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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ome >  칼럼/책 >  그런 기독교는 없습니다
* 본 설교는 2004년도 개척 첫해에 기초교리 공부 내용입니다
 
작성일 : 13-04-15 19:51
   4. 세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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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글쓴이 : njsmyrna
    조회 : 3,117  


(요3:1-21)
1    바리새파 사람 가운데 니고데모라는 사람이 있었다. 그는 유대 의회원이었다.
2    이 사람이 밤에  예수께(그, '그에게') 와서 "랍비님, 우리는, 선생님이 하나님께로부터 오신 분임을 압니다. 하나님께서 같이하지 않으시면, 선생님께서 하시는 그런  표적을(예수의 신성을 보여주기 위한 상징으로서의 기적(그리스어 세메이온)) 아무도 할 수 없습니다" 하고 말하였다.
3    예수께서 대답하셨다. "내가 진정으로 진정으로 너에게 말한다. 누구든지 3)다시 나지 않으면(또는 '위로부터 나지 않으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다.”
4    니고데모가 예수께 말하였다. "사람이 늙은 뒤에, 어떻게 다시 태어날 수 있겠습니까? 어머니 뱃속에 다시 들어갔다가 태어날 수야 없지 않습니까?"
5    예수께서 대답하셨다. "내가 진정으로 진정으로 너에게 말한다. 누구든지 물과 4)성령으로 나지 않으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
6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영으로 난 것은 영이다.
7    너희가 다시 태어나야 한다고 내가 말한 것을, 너희는 이상히 여기지 말아라.
8    바람은('프뉴마'는 '영'을 뜻하기도 하고(6절), '바람'을 뜻하기도 함(8절)) 불고 싶은 대로 분다. 너는 그 소리는 듣지만,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는 모른다.  성령으로 태어난 사람은 다 이와 같다.”
9    니고데모가 예수께 묻기를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습니까?" 하니,
10    예수께서 대답하셨다. "네가 이스라엘의 선생이면서, 이런 것도 알지 못하느냐?
11    내가 진정으로 진정으로 너에게 말한다. 우리는, 우리가 아는 것을 말하고, 우리가 본 것을 증언하는데, 너희는 우리의 증언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12    내가 땅의 일을 말하여도 너희가 믿지 아니하거든, 하물며 하늘의 일을 말하면 어떻게 믿겠느냐?
13    하늘에서 내려온 이, 곧 인자 밖에는 하늘로 올라간 이가 없다.
14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과 같이,  인자도(다른 고대 사본들에는 '하늘에 있는 인자도') 들려야 한다.
15    그것은 그를 믿는 사람마다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려고 하는 것이다.
16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셔서 독생자를 주셨으니, 누구든지 그를 믿으면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을 것이다.
17    하나님이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시려는 것이 아니라, 아들로 세상을 구원하시려는 것이다.
18    아들을 믿는 사람은  심판을(또는 '정죄') 받지 않는다. 그러나 믿지 않는 사람은 이미  심판을 받았다. 그것은 하나님의 독생자의 이름을 믿지 않았기 때문이다.
19    심판을 받았다고 하는 것은, 빛이 세상에 들어왔지만, 사람들이, 자기들의 행위가 악하므로, 빛보다 어둠을 더 좋아하였다는 것을 뜻한다.
20    악한 일을 저지르는 사람은, 누구나 빛을 미워하며, 빛으로 나아가지 않는다. 그것은 자기 행위가 드러날까 보아 두려워하기 때문이다.
21    그러나 진리를 따르는 사람은 빛으로 나아간다. 그것은 자기의 행위가 하나님 안에서 이루어졌음을 드러내려는 것이다.”
 
니고데모는 유대인이요 관원입니다. 그는 학식이 뛰어난 사람이요 부자였습니다. 그는 율법을 철저히 지키는 바리새인이었고, 유대인을 대표하는 제사장들과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로 구성된 의회와 같은 기관에 속한 자였습니다. 당시는 전체 유대인 중에 바리새인이 6,000명이었으며 산헤드린 공회원이100여명 이었습니다. 그는 그만큼 유대사회에서 유력한 사람이었습니다. 지금 성경은 유대인 중에서도 가장 뛰어나고 신실한 네고데모가 얼마나 하잘 것 없는 자라는 것을 보여줌으로 그보다 더 형편없는 이방인들을 사랑하셔서 그들을 구원하시는, 개 같다는 이방인들을 사랑하시는 그 사랑이 얼마나 큰 것인지를 지금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성경을 잘 보시면 니고데모가 밤에 예수를 찾아옵니다. 여기서 밤과 어두움이 상징하는 것은 죄 된 세상을 뜻하는 것입니다.
 
(요1:4-5) 그의 안에서 생겨난 것은 생명이었으니, 그 생명은 모든 사람의 빛이었다.  그 빛이 어둠 속에서 비치니, 어둠이 그 빛을 이기지 못하였다.
 
(요19:39) 또 일찍이 예수를 밤중에 찾아왔던 니고데모도, 몰약에 침향을 섞은 것을  백 근쯤 가지고 왔다.
 
지금 예수께서 ‘밤’이라는 단어를 통해 독자인 성도들에게 말씀하고 싶으신 것은 유대인의 가장 뛰어난 자도 밤에 속한 자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인간의 어떠한 조건이나 위치나 지식이나 소유도 하나님 나라 입성에 아무런 도움이 안 된다는 것을 비유적으로 표현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 니고데모가 예수께 말합니다. 당신은 하나님께로서 온 분이란 것을 안다고 합니다. 일견 멋진 신앙고백처럼 들립니다. 그런데 주님은 그렇게 안다고 하는 니고데모에게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다고 말씀하십니다. 지금 예수님은 안다고 하는 니고데모가 얼마나 모르는 자인지를 설명하고 계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새롭게 하늘로부터 태어나야 구원을 얻을 수 있다고 하시지요? 잘 생각해 보세요. 태어난다는 것은 새롭게 창조되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아기가 태어날 때 자신의 탄생에 무슨 기여를 할 수 있나요? 태어나는 자는 passive thing입니다. active thing은 어머니입니다.
 
예수님은 니고데모에게 구원을 설명하시며 “니고데모야 네가 가지고 있는 성경에 대한 지식과 하나님의 축복이라고 여기고 있는 부와 명예가 있으니 너는 천국에 가까운 자이다. 이제 조금만 더 노력하면 너는 천국에 들어갈 수 있는 자이니 힘내라” 이렇게 말씀하시지 않습니다. 그와 반대로 ‘니고데모야 네가 가지고 있는 조건과 상황과 지식과 지혜가 아무리 뛰어나고 화려해도 너는 하늘로부터 나지 않으면 여전히 밤에 속한 자다’라고 말씀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Jesus saying scrap everything you've done Nicodemus. 네가 지금까지 율법을 지킨다고 하는 그 모든 것과 네가 이루어 놓은 모든 것이 아무 소용없다는 것입니다. 구원에 이르는 길은 우리가 조금만 더 self improvement하면 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조금 더 공부하고 노력하면 되는 것이 아니고, 우리의 결심으로 가능한 것도 아닙니다. 구원의 active thing인 하나님 아버지로부터 거듭남을 거저 받아야만 우리는 비로소 구원을
 
받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니고데모에게 네가 다시 창조되지 않으면 절대 넌 가망이 없다는 말씀을 하고 계신 것입니다.
 
성경에는 족보가 많이 나옵니다. 창세기, 역대 상 역대 하에 많이 나오는데 신약에는 딱 두 번 예수님의 족보가 나올 뿐입니다. 마태복음 1장과 누가복음 3장에 두 번 예수님의 족보가 나오는데 마태복음1장에 예수님의 족보가 어떻게 나옵니까? 아브라함에서 다윗, 다윗에서 바벨론 유수, 바벨론 유수에서 예수그리스도까지 14세대, 14세대, 14세대로 나옵니다. 그리고 그 마지막에 예수가 나오시는데 그 분은 성령으로 잉태 되셨다는 것을 굳이 그 족보의 마지막에 붙여 넣었습니다. 14가 세 번이라는 것은 일곱씩 여섯 개를 말합니다. 창조의 숫자, 안식의 숫자, 완전수인 7이 여섯 번나오고 그 여섯 번째 마지막이요 일곱 번째의 시작이 성령으로 잉태하신 예수님이십니다. 눈치 빠르신 분들은 아, 하고 무릎을 치실 것입니다. 즉 일곱 번째 세대로 마무리되는 새 창조의 완성은 다른 말로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하나님의 백성들은 이제 성령으로 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을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일곱 번째 세대의 머리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성령으로 잉태 되었다는 것을 굳이 기록하고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 성도들은 우리의 노력이나 요구나 열심으로 구원에 이를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오직 성령 하나님에 의해 거듭난 자만이 구원의 방주에 올라 탈 수 있다는 것을 이 족보를 통해 보여주는 것입니다.
 
다시 요한복음의 본문으로 돌아가겠습니다. 여기서 예수님께서 성령으로 나지 않으면 안 된다고 말씀하셔도 되는데 왜 물과 성령이라고 표현 하셨을까요? 그 이유를 찾아보겠습니다. 그 표현은 유대인들이 줄줄이 꿰고 있던 구약을 배경으로 한 표현입니다. 오늘 본문에 그 증거가 나옵니다. 10절을 보세요.
 
(요3:10) 예수께서 대답하셨다. "네가 이스라엘의 선생이면서, 이런 것도 알지 못하느냐?
 
헬라어 원어를 보면 선생이라는 단어 앞에 'ho'라는 정관사가 들어있습니다. 큰 스승이라는 말입니다. 주님은 ‘지금 나는 너희들이 잘 알고 있다고 하는 구약 성경의 이야기를 하고 있는데 너는 이스라엘의 큰 스승으로서 당연히 알고 있어야 할 일을 모르고 있다는 말이냐?‘하고 니고데모를 꾸짖고 계신 것입니다. 즉 예수님은 지금 니고데모에게 하시는 말씀들을 유대인들이 잘 알고 있는 구약을 배경으로 설명하시고 계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지금 인용하시는 부분은 에스겔서입니다. 그리로 가서 물과 성령이 뜻하는 바를 찾아보지요.
 
(겔36:22-26)
22    그러므로 너는 이스라엘 족속에게 전하여라. '나 주 하나님이 이렇게 말한다. 이스라엘 족속아, 내가 이렇게 하려고 하는 까닭은 너희들을 생각해서가 아니라, 너희가 여러 나라에 흩어져서, 가는 곳마다 더럽혀 놓은 내 거룩한 이름을 회복시키려고 해서다.
23    너희가 여러 나라에 흩어져 살면서 내 이름을 더럽혀 놓았으므로, 거기에서 더럽혀진 내 큰 이름을 내가 다시 거룩하게 하겠다. 이방 사람들이 지켜 보는 앞에서, 너희에게 내가 내 거룩함을 밝히 드러 내면, 그 때에야 비로소 그들도, 내가 주인 줄 알 것이다. 나 주 하나님의 말이다.
24    내가 너희를 이방 민족들 가운데서 데리고 나아오며, 그 여러 나라에서 너희를 모아다가, 너희의 나라로 데리고 들어가겠다.
25    그리고 내가 너희에게 맑은 물을 뿌려서 너희를 정결하게 하며, 너희의 온갖 더러움과 너희가 우상들을 섬긴 모든 더러움을 깨끗하게 씻어 주며,
26    너희에게 새로운 마음을 주고 너희 속에 새로운 영을 넣어 주며, 너희 몸에서 돌같이 굳은 마음을 없애고 살갗처럼 부드러운 마음을 주며,
 
이스라엘이 타락하고 범죄 하여 소망이 없는 자들이 되어 하나님께서 가나안에서 쫓아내시고 흩어버리십니다. 그들이 얼마나 소망 없는 자들이라는 것을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그토록 소망이 없는 자들이기에 하나님은 하나님께서 직접 물로 씻어서 그들의 더러움을 제하시고 하나님의 영을 그들의 마음에 새겨서 다시 창조하시지 않으면 절대 소망이 없음을 에스겔을 통해 계시하신 이 부분을 예수께서 니고데모에게 상기시키시며 다시 설명하시고 계신 것입니다.
물은 깨끗하게 하며 정결함을 주는 것입니다. 물과 성령하면 생각나는 것이 무엇이 있으세요?
먼저 여러분이 알아두셔야 할 것이 있는데 성령이라고 번역이 된 히브리어 ‘르와흐’는 ‘바람, 숨, 호흡’이라는 뜻도 함께 가지고 있는 단어입니다. 그럼 생각해 보세요. ‘바람’이 밤새 불어 ‘물’이 갈라진 장면이 있었지요? 바로 홍해가 갈라진 사건입니다. 거기서 모든 죄인들을 상징하는 애굽 군대가 모조리 빠져 죽었습니다. 그러나 가나안 쪽에서 보니 애굽에서 탈출한 새로운 자들이 물을 마른 땅처럼 걸어서 올라오는 것입니다. 그게 홍해 사건이 담고 있는 내용입니다. 그러니까 홍해 사건은 죄인들이 죽고 새로운 생명이 탄생되어 올라오는 것입니다.
 
또 물과 성령하면 생각나는 장면이 있지요? 노아의 홍수 사건입니다. 여러분이 너무나 잘 아시는 것처럼 노아의 홍수사건도 기식하는 죄인들이 모두 빠져 죽고 하나님의 택한 자들만 방주에 담겨 살아나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정결하게 한다는 것의 진의입니다. 정결하게 한다는 것은 단순히 더러워진 것을 씻거나 고치는 정도가 아니라 아예 죄를 죽여 버리는 것입니다. 이렇게 물과 성령으로 거듭난다는 것은 죄에 대해 죽고 성령에 의해 다시 살아난다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신학에서는 그것을 재창조 혹은 새 창조라 부릅니다. 태초에 천지가 창조될 때에 수면(물)위에 하나님의 신(성령)이 운행하셨던 것을 기억하시지요? 옛 창조가 그렇게 물과 성령에서 시작되었다는 것을 성경이 명확히 기록하는 것은 하나님의 궁극적인 목적인 재창조가 그렇게 이루어질 것임을 미리 예표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바람이 임의로 불매 네가 그 소리를 들어도 어디서 오며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하나니 성령으로 난 사람은 다 이러하니라”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재창조, 즉 구원은 하나님의 주권과 섭리에 의해 이루어지는 것이지 우리의 노력과 애씀이 낳는 열매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계속해서 에스겔 37장으로 니고데모에게 말씀을 이어가십니다.
 
에스겔서 37장은 우리가 잘 아는 것처럼 마른 뼈에 생기를 불어넣으니 뼈들이 살이 붙고 힘줄이 붙어 군대가 되는 것을 그리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에스겔에게 열방으로 흩어진 이스라엘의 영적인 상태가 이런 말라빠진 뼈들이라는 것을 그림으로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죽은 지 너무 오래되어서 먼지가 풀풀 나는 그런 마른 뼈들, 그런 마른 뼈들에 생기가 불어서(‘생기’는 히브리말 “르와흐”로 바람, 성령이라는 말과 함께 쓰인다고 했지요?)
 
말라빠진 뼈들이 가득 찬 골짜기에 성령의 바람이 부니 그 마른 뼈들이 살아나서 군대가 되더라는 것입니다. 지금 예수님은 구원받기 전의 우리의 모습이 어떤 자들인지 확인시켜 주시는 것입니다. 그렇게 마른 뼈와 같았던 우리들을 여호와의 군대인 하나님의 백성으로 만드시기 위해 성자 하나님께서 직접 십자가에 달리셔서 저주와 심판의 뱀이 되심으로 우리를 멸망에서 구하신 것입니다. 창세기 1장의 혼돈과 공허가 질서와 충만으로 창조가 되어지는 것과 동일한 모습으로 하나님의 군대가 탄생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마른 뼈와 같은 이들이 자신들의 구원을 위해 무슨 노력을 할 수 있으며 무엇을 보탤 수 있겠습니까?
오늘 본문 14절부터16절까지를 잘 보세요. 두 문장이 댓 구를 이루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14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과 같이,  인자도(다른 고대 사본들에는 '하늘에 있는 인자도') 들려야 한다.
15    그것은 그를 믿는 사람마다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려고 하는 것이다.
16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셔서 독생자를 주셨으니, 누구든지 그를 믿으면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을 것이다.
 
구원이라는 것은 성자이신 예수님께서 저주의 뱀이 되셔서 장대에 달리시고 그 것이 바로 죄인인 자기 자신을 위한 하나님의 은혜의 십자가라는 것을 믿는 사람만이 구원을 얻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에스겔서에서 확인을 했듯이 구원을 얻어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자들은 이미 죽어서 마른 뼈처럼 먼지가 풀풀하는 자들입니다.
그러면 누가 그 저주의 십자가를 구원의 십자가로 믿을 수 있다는 말입니까? 어떤 자들이 과연 그 예수를 믿을 수 있겠습니까? 정말 그 마른 뼈들이 예수를 믿을 수 있습니까? 하나님께서 율법과 제사제도와 그 많은 언약을 주셨음에도 계속해서 타락하고 실패하여 결국에는 그 약속의 땅에서 쫓겨나 버리는 그 죄인들이 정말 독생자 예수를 믿을 수 있습니까.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성령으로 그 눈을 뜨게 해 주시지 않으면 절대로 우리는 믿을 수 없는 것입니다.  죽은 자들이 어떻게 믿습니까? 성령께서 임의로 그 분의 주권으로 우리를 향해 불어오시지 않으면 우리는 믿을 수 없습니다. 우리가 다른 자들보다 무엇이 너 나아서 우리를 택하셨나요? 찬송가 가사처럼 “난 알 수 없도다, 난 알 수 없도다”입니다. 그것이 바로 은혜라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니고데모에게 거듭나지 않으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다고 하신 말씀에서 거듭난다는 말은 헬라어 원문으로 보면 위로부터 난다는 말입니다. 위로부터 오신 분이 누구입니까? 이 세상에 위로부터 오신 분은 예수님 한 분밖에 없습니다.
하늘로부터 내려오셔서 저주와 심판의 물에 의해 죽으시고 성령에 의해 다시 사신 분이  누구입니까? 바로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본문 13절도 명확하게 그 사실을 밝히고 있습니다.
 
(요3:13) 하늘에서 내려온 자 곧 인자 외에는 하늘에 올라간 자가 없느니라
 
우리는 바로 그 예수와 함께 죽고 성령에 의해 새롭게 탄생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와의 연합, 오직 그 은혜로만 우리는 구원을 얻을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 예수의 품에 안겨 죽어야 합니다. 복된 니고데모는 결국 그 의미를 알았습니다.
 
(요19:38-40) 그 뒤에 아리마대 사람 요셉이 예수의 시신을 거두게 하여 달라고 빌라도에게 청하였다. 그는 예수의 제자인데, 유대 사람이 무서워서 그것을 숨기고 있었다. 빌라도가 허락하니, 그가 가서 예수의 시신을 내렸다.  또 일찍이 예수를 밤중에 찾아왔던 니고데모도, 몰약에 침향을 섞은 것을  백 근쯤 가지고 왔다. 그들은 예수의 시신을 모셔다가, 유대 사람의 장례 풍속대로 향료를 바르고, 고운 베로 감았다.
 
몰 약은 사람이 죽으면 시체의 악취를 없애기 위해 사용한 것입니다. 그런데 동방 박사들이 몰  예수께서 탄생하셨을 때 바로 그 몰 약을 예물로 가져 왔습니다. 그것은 예수는 죽기 위해 왔다는 것을 미리 힌트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 몰 약은 아주 비싼 물건이어서 일반인들은 잘 구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니고데모가 몰 약을 백 근을 가져 왔습니다. 몰 약 백 근을 장례에 쓸 수 있었던 사람은 그 나라의 왕 한 사람뿐이었습니다. 그 것은 니고데모가 예수님을 왕으로 인정했다는 의미인 것입니다. 니고데모는 예수님이 말씀하신 물과 성령으로 나야한다는 사실이 무슨 말인지 알게 된 것입니다. 물과 성령으로 난다는 것은 죄에 대해 죽고 성령에 의해 다시 태어나야 한다는 것을 그가 안 것입니다. 유대인의 장례법 중 몰 약과 침향을 시체와 함께 세마포로 싼다는 것은 죽은 그가 너무 소중해서 그와 함께 내가 죽는다는 의미를 담고 있는 것입니다. 니고데모는 그 하나님이신 예수와 함께 죽은 것입니다. 그게 유일한 구원의 길입니다. 우리가 참 부러워하는 예수님 곁에서 죽었던 그 강도가 뭐 한 일이 있습니까? 그는 십자가를 지고 예수와 함께 죽은 것밖에 없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은혜로 그 예수와 함께 죽는 것이 낙원에 이르는 것이란 것을 알았습니다. 그게 구원의 길입니다. 너무 심플하지요?
 
수께서 우리에게 그러한 은혜를 허락하시기 위해 진노의 놋 뱀이 되신 것입니다. 그 진노가 얼마나 무시무시한 것입니까? 오죽하면 예수께서 십자가에 달리시기 전에 하나님께 탄원을 했겠습니까?
 
하나님의 사랑을 독차지하시던 그 하나님의 독생자가 십자가에서 당해야 할 하나님의 저주와 심판이 얼마나 무시무시한 것인지를 아셨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 진노를 예수께 퍼부으셨습니다.
어떤 신학자들은 구약의 하나님을 진노의 하나님이고 신약의 하나님이 사랑의 하나님이라 말합니다. 그것은 틀린 말입니다. 구약의 하나님은 인내의 하나님이시고 신약의 하나님이야말로 진노의 하나님이신 것입니다. 단지 그 진노를 그 아들이신 예수께 다 퍼부으신 것이고 그 모든 저주를 예수께서 다 받아 죽으신 것입니다.
 
사도신경은 그 십자가에서의 진노가 얼마나 무시무시한 것인지를 예수께서 지옥에 내려갔다 오셨다고 말을 할 정도입니다. 'He descend into Hell' 한국어 번역판에서만 지워졌는데 그 말은 예수님께서 진짜로 지옥에 내려가셨었다는 말이 아니라 예수님의 십자가는 우리가 불타야할 지옥처럼 처참하고 고통스러웠다는 의미인 것입니다. 예수님은 바로 그 지옥을 경험하셨다는 말이지요. 성경은 무섭게도 그 사실을 힌트하고 있습니다. 예수께서 죽으시기 전에 ‘목마르다’라고 말씀하셨지요? ‘목마르다‘라는 단어를 들으시면 생각나는 비유가 있지요? 부자와 나사로의 이야기입니다. 거기서 부자가 지옥에서 아브라함에게 뭐라 합니까? 내가 목이마르니 나사로의 손가락에 물을 한 방울만 찍어서 내 목을 축여 달라 부탁하지요? 그게 바로 지옥의 특징입니다. 뿐만 아니라 주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셨을 때 낯 열두시부터 오후 세시까지 태양이 빛을 잃고 세상이 어두워지지요? 어두움, 흑암이 의미하는 바는 저주와 심판, 지옥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대신해서 그리고 우리를 대표해서 지옥을 경험하신 것입니다. 사람들은 그 지옥이 얼마나 무시무시한 곳인지 잘 모르는 것 같습니다.
 
어떤 분들은 구약에서 하나님께서 소돔과 고모라를 불로 다 태워버리시고, 홍수로 사람을 다 쓸어버리시고, 이스라엘이 가나안에 들어갈 때 대적들을 어린아이까지 다 죽여 버리시는 것을 보고 무시무시한 하나님이라 말을 하기도 합니다. 너무 잔인하다는 것이지요? 여러분, 그것이 죄인들이 받아야 할 최종적 형벌인가요? 아닙니다. 처참하게 죽은 그들은 최후의 심판 때 다시 일어나서 그것과는 비교할 수도 없는 몇 억 배의 고통 속으로 영원히 들어가야 하는 것입니다.
 
그게 지옥입니다. 그것이 바로 죄를 향한 하나님의 진노입니다. 그 하나님의 진노가 이 세상에 아주 조금 맛보기로 나타나는 것이 여러 가지 재앙들인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러한 재앙들을 통해 ‘회개하라’고 요한 계시록의 일곱 나팔을 열심히 불고 계신 것입니다. 이제 하나님께서 마지막 심판으로 그 진노를 발하실 때는 우리가 그토록 애정을 쏟아 붓고 있는 이 땅을 비롯한 우주가 전부 불타 없어져 버릴 것입니다. 그만큼 그 진노는 무시무시하고 큰 것입니다. 그 모든 진노가, 전 우주를 태워버릴 수 있는 하나님의 진노가 예수그리스도에게 단번에 쏟아진 것입니다. 그 진노를 하나님이신 예수가 받으셨기에 우리 안에 그 크신 하나님께서 들어와 계신데도 여러분과 제가 이렇게 멀쩡히 살아서 하나님을 이야기하고 있는 것입니다. 죄인들은 절대 하나님과 함께 거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시내 산에서도 하나님은 짐승들조차 하나님께 범접하지 못하게 하셨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제 우리 안에 하나님께서 들어와 계십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렇게 멀쩡하게 그 분과 대화를 하고(기도) 그 분을 자랑하고(찬양) 그 분을 섬깁니다.(예배)  우리가 받아야 할 그 하나님의 진노를 예수께서 받아내셔서 우리가 영생을 얻은 것입니다.
 
하나님은 죄를 그토록 미워하십니다. 하나님은 거룩하시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속성입니다.
 
그런데 지금도 우리는 죄를 짓습니다. 우리 안에 하나님이 계시다고 말은 잘하면서도 여전히 죄를 짓습니다. 여러분 생각해 보세요.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의 죄가 되셔서 죽으셨습니다. 그래서 우리의 죄가 없어졌다고 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죄가 죽었으니까. 그런데 지금 계속해서 죄를 짓고 있는 우리는 뭡니까? 예수 그리스도가가 우리의 죄가 되셔서 죽으셨다면 지금도 여러분과저는 매일매일 예수를 죽이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아요?
 
우리는 하나님이 그토록 사랑하시는 독생자를, 우리의 죄를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셨다는 그 고마운 예수 그리스도를 계속 죽이고 있는 것입니다. 정말 아무런 죄책 감 없이 습관적으로 죄를 짓는 사람들이 물과 성령으로 거듭난 사람들이 맞습니까?  God hates Sin infinitely. 나의 독생자를 십자가에서 울부짖게 만든 그 죄를 나는 이토록 미워한다고 하나님은 세상에게 여전히 말씀하고 계십니다. 그런데 우리가 계속해서 죄를 짓고 있으면 어떡합니까?
 
어떤 분은 이런 질문을 하시기도 합니다. 하나님께서 세상을 그토록 사랑하신다면 자신이 직접 내려와서 죽으실 것이지 아들을 내려 보내셨냐고.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세요? 여러분, 왜 아브라함의 믿음을 시험하시기 위해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목숨을 요구하시지 않고 이삭을 죽이라고 하셨을까요? 자식을 가져 본 사람은 그 이유를 압니다.
 
얼마 전 제가 알라바마에 부흥회에 갔을 때 우리 둘째가 폐렴이 걸려서 심하게 아팠습니다. 그 때 그 아이를 보면서 제가 대신 아파 줄 수 있다면 당장 그렇게 하고 싶었습니다. 저는 저의 세 아들 중 어떤 아들이라도 피치 못할 사정으로 한 녀석이 죽게 되었을 때 대신 누군가가 죽어서 그 아이가 살 수 있다면 단 1초의 망설임도 없이 손을 번쩍 들것입니다. 내가 대신 죽게 해달라고 애걸할 것입니다. 부모에게 있어 자식은 부모 된 자의 최고의 자기표현입니다. 그래서 자식이 좋은 대학가고 훌륭한 사람 되면 부모는 그렇게 기쁜 것입니다. 자식은 자신의 목숨보다 더 귀중한 것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렇게 하나님은 당신의 목숨보다 더 소중한 것을 죽이신 것이다. 다른 말로 하나님의 가장 소중한 것을 버려 우리를 구하셨다는 것입니다. 그게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만일 기독교 박해가 다시 시작되어 예수를 믿으면 죽인다하고 저를 고문한다고 한다면 저는 얼마든지 참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저의 신앙 때문에 저의 자식들을 바로 제 앞에서 고문하고 죽인다면 그 것은 저의 목숨을 끊어버리는 것보다 수천 배 괴로울 것입니다. 차라리 죽는 게 낫지요. 그런데 하나님이 바로 그 고통을 당하신 것입니다. 저는 가끔 생각해 봅니다. 왜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그토록 괴로워 하셨는지. 예수님은 당신의 아버지가 당신을 얼마나 사랑하고 계신지 아셨습니다. 그 아버지가 자신의 죽음을 바라보며 고통스러워하실 것을 생각하신 주님이 그토록 괴로워 하셨던 것입니다. 우리 하나님이 우리 같은 인간들을 위해 그러한 고통을 감수하셨습니다. 그게 구원입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자신의 독생자를 주셨다는 구절의 그 참 사랑을 이제 아시겠습니까? 여러분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을 이해하시겠습니까? 정말 이해하세요?
 
여러분이 여러분의 삶에 이해 할 수 없는 일들이 일어날 때 이 사랑을 기억하십시오.
‘그렇게 나를 사랑하는 하나님이 왜 나를 이 지경에 그냥 놔두시나?’하고 생각하신다면 여러분은 아직 그 아버지의 사랑을 다 이해하지 못하고 계신 분입니다. 그것은 그토록 여러분을 사랑하시는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너무 사랑하셔서 이 세상에 정 주고 살지 못하도록 하시는 것이며, 여러분의 옛 성품이나 모난 인격을 다듬고 계신 것이며, 정금 같은 여러분의 완성을 위해 잠시 허락하는 훈련의 시간일 뿐입니다.
 
그 하나님의 사랑이 얼마나 애절하고 절박한 사랑인지 제발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이스라엘이 애굽의 가장 좋은 땅인 고센 땅에서 잘 살고 있었을 때 그 왕조를 바꿔서 그 이스라엘을 핍박하게 만드신 이유를 아세요?
이 풍요의 땅이 너희들이 거할 곳이 아니란 것을 하나님께서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너희는 그 땅에 정을 두면 안 된다는 것이지요. 영원한 나라를 보라는 것입니다. 영원한 하늘을 소망하라고 지금 고난을 통하여 여러분에게 하나님께서 그렇게 외치고 계신 것입니다. 그 사랑에 감사하세요.
 
‘하나님 이것까지 가져가십니까?’라고 묻지 말고 ‘내가 하나님을 알고 내가 그 천국을 알기에 이 모든 사건과 상황들이 하나님의 그 놀라운 사랑의 표현임을 내가 믿습니다.’라고 말할 수 있는 실력자가 되십시오.
이 세상 모든 것은 다 여러분을 실망시킬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랑은 영원합니다.
 
세례는 이렇게 하나님의 주권과 섭리로 구원을 얻은 자들이 ‘저는 하나님의 은혜로 이렇게 죽고 다시 살아났습니다.’라는 신앙 고백의 하나로 치러지는 성례 중의 하나입니다.
로만 카톨릭에서 주장하는 것처럼 세례(영세)를 받지 않으면 지옥 가는 것 아닙니다.
여러분 마음속에 세례라는 것이 정확하게 무엇인지 각인이 되셨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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