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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14-05-27 01:37
   연애 戀愛/(펌) 고멜과 호세아님의 글
 글쓴이 : 문미헌
    조회 : 17,576  


戀愛 - 그리워할 연, 사랑 애
우리는 연애를 한다. ​우린 사랑을 그리워하며 그리운 사랑을 한다. 우린 그 사랑에 눈물도 짓고 애타고 목마르기도 하다.
근데 말이다. 이 연애를 잊게 만드는 것들이 너무 많다.
맞다. 너무 많다.
​우린 그렇게 연애를 잊는다. 우리가 그리워하던 사랑을 잊는다. 또한 사랑을 그리워하지 않게 된다.
사랑이 무엇일까. 그 사랑을 그리워한다면 우린 무엇을 그리워하는 것일까. 사실 우린 무엇을 그리워하는지도 모르고 사랑을 그리워 한다. 그 사랑이 무엇인지를 우리는 살면서 계속 그 대상을 바꾸어왔다. 우리의 사랑은 우리의 것을 내어주는 것까지가 우리 사랑의 전부였다. 그렇게 우리의 소유를 내어주거나 우리가 가지지 못한 모험까지도 그 사랑에 매몰시켜가는 것을 반복하여왔다. 그러나 그렇게 해오던 사랑의 대상이 그게 사랑이 아니었다고 알게 되었다면 다행이 아닌 분노와 배신으로 느끼게 된다.
​과연 우리가 그토록 찾아온 사랑이 무엇일까.
​우리는 사랑을 동사로 인지하여왔다. 즉, 사랑스럽다던가 사랑을 한다던가 하는 그 무슨 대상을 염두해두고 하는 것으로 인지하였다는 것이다. 그런데 사랑은 그런 대상에 기여한 동사가 아니라 그 사랑자체가 명사였다면 어떻게 인지 하시는가. 곧 사랑은 그 자체로 존재이다. 나도 이십여년간을 찾아온 질문의 해답이 이렇게 단순한 것이었다는 것에 허탈할때도 있지만 사랑은 우리가 느끼는 감정이나 어떤 대상물을 사랑한다라고 하는 동적인 것이 아닌 바로 사랑 그 자체라는 것의 존재를 인지하는데 오랜 시간이 걸렸다. 그러면 명확해진다. 사랑이 무엇인가라는 질문이 이젠 정확해졌다는 것이다. 바로 그 사랑이라는 존재가 무엇이냐는 것이다.
​우리가 흔히들 말하는 사랑, 그 대상이나 목적물에 대하여 얻으려는 다양한 혜택과 지불해야하는 우리의 노력에 의해 성취된 그 사랑을 나는 사랑이라고 말하지 않는다. 그것은 단순히 호르몬의 작용으로 착각을 불러 일으킬만한 무언가로 여겨도 무방하다고 설명할 수도 있지만 그런 차원에서의 이해가 아닌 사랑 그 자체가 눈에 보이는 혹은 목적물과 대상이 명확한 것들은 사랑이 아니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건 사랑의 실체를 잘 모르고 그것을 우리의 오감으로 인지하는 정도의 것과 탐심과 욕구를 채우는 정도의 것으로 밖에는 알지 못하는 것을 그저 우리의 노력과 헌신과 좋아함으로 한정한 개념일 뿐이다. 그래서 사랑이 개념으로 밖에는 남아있지 않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의 경험으로 밖에는 감지되지 못하는 것이다. 그렇기에 서로가 말하는 사랑이 다양하다.
​이제 그 사랑의 실체를 설명하고자 한다.
​사랑은 이 세상에 사랑의 실체로 오셨다. 우린 그 사랑을 하나님이라고 부르기도 하고 그 사랑의 속성을 파악하여 우리의 소유로 만드려고 하기도 하였다. 바로 여러분들이 인지하시는 방식으로는 이 하나님을 대상으로 만들어 버리면 그건 사랑을 사랑하려는 시도일 뿐이라는 것이다. 그렇기에 감이 안오는 것이다. 그래서 사랑을 모를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성경을 완성된 하나님 사랑으로 설명하는 이유는 우리가 가진 사랑의 속성이 사랑하려는 그 무언가의 대상에 우리 자신을 오버랩시키는 시도에 대하여 대상을 한정시키려는 것일 뿐이지 사랑은 처음부터 사랑이었고 나중에도 사랑일 뿐이고 그 대상이 중요한게 아니라 그 사랑 그 자체가 중요하다는 것을 간과해왔다.
​하나님은 사랑이시다.
​과연 이 말을 누가 이해할 수 있을까. 잘못이해하면 하나님의 사랑하려는 속성 그 자체가 하나님이라고 이해해버릴 수도 있는 것이다. 아무래도 모두들 그렇게 인지하시는 것 같다. 그래서 그 사랑의 대상이 성도라고 하여 그 성도가 되기 위해 열심들이실 것이라는 것이다. 완전한 오해다. 우린 탐심으로 그 사랑을 모방하여 그 사랑마져도 우리의 것으로 사유화해버린체 오해된 사랑을 열심히 하고 있는 것이다. 즉, 우린 사랑일 수 없다는 것을 자각하게 할 그 무언가일 뿐이라는 것이다. 더 깊게 생각해보면 우린 그 하나님 사랑의 대상물이라는 인지에 물들어 있으면 성경을 읽을때마다 사랑받고자 하는 갈망의 형태로만 우리에게 각인되게 되어있다.
​그러나 불변하는 진리인 하나님 그 자체가 사랑의 실체이다.
그렇다면 연애란 그 하나님을 그리워하는 것으로 이해해도 될까. 사실 단어적으로 어떤 문헌적 증거나 고증적 시료로써의 증거로는 사용되지 않는 것이지만 우리가 흔히 쓰는 남녀사이의 연애라는 의미에서 그 하나님 사랑을 재해석해 본 것이다. 사랑이 실체가 되는 것, 그리고 그 사랑을 그리워 하는 이 연애가 우리에게 드리워져 있는가.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 하나님이 사랑하신다는 동사적 의미의 사랑은 우리에게는 없었다. 그렇게 인지하면 우리 안에서는 사랑 그 자체도 동사적 의미의 사랑하려는 행동까지도 전부 없었던 것이다. 곧 우리 안에는 사랑도, 사랑을 한다던 동기도 결과도 우리의 것이 아니었다.
성경의 문자적 표현으로써의 사랑은 다양한 의미를 가진다. 그런데 히브리어나 헬라어가 그 하나님이 사랑하신다는 그 사랑을 전부 담고 있지 못함은 우리가 역으로 문자의 원어적 접근으로는 그 하나님의 사랑을 온전히 알 수 없다는 결론에 도달하게 된다. 그렇기에 그 문자를 안다라는 것으로 성경을 안다라고 하지 말라는 것이었다. 그렇다면 여러분들께 성경속에 등장하는 사랑, 그 사랑을 표현한 부분들을 문자가 아닌 내용으로 설명된 것들을 하나 둘씩 찾아보심이 어떠하신가. 아마 전부가 아닐까 한다.
그 말씀이 사랑으로 이미 다가와 있는 것이다.
​역사속에 뚫고 들어온 것이다.
그 사랑, 그 사랑을 모르시겠다고 하시는 분들을 다그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 사랑을 알면서도 채찍을 드는 이들이 이해가 가질 않는 것이고 과연 그 사랑을 안것일까라는 의구심도 든다.
내가 아버지 안에 아버지가 내 안에...
우리가 새로운 피조물이 된다는 말의 의미를 아주 단순하게 하나님과 사랑하는 사이가 된다고 생각해 본다면 좀 이해가 되실 수 있으시겠는가.
​단지 그 하나님을 우리가 사랑해드리겠다는 형식이 아닌 그 사랑의 의미를 알고 그 사랑에 매몰되어져 가는 것으로 이해하시면 좋을 것 같다.
그 사랑을 안다는 것은 곧 하나님을 아는 것이다.
그렇기에 사랑을 그리워하는 것, 우린 그 하나님과 연애를 하는 자들인 것이다.
하나님을 단순히 거대한 힘과 권력을 지닌 어떤 신으로 인지하신다면 여러분들은 굴복의 상태로 밖에는 인지하지 못한다.
그런데 또 어떤 쪽에서는 아빠라고 부르면서 친분을 강조하시는 분들도 계신다.
크게 본다면 나는 후자쪽에 손을 들어주고 싶다. 그러나 이 또한 약간 잘못된 개념에서 비롯된 것이다.
은혜의 관점에서 그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과 사랑하심의 상반된 개념이 어떻게 자리잡고 그것을 신앙생활에 녹아들어져갈 수 있겠는가.
우린 하나님과 관계를 맺는 것이 아닌 그 사랑에 매몰되어져 가는 것이다.
이게 우리 사람들 사이에서의 사랑과 다른 점이다.
한쪽으로 매몰되어져 가는 것이 사랑인 것이다. ​내가 사랑해서 잘해주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랑에 매몰되어져 면목없음과 기쁨이 교차하는 것이다. 이유들은 다들 아시지 않으신가. 죄의 의미를 깨닫고 하나님 절대 의존의 자리를 박차고 나와 제 힘으로 살아보겠다고 한 아담들의 심성에서 그 하나님의 불가항력적인 은혜로 자기 백성을 살려내시겠다는 사랑의 역사에 관에서 말이다. 이 역사 전체가 이것을 설명하시는데 사용되어진 것인데 우린 인본과 탐심의 언저리만 계속 맴돌고 있었던 것이다.
나는 그 사랑의 의미를 알아가게 되면서 한가지 사람들간의 사랑에 대한 관점이 바뀌에 되었다.
그런건 사랑이 아니라는 관점에서 그것도 하나님 사랑의 모형을 설명하기 위한 것이라고 생각했다가 비로서 아... 매몰되어져 가는 것이구나.
배신당해도 나를 미워하더라도 돌을 던지더라도 그 사랑에 매몰되어져 가는 것이구나.
누가 그대들에게 몹쓸소리를 하는가. 혹여 여러분을 핍박하는가. 혹여 괴롭히는가. 혹여 못살게 만드는가.
그 자체가 두가지 의미에서 가르침을 주시는 것이다. 한가지는 우리 인간사이에서는 그 사랑, 그 선을 이룰 수 없음이 그 하나이며 두번째는 그것으로 그 하나님 사랑을 대해온 우리의 죄가 그런 것이다. 우린 그 사랑에게 그렇게 대해온 것이다. 그로써 그 사랑을 안다는 것은 그 사랑이 우리 안에 들어옴으로 그 사랑이 푸대접받는 것을 반드시 경험해 간다는 것이다. 근데 이상하게도 더욱 확연하게 그 사랑을 알게 되는 것이다.
여러분들이 사랑한다던 것들이 다 부정당하고 자식도 부모도 돈도 명예도 권력도 다 끊어지고 이제 남은건 여지껏 푸대접해온 그 하나님 사랑만 남는 것이다.
여러분 스스로는 이 역사속에서 만들어온 그 사랑한다던 것들을 버리실 수 없을 것이다. 그것을 주의 이름으로 버리시겠다고 하시는 분들은 정말 무서우신 분들이다. 다 소용 없다느니 그런 의미가 아니다. 오히려 하나님의 사랑을 더더욱 그리워할 뿐이라는 소리다. 여러분께 미운짓한 가족을 미워하면서 그딴놈 필요 없다고 하는 마음가짐에 어찌 주의 이름을 가져다 쓰겠는가. 그리고 성경에 서로 사랑하라고 씌여 있다고 그 미워죽겠는데 사랑하라고 하니 그것도 스트레스가 되어 맘고생 많으셨을 줄 안다.
그런 의미가 아니다.
서로 사랑하라라고 하신 말씀은 성경의 큰 줄기인 하나님 사랑과 이웃사랑 중 이웃사랑의 내용이다. 하나님 사랑은 하나님의 사랑이 실체이신 사랑의 의미로 말씀으로 오신 것이고 이웃사랑의 진의는 누가 우리의 이웃인가의 해답인 것이다. 우리에게 오신 예수 그리스도인 것이다. 그러면 우리는 어디에 있는 것인가. 바로 우리가 그 예수 그리스도의 참포도나무에 젓붙임된 자들인 것이다.
우리 성도는 곧 예수 그리스도에 묶여 하나님 사랑으로 하나가 되는 것이다.
우리가 억지로 사랑하려고 하지 않아도 된다는 의미이다. 그 사랑의 참의미를 알면 ​그렇게 억지로 사랑하려고 하고 노력하여 선행하며 복음을 전파하기 위해 애를 쓰는 것이 무용함을 알 것이다. 그리스도인으로써의 덕목같은 것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인이 되면 자연스럽게 하나님 사랑이 나타난다는 것이다. 자연스럽게 나타난다함은 내 안의 예수가 나타남이요 내 안의 예수가 열매를 맺는다는 의미이다. 그 맺는다는 열매가 무엇이겠는가. 바로 생명인 것이다.
사람들이 자꾸 혼동하는 것이 손발의 움직임에 너무 빠르다는 것이다. 섣불리 판단하고 옳다여기고 바로 움직이는 것이다. 의심하면 안된다는 결계에 묶여버린듯 그런 이야기를 입밖에 내지 못하고 혼자서 잘믿는척 은혜로운척 하느라 정작 믿는다는 대상이 누구인지도 모른체 마음속에 제멋대로 형상화한 우상을 하나님이라고 믿어버리게 되었다. 내가 아무리 예수가 생명이다라고 말한들 여러분께는 뻘소리로 들릴 것이다. 아니 당연하다고 여러분은 동의라는 끄덕임을 하실지 모르겠다. 근데 나는 옳은소리를 하는 것이 아니라 진실을 말함이다. 그 진실이 여러분께도 진실이 되지 못한다면 혹여 그 진실이 여러분과 아무 상관없는 것이라면 반응들은 여러가지일 것이다.
​우리의 믿음은 동의가 아니다.
다시금 돌아가서 그 믿음은 그 하나님이 사랑하심을 우린 연애, 그 사랑을 그리워 한다. 오직 그 사랑이 전부가 되는 것이다. 이 역사속에서 진실만 진리만 빼어서 보면 그 사랑이야기만 남는 것이다. 바로 그 진실, 진리를 본 자가 그 진리에 기뻐하는자가 성도인 것이다. 지금 모른다고 모르는 것도 아니고 다 안다고 하여 그대의 것이 아닐 수 있다. 알면 무엇하겠느뇨. 아무 상관없는 것이라면 곧 예수께 젓붙임된 자가 아니면 아무 상관이 없는 것이다.
세상에 떠들어대는 예수, 은혜, 복음, 구원, 생명이 그 구분의 근간은 그 앎이 아니라 예수가 행하시는 그 행함이 근간이다.
예수가 행하시는 것이 제일먼저 무엇을 바꾸시겠는가. 젓붙임 당한 여러분들 아니겠는가.
어디가서 아직 뭘 아는지 뭘 모르는지도 모르는 상태에서 주장하거나 비판하거나 가르치려하는자가 되기 이전에 젓붙임당한 스스로에게서 예수 그리스도의 행하심을 찾아보심이 어떻하신가. 그것에서 하나님 사랑이 이미 오롯하게 드러나 있다는것을 아시게될 여러분이 되셨으면 한다.
(퍼온글)
(퍼온글)
세상에 떠들어대는 예수, 은혜, 복음, 구원, 생명이 그 구분의 근간은 그 앎이 아니라 예수가 행하시는 그 행함이 근간이다.
예수가 행하시는 것이 제일먼저 무엇을 바꾸시겠는가. 젓붙임 당한 여러분들 아니겠는가.
어디가서 아직 뭘 아는지 뭘 모르는지도 모르는 상태에서 주장하거나 비판하거나 가르치려하는자가 되기 이전에 젓붙임당한 스스로에게서 예수 그리스도의 행하심을 찾아보심이 어떻하신가. 그것에서 하나님 사랑이 이미 오롯하게 드러나 있다는것을 아시게될 여러분이 되셨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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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멜과 호세아 (samsungfp)
은 15개와 보리 한 호멜 반
 



유영훈 14-06-02 00:57
    
좋은글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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