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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14-09-21 09:39
   난다 고래 ㅡ 서울 조규만님 글
 글쓴이 : 이세형
    조회 : 18,668  




혼자 야구장에 가는것 만큼 즐거운일이 아직은 없습니다. 
그래서 어린시절부터 시간이 나면 가끔 야구장을 찾습니다. 얼마전에도 야구장에 가서 야구를 음미하고 있는데 그날은 중요한 
경기여서 그런지 관중이 무척이나 많았습니다. 제뒷자리에는 대여섯명쯤 되는 젊은 남녀가 짝을 지어 응원을 하고 있었습니다. 
경기 시작전부터 치맥을 즐기며 조잘조잘 재잘재잘 어찌나 떠들어대는지 조금은 방해가 된다 싶었는데 경기가 시작되어 여러 
흥분되는 상황이 연출되자 극도로 시끄러워지 시작했습니다. 그나마 같은 편을 응원하니 참았지 그렇치 않았으면 벌써 도망
갔을 겁니다. 그렇게 한참 경기가 진행되는 와중에 제가 응원하던 팀 선수가 극적인 안타를 쳤습니다. 그러자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며 뒷쪽 처자들이 난리가 났습니다. 그때 어느 한여자분이 마구 소리를 지르다가 옆에 있는 친구에게 물어보더군요.
"뭐야? 뭐니? 왜 좋은건데? 우리가 이긴거야?~" 그러자 그래도 좀 아는친구가 친절히 설명을 해줍니다. 
투수가 던진 공을 저렇게 쳐서 아무도 못잡게해서 저쪽에 보이는 베이스까지 가면 그게 안타야. 
그리고 저다이아몬드를 돌아오면 1점을 내는거구..."
그러자 세상의 모든 비밀을 알았다는듯 그여자분 순간순간 배우고 익히며 꽥꽥 거리는데 정말 미치겠더군요. 그렇게 한참을 
이건 뭐야 저건 뭐야를 반복하며 소리를 지르고 좋아하더니 한참의 시간이 지난 후 그  여자분이 아무렇치 않다는 듯 천진
난만하게 물어보는 참 빠르기도 한 질문이 저의 후두부를 강타해 저는 그만 웃다가 쓰러졌습니다. 
".......그런데 얘들아....우리편이 무슨 색깔옷이니? "

일본 후쿠오카의 명물중 하나인 딸기떡(이치고 모찌)의 유래에 대해서 들은 적이 있습니다.
전통 모찌를 만들어 팔던 어느상인이 있었는데 경쟁하는 가게는 많은데 특별한 기술이 없어서 늘 장사가 안되었다고 합니다.
고민고민하다가 어느날 문득 모찌떡 안에 팥앙금 대신 다른걸 넣어보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들어서 마침 제철이던 딸기를 
그것도 통째로 하나씩 집어 넣어서 만들어 팔면 어떨까 하는 생각을 했답니다. 결국 오랜 시행착오 끝에 마침내 이치고모찌를 
완성했습니다. 그래서 어느날 친구를 조용히 초대해서 자기가 만든 이치고모찌를 먹어보라고 시식을 권했습니다. 
시큰둥한 표정으로 이친구가 또 뭔 뻘짓을 했나 싶어 귀챦다는듯이 모찌를 받아든 친구는 한입 베어 물고는 놀라운 그맛에 
반해 이렇게 소리질렀답니다.
"난다 고래??~(이게 뭐야?)"
그후로 그원조 이치고모찌의 이름을 주인장은 '난다고래'라고 명명하여 대박을 터뜨렸다고 합니다. 이게 또 뭔가 싶어 받아든 
평범한 모찌에서 처음으로 색다른 놀라운 맛을 발견했으니 친구가 얼마나 놀라서 이게 뭐냐고 외쳤을 생각을 해보면 저도 
입가에 미소가 지어지고 침이 질질 흐릅니다. 츄릅...
 
영화 '줄무늬 파자마를 입은 소년'은 '인생은 아름다워'나 '피아니스트' 만큼은 아닐지 몰라도 그에 버금가는 감동을 주는 홀로
코스트를 다룬 좋은 작품입니다. 배우들 한명한명이 연기도 잘했지만 영화속에서 전쟁의 잔인함이나 피뿌리는 잔혹함을 
감추면서도 관객으로 하여금 인간과 전쟁에 대해서 절절하게 생각하게 만드는 긴장감과 몰입감이 아주 그만입니다. 
특히 아이들이 주인공인 영화이기에 감동과 여운이 더욱 오래도록 지속되는 것 같습니다. 영화는 베를린의 고위 장교가 
영전하여 외곽의 포로수용소 주변으로 이사를 오면서 펼쳐집니다. 8살난 장교의 아들 브루노는 누나와 함께 시골로 오게 
되었는데 이곳은 도시와 달리 너무나 심심합니다. 그래서 어느날 엄마가 절대 가지말라는 뒷마당 깊숙이 놀러 갑니다. 

그리고 거기서 철책으로 가로막힌 그곳 건너편의 또다른 어린이인 '슈무엘'을 만나게 됩니다. 둘은 철책선을 사이에 두고 
친구가 됩니다. 아이는 그날이후 자신에게 다가오는 새로운 풍경속 모든 것이 하나하나 전부 궁금합니다. 
어느날엔가는 그네를 타다 다친 무릎이 걱정되어 병원에 가봐야 될지 모른다고 낙심하며 걱정하는데 부엌에서 감자를 깎는 
시중을 드는 유태인 노인네인 파벨은 그렇게까지 걱정할 상처는 아니라고 위로해줍니다. 브루노가 할아버지는 의사도 
아니면서 그걸 어떻게 아시냐고 묻자 할아버지는 얘기해줍니다. 여기오기전까지 자신은 의사였다고 말이죠. 
그때 브루노는 놀라운 사실을 알았다는듯이 가족들에게 얘기해줍니다.
"부엌의 파벨할아버지는 하루종일 감자를 깎기 위해서 의사가 됬데....."

브루노는 똑같은 파자마 잠옷 같은 죄수복을 입고 다니는 파벨 할아버지와 철책선 건너편의 친구 슈무엘이 늘 신기하고 
재미있어 보이기만 합니다. 아마도 자신은 엄한 군인 아버지 밑에서 이쁘고 좋은 옷이지만 반듯하고 격식을 갖춘 불편한 옷만 
입고 다니는데 그들은 잠잘때만 입는 편한 파자마처럼 생긴옷을 언제나 입고 다니니 그들이 좋아보였나 봅니다. 브루노의 
생각엔 그들이 있는 곳은 수용소가 아니라 재미있는 농장이며 그들 가슴에 달려있는 죄수번호도 게임을 위한 숫자일꺼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친구 슈무엘이 아마도 이미 가스실에서 죽었을 수용소안의 사라져버린 아버지를 찾기 위해 도와달라고 
하자 친구를 위해 은근 동경하던 파자마를 몰래 갈아 입고 철책 너머로 숨어 들어갑니다.
가끔씩 높은 굴뚝에서 죽은 유태인을 태우는 검은 연기가 솓아 오르면 저 연기는 무슨 연기일까 하고 그렇게 궁금해했는데 
결국 브루노는 자신 스스로가 그렇게 유태인처럼 비극적인 죽음을 맞이하게 됩니다. 많은 유태인들과 함께 가스실에 들어가기 
위해 파자마를 전부 벗었을때에도 브루노는 샤워하러 들어가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영화는 예상 가능하지만 절대 그렇게되지 
않길 바랬던 방향으로 흘러가 천사같이 귀엽고 착한 한 독일어린이의 죽음으로 마무리됩니다. 
유태인들을 죽이는 수용소의 최고책임자의 귀한 아들이 유태인들과 함께 죽어 그들과 함께 화장되는것으로 끝이 나는 겁니다.

영화를 보는 관객의 마음은 미어집니다. 초조해하며 손에 땀을 쥐며 보다가 결국 먹먹해집니다.
대부분의 관객들은 언제쯤 브루노의 장교 아버지가 등장해 불쌍한 브루노를 구해줄까 궁금해하며 영화를 보다가 예상치 못한 
슬픈 결말에 안타까워하는데 반면 다른 혹자들은 솔직하게 브루노의 죽음이 통쾌했다고 고백하기도 합니다. 
유태인들을 그렇게 학살하는 독일인에게, 그런 나찌에게 복수를 하고 싶었다는 것이죠. 그런데 이상한게 있습니다. 
영화를 본 사람들은 8년간 호의호식하고 행복하게 살고 있던 나찌의 아들 브루노의 죽음은 그렇게도 안타까워 하면서도 아마도 
살아 생전 늘 고생만하고 맛있는 것도 제대로 먹어보지 못했을 유태인 슈무엘에 대해서는 별 감흥이 없습니다. 
결국 죽는건 브루노만이 아닌데 말이죠. 슈무엘은 유태인이니까 결국 죽겠지뭐 하고 예상이라도 했던 것인지 하여간 브루노의 
죽음은 있을 수 없는 일이 일어난 것처럼 못 견디고 괴로워 하면서 슈무엘의 죽음은 기억하지 않습니다. 
물론 그뿐만이 아닙니다. 어린 슈무엘만의 문제가 아니죠. 훗날 이영화를 만든 감독은 이런 고백을 했다고 합니다. 
"사람들은 영화를 보는동안 결국 브루노가 죽는지 안죽는지를 제일 궁금해한다. 
그사이 수많은 유태인들의 죽음은 어쩌면 관심밖에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날마다 숨쉬는 순간마다 많은 어려움들을 만나고 있습니다.
오래된 어려움, 끝난듯 이어지는 어려움, 좋은 것인줄만 알았던 어려움, 그리고 전혀 새로운 어려움까지 말이죠. 
저는 그 어려움들을 만날때마다 광야의 삶속에서 내게 내려온 하늘의 만나가 이런걸까 하는 생각을 합니다. 도무지 이게 뭔지, 
도데체 어쩌라는건지 난감하고 부담스러워 피하고 싶은 그런 순간 순간의 만나를 오래도록 경험하면서 신기하고 놀라운 마음
으로 하루하루 내리시는 그날의 만나를 맞이하며 살고 있습니다. 가끔은 가엽게도 이또한 지나가리라 하며 실실 피해보기도 
하고 때로는 모른척 외면하기도 해보며 드물게는 쫒기는 짐승이 구멍에 머리 쳐박듯 숨어보려고도 해봅니다. 
은근히 어느 정도 세월이 지나거나 때가 되면 아마도 정체를 알아 볼 수 없는 이런 불확실한 만나 대신에 우리가 확연히 알아
먹을 수 있는, 보다 분명한 기쁘고 즐거운 행복한 그무엇인가를 주실것이라고 기대도 하곤 했는데 김성수목사님의 말씀을 듣고 
말씀을 보니 이어려움들은 결국 이광야같은 세상을 사는 내내 함께 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라는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출애굽기에 이런 말씀이 있더군요. (출16:35)
'이스라엘 자손이 사람 사는 땅에 이르기까지 사십년 동안 만나를 먹되 곧 가나안 지경에 이르기까지 그들이 만나를 먹었더라' 
뜨아....전 잠깐동안 만나를 먹고 나중에는 좀 맛있는거 먹으면서 살줄 알았습니다.ㅠㅠ
결국 이하늘의 만나는 저에게 부어지는 은혜이며 우리네 인생에서 어김없이 부어지는 하늘의 양식이신 예수 그리스도라는
것을 알게 되었지만 말입니다.

저에게 내려오는 일용할 만나는 가끔은 물건으로, 때로는 사건이나 사람으로 저에게 다가옵니다. 
그래서 매일 일상에 부딪히는 새로운 만나를 만나게 되면 중얼거리며 생각합니다.
"이건 또 뭐지"......"누구냐 넌?....."
광야에서 처음 만나를 접한 이스라엘 민족이 그 신비하고 놀라운 마음에 "What is this?" 했던 것이 바로 '만나'라는 단어의 
뜻이라고 배웠습니다. 그들이 눈에 확연히 보이는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따라 광야를 걸으면서도 만나를 보며 이게 뭐지 
했는데 지금 복잡하게 눈돌아가는 세상을 살아가는 우리에겐 얼마나 어려운 모습으로 하루하루 새로운 만나를 만나며 살아
가게 될런지 식은 땀이 흐릅니다. 그래서 내가 입고 있는 아름답고 고운 흰 옷을 몰라보고 자꾸 벌거벗은 임금님 밑에사는 
어리석은 백성들 마냥, 영화속 불쌍한 주인공 부르노 마냥 남루하고 찢어진 죽음의 세상 옷에 자꾸 눈길이 가고 있습니다. 

저는 매일 하늘에서 내려오는 만나를 바라보는 마음이 이미 감격에서 식상으로 바뀌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래서인지 매일 부어지는 만나를 보며 기쁨과 설레임보다는 이제 그만 고기 좀 먹여 달라고 앙탈을 부리며 살고 있는 저를 
발견하곤 합니다. 그리고 솔직히 그런 저자신이 한심하다기 보다는 그럴만도 하지 하는 자기 연민으로 이어지기까지 합니다. 
오로지 나만 바라보게 되는 저의 안경은 이웃의 죽음이나 세상의 죽음은 안중에도 없습니다. 
그렇게 저 역시 '줄무늬 파자마를 입은 소년'을 바라보는 아쉬운 한 관객일뿐입니다. 
그래서 느헤미야서에 있는 말씀처럼 그저 엎드려 기도할뿐입니다.
'주의 선한 신을 주사 저희를 가르치시며 주의 만나로 저희 입에 끊어지지 않게 하시고....'

바보같은 저는 매일매일 제앞에 놓인 중국음식점의 포츈쿠키같이 놓여진 만나를 내려다 보며 말로는 주여 믿습니다 하면서도 
속으로는 어김없이 불안하고 떨리는 마음으로 중얼거립니다.
아이고....이건 또 뭐지........

난...다...고...래.....





이장혁 15-04-23 19:18
    
참 재밌습니다,
글 하나 하나가 다 맘에 와 닿네요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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