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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ome >  칼럼/책 >  그런 기독교는 없습니다
* 본 설교는 2004년도 개척 첫해에 기초교리 공부 내용입니다
 
작성일 : 13-04-15 20:49
   10. 성령(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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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글쓴이 : njsmyrna
    조회 : 3,185  


(눅3:16-17)
16    그래서 요한은 모든 사람에게 대답하여 말하였다. "나는 여러분에게 물로 세례를 줍니다. 그러나 나보다 더 능력이 있는 분이 오십니다. 나는 그의 신발끈을 풀 자격조차 없습니다. 그는 여러분에게 성령과 불로  세례를 주실 것입니다.
17    그는 자기의 타작 마당을 깨끗이 하려고, 손에 키를 들었으니, 알곡은 곳간에 모아 들이고, 쭉정이는 꺼지지 않는 불에 태우실 것입니다."
 
한국에 신유집회가 많이 열리는 기도원들이 몇 군데 있습니다. 저도 대학시절 같은 교회 주일 학교 교사이면서 제가 다니던 대학의 사범대학 교수이셨던 어떤 집사님의 부탁을 받고 그런 곳에 찬양을 하러 몇 번 간 적이 있습니다. 엄청난 규모의 기도원에 도착을 해서 먼저 기도원 원장에게 인사를 드리러 가야한다고 해서 그 원장님의 방으로 갔습니다. 마침 몇몇 사람들과 그 곳 기도원 원장이 그날 점심 집회 때 거둔 헌금을 계수하고 있었습니다. 언뜻 눈으로 봐도 어마어마한 액수였습니다. 거기다가 헌금 바구니에 들어있는 반지며 시계, 목걸이 등 값비싼 귀금속들을 이리 저리 보면서 그 곳에 있는 사람들끼리 "너 가져라""내가 갖으마." 하고 있었습니다. 그렇게 어마어마한 헌금과 헌물들을 보니 병을 고치겠다는 병자들과 가족들의 애 타는 염원이 보이는 듯했습니다. 그들의 간절함이 얼마나 컸으면 그렇게 자신의 몸에 있는 귀금속까지 헌금 바구니에 넣었겠습니까?
 
그 기도원에서 간혹 “암 환자가 낳았다. 버거스씨 병에 걸린 사람이 낳았다” 등등 신유의 역사가 일어났었음을 보여주는 증거도 있었습니다. 몇몇은 나와서 간증도 했습니다.
다리를 절룩거리며 나온 어떤 남자가 펄떡 펄떡 뛰면서 그 기도원 원장의 신통력을 입증하는 제스추어를 해 보이기도 했습니다. 제가 보기에 거기에 하나님은 없었습니다. 오로지 그 원장을 통해서 병을 고쳐서 이 땅에서 좀 더 오래 살고 싶어 하는 간절한 병자들은 있었을지언정 하나님이 오늘 부르신다 해도 찬송하며 가겠다는 신앙인들을 보지는 못했던 것 같습니다.
그 곳의 강대상 위에는 커다랗게 ‘성령의 역사를 체험하라’는 표어가 붙어 있었습니다.
그리고 거기 있는 사람들의 대부분이 ‘성령이여, 성령이여’를 외치고 있었습니다.
 
저는 대학 시절부터 찬양 사역을 했었기에 사람들이 많이 모인다는 여러 집회에 참석할 일이 많았습니다. 그렇게 이곳저곳을 다니다보면 가끔 이해 할 수 없는 일들이 많이 일어납니다.
갑자기 앞에서부터 어떤 이들이 몸을 떨면서 춤을 추기 시작하면 이내 온 회중이 무슨 춤의 신이 임한 것처럼 전체가 춤을 추기 시작하는 그런 모습도 보았고 (그들은 그것을 성무라 하더군요) 회중 저쪽 구석에서 갑자기 배를 쥐고 깔깔거리며 웃기 시작하면 점점 그 웃음이 퍼져서 온 회중이 다 웃느라고 배꼽이 빠지는 것도 보았습니다. 갑자기 온 회중이 알아듣지 못할 방언으로 찬양을 하는 것도 보았고, 휠체어에 앉아있던 노인이 집회 중간에 벌떡 일어나 예배당 안을 뛰어다니는 그런 것도 보았습니다.
그들은 그 모든 것들을 성령의 사역이라고 이야기를 합니다. 그리고 그들은 성령 세례를 받아야 그런 일에 참여할 수 있다고, 성령을 받아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소위 second blessing이라는 것이지요.
 
신비나 기적이 있는 곳에 항상 성령의 이름이 회자되고 그들이 말하는 성령세례를 받지 않은 자들은 머쓱해서 머리나 긁적이다가 돌아설 수밖에 없는 그런 분위기가 의외로 오늘날 교회에 많다는 것입니다.
 
실제로 통계에 의하면 지구상의 인구를 60억으로 잡았을 때 16억이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는 사람들이랍니다. 그 중에 로만 캐톨릭이 9억이 넘고 성공회가 5천만 명, 오순절 은사 주의자들이 3억3천만 명이며 복음주의 기독교를 믿는다는 사람들이 약3억5천만 명이라 합니다.
 
그런데 오순절 은사주의자들 말고도 자신들은 복음주의 기독교 안에 들어가 있다고 믿는 사람들과 로만 캐톨릭과 성공회 안에서도 그러한 신비주의나 은사주의자들이 꽤 많이 있습니다. 아니 거의 대부분이라고 말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신비주의와 은사주의는 기독교를 잠식해 가고 있습니다. 참으로 엄청난 수의 사람들이 그런 신비적이고 기적적이며 기복적인 신앙에 빠져 있는 것을 우리는 어렵지 않게 발견합니다.
이러한 신비주의 운동을 오순절 운동이라 하는데 이 운동은 20세기 초반부터 서서히 불기 시작한 운동입니다.
 
그러한 신비주의 운동은 1901년 미국 감리교회 전통에 있던 charles parham으로부터 출발되었습니다. 그가 지니고 있던 second blessing의 신학적 틀 안에서 형성되어 갔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러한 이들의 주장에 따르면 성도는 구원을 받은 이후에 반드시 second blessing을 받아야 한다고 합니다. 그들은 두 번째 second blessing을 받아야 성도는 완전 성화 될 수 있다고 주장했습니다. 좀 더 나은, 성숙한 신앙인이 되기 위해서는 반드시 성령세례를 받아야 한다는 것이지요. 그렇게 되면 완전 성화도 가능하게 된다는 것이 그들의 주장입니다. 그게 정말 가능한가요? 우리가 이 땅에서 완전성화가 된다면 천국이 왜 필요합니까? 물론 나중에는 완전성화를 주장했던 요한 웨슬레도 자기가 말한 것이 “자범 죄를 짓지 않는 상태”라고 많이 양보를 했습니다만 그럼에도 여전히 완전성화를 위해 성령세례가 필요하다는 주장은 오늘날도 위세를 떨치고 있습니다.
 
이 parham목사가 캔사스의 어느 성경 학교에서 학생들에게 가르치면서 능력 있는 그리스도인의 삶을 살기 위해서는 성령의 은사를 경험함으로 가능한 것이라고 가르쳤고 그가 안수하자 Agnes Ozman이라는 학생에게서 방언이 터졌습니다. 이것이 오순절운동의 출발이었습니다. 당시 parham목사의 이런 운동은 좋은 호응을 얻지 못했고 결국 그는 1906년 LA의 azusa거리로 가서 그의 가르침을 전했습니다. 거기서 폭발적으로 이 오순절 운동에 가속이 붙어서 오늘날까지 이르게 된 것입니다.
 
 그들은 성령세례를 강하게 주장하고 있습니다. 성령세례를 받아야만 능력 있는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처럼 인식하고 행하고 있습니다.
그러한 오순절 파의 영향으로 어떤 교회에서는 구역예배에서 방언을 가르치는 교회도 있습니다. 성령을 받아 방언을 해야만 능력 있는 그리스도인이 될 수 있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이 LA에도 그런 교회가 많습니다. 능력 있는 그리스도인이 되고 싶은 그 열정은 높이 치하하는 바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연습을 해서라도 방언을 하고 싶어 하는 것은 복음이 무엇인지 정확히 모르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이 성령 세례의 가장 대표적인 증상으로 내세우는 방언은 은사입니다.
 
은사가 뭡니까?
하나님이 주시는 선물이라는 뜻입니다. 은사는 받은 자격이 없는 자에게 자기도 모르게 주어지는 것을 은사라고 하는 것입니다. 요구해서 받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선물은 주는 사람 마음대로 주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러한 은사를 연습을 해서 얻어낼 수 있다고 하는 것은 언어도단이지요.
 
1901년까지 기독교의 역사에서 방언에 대한 보고(報告)는 한 건도 없었습니다. 왜 하나님은 1900년간 방언을 닫아버리셨을까요?
오죽하면 어거스틴이 ‘왜 방언이 사라졌을까?‘ 에 대한 책을 쓰려는 시도까지 했을 만큼 방언은 초대 교회 이후로 철저하게 사라졌었습니다.
과연 성경이 말하는 성령세례라는 것이 오순절 파들이 주장하는 그런 것일까요?
기적이 임하고 능력이 임하며 병자가 낫는 그런 것을 성령세례라고 하는 것일까요?
 
한국에 가면 천마사라는 곳이 있습니다. 유명한 절입니다. 그 곳에서도 기독교의 오순절파들이 행하는 은사집회와 방불한, 신의 이름만 부처님으로 부르는 똑같은 집회가 있습니다. 서울서도 그곳만 가는 관광버스가 생길 정도로 유명한 곳입니다.
중들이 안수하고 방언하고 안찰을 합니다. 그리고 그곳에서도 암 환자가 낫고 위장병환자가 고침을 받고, 아기를 낳지 못하는 사람들이 아이를 얻기도 하는 역사가 일어납니다.
거기서 일어나는 일은 그들이 하나님 대신 부처를 부르고 있을 뿐 기독교의 신유 기도원이나 여러 은사 집회들에서 일어나는 일과 조금도 다르지 않습니다.
 
그러면 그것은 절에서 일어나는 일이므로 악령 세례입니까?
여러분 성령 하나님이 과연 그런 일을 하러 오시는 것일까요? 왜 우리는 성령을 받아야 하는 것이며 성경이 말씀하고 있는 성령세례가 무엇인지 오늘 성경을 통해 명확하게 밝혀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세례요한은 “나는 물로 세례를 주거니와 예수님은 불과 성령으로 세례를 주신다.”고 이야기를 합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도 부활하셔서 승천하시기 직전에 제자들에게 같은 말씀을 하십니다.
 
(행1:5) 요한은 물로  세례를(또는 '침례') 주었으나, 너희는 여러 날이 되지 않아서 성령으로  세례를 받을 것이다" 하셨습니다.
 
여러분 세례가 무엇이라 했나요?
세례는 죽어야 할 죄인이 그리스도와 연합하여 죽고 그리스도와 합하여 새 사람으로 살아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머리에 물을 뿌려 그가 물에 잠겨 죽은 자라는 것을 상징하는 것이고 그가 새 사람으로 살아 올라오는 것을 세례라 합니다.
이렇게 성경이 말씀하고 있는 세례라는 것은 연합의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골로새서를 보면 그 세례의 의미가 잘 나와 있습니다.
 
 (골2:12) 여러분은  세례로 그리스도와 함께 묻혔고, 또한 그를 죽은 사람 가운데서 일으키신 하나님의 능력을 믿는 믿음으로,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일으키심을 받았습니다.
 
여기서 가장 중요한 단어가 바로 “함께”라는 단어입니다. 세례란 바로 “함께”라는 개념인 것입니다.
 
그런데 세례요한이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세례를 주었습니다. 그렇다면 그 세례는 무슨 세례입니까? 오늘 본문은 그 요한의 세례를 “회개의 세례”라 합니다.
 
(행13:24) 그가 오시기 전에, 요한이 먼저 회개의 세례를 모든 이스라엘 백성에게 선포하였습니다
 
이렇게 성경은 요한의 세례를 회개의 세례라 합니다.
회개의 세례란 세례를 받는 자신들이 죄 사함을 받아야만 하는 불가능한 인간들임을 고백하고 누군가 자신들을 건져주지 않으면 안 된다는 고백을 하는 것이 바로 회개의 세례였습니다. 그러니까 ‘나는 죄인입니다’라는 고백과 함께 내가 용서 받아야 할 죄인 속에 있는 자라는 것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역시 연합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공생애의 시작을 바로 그 세례를 받으심으로 시작하십니다.
예수님이 무슨 죄가 있으시기에 회개의 세례를 받으시는 걸까요? 그것은 바로 예수님께서 죄인인 우리 인간들과 동일시되심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신 그분이 우리 죄인들을 품에 안으시고 우리를 대표하여 십자가의 형벌을 받으시기 위해 우리 죄인과 연합되시는 장면인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 하나님의 백성들을 구원하시기 위해 죄가 없으신 분임에도 불구하고 인간의 몸을 입고 죄인과 연합되기 위해 이 땅에 오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요한의 세례를 받으심으로 나도 그들과 동일한 위치에 와 있는 것을 인정하시는 것이지요. 그것을 내포적 대신 ‘inclusive representative'라 합니다. 우리 인류를 대표하기 위하여 우리와 동일시되셨다는 것이지요.
 
그런데 우리는 이제 요한의 세례를 받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습니다.
 
(행2:37-38)
37 사람들이 이 말을 듣고 마음이 찔려서 " 형제 여러분, 우리가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 하고, 베드로와 다른 사도들에게 말하였다.
38    베드로가 대답하였다. "회개하십시오. 그리고 여러분은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의 용서함을 받으십시오. 그러면 성령을 선물로 받을 것입니다.
 
예수그리스도께서 요한의 세례에 동참하심으로 우리 죄인들과 동일시 되셨다면 이제 우리는 예수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음으로 예수 그리스도와 연합된다는 뜻입니다.
 
사도 바울이 로마서에서 그 복된 소식을 이렇게 설명합니다.
 
(롬6:3-8)
3    여러분은, 그리스도 예수와 연합하는  세례를 받은 우리 모두가, 그분의 죽으심과 연합하는  세례를 받았다는 것을 알지 못합니까?
4    그러므로 우리는 그분의 죽으심과 연합하는  세례를 받음으로써, 그분과 함께 묻혔습니다. 이것은, 그리스도께서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아버지의 영광으로 살리심을 받은 것과 같이, 우리도 새로운 생명 가운데서 살아가게 하려는 것입니다.
5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같은 죽음으로 그와 연합하는 사람이 되었으면, 또한 분명히, 그의 부활하심과 같은 부활로 그와 연합하는 사람이 될 것입니다.
6    우리는, 우리의 옛사람이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달려서 죽은 것이, 죄의 몸을 멸하여서, 우리가 다시는 죄의 노예가 되지 않게 하려는 것임을 압니다.
7    죽은 사람은 이미 죄의 세력에서 해방되었습니다.
8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으면, 그와 함께 우리도 또한 살아날 것임을 믿습니다.
 
세례라는 것은 이렇게 연합의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는 다는 것은 나는 이제 예수와 함께 죽고 예수의 그 사심, 즉 부활에 동참하는 자가 된다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요한의 세례는 왜 물로 주는가?
 
(벧전3:20-21)
20    그 영들은, 옛적에 노아가 방주를 짓고 있는 동안에, 곧 하나님께서 아직 참고 기다리실 때에, 순종하지 않던 자들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 방주에 들어감으로써 물에서 구원받은 사람은, 겨우 여덟 사람밖에 없었습니다.
21    그것은 지금 여러분을 구원하는 7)세례를 미리 보여 준 것입니다. 세례는 육체의 더러움을 씻어 내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힘입어 선한 양심을 가지려고, 하나님께 드리는 호소입니다.
 
노아의 방주는 무엇을 상징하는 것이라 했나요? 새 가족 성경공부 때 말씀드렸지요? 노아의 방주는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한다고 했습니다. 저주의 물을 방주가 대신 맞고 그 안에 있는 하나님의 택하신 피조물들이 살아나는 것, 그게 노아의 방주가 담고 있는 복음입니다. 그래서 방주는 하늘의 모형으로 3층으로 되어 있는 것이라 했잖아요.
 
성경에서 물이라는 것은 모든 육체를 그 아래로 삼켜버려 사망으로 끌고 가는 것으로 상징이 됩니다. 물은 그렇게 저주와 심판과 죄와 악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요한 계시록의 새 하늘과 새 땅을 묘사할 때 ‘다시 바다가 있지 않겠고’라고 묘사를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저주의 물에서 건짐을 받기 위해 우리가 타야하는 방주, 배는 그 물이 없으면 뜨지 않는다는 것을 기억하세요. 그게 무슨 의미인가? 그러니까 물은 사망을 초래하기는 하지만 어떤 것에게는 그것이 힘이기도 하고 생명이기도 한 것이라는 말입니다. 쉽게 말해 이런 것입니다. 우리 자체로서는 물에 빠지면 죽지만 배 속에 들어가 있으면 그 물로 인해서 우리는 오히려 죽어야 할 자들과 구별되어지고 분리되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요한의 세례는 물 아래 죽어 마땅한 자라는 것을 인정하고 물 위에 뜰 수 있는 어떤 나 아닌 다른 분에 의해 구원을 얻을 것을 소망하는 것이 동시에 내용으로 들어있는 것입니다. 그런 세례의 내용은 고린도 전서에도 나옵니다.
 
(고전10:1-2)
1      형제자매 여러분, 나는 여러분이 이 사실을 알고 지내기를 바랍니다. 우리 조상들은 모두 구름의 보호 아래에 있었고, 바다 가운데를 지나갔습니다.
2    이렇게 그들은 모두 구름과 바다 속에서 세례를 받아, 모세에게 속하게 되었습니다.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나와야 하는데 그들에게는 수십 마일 넓이의 넘실거리는 홍해를 건너서 애굽을 나올 능력이 없습니다.
모세는 애굽 군사를 때려죽이고 이미 애굽에서 광야로 나왔다가 다시 들어간 사람입니다.
(이것은 상징이다)그러므로 애굽에서 나올 수 있는 실력이 있는 자는 모세 한 사람 뿐입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나오기 위해서는 모세가 그들을 자기 품에 안고 애굽을 탈출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 모세를 앞 세워 이스라엘을 건져 내셨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이스라엘이 모세에게 속하여 세례를 받았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이것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가 받을 구원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저주로부터 살아날 수 있는 사람은 예수님 한 분뿐입니다. 왜냐하면 그 분만이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율법을 모두 지키실 수 있는 분이고 하나님이 그토록 미워하시는 죄와 아무 상관이 없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죄로 인해 다 죽어야 할 이 저주의 바다 같은 세상에서 방주인 예수님 한 분을 구원하십니다. 하나님이 내리시는 그 무시무시한 저주의 물위로 둥둥 뜨는 배가 있으니 그 분이 바로 예수님인 것입니다. 우리는 바로 그 예수 안에 들어가서 구원을 받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창세전에 부르신 교회를 모두 예수님 안에 넣으셔서 구원을 하십니다.
 
그러면 불과 성령으로 세례를 받는다는 것은 무엇을 이야기하는가?
불은 저주받아 죽어야 할 부분들을 모두 태우는 것입니다.
 
(고전3:10-15)
10    나는 하나님께서 나에게 주신 은혜를 따라, 지혜로운 건축가와 같이 터를 닦아 놓았습니다. 그런데 다른 이가 그 위에다가 집을 짓습니다. 그러나 어떻게 집을 지을지 각각 신중히 생각해야 합니다.
11    아무도 이미 닦아 놓은 터 곧 예수 그리스도 밖에 또 다른 터를 놓을 수 없습니다.
12    누가 이 터 위에 금이나 은이나 보석이나 나무나 풀이나 짚으로 집을 지으면,
13    각 사람의 업적이 드러날 것입니다. 그 날이 그것을 밝히 보여 줄 것입니다. 그 날은 불로 나타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 불이 각 사람의 업적이 어떤 것인가를 검증하여 줄 것입니다.
14    어떤 사람이  지은 작품이(또는 '세워 놓은 일')그대로 남으면, 그는 삯을 받을 것이요,
15    어떤 사람의  작품이 타 버리면, 그는 손해를 볼 것입니다. 그 사람은 구원을 받을 것이지만, 마치 불 속을 거쳐서 살아나오듯 할 것입니다.
 
불은 이렇게 태워버리는 것, 심판을 상징합니다. 생명이 아닌 것을 심판하는 것을 말합니다. 그 모든 탈것들 속에서 건져내어짐을 받는 것이 바로 성령에 속한 것들입니다.
그러니까 물이 쏟아지면 물속에 빠져 죽는, 저주받아 죽는 것들이 불로 타죽게 되는 것들이고 방주로 말미암아 물위에 뜨는 부분이 바로 성령에 속한 것들인 것입니다. 방주로 말미암아 죽어야 할 것이 죽지 않고 뜨는 것처럼 성령 때문에 불에 타야 할 것들이 건져내어짐을 받는 것입니다. 그게 불과 성령으로 세례를 받는다는 어구가 담고 있는 내용인 것입니다.
 
그러니까 구원 얻은 성도들은 모두 불과 성령으로 세례를 받은 자들입니다.
불로 인해 죽어야 할 세상과 함께 죄와 어두움이 모두 죽고 성령에 의해 새롭게 태어난 자들을 우리는 불과 성령으로 세례를 받은 자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그렇게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성령이 오십니다. 성령이 그 속에 안 계시면 절대 예수님을 그리스도라 인정할 수 없다고 바울 사도가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나중에 공부하겠지만 옛 언약과 새 언약에 보면 하나님께서 내가 너희에게 새 영을 부어 너희 마음을 새롭게 창조하여 너희를 구원해 내시겠다고 하시는 구절이 나옵니다. 바로 그 영이 성령이신 것입니다. 우리 죄인들을 새롭게 창조하시기 위해 우리 안에 들어오시는 분, 그 분이 바로 성령 하나님이신 것입니다.
 
(고전12:3) 그러므로 나는 여러분에게 알려드립니다. 하나님의 영으로 말하는 사람은 아무도 "예수는 저주를 받아라" 하고 말할 수 없고, 또 성령으로 감동하지 않고서는 아무도 "예수는 주님이시다" 하고 말할 수 없습니다.
 
이렇게 이미 예수를 주라 고백하는 여러분의 안에는 성령이 와 계십니다.
그 성령이 어떤 역할을 한다고 했지요? 우리를 저주의 물위로 뜨게 하시는 역할을 하신다고 했잖아요. 로마서로 가보지요.
 
 (롬8:9-11)
9    그러나 하나님의 영이 여러분 안에 살아 계시면, 여러분은 육신 안에 있지 않고,  성령 안에 있습니다.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닙니다.
10    또한 그리스도께서 여러분 안에 살아 계시면, 여러분의 몸은 죄 때문에 죽은 것이지만, 영은 의 때문에 생명을 얻습니다.
11    예수를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살리신 분의 영이 여러분 안에 살고 계시면, 그리스도를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살리신 분께서, 여러분 안에 계신 자기의 영으로 여러분의 죽을 몸도 살리실 것입니다.
 
우리 육신이 아무리 이렇게 불가능해 보이고 추악해 보여도 우리 안에 성령이 계시는 한 우리는 절대 저주 아래 떨어질 수가 없습니다. 성령께서는 완전한 하나님이십니다. 그 분은 예수께서 영광스러운 하늘 보좌로 복귀하셨듯이 반드시 하늘 보좌로 올라가실 분이십니다. 그 분이 우리 안에 계십니다. 따라서 당연히 우리도 함께 올라가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게 성령을 받은 자들의 고귀한 신분이며 변할 수 없는 운명인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예수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주시고자 하시는 그 구원의 보증으로, 내가 반드시 너희들을 내 백성으로 만들어 너희를 새 하늘과 새 땅으로 인도하고야 말 것이라는 보증으로 성령을 우리에게 보내 주신 것입니다.
 
(고후5:5) 이런 일을 우리에게 마련해 주시고, 그 보증으로 성령을 우리에게 주신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그렇지요? 성경은 왜 우리가 성령세례를 받아야 하는지를 반복해서 설명해 주십니다.
 
(롬8:1-2)
1    그러므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사람들은 정죄를 받지 않습니다.
2    그것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생명을 누리게 하는  성령의 법이 여러분 각자를 죄와 죽음의 법에서 해방하여 주었기 때문입니다
 
무엇이 죄와 사망에서 우리를 해방시키신다고요? 성령 하나님이,  우리가 뭐가 잘나서가 아니라, 우리의 노력이 아니라 성령이 와 계시기 때문에 우리가 죄와 사망에서 풀려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 저주의 물과 심판의 불에 성령은 탈 수 없고 빠지실 수 없는 분이기에 우리는 그 성령 때문에 안전하게 물 위로 뜨게 되는 것이고 불 가운데서 건짐을 받아 해방되는 것입니다.
바로 그러한 이유로 성령께서 오순절 날 오시는 것입니다.
 
오순절이 무엇입니까?
유대인의 절기 중에 중요한 삼대 절기가 뭐라 했지요? 아빕월 14일인 유월절, 그리고 그로부터 50일 째인 오순절, 그리고 초막절(장막절, 수장절)입니다. 유월절은 우리가 아는바 대로 참 제물이신 유월절 어린양,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가 구원을 받게 된 것을 기념하는 절기입니다.
유월절 다음날부터 무교절이고 유월절 후 안식일 바로 다음날이 첫 이삭 드리는 날입니다.
그날 예수님이 부활하셨습니다.
 
첫 이삭 드리는 날로부터 50일 째 되는 날이 바로 오순절인데 오순절은 칠칠절이라고도 합니다. 칠 곱하기 칠은 사십구에서 나온 말입니다.
 
안식일은 7일째입니다. 안식일이 뭐라 했나요?
천지창조는 하나님께서 하신 것이며 하나님의 그 창조에 우리가 보탤 것은 하나도 없을 만큼 완벽한 창조였다는 것을 고백하는 것이고, 그 천지창조는 혼돈과 공허와 흑암뿐인 우리 죄인들의 마음속에 하나님께서 빛을 비춰주시고 질서를 잡아 재창조를 하시는 것을 상징하는
것이라 했습니다. 그 하나님 나라의 완성은 반드시 이루어진다는 소망으로 하나님 나라의 백성답게 시간을 쓰겠다는 거룩한 고백으로 함께 하는 날이 안식일입니다. 그러므로 안식일은 그 일을 완벽하게 이루시기 위해 오실 예수 그리스도를 기대하며 소망하는 날인 것입니다. 죄에서의 온전한 해방을 기다리는 날이란 말입니다. 그 칠일이 일곱 번 지난 49일후 50일째를 오순절이라 하는데 그것은 레위기의 이스라엘의 율법에 나오는 희년의 개념을 알면 더 자세히 알 수 있습니다.
 
한 번 더 복습합니다.
희년이라는 것은 7년마다 오는 안식년이 일곱 번째 오는 50년째를 희년이라 하지요?
그 때 이스라엘은 모든 노예들과 빚진 자들을 자유롭게 놓아주어야 하는 그런 해입니다.
 
(레25:8-10)
8    안식년을 일곱 번 세어라. 칠 년이 일곱 번이면, 안식년이 일곱 번 지나, 사십구 년이 끝난다.
9    일곱째 달 열흘날은 속죄일이니, 너희는 뿔나팔을 크게 불어라. 나팔을 불어, 너희가 사는 온 땅에 울려 퍼지게 하여라.
10    너희는 오십 년이 시작되는 이 해를 거룩한 해로 정하고, 전국의 모든 거민에게 자유를 선포하여라. 이 해는 너희가 희년으로 누릴 해이다. 이 해는 너희가 유산, 곧 분배받은 땅으로 돌아가는 해이며, 저마다 가족에게로 돌아가는 해이다.
 
자 이제 머릿속으로 지금까지 설명해 드린 것들을 죽 연결해 보세요. 왜 오순절 날 성령이 오셨는지 아시겠지요?
 
죄의 종 되었던 자들에게 자유를 선물하시기 위해 이 땅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이 이제 완성이 되어서 그 자유가 적용이 되어질 창세전에 이름이 불린 하나님의 교회에 오순절 날 성령이 임하시는 것입니다. 이제 그 교회는 예수님의 사역으로 인해 완성되었고 “너희들은 자유다”라는 의미에서 오순절 날 성령이 임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이 오순절이 오늘도 계속 되어져야 한다고 주장하는 자들은 도대체 성경을 어떻게 읽고 있는 것입니까? 예수님의 십자가가 뭔가 부족해서 또 다시 서야 한다는 말입니까? 예수님의 사역이 완성이 안 되었다는 말인가요? 왜 성령 세례를 또 받아야 한다는 것입니까? 또 다른 오순절이라니요. 그게 무슨 망발입니까?
 
성령은 이미 그리스도인들 속에 와 계십니다. 성령이 아니 계시고는 우리가 예수님을 주라 시인할 수 없다고 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우리가 두 번째 받아야 할 성령은 도대체 뭡니까?
처음 와 계신 성령보다 더 능력 있는 성령이 또 계시다는 말인가요?
 
어느 날 우리의 삶에 성령이 오셔서 우리의 눈을 뜨게 해 주시고 죄를 알게 해주시고 우리에게 주어진 의가 무엇인지 알게 해주시며 영원한 하나님의 저주의 심판이 바로 우리의 것이었다는 것도 알게 해주신 그날 여러분은 성령세례를 받은 날인 것입니다.
 
또 다른 성령 세례는 없습니다. 이제 한 번에 우리에게 선물해주신 그 하나님의 구원, 믿음, 아들의 신분을 하나하나 말씀 안에서 깨달아져 가면서 우리는 우리의 버려야 할 부분들을 불로, 물로 태워버리고 익사시켜 버림으로 우리 안의 그 거룩한 모습만을 찾아가는 것이 바로 신자의 삶인 것입니다.
 
엉뚱한 성령세례 찾아다니지 마세요. 제발 공부 좀 하세요. 성경을 한 번 만이라도 처음부터 끝까지 정독을 해 보세요. 어디 그런 엉터리 같은 인간들의 허튼 소리가 발을 디밀게
합니까?  다음 주에는 계속해서 성령이 우리에게 오셔서 이 땅에서 하시는 일이 뭔가에 대해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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