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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ome >  칼럼/책 >  그런 기독교는 없습니다
* 본 설교는 2004년도 개척 첫해에 기초교리 공부 내용입니다
 
작성일 : 13-04-15 19:53
   6. 헌금
트랙백
 글쓴이 : njsmyrna
    조회 : 3,171  


(막12:41-44)
41    예수께서 헌금함 맞은쪽에 앉으셔서, 무리가 어떻게 헌금함에 돈을 넣는가를 보고 계셨다. 많이 넣는 부자가 여럿 있었다.
42    그런데 가난한 과부 한 사람은 와서, 렙돈 두 닢, 곧 한 고드란트를 넣었다.
43    예수께서 제자들을 곁에 불러 놓고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내가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헌금함에 돈을 넣은 사람들 가운데, 이 가난한 과부가 어느 누구보다도 더 많이 넣었다.
44    모두 다 넉넉한 데서 얼마씩을 떼어 넣었지만, 이 과부는 가난한 가운데서 가진 것 모두, 곧 자기 생활비 전부를 털어 넣었다."
 
‘아니 서머나 교회에서 헌금 설교를 하다니 목사가 드디어 헌금을 강요하기 시작하는구나’ 하고 오해하는 분이 계실지 모르겠습니다. 사실 오늘 주제는 개혁주의 목사들이 설교하기를 많이 꺼리는 내용입니다. “헌금”그러나 헌금에 대한 올바른 이해는 신앙의 본질을 공부하는 데에 빠져서는 안 될 내용이기에 여러분들에게 헌금에 대한 정확한 지도를 그려 드리고자 오늘 교리 설교의 주제를 ‘헌금’으로 택한 것입니다.
 
오늘 본문을 보시면 예수님이 헌금함 맞은편에 앉으셔서 누가 어떻게 헌금하는지를 지켜보고 계십니다. 참 재미있는 장면입니다. 예수님은 뭐가 그렇게 궁금하셨을까요? 여러 부자들이 연보를 많이 넣고 갔습니다. 그런데 한 과부가 자기의 전 재산을 가지고 왔습니다. 예수님은 그것이 그 여자의 전 재산이란 것을 금방 아셨습니다. 많지 않은 돈이었지만 그 여인은 그 것을 모두 헌금함에 넣었습니다. 지금의 돈으로 따지면 1불 정도도 안 되는 아주 적은 돈입니다. 오죽하면 그 렙돈은 너무 가벼워서 연보함에 떨어지는 소리가 구별될 정도였습니다.
 
그러나 그 여인에게는 전 재산이었습니다. 그렇다면 그 여인이 그 돈을 모두 헌금함에 넣고 나면 당장 그 여인의 끼니는 어떻게 될까요? 그것 모르실 예수님이 아닌데 말리지 않으십니다. 저는 고등학교 때 이 대목을 읽으면서 기실 주님의 이런 대응을 기대했습니다. ‘당신의 성의는 충분히 알겠다. 그 마음은 이미 받았으니까 하나만 넣고 하나는 도로 가지고 가라. 가서 식구들하고 빵이라도 사먹어라.’ 그래야 사랑의 예수님답지 않습니까? 그런데 전 재산을 넣은 그 여인을 칭찬하십니다. 주님은 그렇게 자기 백성이야 어떻게 되든 말든 열심히 긁어 모으시기만을 좋아하시는 수전노 같은 분입니까?
 
예수님은 왜 그 가난한 여인이 연보함에 전 재산을 넣은 것을 칭찬 하셨을까요? 어떤 분은 이 본문을 가지고 ‘우리도 그런 여인의 열심을 본받아 헌금에 힘쓰자.’하고 결론을 내시는 것을 들었습니다. 물론 그렇게 결론을 내리면 목사도 좋고 듣는 청중도 이해가 빠르겠지요. 그런 것을 일석이조라고 하나요? 그러나 그렇게 해서 잡은 새는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새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여러분이 이미 들어서 숙지하고 계신 엉뚱한 결론들은 다 내려놓으세요. 그리고 그 비어진 자리에 오늘 설교를 채워 넣으십시오.
 
오늘 본문의 논리를 그렇게 결론을 낸다면 우리는 헌금에 힘쓰는 정도가 아니라 버는 족족 다 갖다 바쳐야 합니다. 주님은 자신의 전 재산을 다 바친 과부를 칭찬하셨으니까. 여러분 정말 자신 있으세요? 정말 우리도 그렇게 전 재산 다 갖다 바쳐야 하는 것입니까? 그래야 주님께 칭찬 받을 수 있나요?
 
이 가난한 과부를 칭찬하신 이야기는 하나님의 교회, 즉 천국 백성의 모습은 어떠한 것인가를 힌트하고 계신 것입니다. 오순절 날 성령 강림 이후 하나님의 교회가 탄생했습니다. 그 교회는 예수님의 피 값으로 만들어진 교회였습니다. 거기는 누룩이 들어올 수 없는 순수한 하나님의 백성들의 공동체였지요. 그래서 아나니아와 삽비라가 그리 큰 잘 못을 범하지 않았음에도 그 자리에서 죽여 버린 것입니다. 생각해 보세요. 아니니아와 삽비라가 뭘 그리 큰 잘못을 했습니까? 전 재산 다 팔아서 자기 먹을 것 조금 챙기고 교회에 다 헌금했는데 그게 정말 그 자리에서 급살을 맞을 잘못입니까? 그 것은 하나님의 교회는 어떤 작은 티라도 들어올 수 없는 순결하고 순수한 것이라는 것을 성경을 읽는 독자들에게 메시지로 던지고 있는 것입니다. 물론 제가 말하는 교회는 이 땅의 지역 교회들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거기는 더러움 투성이지요. 하나님의 교회는 창세전에 택함을 받은 하나님의 백성들의 영적 공동체를 말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그 하나님의 교회는 잡티가 들어 올 수 없는 곳입니다. 그 곳은 천국을 상징하는 곳이었습니다. 거기의 모습이 어떠했나요?
 
(행4:32-35)
32    많은 신도가 다 한 마음과 한 뜻이 되어서, 누구 하나도 자기 소유를 자기 것이라고 하지 않고, 모든 것을 공동으로 사용하였다.
33    사도들은 큰 능력으로 주 예수의 부활을 증언하였고, 그들은 모두 큰 은혜를 받았다.
34    그들 가운데는 가난한 사람이 하나도 없었다. 땅이나 집을 가진 사람들은, 그것을 팔아서, 그 판 돈을 가져다가
35    사도들의 발 앞에 놓았고, 사도들은 각 사람에게 필요에 따라 나누어 주었다.
 
네 것 내 것 없이 전 재산을 내어놓고 서로 통용하며 살아가는 그런 곳, 그러므로 핍절한 사람, 가난한 사람이 없는 곳을 우리는 천국이라 하고 그 모형으로 교회를 이 땅에 주신 것이며, 그러한 초대 교회의 모습을 성경에 기록해 놓음으로서 천국에서의 교회의 삶을 힌트 하고 계신 것입니다. 어떻게 사람들이 자기 생명처럼 여기는 자신의 재산을 몽땅 내어놓고 다른 이들과 유무상통할 수 있을까요? 천국에서만 가능한 일입니다. 내 소유가 나의 힘이 아니라 하나님만이 나의 힘이요 나의 주인이라는 확신 속에 거하는 자들이 바로 하나님 나라 백성들이거든요. 성경은 지금 그 모습을 그림자로 잠간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신명기에서 하나님의 백성들이 궁극적으로 들어갈 곳을 이렇게 설명합니다.
 
(신15:4) 너희 가운데 가난한 사람이 없게 하여라. 그러면 주 너희의 하나님이 너희에게 유산으로 주어 차지하게 하시는 땅에서 너희가 참으로 복을 받을 것이다
 
인류의 역사상 가난한자가 없었던 때가 있었습니까? 없었습니다. 왜요? 하나님께서 분명 약속하셨잖아요? 네가 만일 네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만 듣고 여호와가 명하는 명령을 다 지켜 행하면 복을 받아 너희 중에 가난한 자가 없을 것이라고 하나님이 말씀하셨잖아요? 그런데 왜 역사 속에 가난한 사람이 없었던 때가 없을까요? 답은 간단하지요. 그 누구도 하나님의 말씀만 듣고 그 명령을 다 지켜 행한 자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신약의 한 모퉁이에 그런 공동체가 있더란 것입니다. 그게 교회였습니다. 자, 그렇다면 하나님이 말씀하신 대로 누군가가 하나님의 명령을 다 지켜 행한 분이 계시다는 것인데 그 분이 누구일까요? 그런 사람이 있었으니까 정말 가난한 자가 없는 공동체가 생겼을 것 아닙니까? 바로 예수그리스도이십니다. 예수께서 하나님의 조건을 다 충족시키시고  하나의 공동체를 탄생시키신 것입니다. 그곳에서는 모든 자들이 자기의 전부를 내어놓고 서로 나누며 가난한 자가 없더라는 것입니다. 그게 바로 유무상통하는 초대교회의 그림이 우리에게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인 것입니다. 하늘나라 백성들의 공동체를 모델로 잠간 그려놓으신 것입니다. 우리가 바로 그 속에 들어있는 교회인 것입니다. 가난한 자가 없는 그 공동체 속에 들어와 버린 이들이 성도들인 것입니다. 그럼 이제 우리는 교회에다 모두 다 갖다 바쳐야 하나요?
그럼 이제 주님께서 전부 다 바친 자를 칭찬하신 것이 무슨 의미인지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구약시대에는 성전에 제사를 지내러 갈 때 제물을 가지고 갔습니다. 다 아시지요? 그 제물에 자신의 죄를 전가시켜 태워버림으로 그 사람의 죄가 사해지는 율법의 내용을 따르기 위함입니다. 그 제물은 누구를 상징하는 것이었나요? 여러분이 아시다시피 속죄양 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들은 그 제물을 태움으로 죄 사함을 받은 것이 아니라 그 제물이 상징하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죄 사함을 받았던 것입니다. 구약의 제사는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가리키는 상징이었던 것입니다. 조금 비약을 해보면 신약에서의 그 제물이 바로 헌금인 것입니다. 그 중간에 설명할 부분이 많지만 오늘은 헌금에 대해서만 설명을 드릴 것이기 때문에 조금 건너뛰었습니다. 나중에 자세하게 설명할 기회가 있을 것입니다. 그렇게 구약에서의 제물이 오실 그리스도를 상징하는 것이었다면 신약시대의 헌금은 무엇을 상징하는 것이겠습니까?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하는 것이겠지요? 이 땅에 인간의 몸을 입고 오셔서 하나님의 말씀을 완벽하게 들으시고 지켜내신 예수 그리스도, 우리를 영원한 죽음에서 건져내신 참 제물인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하는 것이 헌금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헌금을 드린다는 것은 이것으로 하나님의 일을 돕겠다고 나서는 것이 아니라 나는 그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죄 사함을 받고 의롭게 되었다는 하나님 앞에서의 신앙고백인 것입니다.
그렇게 헌금이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말한다면 우리가 헌금을 한다는 것은 내 안에 이미 들어와 계신 예수 그리스도를 하나님 앞에 내어놓는 것이 되는 것입니다. 자, 지금부터 잘 들으세요. 그리스도와의 연합이 무엇인지 여러분 잘 아시지요? 우리 성도와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로 연합이 되어 하나님께 드려짐으로 우리는 구원을 받은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헌금으로 바치는 그 예수 안에 누가 들어있다는 소리입니까? 바로 우리 자신이 들어있는 것입니다. 예수가 내 안에 내가 예수 안에 있는 것이니까요. 그러면 헌금은 결국 무엇을 드리는 것입니까? 바로 나 자신을 모두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 헌금인 것입니다.
 
나는 저주받아 죽어야 할 자였습니다. 그런데 생명의 속전인 은 삼십 냥에 팔리신 예수님께서 나의 속전이 되셔서 죽어야 할 나를 살리신 것입니다. 그래서 이제 우리는 예수님 것이 되었습니다. 이제 더 이상 ‘나’라는 존재는 내 것이 아니기 때문에 소유권을 주장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나’를 다 드리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을 성경은 순종이라 하는 것이고, 항복이라고도 부르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의미를 올 바르게 깨달은 자들은 그렇게 자신을 하나님 앞에 쳐서 복종시키게 되는 것입니다. 거기에서 순종의 삶이 나오고, 헌금이 나오고, 자신의 것을 비워 남을 살리는 구제와 봉사가 나오는 것입니다. 이렇게 헌금을 비롯한 종교행위는 전부 나 자신을 하나님께 모두 드리는 행위이기에 주님은 자신의 모든 것을 다 바친 그 여인을 예로 들어 헌금의 내용을 우리에게 메시지로 던지시는 것입니다.
 
“너는 너에게 주어진 모든 것이 하나님으로부터 왔다는 것을 아는 자구나. 그래서 바로 다음끼니가 어떻게 될 것인가도 걱정하지 않고 너희 가진 것을 다 털어 낼 수 있는 믿음의 여인이구나.” 하고 그 여인을 칭찬하시며 우리 교회에게 이 세상에서 어떠한 자세로 살아야 하는지를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헌금은 액수의 많고 적음이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헌금이라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라는 참 제물에 의해 내가 구속되었다는 그러한 믿음에서 근거한 것인가 아닌가가 중요한 것입니다. ‘하나님 저는 이제 하나님만이 저의 힘이요 소망이라는 것을 알기에 세상 사람들이 목숨처럼 여기는 이 세상의 힘을 대표하는 물질을 하나님 앞에 이렇게 바칠 수 있습니다’ 이게 헌금의 정신입니다. 그 헌금의 정신을 올바로 깨닫고 실행에 옮긴이들이 고린도서를 쓴 바울에게서 언급이 됩니다.
 
 (고후8:1-5)
1    형제자매 여러분, 우리는 하나님께서 마케도니아 여러 교회에 베푸신 은혜를 여러분에게 알리려고 합니다.
2    그들은 큰 환난의 시련을 겪으면서도 기쁨이 넘치고, 극심한 가난에 쪼들리면서도 넉넉한 마음으로 남에게 베풀었습니다.
3    내가 증언합니다. 그들은, 힘이 닿는 대로 구제하였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힘에 지나도록 자원해서 하였습니다.
4    그들은, 성도들을 구제하는  특전에 동참하게 해 달라고, 우리에게 간절히 청하였습니다.
5    그들은, 우리가 기대한 이상으로, 먼저 자기를 주님께 드리고, 하나님의 뜻을 따라 우리에게 바쳤습니다.
 
마게도냐 교회 교인들이 성도를 구제하기 위해 연보를 했는데 그들의 상황이 어떠했는지 보세요. 그들은 환난의 많은 시련 가운데 있었고 극한 가난에 시달렸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풍성한 연보를 했다는 것입니다. 힘대로 할뿐 아니라 힘에 지나도록 자원하여서 제발 우리도 그 연보에 동참하게 해 달라고 바울에게 간구를 했다는 것입니다.
 
이 가난한 사람들이 이 땅에서의 자신들의 안위를 걱정했다면 그렇게 할 수 있었겠습니까?
어떻게 그렇게 가난한 사람들이 자신들이 가진 것을 힘에 지나도록 헌금할 수 있었을까요?
그들의 관심은 이미 이 땅의 것들이 아니었다는 증거인 것입니다.
그들에게는 하늘의 복된 소망이 이미 자리하고 있었기에 하나님 앞에 자기 자신을 드린 것입니다. 그러고도 그게 아깝지 않은 것입니다. 내가 하나님의 소유가 확실하다면 나에게 주어진 모든 것이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이므로 아까울게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한 신앙고백의 표현이 헌금인 것입니다. 그러한 신앙고백은 하나님께서 주신 참 믿음에서만 나올 수 있는 것이므로 성도는 자원하고 준비하여 헌금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고후9:5-7) 그러므로 나는 그 형제들에게 권면하여, 나보다 먼저 여러분에게로 가서, 여러분이 전에 약속한 선물을 준비해 놓게 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하였습니다. 이렇게 해서, 여러분이 이 선물을, 억지로가 아니라, 마음에서 우러난 선물로 마련하게 하려는 것입니다. 요점은 이러합니다. 적게 심는 사람은 적게 거두고, 많이 심는 사람은 많이 거둡니다.  각자 그 마음에 정한 대로 해야 하고, 아까워하면서 내거나, 마지 못해서 하는 일은 없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기쁜 마음으로 내는 사람을 사랑하십니다.
 
보세요. 헌금은 이렇게 아무렇게나 거지 동냥 주듯이 교회에 와서 주머니에 있는 것 꺼내서 내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신앙고백과 함께 하나님께 자신을 드리는 것입니다. 그러한 신앙 고백 없이 하나님께 소액 투자하고 많은 배당금을 받겠다고 헌금을 하는 사람들을 가리켜 적게 심는 자라 하는 것이며 ‘나는 하나님의 것이므로 나를 하나님께 드립니다.’라는 신앙고백과 함께 헌금을 드리는 자를 많이 심는 자라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혹자들이 이야기하는 것처럼 헌금을 적게 하면 하나님이 적게 보답하시고 헌금을 많이 하면 하나님이 많은 것으로 보답하신다는 그런 식으로 이 구절들을 이해하시면 안 됩니다.
 
이 구절의 진의는 적게 심는 자, 즉 복음과 믿음에 근거하지 않고 헌금을 한 자들은 풍성한 천국과는 아무 상관없는 적게 거두는 자로 남게 되고 많이 심는 자들, 즉 믿음에 근거한 자신을 드리는 신앙고백을 근거로 헌금을 한 이들은 천국의 풍성함을 거둔다는 말이 많이 거둔다는 말의 의미인 것입니다. 그런 자들은 당연히 즐겨 낼 수밖에 없지요.
 
십의 일조가 뭐 그리 대단합니까? 십의 십이 다 하나님 것인데요. 그런 사람들은 십일조 해놓고 자랑하거나 그 것 알아주지 않는다고 실망하지 않습니다. 나와 하나님 사이의 신앙고백에 왜 남의 눈을 의식하는 바보 같은 행동을 합니까? 헌금은 신앙고백으로 드려질 때만 즐겨 낼 수가 있는 것입니다. 아니면 아까워서 어떻게 내냅니까? 그러니까 여러분 이 중에 혹시 아직 복음을 제대로 깊이 깨닫지 못하고 아까운 마음에 헌금을 하시는 분들이 계시다면 지금 당장 멈추세요. 그런 사람은 헌금을 안 하시는 것이 좋습니다. 그런 사람은 헌금을 하면 할수록 죄를 짓는 꼴이 되기 때문입니다. 아까운 것을 교회에다 갔다 내고는 ‘하나님이 내가 이정도 했는데도 나를 알아주시지 않는다면 정말 나 화날 거야’ 이건 죄입니다.
 
어떤 집사님이 술을 아주 좋아하셨는데 군인이셨습니다. 군인은 군대 PX에서 술을 사 마실 수 있어 아주 저렴하게 마신다지요. 그런데 헌금을 하려고 하면 5불이면 술이 열 잔인데 하는 생각 때문에 손이 부들부들 떨리더랍니다. 그렇게 아까우면 헌금 하지 마세요. 교회는 여러분이 헌금을 안 한다고 망하고 여러분이 헌금을 많이 해서 흥하는 그런 곳이 아닙니다. 그러니까 걱정 마시고 정말 온전한 신앙인이 되셨을 때 그 때 아낌없이 ‘나’를 하나님께 드리세요.
 
여러분이 헌금을 하시면서 이 돈이면 하나님께 꽤 도움이 되겠지 하고 내는 사람이 있다면 크게 오해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돈이 필요해서 헌금을 하라고 하시겠습니까? 오병이어의 기적을 예로 들면서 하나님께 적은 것을 바치면 하나님께서 그 돈을 잘 굴려서 크게 쓰신다고, 그러니까 가진 대로 정성껏 헌금하면 하나님이 그 돈으로 하나님 사업에 잘 쓰실 거라고 생각하지 마세요. 그리고 그렇게 오병이어를 내어놓은 자를 하나님께서 몇 십 배로 축복하신다는 귀신 씬 나락 까먹는 이야기에도 속지 마세요. 여러분은 헌금을 한 만큼 경제적으로 손해입니다. 분명합니다. 하나님께서 몇 배로 투자금액을 부풀려 갚아 주실 것이라 오해 하지 마세요. 그럴 심산으로 헌금을 하시는 것이라면 좋은 재테크 상담원을 찾아가세요. 여러분은 헌금을 하면 할수록 이 땅의 것에 오염된 나를 버리는 것이지 이 땅의 것들을 어 많이 얻어내기 위한 투자로 하는 것이 아닙니다. 거꾸로 생각하고 계신 거예요.
 
오병이어의 사건은 여자와 아이 합치면 족히 이만명은 넘는 사람들을 먹이는데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는 얼마나 쓸모없고 하찮은 것인가를 대비시키기 위한 소품일 뿐입니다. 왜 모세를 팔팔한 40대 때 부르시지 않고 여든 살의 노인이 되어서야 부르셨을까요? 왜 바울을 스데반을 죽이는데 동참하게 하여 평생 그 죄책감에 시달리게 하시면서 그를 부르셨을까요? 그런 잔인한 것은 미리 좀 말려 주실 수 도 있었잖아요?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이시니까.
그 모든 것은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일은 너희가 가진 것으로 너희의 힘과 능력으로 되는 것이 아니란 것을 알게 해 주시기 위함인 것입니다.
 
우리는 헌금을 하면서 하나님, 이것이 하나님의 일에 무슨 도움이 되겠습니까? 하지만 우리가 헌금을 드리는 것은 “하나님 우리는 돈으로 사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사는 사람들입니다 ”라는 고백을 하는 것입니다. 오병이어의 기적에서 가장 큰 기쁨을 맛본 자가 누구 일 것 같으세요? 그것을 드린 어린아이와 그것을 받아 예수님께 전한 제자들일 것입니다.
성경 어디에 그 오병이어를 바친 아이를 주님께서 축복하셔서 거부(巨富)가 되게 해 주셨다는 구절이 있습니까? 그것은 단지 전혀 가능성 없는 것을 가지고 예수님께서 하늘의 풍성함을 보이시는 것입니다. 여러분 그 어린 아이를 생각해 보세요. 조금 전까지 내가 가지고 있던 보리떡입니다. 그것이 수천 배, 수만 배가 되어 백성들의 배를 불리고 있습니다. 조금 전까지 내가 가지고 있던 물고기 두 토막이었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이렇게 수 만 마리의 물고기로 둔갑하고 있습니다. 누가 제일 은혜를 받았겠습니까? 그 것을 내 놓은 아이입니다.
 
다른 사람들은 그것이 어디서 어떻게 나오는지 알게 뭐예요? 하지만 본인은 알고 있지 않습니까?
하나님이 우리에게 왜 헌금을 하도록 하시는지 아세요? 우리의 돈으로 하나님을 도와 달라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유익을 위해 우리에게 헌금을 하라 명하시는 것입니다. 세상의 힘을 대표하는 그 돈을 자신을 위해 쓰지 않고 서슴없이 내어 놓을 수 있는 믿음을 가르치기 위해, 그리고 그러한 믿음을 시험하시기 위해 우리에게 헌금을 하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그 시험에 합격한 자들이 축복 받은 자들인 것입니다. 그러니까 헌금은 우리 자신을 축복하시기 위한 하나님의 배려인 것입니다. 어떻게 하나님의 일이 돈으로 이루어집니까? 정말 사람의 마음을 돈으로 바꿀 수 있나요? 정말 돈으로 죄인들의 회개를 이끌어 낼 수 있나요? 그런데 그 불가능한 우리의 돈으로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일을 해 나가시는 것을 보며, 역시 하나님은 위대하시며 오늘도 살아 계시다는 것을 우리로 하여금 실감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좋은 선생님은 자신을 먹여 살릴 등록금을 내주는 학생이 필요한 것이 아니라 자기가 가르칠 학생이 필요한 사람이 좋은 선생님입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을 도울 사람을 찾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백성으로 가르치실 사람들이 필요한 것입니다. 그게 성도입니다. 우리는 헌금을 하면서 그 대열에 동참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말이 나온 김에 십일조에 관해서도 설명을 하고 가지요. 여러분 십일조가 뭡니까? 하나님이 왜 이스라엘에게 십일조를 하라고 시키셨지요? 하나님이 하늘나라 재정이 부족하셔서 그렇게 시키신 것입니까?
십일조에서 놓쳐서는 안 될 중요한 것 중 하나가 십일조는 약속의 땅과 관련이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십일조를 명령하신 것은 ‘약속의 땅’에 들어가고 난 후였습니다.
 
(레27:30) "땅의 십분의 일, 곧 땅에서 난 것의 십분의 일은, 밭에서 난 곡식이든지, 나무에 달린 열매이든지, 모두 주에게 속한 것으로서, 주에게 바쳐야 할 거룩한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그 약속의 땅에서 나는 소산과 가축의 십분의 일을 꼭 하나님께 바치도록 했습니다. 그 것은 하나님께서 어린양의 피로 말미암아 은혜로 주신 그 약속의 땅에서 나는 모든 것은 하나님께서 은혜로 주시는 것이라는 것을 고백하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은 ‘하나님의 은혜를 기억하라‘ 는 의도에서 십일조를 허락하신 것입니다. ’그 땅과 그 땅에서 나는 소산은 하나님의 전투를 통해 너희에게 은혜로 주어진 것이라는 걸 기억하라’ 는 하나님의 의도가 숨어 있는 것이 바로 십일조 인 것입니다.
신명기에 가면 그 십일조가 어떤 것인지 조금 더 계시가 점진됩니다.
 
(신14:22-23) "너희는 해마다 밭에서 거둔 소출의 십일조를 드려야 한다.  너희는, 곡식과 포도주와 기름의 십일조를, 처음 난 소와 양의 새끼와 함께, 주 너희의 하나님이 당신의 이름을 두려고 택하신 곳으로 가지고 가서, 주 앞에서 먹어야 한다. 이렇게 함으로써 너희는 주 너희의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것을 배우게 된다.
 
여기 보시면 하나님께서 ‘십일조를 권속들과 함께 먹으라’고 하십니다. 그러니까 십일조는 그 용도가 우리가 아는 것처럼 단순히 레위 인들의 생활비에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은혜로 주신 것을 다시 하나님께 바침으로 그 모든 것들이 은혜라는 것을 확인하고, 그 것을 자신과 권속들이 나누어 먹으며 잔치를 벌이는 것이 바로 십일조 인 것입니다. 그런데 23절을 보시면 십일조를 먹으라고 하시면서 네 곡식과 포도주와 기름의 십일조를 먹으며 또 네 우양의 처음 난 것을 먹고  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니까 십일조라는 것은 ‘우 양의 처음 난 것‘ 즉 ’맏물‘ ’맏이‘와 깊은 관련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성경이 말하는 ‘맏물‘이 무조건 처음 난 것을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민18:12-13) 가장 좋은 기름과 가장 좋은 포도주와 곡식과 그들이 나 주에게 바치는 첫 과일 모두를, 내가 너에게 준다.  그들의 땅에서 난 처음 익은 열매 가운데서, 그들이 나 주에게 가져 오는 것은 모두 너의 것이다. 너희 집에 있는 정결한 사람은 모두 그것을 먹을 수 있다
 
이 구절은 하나님께서 레위 인들과 제사장들의 분깃에 관해서 설명하시는 구절입니다.
아시다시피 레위 인들은 이스라엘 사람들의 십일조로 그 분깃을 삼는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그들의 분깃을 “첫 소산”이라고 표현을 하시면서 “곧 제일 좋은 기름과 제일 좋은 포도주와 곡식”이라고 부연을 하십니다. 그러니까 이스라엘이 하나님께 바쳤던 것은 단순히 제일 처음 익은 곡식과 제일 처음 태어난 짐승이 아니라 ‘가장 좋은 것‘이라는 의미인 것입니다. 거기에는 그렇게 ’가장 좋은 것‘도 하나님이 은혜로 허락하신 하나님의 것이라면 ’그 뒤의 별로 안 좋은 것들은 말할 것도 없이 모두 다 하나님의 것‘이라는 신앙 고백적인 내용이 담겨 있는 것입니다. 다른 말로 ’맏물’은 단순히 첫 번째 태어난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그 맏물이 속해 있는 전체를 대표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십일조는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백성에게 허락하시는 세상 어떤 것과도 비교할 수 없는 가장 좋은 어떤 복을 대표하는 것입니다.
그럼 ’맏물’하면 대표적으로 생각나는 게 뭐가 있지요? ‘출애굽, 유월절‘
그러니까 이 십일조는 유월절과도 아주 밀접한 관련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유월절에 애굽의 장자들이 다 죽었을 때 하나님께서 어린양의 피를 문설주와 인방에 바른 이스라엘의 장자를 모두 살려 주셨습니다. 그리고는 이스라엘에게 ‘내가 너희 장자들을 살려 주었으니 처음 난 것은 사람이건 짐승이건 모두 나에게 바치라’는 명령을 내리셨습니다.
 
(민3:13) 처음 난 것은 모두 나의 것이기 때문이다. 내가 이집트 땅에서 첫 번째로 난 모든 것을 칠 때에, 사람이든지 짐승이든지, 이스라엘에서 처음 난 것은 모두 거룩하게 구별하여 나의 것으로 삼았다. 나는 주다.”
 
(레27:26) 짐승의 맏배는 새삼스레 거룩한 것으로 바칠 것이 없다. 맏배는 이미 나 주의 것이기 때문이다. 소든지 양이든지 그것들은 다 나 주의 것이다.
 
이렇게 십일조에는 유월절 어린양에 의해 살아난 ‘처음 난 것‘’맏이‘ 들의 ’대신’ 이라는 의미가 들어 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나님께 바쳐질 ‘맏물’에 대한 명령은 이미 출애굽기에서부터 주어졌던 것입니다.
 
(출13:11-15)
11 주께서, 너희와 너희 조상에게 맹세하신 대로, 너희를 가나안 사람의 땅에 이르게 하셔서, 그 땅을 너희에게 주시거든(약속의 땅에서)
12 너희는 태를 처음 열고 나오는 모든 것을 주께 바쳐라. 그리고 너희가 기르는 짐승이 처음 낳는 수컷은 다 주의 것이다. (초태생 중 수컷은 곧 ‘장자’를 의미)
13 나귀의 첫 새끼는 다 어린 양으로 대속할 것이요(하나님께서 나귀는 그냥 안 받으시겠답니다. 나귀는 어린 양으로 대신 바치라고 하십니다. 만일 그 나귀를 대신할 어린  양이 없으면 어떻게 되는 것입니까?) 그렇게 아니하려면 그 목을 꺾을 것이며 (만일 나귀 대신 바쳐질 어린양이 없으면 나귀는 목이 꺽여 죽게 됩니다. 여러분 지금 이게 무엇을 상징하고 있는지 잘 아시겠지요? 우리 죄인들은 우리를 대속 하신 어린양이 없었다면 모두 목이 꺽여 줄을 수밖에 없는 운명이었다는 것을 보여 주는 것입니다) 너의 아들중 모든 장자 된 자는 다 대속할지니라(인간의 모든 장자들도 다 대속 하라고 하십니다)
14 뒷날, 너희 아들딸이 너희에게 묻기를, 무엇 때문에 이런 일을 하느냐고 하거든, 너희는 아들딸에게 이렇게 일러주어라. '주께서 강한 손으로, 이집트 곧 종살이하던 집에서 우리를 이끌어 내셨다.
15 그 때에 바로가 우리를 내보내지 않으려고 고집을 부렸으므로, 주께서, 처음 난 것을, 사람뿐만 아니라 이집트 땅에 있는 모든 처음 난 것을 죽이셨다. 그래서 나는 처음 태를 열고 나온 모든 수컷을 주께 제물로 바쳐서, 아들 가운데에서도 맏아들을 모두 대속하는 것이다.
 
이렇게 맏물은 어떤 것을 대표하며 대신하는 ‘대속’의 효능이 있는 것입니다. 십일조가 바로 그 것을 내용으로 담고 있다는 것입니다. 계시는 계속 점진됩니다. 이 개념이 히브리서까지 어떻게 이어지는지 잘 보세요.
 
그런데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의 장자들 대신에 한 지파를 선택하셔서 전체 이스라엘 지파를 대표해서 장자로 삼으셨습니다. 그게 레위 지파입니다. 레위 지파는 하나님께 전체 이스라엘을 대신해서 바쳐진 대속 물이기 때문에 약속의 땅에서 기업을 받지 못합니다. 그들은 제물인 것입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에는 야곱의 12아들 중 요셉의 두 아들이 각각 한 지파씩을 이루었기 때문에 원래 이 ‘에브라임과 므낫세’지파를 포함하면 13지파임에도 불구하고 레위 지파는 약속의 땅에서 지파로서의 이름을 상실해 버리기 때문에 이스라엘은 12지파가 된 것입니다. 그러니까 레위 지파는 나머지 12지파를 대신해서 하나님을 섬기는 희생 제물로 바쳐진 것입니다.
 
(민3:40-41)
40 주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셨다. "이스라엘 자손 가운데서, 태어난 지 한 달이 넘은 맏아들은 모두 등록시키고, 명단을 작성하여라
41 나는 여호와라 이스라엘 자손 중 모든 처음 난 자의 대신에(장자들 대신에, 장자는 이스라엘 전체를 상징하는 것이므로 레위인은 이스라엘 전체를 대신하고 대표하는 사람) 레위인을 내게 돌리고 또 이스라엘 자손의 가축 중 모든 처음 난 것의 대신에 레위인의 가축을 내게 돌리라
 
그러니까 레위 지파는 이스라엘 전체를 대표해서 하나님께 바쳐진 대속 물 인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은 이스라엘 전체를 하나님의 장자로 여기시고 그들을 애굽에서 건지셔서 하나님의 자녀로 삼으시겠다는 교회를 향한 하나님의 구속의 약속을 어떻게 이루실 것인지를 레위 인들을 이스라엘의 장자로 삼으셔서 하나님을 섬기게 하시는 것으로, 모형으로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한 대속 물이 하나님께 바쳐짐으로 나머지가 전부 복을 받게 되는 원리,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을 그림으로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출4:22)
22 너는 바로에게 말하여라. '나 주가 이렇게 말한다. 이스라엘은 나의 맏아들이다.(분명 이스라엘 전체를 장자라고 부르시지요? 레위 지파만이 아닙니다. 레위 지파는 그 전체 이스라엘을 대표하고 있는 장자들인 것입니다)
 
이렇게 레위 지파 속에는, 처음 난 것은 전부 하나님의 것이라는 ‘장자’의 개념과 어떤 무리를 대표하여 대속 하는 ‘맏물’의 개념이 겹쳐있는 것입니다.
아까 그 장자와 맏물의 개념이 십일조의 내용이라고 했지요? 그러니까 레위 지파는 전체 이스라엘 민족의 십일조로 하나님께 드려진 것입니다.
 
다시 한 번 정리를 할게요. 십일조는 하나님께서 약속의 땅에서 이스라엘에게 하나님의 은혜를 기억하게 하려는 의도에서 명령하신 율법입니다.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로 복을 받은 이스라엘이 그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확실한 신앙고백으로 십일조가 드려지는 것입니다. 그리고 온전한 십일조가 하나님께 드려졌을 때 하나님은 하나님을 알아보고, 인정하며, 순종하는 그 것을 기뻐하시며 이스라엘에게 복을 부어주시는 그러한 복의 순환을 십일조가 담고 있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레위 지파도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 은혜로 복을 주셨으며, 또 주실 것이라는 것의 표징으로 하나님 앞에 드려진 지파인 것입니다.
그래서 레위지파가 제사를 잘 지내면 이스라엘 전체가 약속의 땅에서 복을 받게 되는 것이고 레위 지파가 제사를 잘 못 드리고 하나님 섬기는 일을 소홀히 하면 이스라엘 전체가 벌을 받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십일조라는 것은 하나님께 바쳐진 대속의 제물임과 동시에 자신이 대표하고 있는 사람들의 죄를 대속 하는, 제사를 지내는 제사장의 역할을 동시에 포함하고 있는 것입니다. 십일조 안에 그 두 가지 내용이 다 들어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십일조가 약속의 땅에서 하나님께서 주시는 모든 것은 하나님의 것이라는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신앙 고백인 것처럼 레위 인들이 하나님께 구별되어 바쳐진 것 또한 그 레위 인들의 희생으로 말미암아 온 이스라엘이 복을 받게 된다는 구속사 전체가 그 안에 들어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십일조는 단순히 물질적인 어떤 소득을 하나님께 떼어서 바친다는 것을 내용으로 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안에는 아주 중요한 ‘십일조의 정신’이 들어 있는 것입니다. 보세요.
 
(신14:24-29)
24    그러나 주 너희의 하나님이 당신의 이름을 두려고 택하신 곳이, 너희가 있는 곳에서 너무 멀고, 가기가 어려워서, 그것을 가지고 갈 수 없거든,
25    너희는 그것을  돈으로 바꿔서, 그 돈을 가지고 주 너희의 하나님이 택하신 곳으로 가서,
26    그 돈으로 마음에 드는 것을 사거라. 소든지 양이든지 포도주든지 독한 술이든지, 어떤 것이든지, 먹고 싶은 것을 사서, 주 너희의 하나님 앞에서 너희와 너희의 온 가족이 함께 먹으면서 즐거워하여라.
27    그러나 성 안에서 너희와 함께 사는 레위 사람은, 유산도 없고 차지할 몫도 없는 사람들이니, 그들을 저버리지 않도록 하여라.
28    너희는 매 삼 년 끝에 그 해에 난 소출의 십일조를 다 모아서 성 안에 저장하여 두었다가,
29    너희가 사는 성 안에, 유산도 없고 차지할 몫도 없는 레위 사람이나 떠돌이나 고아나 과부들이 와서 배불리 먹게 하여라. 그러면 주 너희의 하나님은 너희가 경영하는 모든 일에 복을 내려 주실 것이다."
 
이렇게 십일조는 단순히 소득의 십분의 일을 하나님께 바친다는 것 보다 하나님께서 은혜로 허락하신 것이 다시 그 하나님께 바쳐진 것을, 또 다시 받아서 먹으며 즐기는 것입니다.
단순히 바치는 것이 목적이라면 ‘성전이 아무리 멀어도 끝까지 끌고 와야 한다.‘ 그래야 맞지요? 그런데 하나님은 ’성전이 너무 멀면 그 십일조를 팔아서 너희가 제일 먹고 싶은 것을 사라, 그리고 그 것을 권속들과 함께 먹으라.’고 하십니다. 그러니까 십일조는 하나님의 은혜를 누리고 즐기는 데 진정한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단순히 십일조를 나에게 주신 소득의 십분의 일을 바치는 것이라고 정의를 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로 허락하시는 것이 ‘이 땅의 물질’뿐이라는 이 세상의 시대정신이 낳은 악마적인 발상인 것입니다. 정말 하나님이 우리에게 은혜로 주시는 것이 단순히 물질  뿐입니까?
이 십일조가 담고 있는 것을 좀 더 정확하게 이해를 하시려면 최초의 십일조가 드려졌던 창세기로 가 보셔야 합니다.
 
(창14:14-20)
14    아브람은 자기 조카가 사로잡혀 갔다는 말을 듣고, 집에서 낳아 훈련시킨 사병 삼백열여덟 명을 데리고 단까지 쫓아갔다.
15    그 날 밤에 그는 자기의 사병들을 몇 패로 나누어서 공격하게 하였다. 그는 적들을 쳐부수고, 다마스쿠스 북쪽 호바까지 뒤쫓았다.
16    그는 모든 재물을 되찾고, 그의 조카 롯과 롯의 재산도 되찾았으며, 부녀자들과 다른 사람들까지 되찾았다.
17    아브람이 그돌라오멜과 그와 동맹을 맺은 왕들을 쳐부수고 돌아온 뒤에, 소돔 왕이 아브람을 맞아서, 사웨 벌판 곧 왕의 벌판으로 나왔다.
18    그 때에 살렘 왕 멜기세덱은 빵과 포도주를 가지고 나왔다. 그는 가장 높으신 하나님의 제사장이다.
19    그는 아브람에게 복을 빌어 주었다. "천지의 주재,  가장 높으신 하나님, 아브람에게 복을 내려 주십시오.
20    아브람은 들으시오. 그대는, 원수들을 그대의 손에 넘겨 주신  가장 높으신 하나님을 찬양하시오."아브람은 가지고 있는 모든 것에서 열의 하나를 멜기세덱에게 주었다.
 
최초의 십일조가 등장하는 장면입니다. 소돔 왕과 고모라 왕과 아드마 왕과 스보임 왕과 소알 왕 이렇게 다섯 나라 왕의 연합군이 엘람왕, 고임왕, 시날왕,  엘라살왕 이렇게 네 왕의
연합군과 전쟁을 했습니다. 그 와중에 소돔에 살던 아브라함의 조카 롯이 잡혀가게 되었습니다. 그 소식을 들은 아브라함이 집에서 키우던 사병 318명을 데리고 그 네 나라 국가 연합군 수 만 명을 무찌르고 롯을 구해옵니다. 그 전쟁은 상식적으로 어느 모로 보나 아브라함이 이길 수 있었던 전쟁이 아니었습니다. 그 전쟁은 하나님께서 함께 하셔서 이긴 전쟁이라는 사실을 아브라함도 알았습니다.
 
그런데 돌아오는 길에 살렘왕 멜기세덱이라는 사람을 만납니다. 성경은 그 사람을 살렘 왕 즉 ‘샬롬 왕’‘평강의 왕’이라고 부릅니다. 그리고 그는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제사장이라고 합니다. 그가 떡과 포도주를 가지고 나와서 아브라함을 축복합니다. 떡과 포도주, 제사장, 축복 언뜻 떠오르는 분이 있지요? 그 멜기세덱이 ‘천지의 주재시요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이여 아브람에게 복을 주옵소서.’ 그랬더니 아브라함이 그 멜기세덱에게 십일조를 바쳤습니다. 아브라함의 그러한 행위는 ‘이 모든 것은 당신 덕택입니다‘ 라는 고백이었습니다. 그 말은 ’이 전쟁은 당신이 이기게 해 준 것입니다‘라는 고백인 것입니다. 그래서 자신의 소유의 10분의 1을 멜기세덱에게 바친 것입니다. 그걸 어떻게 아는가? 그건 조금 있다가 시편에서 확인시켜 드리겠습니다. 그런데 창세기 본문을 보면 그 멜기세덱 왕은 왕이면서 제사장이라고 합니다. 원래 왕은 힘을 가지고 전쟁을 치르고 정치를 하는 사람이고 제사장은 뒤에서 그 왕의 승리를 위해 제사를 지내고 기도를 하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그 살렘왕 멜기세덱은 왕이면서 제사장입니다.
 
그 말은 그 살렘 왕 멜기세덱은 제사장의 일, 즉 제사를 지내는 것 자체로 왕의 역할을 하는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그는 힘으로 전쟁을 하고 다스리는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께 제물을 바쳐 제사를 지내는 것 자체로 승리를 이끌어 내고 왕국을 다스리는 자라는 뜻입니다. 그게 누구입니까? 거기에 대한 답이 시편 110편에 나와 있습니다.
 
(시110:1-5)(다윗의 시)
1    주께서  내 주께 말씀하시기를 "내가 네 원수를 네 발판이 되게 하기까지, 너는 내 오른쪽에 앉아 있어라" 하셨습니다.
2    주께서  임금님의(글자대로는 1절의 '내 주(아도니)'를 가리키는 2인칭 단수 대명사 '당신') 권능의 홀을 시온에서 보내 주시니,  임금님께서는 저 원수들을 통치하십시오.
3    임금님께서  거룩한 산에서(또는 '거룩한 광채로') 군대를 이끌고 전쟁터로 나가시는 날에,  임금님의 백성이 즐거이 헌신하고, 아침 동이 틀 때에  새벽 이슬이(히, '당신의 젊음의 이슬이 당신께로……')맺히듯이, 젊은이들이 임금님께로 모여들 것입니다.
4    주께서 맹세하시기를 "너는 멜기세덱을 따른 영원한 제사장이다" 하셨으니, 변하지 않으실 것입니다.
5    주께서  임금님의 오른쪽에 계시니, 그분께서 노하시는 심판의 날에, 그분께서 왕들을 다 쳐서 흩으실 것입니다.
 
보세요. 여기 나오지요? 하나님께서 다윗을 데리고 전쟁을 하십니다. 그런데 다윗은 그 전쟁의 승리는 주의 우편에 계신 주님, 그러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전쟁이며 그 분이 반드시 열 왕을 쳐서 파하고 승리하신다는 고백을 합니다. 그런데 그분이 어떤 분이신가 하면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은 영원한 제사장’이시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다윗의 전쟁을 당신이 맡아서, 열 왕을 쳐서 파해 버리실 그 예수 그리스도께서 창세기의 멜기세덱과 같은 일을 하신다는 것입니다.
 
즉 창세기의 멜기세덱은 ‘십자가라는 제사’로 ‘영원한 승리’를 만들어 내시는 왕이요 제사장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하는 인물이라는 것이지요.
그 장면을 히브리서 기자가 히브리서 7장에서 인용합니다. 그 구절을 보시면 그 의미가 조금 더 확실해 질 것입니다.
 
 
 (히7:1-10)
1    이 멜기세덱은 살렘 왕이요, 가장 높으신 하나님의 제사장이었습니다. 그는 아브라함이 여러 왕을 무찌르고 돌아올 때에, 그를 만나서 축복해 주었습니다.
2    아브라함은 모든 것의 십분의 일을 그에게 나누어 주었습니다. 첫째로, 멜기세덱이란 이름은 정의의 왕이라는 뜻이요, 다음으로, 그는 또한 살렘 왕인데, 그것은 평화의 왕이라는 뜻입니다.
3    그는 아버지도 없고, 어머니도 없고, 족보도 없고, 생애의 시작도 없고, 생명의 끝도 없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아들과 같아서, 언제까지나 제사장으로 계신 분입니다.
4    그가 얼마나 위대하신가를 생각하여 보십시오. 족장인  아브라함까지도(다른 고대 사본들에는 '아브라함은') 가장 좋은 전리품의 십분의 일을 그에게 바쳤습니다.
5    레위 자손 가운데서 제사장 직분을 맡은 사람들은, 자기네  동족인 이스라엘 백성에게서, 비록 그 백성도 아브라함의  자손으로 태어났지만(그, '허리에서 나왔지만'), 율법을 따라 열의 하나를 받으라는 명이 내려 있습니다.
6    그러나 멜기세덱은 그들의 족보에 들지도 않았는데, 아브라함에게서 열의 하나를 받았고, 하나님의 약속을 받은 그를 축복해 주었습니다.
7    두말 할 것 없이 축복은 아랫사람이 윗사람에게서 받는 법입니다.
8    한쪽에서는, 죽을 수밖에 없는 인간들이 십분의 일을 받고, 다른쪽에서는, 살아 계심이 입증되신 분이 그것을 받습니다.
9    그렇게 말하면, 십분의 일을 받는 레위까지도 아브라함을 시켜서, 십분의 일을 바친 셈이 됩니다.
10    멜기세덱이 아브라함을 만났을 때에는, 레위는 아직 그의 조상 아브라함의  몸 속에(그, '허리') 있었으니 말입니다.
 
여기 보면 멜기세덱, 아브라함, 레위지파, 십일조 지금까지 공부한 모든 내용이 다 들어 있습니다. 먼저 레위 지파와 아브라함의 관계를 보세요.
5절을 보시면 레위의 아들들, 즉 레위 지파 제사장들이 아브라함이 멜기세덱에게 십일조를 바칠 때에 그 아브라함의 허리에 있었다고 합니다. 여기서 ‘허리‘라는 것은 쉬운 말로 ’배‘라는 뜻입니다.
 
(창35:11)(하나님께서 야곱에게 예언하시는 장면입니다) 하나님이 그에게 말씀하셨다.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다. 너는 생육하고 번성할 것이다. 한 민족과, 많은 갈래의 민족이 너에게서 나오고, 너의 자손에게서 왕들이 나올 것이다
 
이렇게 ‘허리’라는 말은 시간차를 두고 세상에 나오지만 본질이 하나인 것들을 가리킬 때 쓰던 단어입니다.
아브라함이 멜기세덱 앞에 있을 때에 그 레위를 배에 품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다른 말로 레위 지파가 하는 일은 그 때 멜기세덱 앞에서 아브라함이 했던 그 일과 같은 것이라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아브라함도 레위 지파처럼 제사장이었다는 것이지요. 그리고 그 위에 멜기세덱이라는 하나님의 제사장이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이 멜기세덱에게 십일조를 바칠 때 레위가 그 안에서 함께 십일조를 바쳤다고 합니다. 그러면 그 레위에게 바친 십일조는 누구의 십일조가 포함 된 것입니까? 이스라엘의 십일조가 포함된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림을 잘 그려 보세요. 멜기세덱이라는 하나님의 제사장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 분께 복을 받고 십일조를 드린 제사장 아브라함이 있습니다. 그 아래 아브라함의 허리에 있던 제사장 레위 지파가 있습니다. 그들도 아브라함의 허리에서 멜기세덱에게 십일조를 바쳤습니다. 다른 말로 복을 받은 자로 서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레위에게 십일조를 바친 이스라엘이 있지요? 그들도 역시 복을 받은 자로서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신앙고백으로 십일조를 드린 자들입니다. 그러니까 그 라인에 서 있는 아브라함, 레위, 이스라엘 모두가 멜기세덱으로부터 복을 받은 자들입니다. 그런데 그 멜기세덱은 거룩하신 하나님의 제사장이라고 했습니다. 제사장은 십일조를 받으면 그 것을 역시 하나님께 십일조로 드리게 되어 있었습니다.
 
형식상으로는 대 제사장인 아론이 받았지만 하나님은 그 것을 ‘내가 받았다’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시편에서 우리가 확인한 것처럼 그 멜기세덱은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하는 분이었습니다. 이제 그림이 확실해 졌지요?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복을 흘려보내고 계신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아브라함과 그의 허리에 있는 레위, 그리고 그 레위가 대표하고 있는 ‘믿음의 후손’인 이스라엘에게 복을 부어 주고 계신 것입니다. 그리고 그 복을 받은 자들이 하나님께 신앙 고백으로 바치는 것이 십일조입니다. 그런데 십일조는 내가 받은 모든 것, 내가 받은 모든 복은 주님께서 허락하신 것입니다‘ 라는 신앙고백임과 그 자체가 전체를 대표하는 대속 물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드리는 십일조도 레위가 드렸던 십일조와 제사도, 아브라함이 드렸던 십일조도 모두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복을 부어 주시기 위해 하나님께 바쳐지는 대속 물 예수 그리스도였던 것입니다. 그로 말미암아 우리는 진짜 참 복을 받게 된 것이고 이제는 십일조가 아니라 진짜 참 복인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주어진 영생”즉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함께 재물로 드려진 복된 나”를 하나님께 드리는 것입니다. ‘하나님, 하나님께서 복으로 주신 새로운 저는 하나님 것입니다’ 이게 오늘날의 십일조 인 것입니다.
 
그래서 이제 십일조도, 레위 지파도, 제사장도 다 없어진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그 복이 완성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멜기세덱에서 십일조 까지를 죽 그려보면 거기에 뭐가 흐르고 있는 것입니까? ‘복’이 흐르고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십일조는 ‘복의 계통도’인 것입니다.
 
구약에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그리고 있던 십일조를 레위 지파에게 내게 함으로 해서 구원이라는 복이 어떤 모양으로 우리에게 주어질 것인가를 힌트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심지어 구약시대 사람들도 자기의 유익을 따라 그 중요한 십일조를 눈속임으로 했습니다. 그래서 사사기에 보면 레위 지파 사람들이 개인 집으로 흩어져서 ‘무당 노릇’을 해 주고 밥벌이를 해야 했던 것입니다. 십일조가 안 들어오니까, 들어 와도 저는 것, 흠 있는 것, 약해 빠진 것 이런 것들만 들어오니까 레위 사람들이 먹고살기가 힘들어 졌던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얼마나 통탄 하셨겠습니까?
 
그래서 말라기에서 구약을 닫으시면서 “내가 너희에게 십일조를 하라고 한 것은 하늘의 복을 부어주기 위해 예수 그리스도를 보낼 것을 상징하는 그 십일조를 통해 하나님의 은혜를 깨달으라고 한 것이었는데 너희는 그것조차도 눈속임으로 하는구나, 너희가 정말 그 십일조의 정신을 잘 알고 십일조를 한다면 내가 너희에게 부어줄 복이 얼마나 엄청난 것인데 너희는 그 것조차 하지 않는단 말이냐“ 하고 통탄하신 것입니다.
 
(말3:8-10)
8    사람이 하나님의 것을 훔치면 되겠느냐? 그런데도 너희는 나의 것을 훔치고서도 '우리가 주님의 무엇을 훔쳤습니까?' 하고 되묻는구나. 십일조와 헌물이 바로 그것이 아니냐!
9    너희 온 백성이 나의 것을 훔치니, 너희 모두가 저주를 받는다.
10    너희는 온전한 십일조를 창고에 들여 놓아, 내 집에 먹을거리가 넉넉하게 하여라. 이렇게 바치는 일로 나를 시험하여, 내가 하늘 문을 열고서, 너희가 쌓을 곳이 없도록 복을 붓지 않나 보아라. 나 만군의 주의 말이다.
 
이게 바로 그 말인 것입니다. 너희는 그 십일조의 정신을 알지 못하고 형식적으로 소득을 바치는 것으로만 십일조를 오해하고 있기에 저는 것, 흠 있는 것, 쓸모없는 것들을 가져다 바쳐놓고 ‘내 할 일 다 했다.’고 하는데 ‘그거 정말 착각이다‘ ’그거 내가 원하는 십일조
 
아니다‘’그래서 내가 진정한 십일조인 예수 그리스도를 보낼 수밖에 없다‘하고 ’아브라함과 다윗의 세계라‘하시면서 ’마태복음‘을 여시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23장도 같은 내용입니다.
 
(마23:23-24)
23    율법학자들과 바리새파 사람들아, 위선자들아, 너희에게 화가 있다! 너희는 박하와 회향과 근채의 십일조는 드리면서, 정의와 자비와 신의와 같은 율법의 더 중요한 요소들은 버렸다. 그런 것들도 반드시 했어야 하지만, 이것들도 소홀히 하지 말았어야 했다.
24    눈먼 인도자들아! 너희는 하루살이는 걸러내면서, 낙타는 삼키는구나!
 
아직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에서 십일조로, 제물로 드려지기 전입니다. 그리고 이스라엘은 여전히 약속의 땅인 팔레스타인에 있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십일조의 정신을 여전히 잃어버리고 형식적인 십일조를 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왜 그렇게 된 것입니까?
 
24절에 보면 소경된 인도자들이 즉 다른 말로 가짜 목사들이 하루살이는 걸러내고 낙타를 삼키려는 마음에 -하루살이는 살이 없지요. 아무리 먹어도 배가 부르지 않습니다. 낙타는 살점이 있잖아요. -십일조의 정신이 무엇인지에는 관심도 없고 그저 십일조 해야 복 받는다고 가르쳤기 때문에 사람들이 곡식이나 짐승만 던져놓고 자기 할 일 다 한 것처럼 세상에 나가서는 세상 사람들과 똑같이 자기 의를 의지하고 죄 속에서 살았다는 것입니다. 오늘 날 하고 똑 같지요? 그런 썩어 빠진 정신이 형식적인 십일조를 낳은 것입니다. “십일조 하면 복 받는다” 그런데 주님이 요구하시는 것은 ‘의’‘인’(mercy 자비)‘신’(faith 믿음) 이랍니다. 다 뭡니까? 하나님으로부터 은혜로 주어지는 것들이지요? 너희들은 십일조가 뭔지 정말 모른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은 아직 십일조가 완성되지 않았고 여전히 가나안 땅에 머물고 있으므로 이것도 하고 저것도 하라고 하신 것입니다.
 
(히7:27)  그는 다른 대제사장들과는 다릅니다. 다른 제사장들은 날마다, 먼저 자기 죄를 위하여 희생제물을 드리고, 그 다음에 백성을 위하여 희생제물을 드리지만 그는 이렇게 하실 필요가 없습니다. 그는 자기를 바치셔서, 단 한 번에 결정적으로 이 일을 이루셨기 때문입니다
 
(히10:3-10)
3    그러나 제사에는, 해마다 죄를 회상시키는 효력이 있습니다. 4    황소와 염소의 피가 죄를 없애 줄 수는 없습니다.
5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 세상에 오셨을 때에, 하나님께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주님은 제사와 예물을 원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래서 나에게 입히실 몸을 마련하셨습니다.
6    주님은 번제와 속죄제를 기뻐하지 않으셨습니다.
7    그래서 내가 말하였습니다. '보십시오, 하나님! 두루마리에 나를 두고 기록되어 있는 대로, 나는 주님의 뜻을 행하러 왔습니다.'"
8    위에서 그리스도께서는 "주님은 제사와 예물과 번제와 속죄제를 원하지도 기뻐하지도 않으셨습니다"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런 것들은 율법을 따라 바칩니다.
9    그 다음에 말씀하시기를 "보십시오, 나는 주님의 뜻을 행하러 왔습니다" 하셨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두 번째 것을 세우시려고, 첫 번째 것을 폐하셨습니다.
10    이  뜻을 따라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몸을 오직 한 번 바치심으로써, 우리는 거룩하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율법은 다 완성이 되었습니다. 오히려 하나님은 그렇게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완성이 된 율법에 또 다시 묶여 있는 사람들에게 ‘너희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헛되게 하는 자“라고 하셨습니다.
 
(갈4:4-5,10-11)
4    그러나 기한이 찼을 때에,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아들을 보내셔서, 여인에게서 나게 하시고, 또한 율법 아래 놓이게 하셨습니다.
5    그것은 율법 아래 있는 사람들을 속량하시고, 우리로 하여금 자녀의 자격을 얻게 하시려는 것이었습니다
10    여러분이 날과 달과 계절과 해를 지키고 있으니,
11    내가 여러분을 위하여 수고한 것이 헛될까 염려됩니다.
 
여러분이 오늘날에도 그러한 율법에 얽매이는 것은 십자가 앞에서 또 양을 잡는 것과 다를 것이 하나도 없는 것입니다. 십자가가 뭔가 부족한 것입니까? 율법에는 여자가 남자 옷 입으면 벌 받는다고 나와 있습니다. 왜 제사는 안 지내세요? 여자가 멘스를 해도 부정한 사람이 되는 것이 율법입니다. 그런데 그런 것은 지금 하나도 안 지키잖아요.
 
그런데 왜 유독 십일조만 고집하나요? 목사들의 입장에선 교회의 재정의 최고 효자가 십일조이기 때문이고 신자의 입장에서는 십일조 하면 하나님께서 섭섭지 않게 보답해 주실 것이라는 헛된 기대 때문인 것입니다. 아닙니다. 그 모든 구약의 율법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완성되었습니다.
 
그러면 이제 우리는 헌금이고 뭐고 하나도 안 해도 되는 것인가? 아닙니다. 이제 하나님은 십일조가 아니라 여러분의 생명을 요구하십니다. 하나님은 여러분에게 영생을 복으로 주셨습니다. 이제 여러분은 영생의 십일조를 드리셔야 합니다. 하나님은 여러분이 자발적으로 여러분의 목숨까지도 하나님께 바칠 수 있는 순종의 사람이 되기를 요구하십니다. 이제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예수 그리스도라는 제물로, 십일조로 사셨기 때문에 하나님은 여러분의 전부를 원하십니다. ‘너는 내 것이라’
그래서 이제 내가 사는 모든 삶이 하나님의 것이 되는 것이고 내가 가는 모든 곳에 나의 전부가 따라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러분은 돈과 시간과 힘을 헛된 곳에 쓸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교회가 필요로 할 때는 나의 모든 것을 내 놓을 준비가 되어 있는 사람들인 것입니다. 왜? 십자가에서 이 땅의 것과 나는 이미 죽었기 때문입니다. 초대 교회 때 사도들이 십일조에 대해 한 마디라도 한 적이 있나요? 없습니다. 그럼에도 그들은 십일조가 아니라 자신의 전부를 하나님 앞에 내 놓을 준비가 되어 있었습니다.
 
여러분 이렇게 모든 헌금은 예수 그리스도를 선물로 받은 자들이 자신 안에 있는 예수 그리스도를 자신과 함께 하나님께 올려드리는 행위를 말하는 것입니다. 헌금을 하고 안 하고를 따지기 전에 먼저 자기 자신 안에 예수 그리스도가 있는지를 확인하세요. 그리고 그 예수 그리스도로 인해 내가 하나님께 전적으로 순종할 준비가 되어 있는 자인지를 먼저 확인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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