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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14-01-27 15:21
   하나님 사랑 이야기 - 아가서
 글쓴이 : njsmyrna
    조회 : 16,333  


로마서(13) “사랑하심을 입고 그리스도의 것으로 부르심을 입은 자” 중에서
 
그러니까 천국이라는 곳은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자가 가는 곳이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가 가는 곳이 아닙니다. 
잘 새겨들으세요. 천국은 은혜로 가는 것이지 행위로 가는 곳이 아니란 말입니다.
 
그러한 사랑의 관계가 아주 잘 그려져 있는 곳이 바로 아가서입니다.

아가서는 솔로몬이라는 신랑과 술람미라는 신부의 사랑이야기입니다. 
그런데 술람미라는 여자는 마귀 같은 오빠들 때문에 포도원에서 실컷 일만해야 했던, 얼굴이 검은 노예 여인
이었습니다. 그 술람미라는 여자와 대조가 되어 등장하는 여자들이 희고 아름다운 예루살렘 여인들입니다. 
솔로몬에게는 1,000명이 넘는 아내와 후궁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저마다 재색을 겸비한 훌륭한 외모의 여자들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여인들을 제치고 포도원에서 죽도록
일만하던 검은 피부의 술람미가 솔로몬의 사랑을 독차지 하고 있는 것입니다. 겉만 번드르르한 예루살렘 여인
들은 검고 못생긴 술람미 앞에서 철저하게 부정당합니다. 여러분이 이미 눈치를 채셨겠지만 희고 아름다운 
예루살렘 여인들은 율법주의와 유대주의, 인본주의를 상징하는 것입니다. 반면에 검고 못생긴 술람미 여인은 
사랑받을 만한 아무런 자격이 없는 가운데 오직 신랑의 선택과 사랑에 의해 신랑의 신부가 된 은혜를 입은 교회
(세리, 창녀, 병자, 고아, 과부 등)를 상징하는 것입니다.
 
인본주의는 인간의 행위와 외모로 그 사람의 가치를 판단합니다. 그래서 생 쇼를 하더라도 자신이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할 수 있는 존재임을 증명하려고 합니다. 그게 율법주의의 자기외모 가꾸기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열심과 
노력을 서로 서로 인정해 주면서 ‘당신이야말로 신랑의 사랑을 듬뿍 받을 수 있는 자격이 있는 신부’라고 추켜
세웁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들의 그러한 행위들을 다 부정해 버리십니다. 하나님은 외모를 보시지 않습니다. 
그들이 내어놓는 행위를 보시지 않습니다. 그래서 검고 못생긴 술람미가 솔로몬의 사랑하는 아내로 간택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외모를 보시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술람미는 아무런 자격이나 조건을 소유하지 못한 그런 
여자입니다. 그런데 신랑인 솔로몬이 무조건 적인 선택으로 신부를 사랑해 버리는 것입니다. 그 사랑을 바울이 
이렇게 설명을 합니다.
 
(롬9:11~13)
그 자식들이 아직 나지도 아니하고 무슨 선이나 악을 행하지 아니한 때에 택하심을 따라 되는 하나님의 뜻이
행위로 말미암지 않고 오직 부르시는 이에게로 말미암아 서게 하려 하사 리브가에게 이르시되 큰 자가 어린 
자를 섬기리라 하셨나니 기록된바 내가 야곱은 사랑하고 에서는 미워하였다 하심과 같으니라
 
아직 태어나기도 전에 신랑이 신부를 찍어 버리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선택이 된 신부를 목숨을 걸고 사랑해 
버리는 것이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그리고는 신랑의 나라의 통치 원리를 적용시켜서 신부의 나라 생활원리로 
못 살게 들들 볶아요. 생각해 보세요. 천지만물의 창조주께서 죽은 흙을 신부로 택하셨어요. 그런데 그 흙은 자꾸 
땅의 세상에 동화되려 해요. 땅에 대한 연정을 못 버린단 말입니다. 흙이니까요. 거기서 나왔으니까요. 
그런데 그렇게 흙의 삶을 추구하며 흙의 삶을 누리다가는 영원한 멸망으로 떨어지고 말아요. 그래서 신랑은 당신의 
신부의 삶을 차압해 버리는 것입니다. 당신이 원하시는 방향으로 자기 마음대로 끌고 가세요. 
그러나 그것이 바로 구원의 길인 것입니다.
 
(롬5:8)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 하셨느니라
 

보시다시피 우리가 아직 죄인이었을 때에, 포도원의 검고 못생긴 노예였을 때에, 아무런 자격도 조건도 묻지 
않으시고 신랑이 와서 날 선택해 버리는 것입니다. 그게 구원입니다. 그렇게 우리의 처음자리가 들켜지고 우리를 
향한 엄청난 신랑의 사랑을 깨닫게 되었을 때 우리는 그야말로 면목 없는 자리로 내려가게 되는 것이고, 그러한 
불가항력적 은혜로 나를 찾아오신 그 신랑만을 꼭 붙들고 의지하게 되는 것입니다. 아무리 다른 놈들에게, 세상 
것들에게 기웃거려 보아도 실컷 이용만 당하고 버려질 뿐임을 자신의 인생을 통해 배우게 되거든요.
 
고멜 보세요. 신랑 호세아가 그토록 열심히 사랑을 해 주는 데도 열심히 다른 남자들과 바람을 피우지요? 
그러다가 결국 어떻게 됩니까? 단물 다 빠지고 나니까 노예 시장에 팔아 버려요. 그때 신랑 호세아(헬라어로는 
예수)가 은 열다섯과 보리 한 호멜 반으로 그 창녀 같은 신부를 사오는 것입니다. 은 열다섯과 보리 한 호멜 반은 
은 삼십 냥이라고 했지요? 예수님이 우리의 속전이 되셔서 십자가에 매달리셨을 때 얼마에 팔리셨습니까? 
은 삼십에 팔리셨습니다. 그렇게 우리는 신랑의 은혜와 사랑에 의해 선택을 받아 죽어야 할 창녀의 자리에서 왕의 
신부의 자리로 옮겨 앉은 대박 맞은 인생들인 것입니다. 그걸 실존적 경험으로 배우게 되는 것이 신앙생활입니다. 

그러니까 신앙생활은 경건하고 거룩하고 순결한 것이기 이전에 창녀같이 더럽고 추악한 자신의 실체를 폭로당하는 
고통스러운 현장이란 말입니다. 그 속에 말씀이 떨어져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너를 위해 당신의 아들을 
죽이셨다는 것을 믿어지게 하시는 것이 신앙생활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그 왕을 사랑하지 않을 수 있어요. 
그게 믿어진다면요. 그래서 사도 바울이 제발 그 사랑을 좀 깨달으라고 입에 침이 마르도록 강조하는 것입니다.
 
(엡3:18~19)
능히 모든 성도와 함께 지식에 넘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아 그 넓이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가 어떠함을 깨달아 
하나님의 모든 충만하신 것으로 너희에게 충만하게 하시기를 구하노라
 
그렇지요? 그런데 우리는 자꾸 선악과를 따먹고 신이 되어버린 우리 자신 안에서 사랑받을 수 있는 근거를 찾는
다는 말입니다. 그런 사람은 반드시 자기가 사랑받을 수 있는 자격을 갖추었기 때문에 상대가 나를 사랑해 주는 
것이라는 교만의 자리로 가게 되어 있습니다. 마귀는 바로 그러한 인간의 아킬레스건을 치고 들어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온갖 감언이설로 인간의 아름다움과 훌륭함과 위대함을 칭찬해 줍니다. 어리석은 죄인들은 그것을 사랑
이라고 착각하는 것입니다. 사실은 그 마귀에게 자신의 단물을 다 빼앗기고 있는 것을 모르는 것입니다. 
결국은 자신이 그 마귀에 의해 심판의 노예시장에 팔리게 될 것임을 모르는 것입니다.
아닙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우리의 비위를 맞추는 사랑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어떤 존재였는지를 확실하게 
보게 하십니다. 제발 감추어 주었으면 하는 그 비밀스러운 것까지 다 까발려 버리십니다. 
그리고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너를 사랑한 것이란다’하고 사랑고백을 하시는 분이 하나님이십니다.
 
그러한 구원의 현실을 알지 못하는 자들이 자기 자신에게서 사랑받을 근거를 찾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그러한 
것들이 찾아지지 않으면 그 근거를 마련하느라 무거운 짐을 지고 매순간을 헉헉 대면서 살고 있는 겁니다. 
두렵거든요. 내 꼬라지로는 절대로 신랑의 사랑을 받을 수 없을 것 같거든요. 그게 양심이 있는 모습처럼 보이지만 
그것이 바로 예수님의 사랑을 폄훼하는 행위인 것입니다. 예수님의 사랑이 그 정도로 밖에 안 보인다는 것이니까요. 
그렇게 신부가 신랑의 사랑의 근거를 자기 자신에게서 찾게 될 때 신부는 두려움에 떨게 됩니다. 
혹시 버림받는 것은 아닐까? 하고요. 성경은 그것을 죄라 합니다.
 
(요일4:18~19)
사랑 안에 두려움이 없고 온전한 사랑이 두려움을 내어 쫓나니 두려움에는 형벌이 있음이라 두려워하는 자는 
사랑 안에서 온전히 이루지 못 하였느니라. 우리가 사랑함은 그가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음이라
 

정확하지요? 이러한 두려움이 술람미의 꿈속에서도 나타난다는 것을 아십니까?
 
(아3:1~5)
내가 밤에 침상에서 마음에 사랑하는 자를 찾았구나 찾아도 발견치 못 하였구나. 이에 내가 일어나서 성중으로
돌아다니며 마음에 사랑하는 자를 거리에서나 큰 길에서나 찾으리라 하고 찾으나 만나지 못 하였구나
성중의 행순하는 자들을 만나서 묻기를 내 마음에 사랑하는 자를 너희가 보았느냐 하고 그들을 떠나자마자 
마음에 사랑하는 자를 만나서 그를 붙잡고 내 어미 집으로, 나를 잉태한 자의 방으로 가기까지 놓지 아니하였노라. 
예루살렘 여자들아 내가 노루와 들 사슴으로 너희에게 부탁 한다 사랑하는 자가 원하기 전에는 흔들지 말고 깨우지
말지니라
 
아가서 2장에 보면 예루살렘 여자들, 그러니까 인간의 외모와 행위와 소유 등의 세상 적 힘과 가치의 유무로 사람을
판단하는 인본주의와 유대주의가 술람미를 격동시키는 내용이 나옵니다. 너 같은 시커먼 노예가 어떻게 위대하고
위대한 솔로몬 왕의 신부 자격이 있느냐는 것입니다. 아가서 기자는 그러한 율법주의의 공격을 ‘포도원을 허는 여우’
라고 표현을 합니다. 그 여우를 잡으라고 합니다. 한 마디로 그런 말에 속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리고는 이 술람미의 꿈 이야기가 이어지는 것입니다. 술람미가 아무리 얼굴에 철판을 깔았다고 해도 그러한 
예루살렘 여자들의 비아냥 속에서 마음이 편했을 리가 없지요? 마치 여러분이 예수를 믿는다고 하면서도 세상 
사람들과 별반 다를 바가 없는 자신의 모습에 실망하고 있을 때 주위에서 누군가가 ‘너 같은 게 예수를 믿는 사람
이라면 똥파리도 새다’라고 비아냥거릴 때 여러분 마음이 뜨끔 한 것과 같은 형국입니다. 

그러한 불편함이 꿈에 나타난 것입니다. 진짜로 신랑이 어디로 떠나 버린 것입니다. 술람미가 얼마나 안타깝게 
신랑을 찾아다닙니까? 그런데 신랑이 멀쩡한 얼굴로 나타나서 ‘나 잠시 화장실 다녀왔는데, 왜 그렇게 울고 있어?’ 
이러는 겁니다. 얼마나 안심이 되었을까요? 그때 술람미 여인이 그 신랑을 데리고 어디로 갑니까? 4절을 보시면 
‘내 어미의 집, 나를 잉태한 자의 방’으로 데리고 갑니다. 그리고 거기에서 신랑을 꼭 붙듭니다. ‘내 어미의 집, 
나를 잉태한 자의 방’이란, 자신의 존재의 근본, 사랑받음의 근본의 자리로 돌아갔다는 말입니다.

자신은 무슨 자격이 있거나 외모가 훌륭하거나 행위가 근사해서 신랑에게 선택을 받은 것이 아니라 신랑의 일방
적인 선택과 사랑에 의해 신부로 간택이 된 것임을 재확인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랬더니 예루살렘 여우들의 참소가 
두려움과 부끄러움의 칼로 여겨지지 않더라는 것입니다. 그제서야 술람미가 자신을 참소하는 예루살렘 여자들에게 
외칩니다. ‘이제 나를 흔들지 마, 날 방해하지 마, 난 알았어,나의 처음자리가 어디인지를, 난 신랑의 일방적인 
사랑에 의해 신부가 된 사람이야, 그러니까 자꾸 나의 자격이나 조건을 들춰내며 날 격동시키지 마’
그때 신랑이 예루살렘 여자들 보란 듯이 그 술람미를 그 앞에서 꽉 껴안아 줍니다. 그런데 어떻게 그 신랑을 사랑
하지 않습니까? 목숨을 바치죠. 그렇게 성도는 자기가 받은 것이 확인이 되면 반드시 그 받은 것을 내어 놓게 되어 
있습니다. 

성화는 그런 겁니다. 무작정 열심히 노력해서, 허벅지를 찔러가며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니라, 내가 받은 사랑이 
확인이 될 때 그 받은 것이 나에게서 흘러나가는 방식으로 나타나야 진짜 성화인 것입니다.
하나님은 반드시 당신이 주신 것만 내 놓으라고 하세요. 하나님께서 믿음의 조상인 아브라함에게 모리아 산에서 
내 놓으라고 하신 것이 뭡니까? 이삭입니다. 이삭은 원래가 아브라함의 것이 아니었어요. 하나님이 주신 언약의 
후손이란 말입니다. 없음이었던 자가 하나님의 은혜로 있음이 되어 아비에게 주어진 것입니다. 하나님은 내가 준 
것, 도로 내 놓으라고 하신 것입니다. 내가 가진 것이 내가 생산해 낸 것이 아니라 지금 나에게 상환을 요구하는 
타자에 의해 선물로 주어진 것임을 아는 이들은 아낌없이 그것을 내 놓을 수 있습니다. 사랑이라는 것이 그런 것
입니다.
 
여러분, 잘 생각해 보세요. 신랑인 솔로몬이 어떻게 왕이 되었습니까? 솔로몬은 원래 없음입니다. 아버지 우리야의 
죽음을 먹고 은혜에 의해 탄생한 자가 솔로몬입니다. 하나님이 솔로몬의 형이 죽었을 때 다윗을 함께 죽여 버렸으면 
솔로몬은 이 땅에 존재 할 수 없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은혜로 존재로 탄생하게 되었을 뿐 아니라 이스
라엘의 왕의 자리에 까지 올라가게 된 것입니다. 모든 것이 은혜입니다. 솔로몬의 어미, 솔로몬이 잉태된 자리가 
어디입니까? 간음한 여인 밧세바의 태입니다. 
솔로몬은 그렇게 어미의 태에서부터 죄 덩어리로 존재하던 자였습니다. 그런데 그가 하나님의 일방적인 사랑
(여디디야)을 입고 이스라엘의 왕이 된 것입니다. 그게 바로 우리의 이야기입니다. 술람미가 바로 그 사랑을 입은 
것입니다. 그걸 확인한 것이 술람미가 솔로몬을 ‘어미의 집, 자신을 잉태한 이의 방’으로 데리고 갔다는 어구 속에 
들어 있는 메시지인 것입니다.
 
우리의 신랑이신 예수, 그분만이 우리의 사랑의 대상이 되어야 합니다. 그분만이 우리를 목숨 걸어 사랑해 주시는 
분입니다. 이 세상의 다른 사랑에 속지 마세요. 남편, 자식, 아내, 부모, 물질, 명예, 신분, 등등 그 모든 육적 사랑에 
집착하다보면 여러분은 그 육적 사랑에 짓눌려 죽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그러한 것들을 허락하신 것은 
그것들을 통하여 우리의 육적 삶을 풍요하고 행복하게 만들라고 주신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러한 육적 관계나 
물질이나 힘 등이 얼마나 허황되며 거짓되며 무가치한 것인지를 깨닫고 진짜 신랑이신 예수만 사랑하라고 주신 
것들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셔서 ‘진리인 내가 이 땅에 온 이유는 내가 검이 되어 그러한 것들을 끊어
내기 위해 온 것이다’라고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마10:34~39)
내가 세상에 화평을 주러 온 줄로 생각지 말라 화평이 아니요 검을 주러 왔노라. 내가 온 것은 사람이 그 아비와, 
딸이 어미와, 며느리가 시어미와 불화하게 하려 함이니. 사람의 원수가 자기 집안 식구리라. 아비나 어미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내게 합당치 아니하고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도 내게 합당치 아니하고, 또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지 않는 자도 내게 합당치 아니 하니라. 자기 목숨을 얻는 자는 잃을 것이요 나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잃는 자는 얻으리라
 
보세요. 주님은 우리 인간들이 자신의 목숨처럼 여기고 있는, 그러나 결국 이기적인 자기 사랑에 불과한 인간
관계 뿐 아니라 인간의 자기 목숨을 향한 애착과 열심까지도 끊어내러 오셨다는 것입니다. 그리고는 그것이 바로 
너희들이 살 길이라고 말씀을 하시는 것입니다.그렇다고 가족을 내 팽개치고 자기 마음대로 살라는 말이 아닙니다. 
디모데전서 5장 8절에 ‘누구든지 자기 가족을 돌보지 않는 자는 불신자보다 더 악한 자’는 말이 나옵니다. 가족은 
자신에게 허락하신 가장 가까운 이웃입니다. 당연히 보호하고 사랑하고 지켜야 합니다.그러나 그 가족 관계, 친족 
관계, 이웃 관계라는 것을 ‘나’라는 존재의 존재확장의 도구로 사용하기 위해, 혹은 내 만족과 내 평판을 위해, 꼭
붙들고 있는 것은 진짜 사랑이 아니란 것입니다. 그건 내 자신이 악당 잭이 되는 것입니다. 자기의 유익을 위해 
사랑이라는 것으로 위장하는 것입니다.

그러한 인간의 육적 사랑은 항상 유동적입니다. 그러한 육적 사랑은 항상 자신의 유익을 위한 쪽으로만 움직입니다. 
그래서 자기에게 유익이 되지 않을 것이라고 판단이 되면 가차 없이 다른 유익 쪽으로 이동을 해 버리는 것입니다. 
그건 사기요, 속임수일 뿐입니다. 아니 좀 더 원색적으로 말하면 그건 사랑이 아니라 ‘나’라는 우상을 살찌우기 
위한 더러운 죄인 것입니다.
성도의 가족사랑은 그 대상의 영원한 생명을 걱정하는 사랑이어야 하는 것입니다.
 
진짜 사랑은 내가 받은 신랑의 사랑이 그들에게도 임하게 되기를 간절히 바라는 마음으로, 그들의 삶 속으로 
들어가 내가 받은 솔로몬의 사랑을 술람미같은 그들에게 흘려 보내주는, 자기희생의 사랑이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건 우리가 만들어 낼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그래서 우리가 우리 신랑의 사랑을 배우고 또 배우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나’라는 존재가 얼마나 사랑을 할 수 없는 존재인지를 먼저 폭로 당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러한
자기 존재의 자각에 근거하여 ‘나’라는 존재는 누구로부터도 사랑을 받을 만한 자격이 없는 자임을 확실히 아셔야 
합니다. 그런데 그러한 죽은 흙에게, 거름덩어리에게 하나님의 사랑이 찾아왔다는 것을 믿음 속에서 인식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게 신앙생활입니다.

다시 한 번 오늘 본문의 말씀을 마음속에 금강석 철필로 새기십시오. 
‘나’는 하나님의 사랑하심을 입어 그리스도의 것으로 부르심을 입은 자입니다. 그리스도는 하나님이십니다. 
그 하나님의 것을 누가 빼앗을 수 있겠습니까? 그게 로마서 8장 말미의 위대한 진술인 것입니다.
엉뚱한 가짜 신랑들에게 한 눈팔다가 단물 다 빼앗긴 다음에 노예 시장에 팔리지 마시고 우리를 사랑하셔서 목숨
까지 내어주신 우리 신랑 예수 그리스도의 피만을 의지하시기 바랍니다.



admin 15-04-01 07:28
    
그러면 지금 여러분의 꼴을 봐서 야 내가 이꼴로 어떻게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할 수 있어?
그 반성은 아주 훌륭한 반성이에요. 그리고 훌륭한 고민이란 말입니다.
 그런데 그 고민에서 절망으로 가버리면 안되는거에요.
복음을 아는 이들은 원래 니들이 게달의 장막이었다 라는것을 알게 해주기 위해서
솔로몬이 놔두고 떠나버렸단 말에요. 
왜 그 귀한, 내 사랑하는 술람미를 왜 두고 솔로몬이 떠나냐구요?
어디든지 손잡고 다녀야지. 그게 인지상정 아닙니까? 주머니에 넣고 다니고 싶잖아요?
그런데 이유가 있어서 솔로몬이 그냥 두고 떠났단 말이에요. 이게 여러분의 인생이란 말입니다.
창세전에 입맞춤을 해서 넌 내꺼야 하고 딱 찍어논 다음에 역사 속에 던져버리고
하나님이 안나타나는 거에요.
아니에요 나는 꿈에서도 만나고요, 환상 속에서도 만나고요, 그건 미친거에요.
하나님은 두고 떠난다니깐요.
두고 떠나는 이유가 뭐냐면, 니가 내사랑을 받을 자격이 있는 자인지
역사 속에서 분명히 알구 와 라는거에요.
#아가서강해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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