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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ome >  칼럼/책 >  그런 기독교는 없습니다
* 본 설교는 2004년도 개척 첫해에 기초교리 공부 내용입니다
 
작성일 : 13-04-15 19:53
   7. 선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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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글쓴이 : njsmyrna
    조회 : 3,015  


(마28:18-20)
18    예수께서 다가와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나는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받았다.
19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서,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3)세례를 주고,
20    내가 너희에게 명한 모든 것을 그들에게 가르쳐 지키게 하여라. 보아라, 내가 세상 끝 날까지 항상 너희와 함께 있을 것이다."( 다른 고대 사본들은 절 끝에 '아멘'이 있음)
 
 (행1:8)  그러나 성령이 너희에게 내리시면, 너희는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에서, 그리고 마침내 땅 끝에까지, 나의 증인이 될 것이다."
 
우리가 새벽 기도 때 요한복음을 공부하면서 예수님께서 첫째 날, 둘째 날, 셋째 날까지 혼돈과 공허를 잡으시고 넷째 날부터 여섯 째날 까지 12제자를 부르심으로 그 틀을 어떻게 채우시는가를 창세기와 비교를 하며 공부를 했습니다. 그러면서 요한복음은 계속해서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의 백성들을 어떻게 부르시는가를 보여주시는데 첫 번째가 예루살렘에서 성전을 청소하시는 그림을 보여주시지요. 주님께서 너희는 하나님의 기도하는 집을 강도의 굴혈로 만들었다고 예레미야 7장 11절의 말씀을 들어 나무라시는 모습을 우리는 볼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그림을 통해 구원은 이런 거짓 성전에서 너희들에게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참 성전이신 예수로 말미암아 오는 것임을 예시하십니다. 나중에 요한복음 강해 서를 자세하게 참조하세요. 그리고 유대의 관원인 니고데모를 만나서 구원은 하늘로부터 나야만 하는 것임을 친절히 가르치시고 바로 사마리아 여인에게 가셔서 그처럼 불가능한 여인을 구원하심으로 구원은 너희에게서 이유나 조건을 찾을 수 없는 것임을 말씀하시지요? 그리고 헤롯 안티파스의 신하의 아들을 고쳐주심으로 이방인에게도 구원이 일어날 것임을 암시하십니다.
 
그렇게 예수께서는 하나님의 백성들을 모으시고 계시다는 것을 성경은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자, 여러분이 지금 예수께서 복음을 전하시는 길을 죽 보셨는데 주님이 어디서 시작하셔서 어디로 가십니까?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예수께서 가시면서 사람들을 구원하고 계시는 것을 볼 수 있지요?
 
그럼 오늘 두 번째 본문인 사도행전을 보겠습니다. 예수께서 승천하시기 전에 사도들이 모인 자리에서 “오직 성령이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제자들은 예루살렘으로 가서 120명이 마가의 다락방에 모여 기도에 힘을 씁니다. 예수께서 약속하신 대로 성령께서 강림하시고 이제 제자들이 설교를 하기 시작합니다. 베드로의 한 번 설교에 수천 명씩이 주님께 돌아오는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그러나 스데반의 설교를 들은 회중이 그를 돌로 쳐 죽입니다. 그로 말미암아 예루살렘 교회가 박해를 받게 되고 사도들 이외에는 모두 유대와 사마리아로 흩어지게 됩니다. 자기들이 원해서 가는 것이 아니라 어떤 힘이 그들을 흩어버리고 계신 것입니다.
 
(행8:1) 사울은 스데반이 죽임당한 것을 마땅하게 여겼다.  그 날에 예루살렘 교회가 크게 박해받기 시작하여, 사도들 이외에는 모두 유대 지방과 사마리아 지방으로 흩어졌다.
 
그렇지요? 흩어진 사람들은 사마리아와 유대를 두루 다니며 그리스도를 선포하였습니다. 그러던 중에 빌립에게 하나님께서 남쪽으로 내려가라 말씀하십니다. 남쪽으로 내려가다가 이디오피아 여왕 간다게의 재정을 담당하고 있던 내시를 만나게 하시고 그에게 복음을 설명하게 하십니다. 예루살렘에서 교회를 흩으셔서 사마리아와 온 유대로 가게 하시고 땅 끝의 이방인에게로 빌립을 보내시는 분이 누구십니까? 아니 엄밀히 말해 지금 예루살렘에서 온 유대로 사마리아로 땅 끝으로 누가 가고 계신 것이지요? 성령 하나님께서 복음을 들고 손수 가고 계신 것입니다. 예수께서 이 땅에서 복음을 전하시면서 가신 길을 그대로 예수 그리스도의 영이신 성령이 가고 계신 것입니다. 이렇게 전도는 하나님이 시작하셔서 하나님이 끝내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영광스럽게도 하나님께서 거기에 우리를 방법이요 도구로 동참시켜 주시는 것이지요. 좀 더 확실히 말하자면 전도는 우리의 실력으로 우리의 설득으로 다른 사람들에게 복음이 전해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구원하고자 하는 자들에게 그의 백성들을 보내셔서 그 일을 증인으로서 보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선교입니다. 오늘 본문의 지상 대 명령은 “가라”에 초점을 두고 있지 않습니다. 사도행전의 그 명령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원의 조건이 모두 충족된 그것을 성령께서 오셔서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퍼져있는 하나님의 백성들을 찾아가셔서 그들을 구원하시는 것을 보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에스겔서 37장의 그 유명한 이야기를 알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골짜기로 에스겔을 데리고 가셔서 거기 뭐가 있냐고 물으시지요? 에스겔의 눈에는 먼지가 풀풀 나는 마른 뼈들만이 즐비했습니다. 해서 에스겔이 하나님께 마른 뼈들이 있다고 하니까 하나님께서 그 뼈들이 살아날 것 같으냐고 물으십니다. 그리고는 그 뼈들에게 너희들이 살아날 것이라고 대언 하라고 하십니다. 이것은 마치 로즈 힐 공동묘지에 가서 시체들에게 ‘여러분 하나님이 여러분더러 일어나라네요.’라고 외치는 것과 똑같은 것입니다. 에스겔은 믿지 않았습니다. 그 증거가 마른 뼈들이 맞춰지면서 달그락 소리가 날 때 에스겔이 고개를 들어 그 것을 보았다고 하지요? 에스겔은 마지못해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하긴 했지만 믿기 어려워 아예 그 장면을 쳐다볼 생각도 안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정말 마른 뼈들이 다시 살아나 군대가 되었습니다. 구원이란 그런 것입니다. 우리가 마른 뼈에게 무슨 전략을 가지고 간다는 말인가요?
 
마른 뼈는 왁스로 잘 닦아주면 더 살아나기 쉬운가요? 아니면 물에 좀 푹 불려 놓으면 더 잘 살아날까요? 무슨 방법을 써야 마른 뼈가 살아나서 군대가 될 수 있을까요? 우리로서는 아무 방법이 없습니다. 그게 정답입니다. 하나님께서 살을 붙이시고 생기를 불어넣지 않으시면 우리의 어떤 전략도 통할 수 없는 것입니다.
 
(고전1:21)  하나님의 지혜에 있어서는 이 세상이 자기 지혜로 하나님을 알지 못 하는 고로 하나님께서 전도의 미련한 것으로 믿는 자들을 구원하시기를 기뻐하셨도다 (이 세상이 그 지혜로 하나님을 알지 못한 것은, 하나님의 지혜 안에서 된 일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어리석은 선포로 믿는 사람들을 구원하시기를 기뻐하셨습니다.)
 
잘 보세요. 전도란 어떤 것이라고요? 미련한 것이랍니다. 왜 전도를 미련한 것이라 할까요? 그 방법으로는 세상이 절대 하나님 앞에 돌아올 수 없는 방법이라는 말입니다. 그래서 미련한 것입니다. 생각해 보세요. 우리 대한민국의 조상도 아니고 얼굴도 생소한 저 팔레스타인이라는 땅의 이스라엘 민족의 조상이, 그것도 뭐 대단한 사람도 아니고 목수의 아들이 우리의 죄를 짊어지고 죽음으로 우리의 죄가 사해졌다는 말이 정말 정상적인 이성으로 믿겨지세요? 그게 복음 아닙니까? 그 복음이 이해되어지고 전해지는 데에 우리의 전략과 전술이 보탬이 될까요?
 
 
 (사6:8-10)
8    그 때에 나는 주님께서 말씀하시는 음성을 들었다. "내가 누구를 보낼까? 누가 우리를 대신하여 갈 것인가?" 내가 아뢰었다. "제가 여기에 있습니다. 저를 보내어 주십시오."
9    그러자 주께서 말씀하셨다. "너는 가서 이 백성에게  '너희가 듣기는 늘 들어라. 그러나 깨닫지는 못한다. 너희가 보기는 늘 보아라. 그러나 알지는 못한다'(칠십인역에는 '너희가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는 못하고, 너희가 보기는 늘 보아도 알지는 못한다') 하고 일러라.
10    2)너는 이 백성의 마음을 둔하게 하여라. 그 귀가 막히고, 그 눈이 감기게 하여라. 그리하여 그들이 볼 수 없고, 들을 수 없고 또 마음으로 깨달을 수 없게 하여라. 그들이 보고 듣고 깨달았다가는 내게로 돌이켜서 고침을 받게 될까 걱정이다.( 칠십인역에는 '이 백성의 마음은 둔해졌다. 그들은 귀가 막혀 듣지 못하고, 눈은 아예 감아 버렸다. 그들이 눈으로 보거나 귀로 듣거나 마음으로 깨달았다가는 내게로 돌이켜서 고침을 받게 될까 걱정이다')”
 
여기 보시면 하나님께서 이사야를 보내시면서 이사야의 말을 아무도 깨닫지 못하고 알지 못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게다가 한 술 더 떠서 오히려 그 말을 듣는 자들의 귀를 막히게 하고 눈을 감기게 하라고 하십니다. 복음은 그렇게 사람들의 실력으로 깨달아지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가서 무슨 말을 하라고 하는 것입니까? 선교는 너희들 힘으로 되는 것이 아니란 말입니다. 고린도전서 2장 1절에서5절까지를 살펴보겠습니다.
 
(고전2:1-5)(표준 새 번역)
1 형제자매 여러분, 내가 여러분에게로 가서 하나님의 비밀을 전할 때에, 훌륭한 말이나 지혜로 하지 않았습니다.
2 나는 여러분 가운데서 예수 그리스도 곧 십자가에 달리신 그분 밖에는, 아무것도 알지 않기로 작정하였습니다.
3 내가 여러분과 함께 있을 때에, 나는 약하였으며, 두려워하였으며, 무척 떨었습니다.
4 나의 말과 설교는 지혜에서 나온 그럴 듯한 말로 한 것이 아니라, 성령의 능력이 나타낸 증거로 한 것입니다.
5 그것은, 여러분의 믿음이 사람의 지혜에 바탕을 두지 않고 하나님의 능력에 바탕을 두게 하려는 것이었습니다.
 
바울은 복음을 전하면서 자신의 지혜로 하지 않았습니다. 훌륭한 미사여구를 나열하는 현란한 언변으로 사람들을 설득하지도 않았습니다. 이렇게 하나님은 선교를 하는 데에 있어서 우리에게 우리의 능력을 요구하시지 않으십니다. 우리에게 전략과 전술을 세워 제발 선교 좀 해달라고 부탁하시지 않으신다는 말입니다. 다만 충성함으로 하나님께서 어떻게 일을 하시는지 보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제가 선교와 전도에 열심을 부리지 말라는 것이 아닙니다. 선교 안하는 기독교인이 정말 그리스도인입니까? 아닙니다. 우리는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복음을 전해야 합니다. 우리에게 깨달아진 그 복된 소식을 어떻게 가슴에만 담아두고 있습니까? 목숨 걸고 전해야지요.
 
윌리암 부스가 말한 것처럼 온 세상이 깨어진 유리조각으로 되어 있다 할지라도 무릎으로 기어서라도 그 복 된 소식을 전하고 싶어 하는 자들이 성도 아닙니까? 그러나 제가 말하고 싶은 것은 선교는 우리의 실력이나 설득으로 되어지는 것이 아니란 그 기초 위에서 행해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자랑하지 말라는 것이지요. 선교를 하면서 뭐 대단한 고생이나 하는 것처럼 간증하고 다니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 시간에 불쌍하고 가련한 영혼들에게 한 마디라도 더 전해 주어야지요. 무슨 전도 왕이니 선교 왕이니, 베테랑 선교사니 이런 우습지도 않은 말 하지 말자는 것입니다. 누가 하는 건데요. 하나님이 하시는 것인데 자기들이 뭐라고 그 영광을 통째로 가로챕니까?
 
 (고전1:26-29)  형제자매 여러분, 여러분이 부르심을 받을 때에, 그 처지가 어떠하였는지 생각하여 보십시오. 육신의 기준으로 보아, 지혜 있는 사람이 많지 않고, 권력 있는 사람이 많지 않고, 가문이 훌륭한 사람이 많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시려고 세상의 어리석은 것을 택하셨으며, 강한 자들을 부끄럽게 하시려고 세상의 약한 것을 택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세상에서 비천한 것과 멸시받는 것을 택하셨으니, 곧 잘났다고 하는 것들을 없애시려고, 아무것도 아닌 것들을 택하셨습니다.  그것은,  아무도(그, '육신도') 하나님 앞에서는 자랑하지 못하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왜 하나님은 약한 자들을 들어서 복음을 전하실까요? 생각해 보세요. 만일 여러분이 선교를 하러 가서 여러분의 해박한 지식이나 지위 혹은 여러분의 경건함과 도덕성을 자랑하는 것으로 전도가 되었다면 그 사람들은 여러분을 존경하지 여러분을 보낸 하나님을 볼 수가 없을 것입니다. 여러분은 불쌍한 사람들에게 빵을 전달하는 임무를 받은 부자의 종으로 서야지 여러분이 그 앞에서 부자의 역할을 하면 고아원 원장이 여러분에게 아부를 하게 되는 것입니다. 무슨 말인지 아시겠어요?
하나님은 우리의 능력을 요구하시는 분이 아니라 충성을 요구하시는 분이십니다.
사울에게도 똑같은 말씀을 하셨잖아요? 순종이 제사보다 나은 것이라고.
 
제가 하고 싶은 말은 하나님의 일을 한답시고 ‘나 아니면 이 일은 못해’ 라는 말은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달란트의 비유에서도 배울 수 있듯이 열 달란트 받은 자가 열 달란트를 남기고 다섯 달란트를 받은 자는 다섯 달란트를 남겼다는 것은 자기에게 주어진 은사나 능력이 왜 요거밖에 안 되는가라고 불평하지 말고 그 상태에서 충성하라는 것입니다. 분명 주인은 다섯 달란트 받고 다섯 달란트 남긴 자를 두 달란트 받고 두 달란트 남긴 자보다 더 칭찬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 마태복음 28장을 보면 전도란 믿지 않는 자들에게 가서 무차별 폭격을 해서 잡아오는 것이 아니라 제자를 삼아 가르쳐서 지키게 하는 것이라고 명확하게 말씀 하십니다. 가르쳐 지키게 하라는 것은 사도행전 1장8의 증인이 되라는 것과 같은 말입니다. 성경이 증인이 되는 게 무엇인가를 이렇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요13:34-35) 이제 나는 너희에게 새 계명을 준다. 서로 사랑하여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과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모든 사람이 그것으로써 너희가 나의 제자인 줄을 알게 될 것이다."
 
 (마5:14-16) 너희는 세상의 빛이다. 산 위에 있는 동네는 숨길 수 없다.  또 사람이 등불을 켜서 됫박 아래에 두지 않고, 등경 위에 둔다. 그래야 등불이 집 안에 있는 모든 사람에게 환히 비친다.  이와 같이, 너희 빛을 사람에게 비추어서, 그들이 너희의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여라."
 
여기를 잘 보시면 인격적으로 사랑하는 사람이 되는 것이 제자를 삼는다는 뜻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무엇을 알고 있고 무엇을 어떻게 설명하느냐로 제자를 삼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무언가 다른 사람이 되어 그들 앞에 서는 것이 다른 사람을 제자 삼을 수 있는 방법이란 것입니다. 즉 다른 말로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거룩한 성품과 인격을 우리 속에서 향기로 발하게 될 때 사람들은 우리를 보고 주님께 돌아오게 된다는 것이지요. 그것이 바로 가르쳐 지키게 하는 것이고 그것이 바로 선교의 핵심인 것입니다. 제가 무엇을 말하려는 지 이제 조금 감이 잡히세요.
 
선교는 우리의 힘과 언변과 재주로 복음을 설득하는 것이 아닙니다. 복음은 프로파겐다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억지로 설들을 시키기 위해 견강부회로 흘러서도 안 됩니다. 복음 전파가 억지 경강부회가 되지 않기 위해서는 우리의 삶이 먼저 거룩을 향하고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자신조차 하나님 앞에 온전히 항복하지 못하고 여전히 그 분
앞에 순종의 삶을 내어 놓지도 못하면서 입에 침도 안 바르고 순종의 삶이 주는 행복과 기쁨과 그 것으로 가득 찬 천국을 어찌 설명할 수 있겠느냐는 말입니다.
 
여러분 사람들이 오해하는 것이 나에게서 구원의 근거를 1%도 찾지 않으신 하나님이 앞으로도 열심히 죄 짓고 살아도 또 이끌어 주시지 않겠는가 하고 안심을 하는 무 율법 주의적 사고입니다.
 
이런 예를 들어 볼게요.
 
부모가 아들을 파티에 데려가기 위해서 열심히 찾았습니다. 그런데 찾아보니 아이가 진흙탕에서 구르며 놀고 있었습니다. 부모는 그 아이를 잔치 집에 데려가기 위해 잘 씻기고 깨끗한 옷으로 갈아 입혔습니다. 그런데 이 철없는 아들이 또 진흙탕 속으로 들어가서 열심히 놀았습니다. 아버지는 다시 그 아이를 씻기고 또 새 옷을 입혀 주셨습니다. 그 것을 본 아들이 ‘아 우리 아버지는 이렇게 계속 옷을 버리고 내 몸을 더럽혀도 계속해서 새 옷을 갈아 입혀주시는 분이구나’하고 계속해서 진흙탕에 구르고 있다면 그 아이가 정말 정신이 제대로 박힌 아이일까요?
 
여러분 하나님 아버지께서 우리에게 구원이라는 새 옷을 입혀주신 이유는 그 옷을 입고 혼인잔치에 가자는 의미인 것입니다. 그걸 모르고 공짜로 줬으니 또 버리면 또 주겠지 하고 자꾸 진흙탕으로 가는 것은 바보란 것입니다. 그런 자들은 정말 은혜가 무엇인지 제대로 깨닫고 있지 못한 자들이지요. 구원을 공짜로 선물로 주신다고 하니까 사람들이 그런 발상을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구원을 준 것은 이제 그 생명이 자라고 꽃피우게 하라고 주신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구원의 이유를 명확하게 제시합니다.
 
(롬6:4-5) 그러므로 우리는 그분의 죽으심과 연합하는 세례를 받음으로써, 그분과 함께 묻혔습니다. 이것은, 그리스도께서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아버지의 영광으로 살리심을 받은 것과 같이, 우리도 새로운 생명 가운데서 살아가게 하려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같은 죽음으로 그와 연합하는 사람이 되었으면, 또한 분명히, 그의 부활하심과 같은 부활로 그와 연합하는 사람이 될 것입니다.
 
여러분들에게 구원을 주신 것은 이제 여러분들로 하여금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하심인 것입니다. 새 옷은 더욱더 복되고 좋은 자리로 가자고 입혀 놓은 것입니다. 우리가 새 옷을 입었으면 이제 그 옷에 어울리는 곳으로 출발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또 다른 오해가 있을 수 있지요?
‘그럼 그 새 옷을 입고 무엇을 해야 하나‘하고 고민하는 사람들에게 어떤 이들이 이제 다 뛰쳐나가서 열심히 하나님의 명령을 좇아 예배당을 채워야 한다고 가르친다는 것입니다. 그건 정말 오해입니다.
 
구원을 받았다는 것은 이제 어린아이로 태어났다는 것입니다. 이제 그 아이는 장성한 분량으로 자라나야 합니다. 그런데 열심히 말씀의 젖을 먹고, 기도의 이유식으로, 하늘나라 백성으로 잘 자라나야 할 아기들이 젖병을 물고 전도를 하러 먼저 튀어 나가는 것이 문제인 것입니다. 이제 갓 태어난 아기 들이 젖병 물고 나가서 ‘예수 믿으세요, 예수 믿으세요.‘ 합니다. 전도는 그런 열심으로 되어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람으로 변화되어진 우리의 모습을 보면서, 도대체 저 사람을 변화시킨 하나님이 누구시기에 저 사람이 저렇게 변했는가, 하면서 하나님을 궁금해 하는 것에서부터 시작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 출발점을 바로 잡자는 것입니다.
 
 
제가 수고하시는 선교사님들의 노고를 폄하하자는 것이 아닙니다. 훌륭한 선교사님들 참 많으십니다. 그러나 일부 몰지각한 가짜들이 선교를 합네, 전도를 합네 하면서 엉뚱한 무당 잡교를 퍼뜨리고 있는 것이 너무 안타까워서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여러분 왜 하나님께서 다메섹에서 회심을 시킨 바울을 바로 쓰시지 않으셨을까요? 사도 바울은 그로부터 십 수 년 후에 비로소 하나님의 복음을 제대로 전하는 자가 됩니다. 그 기간 동안 바울은 다소에 가서 머뭅니다. 다소가 어디지요? 바울의 고향입니다. 하나님께서 선교의 도구로 쓸 수 있는 자는 자신의 생업과 가족이 있는 그 곳에서 먼저 그리스도인으로 인정을 받아야 한다는 의미인 것입니다. 주님께서 부활하셨을 때에 왜 사도들을 갈릴리로 가라고 했을까요?
갈릴리는 그들의 생업과 가족이 있는 곳 아닙니까? 사도들이 사도의 역할을 제대로 해 내기 위해서는 가족과 생업이 있는 곳에서 먼저 사도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게 거룩입니다.
우리가 먼저 챙겨야 할 선교의 기본인 것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선교를 하고 전도를 한다는 교회 안에서 교인끼리도 서로 친하지 않습니다. 자기들끼리도 서로 가슴에 묻어둔 얘기를 못합니다. 오히려 믿은 지 얼마 안 되는 사람은 세상 친구들, 동창들 만나 술 한 잔 하면서 속 얘기를 합니다. 그런데 어찌 자신을 비우고 죽여 아직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원수들을 살려내는 선교를 한다는 사람들이 서로를 경계하며 살고 있다면 이 어찌 제대로 된 교회이겠습니까?
 
그것이 바로 어떻게 증인이 되며 어떻게 제자를 삼아야 하는지가 오해되고 있다는 증거인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하나님의 성품을 닮아가는 삶을 추구한다는 것은 우리가 살아났다는 유일한 증거인 것입니다. 그런데 아직도 죽은 자들이 산자들의 나라인 천국을 전한다는 것이 말이 되는 것입니까?
 
(엡4:17-19) 그러므로 나는 주님 안에서 간곡히 권면합니다. 이제부터 여러분은 이방 사람들이 허망한 생각으로 살아가는 것과 같이 살아가지 마십시오.  그들은 그들 속에 있는 무지와 그들의 마음의 완고함 때문에 지각이 어두워지고, 하나님의 생명에서 떠나 있습니다.  그들은 수치의 감각을 잃고, 스스로를 방탕에 내맡겨서, 탐욕을 부리면서 모든 더러운 일을 합니다
 
보세요. 하나님 나라의 삶의 원리인 십자가의 원리로 삶을 살기 위해 분투하지 않는 자들은 아직 감각이 없고 보이지 않아서 그렇다는 것입니다. 죽어 있다는 말입니다.
여기서 허망하다는 것은 과녁이 없는 곳에 대고 화살을 쏘는 것이라는 의미입니다. 목표가 없는 것입니다.
 
오죽하면 골프 핸디 줄이는 것을 인생의 목표로 삼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러니까 그런 허망한 목표들을 위해 정작 하나님의 형상을 받은 인간이 해야 할 하나님의 영광을 반사해 내는 삶을 홀대를 당하는 것입니다. 아직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세상 사람들은 시체들이기에 인생이 목표가 없는 것입니다. 허망한 것에만 눈을 두고 사는 것입니다. 그런데 삶의 목표를 찾았다고 하고 죄와 허물로 죽었던 자리에서 살아났다고 하는 이들이 여전히 세상의 허망한 것들만을 추구하며 나의 유익을 위해 다른 이들을 가차 없이 밟는 그러한 삶을 살고 있다면 어찌 그들이 산 자들이겠습니까? 그러면서 무슨 선교를 합니까? 다시 한 번 말씀드리지만 하나님은 자신의 거룩을 향한 피나는 추구 없이 오지에 세워 놓은 빵 공장을 통해 복음을 전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하나님 백성으로서의 자라남은 안중에도 없는 자들이 만들어 놓은 유치원이나 학교를 통해 하나님의 십자가 복음을 전하실 수 없습니다. 우리가 하나님 나라에 입성할 때 까지 이
 
땅에서 해야 할 첫 번째 일은 하나님의 백성답게 지어져 가는 것입니다. 그 길에 선교가 있는 것이고, 그 길에 순교가 있는 것이고 그 길에 구제와 봉사가 있는 것입니다.
 
(엡4:20-24) 그러나 여러분은 그리스도를 그렇게 배우지는 않았습니다.  여러분이 예수 안에 있는 진리대로 그분에게서 듣고, 또 예수 안에서 가르침을 받았으면,  여러분은, 지난날의 생활방식에 얽매여서 허망한 욕정을 따라 살다가 썩어 없어질 옛 사람을 벗어버리고,  마음의 영을 새롭게 하여,  하나님을 따라 참된 의로움과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으십시오
 
노력해야 합니다. 구원 얻는 믿음은 주님께서 거저 주시지만 그 이후에 우리가 두렵고 떨림으로 이루어 가야할 부분이 있는 것입니다.
전도는 전하는 그 사람이 자신이 전하는 복음에 합당한 수준을 가지고 있지 않으면 힘을 발휘하지 못합니다.
 
전도의 제대로 된 순서는 복음을 얘기하기 전에 ‘저 사람을 보면 뭔가가 있다. 그게 뭘까?’ 하는 물음이 먼저 나와야 합니다. 그랬을 때 ‘그것은 이런 것이다‘라고 얘기하는 것이 제대로 된 전도일 수 있는 것입니다.
 
(엡4:25-29)    그러므로 여러분은 거짓을 버리고,  각각 자기 이웃과 더불어 참된 말을 하십시오. 그것은 우리가 서로 한 몸의 지체들이기 때문입니다.  화를 내더라도 죄는 짓지 마십시오. 해가 지도록 노여움을 품고 있지 마십시오.  악마에게 틈을 주지 마십시오.  도둑질을 하는 사람은 다시는 도둑질을 하지 말고, 수고를 하여, 제 손으로 떳떳하게 벌이를 하십시오. 그리하여 오히려 궁핍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줄 것이 있도록 하십시오.  나쁜 말은 입 밖에 내지 말고,  덕을 세우는 데에 필요한 말이 있으면 적절한 때에 해서, 듣는 사람에게 은혜를 끼치게 하십시오.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원하시는 신앙의 행위는 종교행위가 아니라 일상생활이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얼마든지 가면을 쓰고 종교 행위를 할 수 있습니다. 얼마든지 분에 넘치는 헌금을 할 수 도 있고 얼마든지 천사의 얼굴을 하고 구제행위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 행위를 쓰시겠다고 하지 않으십니다. 일상생활이 바로 신앙생활이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러한 변화된 일상을 통해 당신의 일을 하시는 것입니다.
 
에베소서 5장에서도 ‘성도야 성령 충만한 삶을 살아라.‘고 말씀하시면서 첫 번째 요구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아내들이여 남편에게 복종하라’입니다. 그리고 이어지는 것이 ‘남편이여, 아비들아, 자식들아, 종들아, 상전들아 너희들은 이렇게 살아라.’입니다. 성령 충만의 삶은 바로 여러분의 직장이나 가정에서 보여 지는 것이란 말입니다.
 
주님께서 인정하는 신자는 선지자 노릇하고 기적을 일으키고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고 한 자가 아니라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 등의 하나님의 성품을 가진 자라는 것을 절대 잊으시면 안 됩니다.
 
여러분 우리 성도는 무엇을 했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그 일을 어떻게 했느냐가 중요한 것입니다. 새사람으로 재창조된 자가 너무 감사해서 하나님의 기쁨을 위해 한일이 하나님의 일인 것입니다. 우리 죄인들은 나의 기쁨이나 만족을 위해서도 얼마든지 종교행위를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생각해 보세요. 마태복음에 나오는 반석 위에 지은 집과 모래 위에 지은 집, 둘 다 집을 지은 사람들입니다. 둘 다 행위가 있었던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어디 위에다 지은 것이냐가 그들을 가르는 것입니다. 아무리 전도를 많이 했어도 자기의 의나 만족 기쁨을 위한 자들은 내가 너를 도무지 모른다는 말을 들을 것입니다. 여러분, 교회에서 능력 있는 사람들 존경하지 마세요. 기적을 일으키고 많은 일을 하는 자들이 하나님의 기뻐하는 자들이 아니라 삶이 변한 자들입니다. 그들을 존경하세요.
 
(골3:5-14)  그러므로 땅에 속한 지체의 일들, 곧 음행과 더러움과 정욕과 악한 욕망과 탐욕을 죽이십시오. 탐욕은 우상 숭배입니다.  이런 것들 때문에  순종하지 않는 사람들에게(다른 고대 사본들에는 '순종하지 않는 사람들(그, '불순종의 자식들')에게'가 없음) 하나님의 진노가 내립니다.  여러분도 전에그런 것에 빠져서 살 때에는(또는 '그런 삶을 살 때에는' 또는 '그런 사람들 가운데서 살 때에는'), 그렇게 행동하였습니다.  그러나 이제 여러분은 그 모든 것, 곧 분노와 격분과 악의와 훼방과 여러분의 입에서 나오는 부끄러운 말을 버리십시오.  서로 거짓말을 하지 마십시오. 여러분은 옛 사람을 그 행실과 함께 벗어 버리고,  새 사람을 입으십시오. 이 새 사람은 자기를 창조하신 분의 형상을 따라 끊임없이 새로워져서, 지식에 이르게 됩니다.  거기에는 그리스인도 유대인도, 할례자도 무할례자도, 야만인도 스구디아인도, 종도 자유인도 없습니다. 오직 그리스도만이 모든 것이시요, 모든 것 안에 계십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하나님의 택하심을 받은 거룩하고 사랑받는 사람답게, 동정심과 친절과 겸손과 온유와 오래 참음을 옷 입듯이 입으십시오.  누가 누구에게 불평할 일이 있더라도, 서로 용납하여 주고, 서로 용서하여 주십시오.주께서 여러분을 용서하신 것과 같이, 여러분도 서로 용서하십시오.  이 모든 것 위에 사랑을 더하십시오. 사랑은 온전하게 묶는 띠입니다.
 
이렇게 신앙은 능력과 실력이 아니라 성품과 인격적인 것입니다. 우리의 신앙행위는 지금 하나님을 우리가 돕지 않으면 하나님 일이 안될 줄 알고 있는 것 아닙니까?
 
아닙니다. 에스더서에서 모르드개가 에스더에게 뭐라합니까? ‘이일을 위해 네가 왕비가 된 줄 어찌 아냐? 그러나 네가 안 해도 하나님은 다른 방법으로 이 일을 이루실 것이다.‘그렇지요? 그 말은 하나님의 일을 우리가 안 한다고 하나님의 일이 이루어지지 않는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일은 한 치의 오차도 없이 모두 이루어집니다. 그러나 그 일에 참여하는 자는 하늘의 새 창조에 동참하며 얻는 행복과 기쁨이 있습니다. 그래서 열심히 하나님의 일에 동참하려 하는 것입니다. 동기가 그러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일을 하면서 하나님 앞에 ’나 이런 것도 했어요‘라고 명함을 내미는 사람이 아니라 나 같은 것을 그 위대한 일에 참여하게 해주신 하나님께 감사해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나 아니어도 어차피 이루실 일에 내가 참여함으로 해서 그 영광에 동참하는 것이 하나님의 일입니다. 그런데 거기서 어디 자랑이 나올 수 있습니까? 다시 말씀드립니다. 하나님의 일은 어차피 이루어집니다. 따라서 거기에 동참해서 일 한 사람만 이익입니다. 그렇게 하나님은 하나님이 다 하시고 네가 했다고 칭찬해 주십니다. 그러기 위해 하나님은 우리를 당신의 일에 동참 시키시는 것입니다. 당신의 주권과 섭리로 모든 것을 다 하실 것이면서 그 일에 우리를 부르셔서 우리를 칭찬해 주시고 싶어 우리를 부르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영광에 동참하는 것이 너무 기뻐 일을 하는 것이지 ’나 아니면 하나님 일이 안 된다.‘ 이렇게 접근하시면 큰 오산이란 말입니다. 그렇게 하나님의 일에 겸손함으로 동참함으로 우리는 그 속에서 순종을 배우고 하나님의 능력을 체험하며 은혜를 학습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원하시는 예수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로 조금씩 자라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은 특혜입니다. 축복입니다. 우리는 주님의 일에 동참함으로 주님의 마음에 동참하고 주님의 마음을 조금이나마 알게 되는 것이니까요.
 
여러분이 생각하는 땅 끝으로 먼저 뛰려 하지 마세요.
땅 끝은 여러분의 가정이고 여러분의 직장입니다. 그리고 여러분이 매일 만나는 사람들인 것입니다. 지구는 둥글잖아요. 가고, 가고, 자꾸 가다보면 다시 원점으로 돌아오는 그 원리. 아시지요? 그래서 내가 선 자리가 바로 땅 끝인 것입니다. 그 땅 끝으로 먼저 가세요. 예수를 믿고 난 사람이 가져야 할 본질적 전도자의 모습이 바로 이 모습인 것입니다. 존재론적으로 성품과 인격으로 바뀌어 있어서 걸어 다니는 빛이 먼저 되어야 합니다. 
우리 그런 선교 한 번 멋지게 해 보자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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