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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16-01-20 10:06
   모세가 막아선 사람만 살아요!!
 글쓴이 : admin
    조회 : 28,220  


(산상수훈 8강에서)

출애굽기 32장 1절을 보면요. 시내 산에 십계명 돌 판을 가지러 올라간 모세가 안 내려오자 이스라엘 백성들 전체가 불안해하고 있죠? 아, 그 사람 왜 안 내려와? 그러고 있는 거잖아요? 지금? 그러면서 모세를 뭐라고 부르느냐면 우리를 애굽에서 인도하여 낸 사람이라 그래요. 여러분 이 때에 시내 산 위에서 하나님의 임재의 현상들이 나타나고 있었어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산 아래에서 그걸 보고 있으면서도 그 하나님을 못 알아먹더라는 것입니다. 인간들이요. 지금 모세하고 하나님은 열심히 위에서 돌 판에다 글씨 쓰고 있는데 그 아래에서 이들이 그 하나님 없다, 라고 이야기하는 거예요. 안 보이니까. 
분명 그들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낸 분은 하나님이세요. 사람들은 눈에 보이는 모세만 바라보는 거예요. 이게 인간들의 맹점이에요. 

여러분 설교를 잘 하는 목사 하나님의 말씀을 올바로 대언하는 설교자, 어느 틈에 여러분은 그 사람을 우상으로 섬기게 되어 있어요. 그 뒤에 있는 하나님을 보지 못하면, 여러분 그 사람이 사라지잖아요? 그러면 불안해서 견딜 수가 없어요. 이게 이스라엘이 지금 행했던 바로 그런 모습이었어요.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이끌어낸 건 모세 뒤에서 일을 하신 하나님이었단 말입니다. 그걸 보셔야 여러분이 그까짓 모세가 없어도, 목사가 한 달 동안 비어도(ㅎㅎㅎㅎ) 안전하게 교회에 나와서 신앙생활 하는 거예요. 안 나오기만 해봐 그냥. ㅎㅎㅎ. 방송으로 다 보고 그냥. 
아, 근데 이 모세가 안 보이니까 이 사람들이 불안해갖고 눈에 보이는 모세를 쫒았던 그들은 눈에 보이는 뭔가를 대체물로 만들어내야 돼요. 그래서 고작 만들어 낸 게 금송아지에요. 근데 이건 모세라고 부를 수 없으니까, 이가 우리를 애굽에서 인도하여 낸 신이다, 라고 부른 거예요. 조금 아까 모세를 불렀던 이름이에요. 그거는요. 그러니까 모세를 통하여 이스라엘은 평화를 얻기를 원했고 이런 눈에 보이는 금송아지를 통해서 평화를 얻기를 원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떡하니 그거 만들어놓자마자 화목제 드리고서 평화, 평화 그래요.
  
생각해보세요. 하늘에는 영광, 땅에는 평화! 뭐예요? 성탄절이죠? 그런데 그 다음날 우리가 그 성탄절을 어떻게 평가해요? 어제 즐거웠어? 그 성탄절의 주인공이 누군데 지가 즐거우려고 하냐고요? 기뻐 뛰며 노는 거예요. 하나님은 어디 가고... 그게 무슨 땅의 평홥니까? 오늘 날도 똑같은 거예요. 그래서 성탄절이면 꼭 무슨 프로그램을 만들어야 되고 구역별 장기자랑을 해서 즐거운 시간을 보내야 되고 그러는 거예요. 우리가 즐거워야 되니까. 평화는 그렇게 얻어지는 거 아니에요. 
하나님은 거기에 진노하세요. 이 세상 그 어떤 것도, 눈에 보이는 그 어떤 것도 우리에게 평화 못 갖다 줘요. 화평케 못한단 말입니다. 평화는 하나님이 준비하신 어린 양의 피에 의해서만 주어지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인간들이 자기들의 방법과 수단을 동원하여 자기들이 원하는 평화를 생산해내려 하는 거 그게 바로 죄예요. 그래서 하나님이 다 죽여라! 그러는 거예요. 다 죽여라. 모세, 너 하나 남기고 다 죽여 버리겠다, 그러는 거예요.

오늘날 기독교를 공격하는 세속적 지성을 두 가지로 요약해보면 그 하나가 과학적 세계관과 실증주의적 사고방식 그리고 하나가 역사적 사고방식. 그것들은 둘 다 기독교를 향해, 보이는 것으로 나를 설득하라, 고 주장하는 거예요. 보이는 것으로 나를 설득하라.
그러니까 기독교 안에 절대적인 진리들이 자꾸 상대적으로 평가가 되어, 이게 다원화 되는 오늘날의 세상의 특징이에요 이게... 보이는 것으로 설득해달라는 거예요. 과학적 합리성으로 기독교를 이해하고 해석하려는 건 기독교인이라고 자처하는 이들에게서도 흔히 볼 수 있어요. 눈에 보이는 거 내가 체감할 수 있는 것으로 나를 설득해 달라는 거예요. 왜 나에게 평화가 없어요? 왜 내가 기쁘지 않아? 항상 기뻐하라 그랬는데... 그거 아니라니까요. 
역사적 사고 마찬가지에요. 존재하는 모든 건 예외 없이 역사적 기원을 가지고 있으며 역사적으로 형성되고 변화되어 왔음을 전제로 하는 게 역사적 사고예요. 제가 보기에는 교회 밖에서의 그런 사고들의 공격은 그리 걱정할 게 아니에요. 그런데 교회 안에서조차 눈에 보이는 것으로 나를 설득하라는 식의 그런 종교관이 있다는 건 정말 심각한 거예요. 감각으로 느끼고 싶어해요. 무슨 감동을 자꾸 받으려고 하고, 체험을 하고 싶어 하죠. 나를 역사 속에서 행복하게 해주지 못하는 종교는 인정할 수 없다, 라는 자세로 신앙생활을 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목사, 너도 나를 기쁘게 해줘야 되고 말씀도 나를 기쁘게 해줘야 되고 교회도 나를 기쁘게 해줘야 되고 나를 감격시켜 줘야 되고 예배도 뭐, 훌륭한 용병들을 고용해서 찬양도 좀 멋지게 해서 내가 은혜도 받게 하고 이런 식이 되는 거예요. 
  
하나님은 그러한 패역의 자리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다시 화목제가 무엇인지를 가르치세요. 다 죽이겠다고 하셨는데 모세가 막고 서요. 보세요. 다 죽이겠다는 이 말은 애굽의 열 가지 재앙의 마지막 재앙 때로 다시 돌아가는 거예요. 다 죽이겠다죠. 그죠? 어린 양의 피가 발린 집 그 집 장자만 살리겠다. 그랬잖아요. 그러면 그 어린 양의 역할을 지금 누군가가 해야 돼요. 지금 애굽으로 다시 돌아간 상태에요. 이제. 다 죽이겠다! 에요. 
니들이 지금 애굽에서 어떻게 나왔는지를 잊어버리고 그 진정한 화목제물로 드려진 어린 양의 피, 그거 잊어버리고 또 다시 눈에 보이는 것으로 너희들의 평화와 화평을 기원하고 있는데 그래, 다시 가르쳐줄게 그러더니 다 죽이겠다, 로 가요. 그리고는 거기에서 어린 양의 역할로 모세가 막아서는 거예요. 모세가 막아선 사람만 살아요. 
  
(출 32:9-10) 여호와께서 또 모세에게 이르시되 내가 이 백성을 보니 목이 곧은 백성이로다 그런즉 나대로 하게 하라 내가 그들에게 진노하여 그들을 진멸하고 너로 큰 나라가 되게 하리라
(출 32:30-32) 이튿날 모세가 백성에게 이르되 너희가 큰 죄를 범하였도나 내가 이제 여호와께로 올라가노니 혹 너희의 죄를 속할까 하노라 하고 여호와께로 다시 나아가 여짜오되 슬프도소이다 이 백성이 자기들을 위하여 금신을 만들었사오니 큰 죄를 범하였나이다 그러나 합의하시면 이제 그들의 죄를 사 하시옵소서 그렇지 않사오면 원컨대 주의 기록하신 책에서 내 이름을 지워버려 주옵소서

모두 다 죽어야 하는 상황에서 모세가 자기 목숨을 걸고 하나님의 진노를 막아서요. 이게 화목제의 실체인 거예요. 이스라엘이 뭔가 변해서가 아니에요. 그 진로를 막아선 어떤 자, 제물로 드려진 어떤 자, 모세는 여기서 죽는 거예요. 이스라엘을 품어 안고. 그래서 성경이 이스라엘이 모세에게 속하여, In Moses, 모세 안에서 할례 받았다, 세례 받았다, 그러는 거예요. 모세 죽였다는 뜻이에요. 하나님이요. 
자기들이 우상 만들어 놓고 거기에 제사 지내고 하는 것으로 일시적인 기쁨이나 뛰어논 것, 그런 건 있을 수 있어도 진정한 평화는 없다는 거예요. 그래서 하나님께서 ‘나 너희들의 살진 희생의 화목제? 안 받아’ 그러는 거예요. 아모스 5장 22절에 나오죠? 너희들의 살진 희생의 화목제? 그거 안 받아. 시편에선 뭐라 그러죠? 내가 무슨 짐승 타는 냄새가 구수해서 제물을 받겠니? 그거 다 내 거 아냐? 그러시잖아요. 그거 다 내 거야. 그 안에 감추어진 진짜 화목제물인 예수를 발견하라는 뜻이에요. 
그래서 예수님께서도 산상수훈 중간에 그런 말 하시는 거예요. 니들, 예물 갖고 와서 제사지내기 전에 친구와 화목한 관계가 아닌 친구가 있을 때 그 친구와 먼저 화목하고 와서 예물 드려. 그런 거예요. 그 말은 너희들 예물을 드려서 화목하게 되겠다, 라는 그거 깨라는 뜻이에요. 니들이 화목하게 된 상태에서 드려지는 예배, 그게 예수를 드리는 예배가 되는 거지. 그 어떤 인간의 행위로 화목을 성취해낼 수 없다는 뜻이에요. 그걸 히브리서 기자가 이렇게 설명을 해요.
  
(히 3:1-6) 1 그러므로 함께 하늘의 부르심을 입은 거룩한 형제들아 우리의 믿는 도리의 사도시며 대제사장이신 예수를 깊이 생각하라 2 저가 자기를 세우신 이에게 충성하시기를 모세가 하나님의 온 집에서 한 것과 같으니 3 저는 모세보다 더욱 영광을 받을만한 것이 마치 집 지은 자가 그 집보다 더욱 존귀함 같으니라 4 집마다 지은 이가 있으니 만물을 지으신 이는 하나님이시라 5 또한 모세는 장래에 말할 것을 증거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온 집에서 사환으로 충성하였고 6 그리스도는 그의 집 맡은 아들로 충성하였으니 우리가 소망의 담대함과 자랑을 끝까지 견고히 잡으면 그의 집이라 
  
모세와 예수님을 비교하고 있어요. 모세의 중보사역이 예수님의 화목제물 되심의 모형이었다는 거예요. 근데 모세의 중보요청이 받아들여진 이후에도 율법이 다시 내려오죠? 어차피 살려준 거, 모세의 중보사역으로 살려준 거 이 율법 내려가면 또 죽을 거 아는데 하나님이 왜 또 주세요? 또 죽이려고? 아니란 말입니다. 모세의 중보사역으로 살아난 그 현실을 이 율법 앞에서 불가능한 너희의 모습들을 폭로당하면서 모세의 생명에, 모세의 중보사역에 감사하라고 율법을 주는 거예요. 
그래서 그렇게 모세, 중보자인 어린 양 예수만을 의지하고 그의 공로만을 의지하며 그분이 하신 일, 그분의 은혜만을 찬송하는 자 나는 점점 삭제되어가는 그 자, 이 자가 하나님과 화평케 된 자고 그걸 몸으로 살아내면서 입으로 전하는 거, 예수님이 화평케 하셨대요, 예수님이 화평케 하셨대요. 찬송합시다! 하는 이게... 화평을 전하는 직책을 맡은 자의 삶인 거란 말입니다. 그러니까 예수 없는 화평은 없어요. 복음 없는 화평케 하는 자? 있을 수 없는 거란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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