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시드니에서 김연숙님 녹취, 로마서 77강 끝부분에서 >
여러분 자기가 하고싶은 걸 안 하고 그냥 꾹 참는 거, 그게 성숙한 신앙생활 아니에요.
그렇다고 하고 싶은 거 맘대로 막 하고 살라는 말도 아니에요.
“아, 목사님 말씀을 듣더니 그 시로도가 목사님이 그러는데 이제 막 살아도 된다. 그랬어.
그러면서 막 대한대요. 가족들도 그러고 자기에게도 그러고”
그 사람은 아직 초짜예요. 그런 말하는 거 아니에요.
어떻게 그 메가스, 진리의 성령을 안 사람이 야, 인제 개차반으로 막 살아도 되겠네?
어떻게 이게 됩니까? 그리고 꼭 핑계를 나를 핑계를 대갖고..
꼭 참는 게 능사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왜 그런 걸 먼저 법으로 주셨는지를 아는 거예요.
그러면 하고 안 하고의 행위의 문제에서 벗어날 수 있어요.
제가 지난 수요일에 콘서트하면서 느낀 게 바로 그런 거였어요.
아, 이 분들이 진짜 원하는 게 따로 있었구나!
한 번 탁 터트려주니까 그냥 그래, 그거! 하고 나오는 거죠.
그런데 그동안 그거 안하느라고 얼마나 자부심을 가지며 칭찬을 했을까요? 자기를.
야, 너 아직도 그거해? 아, 나는 벌써 옛날에 끊었는데,, 웃기고들 있는 거죠.
사실은 그거 좋아하고 있었던 거잖아요. 꾹 참고 있었던 거예요.
내가 하나님 나라 가면 보자, 내가! 그건 벼르는 거라니까요. 그게 중요한 게 아니라고요.
진리가 된 사람은 그게 아무런 문제가 안 돼요. 그냥 그 속에서 진리를 오히려 찾아내요.
그리고 결국은 내가 즐기던 이런 것도 진짜 나를 즐겁게 해주는게 아니구나를 알게 되는 거지.
그걸 안하고 꾹 참으면서 넌, 왜 아직도 그 수준이야? 이게 시퍼렇게 살아있는 거예요.
우리가 누구의 수준을 따집니까? 아니 누구를 정죄해요?
진리는요 자기를 보게 되어있다니까요. 요거 보기에도 바빠요.
얼마나 불가능하고 추악한지. 얘(자기) 보고 얘(자기) 걱정하기에 더 바쁘다니까요.
그런데 어떻게 그렇게 오만 군데 돌아다니면서 남 참견들을 다 하고 다니는지 말이죠.
누가 그냥 교회를 새로 개척한다는데 뭐 벌써 개척하면 되느냐? 왜 안 돼요? (전ㅂㅇ목사)
아니 아직 회개도 안 하고, 회개가 뭐예요? 사실 그거 질투하는 거죠?
아, 나는 옛날에 어마어마하게 잘 나가서 굉장히 부러웠는데 그런데 쫄딱 망해서 얼마나 내가 고소했는지.
그런데 다시 재기를 한단 말이야? 절대 안 돼! 이거지 뭡니까?
진짜 무슨 교계의 정의를 회복하기 위함이에요? 교계의 정의가 뭔데요?
어차피 진리가 제대로 전해지지 않으면 거긴 그냥 친목계에요.
그럼 마음에 맞는 사람들끼리 모여서 친목회를 한다는데 왜 그렇게 난리냐고요?
그리고 혹시 거기서 진리가 제대로 전해지면 야, 하나님이 저런 사람을 들어서도 진리를 전하시는구나.
역시 호 코스모스 인간, 육, 푸시케는 낫띵, 하나님이 전부! 깨달으면 되지.
뭘 여기저기 돌아다니면서 책을 반납하네 뭐네. 시간들도 많아요. 나는 도대체.
보면 전부 삐리삐리 한 애들이 모여 갖고 그거하고 앉았더라고요. 괜히 질투 나가지고 말에요.
그런 거 하지 말아요. 날 보라고요. 자기 자신을 보라고요. 그리고 이 교회를 신경 쓰라니까요.
여기에 진리가 제대로 전해지고 있는가? 나는 과연 이 푸시케의 죽음을 향하여 가고 있는가?
저 말씀으로! 남의 교회 신경 쓰고 난리에요. 왜?
그거예요. 그게 그렇게 죽고 다시 사는 게 우리의 신앙생활이에요.
진리만 남고, 나와 내가 관심 두고 살았던 이 호 코스모스적 세상이 조금씩 죽어서 말씀이 완성되는
그런 삶을 사는 자. 그들이 바로 성도입니다.
그 죽음, 그 다나투스, 그걸 ‘디오마이’ 맛 봐야 하나님 나라, 그 바실레이야, 하나님의 통치를 ‘호라오’,
비로소 볼 수 있는 거예요. 깨달음으로 볼 수 있는 거예요.
아버지 하나님, 그렇게 죽어야 산다는 이 역설이 이해되어지는 것이 능력입니다.
아버지 하나님, 우리에게 어떻게 그런 능력이 주어졌습니까?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그것을 세상 사람들은 고통이라고, 고난이라고 그렇게 손가락질 하지만
아버지 하나님, 우린 그게 복임을 배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