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니까
진리가 이루어지면 죽음이에요 그것이.
그래서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실 때, ‘다 이루었다‘. 이게 죽음이란 단어에요.
그리고 죽으시는 거예요.
무트, 다 이루었다. 진리가 이루어졌다. 그리고 죽으시는 거란
말에요.
그런데
그게 곧 사는 거예요. 그래서 부활하시는 거예요.
그게 영생이란 말에요. 사는 거예요 그것이...
그래서
바로 다음 장인 22장에서 아브라함이 이삭을 번제로 드리는 장면이 이어지는 거예요.
아들을 죽이는 거예요. 아들 안에서 아브라함이
죽는게 복음이란 말입니다.
여러분은
십자가를 보고 통곡할 게 아니라 아, 거기서 그분은 반드시 죽어야 되는 거구나.
아니, 내가 끌고 가서 죽여야
되는 거구나. (무슨 말인지 조금 있으면 이해하실 거예요.)
그걸 아셔야지, 나와 상관없는
어떤 이가 죽은 그걸 보고 슬퍼하는 게 아니란 말에요.
자
여러분, 아브라함은 이제 모리아 산에서 하나님의 그 언약 성취의 조력자로 나서려했던
자신의 모든 열심을 다 내려놔요.
그 전까지는 하나님이 약속의 후손을 주신다고 했던 그 언약을 성취시키기 위해,
그러기 위해서는 씨를
가진 자기가 살아야 되니까
마누라까지 팔아 먹고 정말 파렴치한 모습, 이런 걸 보이면서, 그거 하나님 도우려고 한 거예요.
사람이 못나서 그런 게
아니라…
그런데
이제는 이 아들이 죽으면 언약의 후손, 약속의 후손이 없어져 버리잖아요.
그러면 하늘의 별처럼, 바다의 모래처럼 어떻게
많아지냐고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얘를 죽인다고 하는 건 이건 내가 도울 일이 아니구나...
바로 전 장에서, 아, 그런 은혜로 완료되는구나
를 알자.
그 약속의 후손을 죽이는 거예요. 서슴없이.
내가
섬기던 예수가 나와 함께 죽고 내가 그 안에서 살아나는 거라니까요.
그런데 우리가 여전히 예배당에 와서 예수를 섬김의 대상으로만 놓고 있다면
우리는 다른 종교인들과 전혀
다를 바가 없는 거예요.
그들은 반드시 역사 속 나가 내어놓아야 하는 행위에 묶일 수밖에 없어요.
예수가
내 밖의 섬김의 대상으로 존재하면 그들은 그 행위에 묶일 수밖에 없다니까요.
내가 섬김의 대상에게 뭔가를 내놓아야 돼요. 그걸 섬김이라고 하잖아요.
율법으로 오신 예수, 죄인의 대표로 오신 예수는
내가 죽여야 하는 존재지
내가 섬기는 대상이 아니란 말에요.
조금 어렵지만 인내심을 갖고 잘 들어보세요.
(중략) 로마서 63강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