯해서 제자들이 안디옥에서 성령이 충만하여 복음을 전했다고 합니다.
이 모든 경우를 주목하여 보세요. 개인이나 무리나 할 것 없이 성령이 충만하니 무엇을 합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합니다. 오순절 날 마가의 다락방에 있었던 120명의 제자들이 그러했고 산헤드린 앞에서 베드로가 그러했고 바울과 바나바, 스데반 등 모든 제자들이 성령이 충만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러므로 성령 충만의 제일 되고 가장 특징적인 표지는, 성령을 충만히 받은 사람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서 말하고 삶으로 예수를 전한다는 것입니다. 위의 구절에 등장하는 어느 누구도 성령이 충만하여 기적을 경험한다든지, 방언을 했다든지, 자기 체험을 이야기하지 않았습니다. 성령 충만한 사람들은 오직 예수만을 이야기합니다.
 
(요16:12-14)
12    아직도, 내가 너희에게 할 말이 많으나, 너희가 지금은 감당하지 못한다.
13    그러나 그분 곧 진리의 영이 오시면, 그가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실 것이다. 그는 자기 마음대로 말씀하지 않으시고, 듣는 것만 일러주실 것이요, 앞으로 올 일들을 너희에게 알려 주실 것이다.
14    또 그는 나를 영광되게 하실 것이다. 그가 나의 것을 받아서, 너희에게 알려 주실 것이기 때문이다.

성령은 이렇게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그리스도가 누구이신지 알게 하시고 복음이 무엇인지를 알게 하셔서 성령 충만을 받은 자들은 반드시 그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삶으로 입으로 전하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를 자랑하고 싶지 않은 사람은 성령 세례를 받은 그리스도인이 아닙니다. 예수로부터 받은 선물을 자랑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를 자랑하는 것이 그리스도인입니다.
여러분, 입으로 삶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한다는 것이 무슨 뜻이겠습니까?
먼저 하나님의 말씀을 알아야 예수 그리스도를 전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딤전6:3-5)
3    누구든지 다른 교훈을 가르치며,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건전한 말씀과 경건에 부합되는 교훈을 따르지 않으면,
4    그는 교만해져서 아무것도 알지 못하는 사람이요, 병이 들어서 논쟁과 말다툼을 일삼는 사람입니다. 그러한 데서, 시기와 분쟁과 비방과 악한 의심이 생깁니다.
5    그리고 마음이 썩고 진리를 잃어서, 경건을 이득의 수단으로 생각하는 사람 사이에 끊임없는 알력이 생깁니다.( 다른 고대 사본들에는 '그런 사람들과는 상종을 하지 말아야 합니다'가 더 있음).
 
바울은 디모데와 디도라는 목회자들에게 편지를 써서 말씀을 바르게 전하라고 목회 서신을 보냈습니다. 디모데서와 디도서지요. 거기에서 바르게 가르치라는 “교훈”이라는 말을 열네 번을 쓰는데 3절의 “다른 교훈”이라고 번역된 말은 헬라어 “헤테로 디다스 칼레오”입니다.
그 뜻은 false doctrine을 말하는 것입니다. 즉, 교리를 모르고 여러분은 절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올바로 전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왜 여호와의 증인을 이단이라 하나요? 왜 베뢰아 파를 이단이라 합니까? 왜 문선명씨의 통일교를 이단이라 하나요? 그들도 같은 성경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왜 그들을 이단이라 합니까? 교리가 다르기 때문에 이단이라 하는 것입니다. 올바른 교리를 알지 못하고 예수를 믿는다는 것이 얼마나 위험하고 어리석은 일인지를 아시겠어요? 체험과 경험으로 믿다보면 언젠가 자기가 믿는 게 하나님인지 부처님인지 알라인지 헛갈리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교회가 이렇게 처음부터 교리 부분을 열심히 공부하고 있는 것입니다. 바르게 알아야 바르게 전할 수 있는 것이니까요.
 
(갈1:6-8)
6    여러분을 그리스도의 은혜 안으로 불러 주신 그분에게서, 여러분이 그렇게도 빨리 떠나 다른 복음으로 넘어가는 데는, 나는 놀라지 않을 수 없습니다.
7    실제로 다른 복음이 있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몇몇 사람이 여러분을 교란시켜서 그리스도의 복음을 왜곡시키려고 하는 것뿐입니다.
8    그러나 우리들이나, 또는 하늘에서 온 천사일지라도, 우리가 여러분에게 전한 것과 다른 복음을 여러분에게 전한다면, 마땅히 저주를 받아야 합니다.
 
교리를 모르고 엉뚱한 복음, 다른 복음을 전하면 하나님께 저주를 받습니다. 그러니 우리가 얼마나 열심히 성경을, 바른 교훈을 공부해야 하겠습니까? 이렇게 올바른 예수를, 올바른 복음을 전할 수 있도록 하나님의 말씀으로 무장된 자를 우리는 성령이 충만한 자라고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사탄과 대적하여 싸울 때 가질 수 있는 유일한 무기가 무엇이라 했나요? 바로 말씀 아닙니까?
 
(엡6:17) 그리고  구원의 투구와 성령의 칼, 곧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십시오.
 
그렇지요? 성령 충만은 이렇게 올바른 교리의 숙지에서 오게 되는 것입니다.
 
두 번째로 성령 충만함을 받아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삶으로 전한다는 것은 오늘 본문 에베소서 5장을 보면 잘 나타나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에베소 교회에게 쓴 편지에서 성령 충만함을 받으라고 이야기합니다.
그리고 바로 뒤이어 ‘남편들아 아내를 사랑하라, 아내들아 남편에게 복종하라, 자녀들아 부모에게 순종하라. 부모들아 자녀들을 노엽게 하지 마라. 종들아 상전에게 순종하라. 상전들아 종들에게 공갈치지 마라.‘고 성령 충만의 내용을 열거합니다.
 
성령 충만을 받으라고 이야기하면서 무엇을 제시하고 있습니까? 바로 일상생활입니다.
여러분의 일상생활에서 그리스도인다운 열매가 맺히지 않는다면 여러분은 성령 충만을 받은 사람이라 할 수 없는 것입니다.
이 에베소서의 성령 충만의 내용은 갈라디아서의 성령의 열매로 이어지는 것이지요.
 
(갈5:22-23) 22    그러나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기쁨과 평화와 인내와 친절과 선함과 신실과
23    온유와 절제입니다. 이런 것들을 금할 법은 없습니다.
 
이게 바로 성령 충만한 자에게서 나오게 되는 성품들인 것입니다.
여러분의 삶에 이러한 영적인 그리스도인의 성품이 나오고 있으신가요? 여러분의 삶 속에서 이러한 용서와 사랑과 인내와 자비가 나오고 있습니까? 아니면 여러분의 불편함을 해소하기 위해 남을 멸시하고 죽이고 있습니까?
 
성령이 오셔서 우리의 눈을 뜨게 하셔서 그리스도의 몸으로 연합시키시고 죄와 의와 심판에 대해 깨닫게 하시고 하나님의 백성으로 만들어 가십니다. 그래서 성령 세례를 받은 사람들은
하나님이 원하시는 거룩을 향해 가게 되어있습니다. 예수라는 줄기에 붙어있는 자들은 당연히 열매가 맺히게 되어있는 것입니다. 거기에 성경 공부나 설교와 같은 학습이 방법으로 개입되는 것이고 그러한 학습과 훈련 속에서 성도는 예수 그리스도의 성품을 배우고 익히게 되는 것이며 그러한 성도의 모습을 우리는 성령 충만한 자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그리스도인이라는 사람들은 예수라는 머리가 지시하는 대로 움직이지 않는 것 같습니다. 머리가 지시하는 대로 움직이지 않는 것을 무엇이라 하나요? 중풍이 걸렸다고 하지요? 여러분 뇌성마비 장애인을 본적이 있으세요? 밥숟가락을 집어 입으로 넣으라는 머리의 명령을 손이 따라주지 않아 제대로 밥도 못 먹습니다.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이 그렇다는 이야기입니다. 예수님이 시키시는 일을 전혀 따라하지 않는 뇌성마비 교인들 그게 오늘날 교회의 모습 아닙니까? 그런데 어디서 성령 충만을 이야기 합니까? 그것을 잘 하는 것이 ‘성령 충만’인데 거룩을 향해 자라가라는 예수님의 요구와 명령에는 전혀 관심이 없는 이들이 무슨 성령 충만을 이야기 하는 것입니까?  그러니까 성도는 예수님을 주와 그리스도로 시인을 해야 하는데 자신을 구원하신 메시아 그리스도 예수로는 인정해도 예수님을 자신의 주인으로는 인정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건 반쪽짜리 복음입니다. 예수님은 메시아요 그리스도이시지만 우리의 주인 이십니다. 입만 열면 예수님을 주님이라 부르면서 왜 예수님을 종 부리듯이 부리려고만 하시나요?
 
성경은 그렇게 거듭났음에도 불구하고 열매가 맺히지 않는 자들 즉, 성령 충만하지 않은 자들을 가리켜 “성령을 소멸하는 자” ”성령을 근심하게 하는 자라”고 이야기합니다.
 
(살전5:19) 성령의 불을 끄지 마십시오
 
(엡4:30) 하나님의 성령을 슬프게 하지 마십시오. 성령 안에서 여러분은 구속의 날을 대비해서 인치심을 받았습니다.
 
구속의 문제에 있어서는 하나님께서 전적인 주권을 가지고 일하심으로써 당신이 원하시는 자를 택하시고 이끌어 가시지만 그리스도인의 성장의 문제에 있어서는 그와는 대조적으로 상당한 분량을 인간에게 책임과 의무로 지우십니다. 그래서 신자의 마음속에서 혹은 성경을 통해 외치시는 성령의 조명을 무시하고 자기 마음대로 옛 사람의 습관을 좇아 막 사는 사람을 성령을 소멸하는 자, 성령을 근심케 하는 자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성경은 성령의 충만을 받으라고 요구하시고 명령하십니다. 성령 하나님은 우리 안에 들어오셔서 우리에게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십니다. 우리는 기도와 말씀으로 무장하며 그 위에 우리의 열심을 보태 성령의 조명을 잘 좇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 것이 바로 성령 충만한 삶입니다.
 
분명 우리를 구원하시고 하나님의 백성으로 만들어 가시는 그 모든 것을 하나님께서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령 세례를 받은 자가 성령의 조명에 거부할 수도 있고 협력할 수도 있습니다. 영적으로 깨어있는 자들은 그러한 성령의 조명에 민감하게 반응을 하게 되지만 은혜의 수단인 기도와 말씀과 성례를 소홀히 하는 자는 절대 그러한 이끄심에 민감하게 반응 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들은 ‘성령 충만’과 전혀 상관없는 자들인 것입니다.
 
여기에서 성령을 소멸한다는 말의 원어의 뜻은 “억누르다” “묶다”의 뜻입니다. 성령을 소멸한다는 것은 성령의 자극을 무시하고 계속해서 죄에 이끌려 가는 것을 성령을 소멸한다고 하는 것입니다. 계속해서 성령의 인도하심을 무시하고 반대하면 점점 그 양심의 소리에 무감각해지니까요. 그러다보면 결국 영적 귀머거리가 되어 엉터리 같은 삶을 살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성도는 그 안에 성령이 계시기에 그러한 엉터리 같은 삶 속에서 절대 행복을 느낄 수 없습니다. 고통스럽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우리에게 ‘성령 충만’을 받으라고 반복해서 요구하는 것입니다.
아울러 성령을 근심하게 한다는 것도 성경의 문맥을 보면 거룩한 삶을 살지 않는 것을 성령을 근심하게 한다고 합니다.
 
(엡4:22-32)
22    여러분은, 지난날의 생활방식에 얽매여서 허망한 욕정을 따라 살다가 썩어 없어질 옛 사람을 벗어버리고,
23    마음의 영을 새롭게 하여,
24    하나님을 따라 참된 의로움과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으십시오.
25    그러므로 여러분은 거짓을 버리고,  각각 자기 이웃과 더불어 참된 말을 하십시오. 그것은 우리가 서로 한 몸의 지체들이기 때문입니다.
26    화를 내더라도 죄는 짓지 마십시오. 해가 지도록 노여움을 품고 있지 마십시오.
27    악마에게 틈을 주지 마십시오.
28    도둑질을 하는 사람은 다시는 도둑질을 하지 말고, 수고를 하여, 제 손으로 떳떳하게 벌이를 하십시오. 그리하여 오히려 궁핍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줄 것이 있도록 하십시오.
29    나쁜 말은 입 밖에 내지 말고,  덕을 세우는 데에(다른 고대 사본들에는 '믿음을 세우는데') 필요한 말이 있으면 적절한 때에 해서, 듣는 사람에게 은혜를 끼치게 하십시오.
30    하나님의 성령을 슬프게 하지 마십시오. 성령 안에서 여러분은 구속의 날을 대비해서 인치심을 받았습니다.
31    모든 악독과 격정과 분노와 소란과 욕설은, 모든 악의와 함께 내버리십시오.
32    서로 친절히 하며, 불쌍히 여기며,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여러분을(다른 고대 사본들에는 '우리를)용서하신 것같이', 서로 용서하십시오.
 
이런 것들을 하지 않는 사람을 우리는 성령 충만하지 못한 사람, 성령을 근심케 하는 사람이라고 합니다.
 
신자 안에 들어오신 성령 하나님은 강제로 일을 하지 않으십니다. 성령은 우리의 의지를 거스려 가며 억지로 끌고 가시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성도의 견인을 잘못 오해하고 있는 사람들이 있는데 한번 구원받은 자는 성령께서 억지로 끌고 가신다는 게 견인이 아닙니다. 본인은 계속해서 죄를 지으려고 하는데 성령 하나님이 그 사람의 마음을 요술 지팡이로 선하게 만들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성령께서 우리가 잘 못 가고 있는 방향에 대해 조명하시고 각성케 하시고 깨닫게 하시지만 우리가 의지를 발동해서 따라올 때까지 기다리십니다. 억지로 끌고 가면 나중에 심판 때에 하나님께서 할 말이 없으시게 됩니다.
 
우리는 우리의 의지를 발동하여 선을 따라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인격적으로 대우하시며 인격적인 가족이 되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올바른 길로 돌아올 때까지 기다리시는 것입니다.
셋 셀 때까지 안 하면 다섯까지 세시면서 기다리십니다. 그러나 명심하세요. 그렇게 하나님이 기다리시는 동안 여러분은 괴롭습니다. 성도는 결코 편하게 성령을 소멸하며 살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인생채찍 사람 막대기, 가시와 담으로 여러분을 계속 설득하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이 돌이키셔야 합니다.
 
성령 충만한 사람들은 이렇게 올바른 교리, 말씀으로 무장하여 언제 어디서든 바른 복음을 자랑하며 전하는 자들이며 거룩한 삶을 추구하며 자기의 의지를 발동하여 힘겹지만 성령의 음성을 따라 사는 사람들을 성령 충만한 사람들이라 말하는 것입니다.  자기에게 손해가 오더라도 성령하나님의 음성을 좇아 사는 사람들, 성령 충만한 사람들입니다.
이들의 삶과 하나님께 졸라서 어떻게 해서든지 자기가 필요한 것을 얻어내려는 오늘날 많은 자칭 기독교인들의 삶과 어떤 게 올바른 그리스도인의 삶이겠습니까?
 
예수께서 왜 병을 고쳐주시고 귀신을 쫓아내시고 가서 아무에게도 이야기 하지 말라고 했는지 아세요? 아직 성령이 임하기 전이기에 눈에 보이는 현상만을 본 사람들에 의해 엉터리 복음이 전해질까 봐 그러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병이나 고쳐주고 오병이어로 먹을 것이나 만들어 주고 귀신이나 쫓아 주기 위해 이 땅에 오신 것이 아니라 십자가를 지고 죄를 대속하러 오신
분이시기에 그들이 나가서 그저 세상의 복이나 주는 예수를 전할까봐 아직 십자가를 지시기 전이고 성령이 임하시기 전이므로 아무 말도 하지 말라고 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많은 교회들이 예수님이 우려하시던 그 엉터리 복음을 전하고 있습니다. 십자가를 지는 그리스도인의 삶을 이야기하지 않고 병을 고쳐주고 복을 내려주며 귀신이나 쫓아내 주는 것이 성령의 사역이라 전하고들 있는 것입니다.
 
기독교는 신본주의입니다. 절대 인본주의가 아닙니다. 나를 위해 하나님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위해 내가 존재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나에게 아무런 이익이나 편의가 오지 않아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것이라면 기꺼이 기쁜 마음으로 감수하는 것이 기독교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된 것이 나를 위해 존재하는 해결사 하나님이 되어버렸습니다. 성령은 그런 일 하시러 오신 분 아닙니다. 성령 충만함이 무엇인지 알았으면 이제부터 의지를 발동하여 성령 충만한 삶을 살아내십시오.
 
지난 금요일에 제가 잘 아는 장로님이 우리 교회를 방문하셔서 저에게 어린 시절 이야기를 해 주셨습니다. 누님께서 클래식을 전공하고 계셨는데 어느 날 동생에게 클래식 공연을 보여주고 싶으셔서 좋은 공연이 들어온 날 함께 클래식 공연을 보러 가셨다고 합니다. 공연이 시작되고 거기 모인 대부분의 사람들이 감동적인 공연에 심취해서 음악을 듣고 있는데 공연 시작 10분이 경과한 시점부터 코를 골면서 주무시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보다 못해 누님이 공연이 끝나기도 전에 끌고 나오셨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 장로님께서는 승부 근성이 강하신 분이십니다. 그날로 클래식 음악에 관한 책을 사셔서 그 음악의 작곡가들이 어떤 의도로 그 음악을 작곡했는지 열심히 공부를 하시고 그 음반들을 사서 다시 들으셨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 작곡가의 의도와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를 알고 들으니까 너무 재미있더라는 것이지요. 그러면서 오늘날 예수를 믿는다는 사람들이 성경의 저자이신 하나님의 저작의도를 모르고 성경을 보니 그렇게 힘이 없고 이해를 못하는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그 저작 의도를 궁금해 하지도 않는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성경이라는 설교에서도 다루었고 새 가족 반에서도 두 시간에 걸쳐서 창세기부터 계시록까지 전체가 무엇을 이야기하는 지를 공부하지 않습니까?
 
성경은 왜 기록 되어있으며 그 내용이 무엇인지 여러분은 이제 아시잖아요? 성경은 하나님의 백성들이 자기들이 어떻게 해서 구원을 받게 되었는가를 알게 하기 위해서 쓰인 책입니다. 우리가 확인했듯이 성경에는 예수에 관해서만 쓰여 있습니다. 우리는 누구이고 예수님은 어떤 분이시며 그 분이 우리에게 주신 은혜가 무엇인지를 설명해 놓은 것이 성경이란 말입니다. 그러니까 성경은 우리의 구원에 관해서만 적혀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거기서 엉뚱한 것들을 찾아내서 미처 하나님이 상상하지도 못하신 심오한 진리들을 생각해 내고 엉엉 울기도 합니다. 그리고는 은혜 받았다고 합니다. 그건 마치 비발디 사계 중에 봄을 들으면서 가을의 낙엽을 떠올리며 눈물짓는 거나 마찬가지입니다. 그 모습을 만일 비발디가 본다면 어떤 생각을 하겠습니까?
 
그건 비발디에 대한 모욕입니다. 비발디는 봄을 열심히 그려놓았는데 낙엽을 떠올린다는 것은 그에 대한 모욕입니다. 여름을 들으면서 썰매를 생각하는 것입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여러분이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주신 성경의 저작의도를 완전히 다르게 이해하고 있다면 그건 하나님에 대한 모독인 것입니다. 잘 분별하세요.
여러분이 ‘성령세례’라든가 ‘성령 충만‘이라든가 ’성령의 은사‘등에 대해서 잘못 알고 있다면 여러분이 아무리 가슴속에서 사이다가 솟는 짜릿한 경험을 한다고 해도 그것은 하나님에 대한 모욕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잊지 마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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