즐겨찾기 | 메인 로그인 | 회원가입 |  사이트맵 |  20 (회원 0)  

Home >  나눔터 >  퍼온 글들

 
작성일 : 15-02-20 11:45
   빈센트 반 고흐의 ‘성경이 있는 정물’
 글쓴이 : admin
    조회 : 29,155  




(비유 23 - 왜 못 알아들을까 초반부에서)

이 그림은 제가 너무나 좋아하는 빈센트 반 고흐의 ‘성경이 있는 정물’이라는 작품입니다. 빈센트 반 고흐는 목사이신 아버지 
밑에서 철저한 기독교 교육을 받았던 사람이고 그 역시 벨기에의 한 탄광촌에 들어가 7년간 목회를 했던 선교사 출신의 
화가입니다. 그런데 고흐의 그림들을 보면 하나같이 전부 자기 자신의 인생의 고뇌라는 염증에서 짜 낸 고름으로 덧칠해 
놓은 듯한 아픔이 느껴집니다. 고갱과의 이별로 스스로 자신의 귀를 자른 뒤 그려낸 ‘붕대를 감고 파이프를 문 자화상’이라
든지 ‘담배를 피워 물고 있는 해골’등의 작품들을 보면 그가 어떤 고뇌 속에서 평생을 살았으며 그러한 고뇌 속에서의 
자아 인식이 어떠했는지가 절절이 배어나옵니다.

저는 그러한 고뇌하는 고흐가 너무 좋아서 대학 시절 고흐박물관을 방문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곳에는 화가인 고흐와 
작곡가인 드뷔시에게 지대한 영양을 미쳐서 야포니즘(Japonism)이라는 문화현상을 발흥하게 했던, 그래서 생전에 고흐가 
열심히 수집을 해 놓은 일본 에도시대의 채색 목판화의 대가 안도 히로시게의 우키요에(浮世繪)들이 아름답게 전시가 
되어 있고, 고흐의 해바라기 정물들과 그 유명한 신발 그림들이 멋지게 전시가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저의 눈길을 오랫동안 놓아주지 않았던 그림이 두 개가 있었는데 바로 지금 보여드린 ‘성경이 있는 정물’이라는 
작품과 ‘소설들이 있는 정물’이라는 작품이었습니다. 그 중에서도 이 ‘성경이 있는 정물’이라는 그림을 보는 순간 눈물이 터져 
나와서 한참을 그 앞에서 움직일 수가 없었습니다.
고흐는 두 작품 모두에서 너무 많이 봐서 구겨지고, 손때가 묻고, 나달나달하게 모서리가 닳아버린 소설을 등장시키는데 
그 소설이 에밀 졸라의 ‘나의 기쁨(La joie de vivre)’이라는 책입니다. 저는 고흐의 그림을 보기 전에 이미 에밀 졸라의 
책들을 아주 열심히 읽었던 터였습니다. 

에밀 졸라는 철저한 무신론적 정체성을 가진 개혁적 현대소설의 선구자라 할 수 있는 그런 사람입니다. 당연히 중세의 
자투리를 부여잡고 생의 의미와 존재의 의미를 챙기고 있었던 대다수의 유럽 종교인들에게는 쓰레기라는 평가를 받았
겠지요. 그는 형식적이고 위선적인 종교인들을 풍자하고 조롱하듯 소설을 써내려갔던 사람입니다. 저에게는 그의 소설이 
‘삶으로 너희의 신앙을 말하라’는 일갈로 들렸습니다. 그런데 목사였던 고흐의 그림 속에 바로 그 에밀 졸라의 소설이 너무 
많이 읽어서 나달나달하게 닳아버린 모습으로 등장하고 있는 것입니다. 
에밀 졸라는 그의 소설의 내용과 그의 삶을 일치시키려 무진 애를 썼던 사람입니다. 20세기 초 프랑스의 드뤠피스 사건
에서의 그의 행보만을 보더라도 그는 자신의 언행일치의 삶에 다소 결벽증적 집착을 보일 정도로 율법적인 사람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청년들은 그러한 사람들에게 열광합니다. 80년대에 386세대 청년들이 사상의 은사라 부르는 리영희 선생
에게 열광한 것도 그런 맥락에서 이해를 할 수 있습니다.

고흐는 중세의 형식적이고 위선적인, 그러나 촛불처럼 자신을 불 태워서 종교인의 삶을 살고 있는 자신의 아버지를, 타다가 
꺼진 촛불로 그려 놓았습니다. 그리고는 그 아버지로 대표되는 형식적이고 위선적인 기독교를 커다란 성경책으로 그려 
놓았고 그 성경책은 이사야서 53장의 고난 받는 종의 노래를 펼쳐 보임으로, 종교가 어떻게 참 신앙인을 핍박을 하게 
되는지를 암시하며 지적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게 성경 책 아래에 그려진 고흐의 영적 멘토 에밀졸라의 소설이 명료하게 
축약하고 있는 메시지인 것입니다. 그 나의 기쁨이라는 책이 인간 삶의 아름다운 가치를 아주 심도 있게 다룬 책이거든요.

그런데 제가 왜 그 그림을 보고 눈물을 흘렸냐면, ‘이렇게 에밀 졸라식의 언행일치 적 신앙을 추구했던 고흐가 왜 일평생 
자신의 귀를 자르는 등의 광기를 감추지 못하고 결국 서른일곱의 나이에 자기 머리에 권총을 쏘아 자살을 했을까?’라는 
답답하고 모순이 되는 듯한 인과(因果)의 모양 때문이었습니다. 고흐의 인생에 대해 이미 자세하게 알고 있던 저는, 그가 
갑자기 너무 불쌍해졌던 것입니다.

‘도대체 왜, 정의와 공평과 순수와 언행일치를 그렇게 진지하게 추구했던 고흐가 그토록 고통스러운 삶을 살다가, 심지어 
창녀와의 동거도 마다하지 않는 삶을 살다가 결국 자신의 머리에 총알을 박는 것으로 그의 인생을 끝내버린 것일까?’ 저는 
너무나 혼란스러웠습니다. 왜냐하면 제가 바로 그 당시 저의 신앙의 노선을 그렇게 정리하고 확정해 가는 단계에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신앙이란, 유치하게 예수의 힘을 이용하여 이 세상의 부귀와 영화와 명성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리영희 
선생처럼, 드뤠피스 사건의 에밀 졸라처럼, 용감한 루터처럼, 간디처럼, 슈바이처처럼 가난하고 압제받는 민중들과 함께 
울고 함께 웃으며 그들의 평등과 권익과 인권을 위해 이 한 몸 불사르게 내어주는 것이 바로 올바른 신앙인의 삶이라고, 
이제 비로소 신앙인의 바른 길을 찾았노라고 확신하고 있었던 저에게, 고흐라는 사람의 인생과 그의 그림 한 장이 커다란 
파장을 일으켜 버렸던 것입니다.

‘그토록 성경을 사랑했고, 그토록 예수를 좇아 살기를 갈망했으며, 그렇게 가난한 이들의 편에서 그들의 아픔을 자신의 
가슴으로 품으려 했던 고흐가 왜 결국 자신을 용서하지 못했을까? 그렇다면 나의 삶과 종말도 결국 에밀 졸라의 추종자인 
고흐처럼 처참하게 끝날 것인가?’ 

저는 성경과 인간 측에서의 열심 있는 노력이 동시에 나타나 있는 그의 ‘성경이 있는 정물’이라는 그림 앞에서 그렇게 큰 
화두 하나를 받아들고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그리고는 정말 오랜 세월을 고민했습니다. 어떤 게 과연 올바른 신앙인의 
삶인가? 기복으로 물들고 힘의 원리에 젖어버린 중세의 형식적이고 위선적인 기독교가 틀렸다는 것은 확실히 알겠는데, 
고흐처럼, 무신론자인 에밀 졸라나 간디 등의 삶을 표본으로 삼아 인간과 사회의 변혁과 발전을 위해 한 몸을 던지는 헌신의 
신앙은 과연 올바른 기독교가 맞는가에 대해서 너무나 긴 시간 고민을 했습니다. 

그러다 결국 둘 다 틀렸다는 것을 성경을 통해 깨닫게 되었을 때 저는 빈센트 반 고흐와 함께 묶여있던 그 속박의 자리에서 
풀려나 자유롭게 복음의 세계 속을 날 수 있었습니다. 그렇게 저를 에밀 졸라나 고흐의 망령 속에서 벗어날 수 있게 해준 
성경 말씀이 바로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거지 나사로와 부자의 비유였습니다.

(중 략)





 
   
 

모임소개  |  로그인 
Copyright ⓒ 2023 뉴저지 교회 NJ Church, All rights reserved. Comment to nj.smyrna@gmail.com (T)201-658-376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