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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13-06-10 15:01
   자기부인(self-denial)
 글쓴이 : njsmyrna
    조회 : 17,237  


<북가주 서머나 원찬연님의 글입니다>

이 세상을 살아가는 모든 생물들 중에 유독 사람만 옷을 입어요. 

다른 생물들은 살아가는 환경에 맞도록 피부의 구조가 정해져 있어서 
각자 주어진 그 자리에서만 살아갈 수 있게 처음부터 지금까지 한결 같습니다. 
개를 예로 들면, 
생래적으로 계절을 따라 털갈이를 하며 체온을 유지하지만 
그건 부끄러움을 감추기 위한 수단이 아닌 개에게 주어진 살아가는 방식 그 자체입니다. 
  
그런데, 사람만 가릴 데를 가리지 않으면 부끄러움을 느낍니다. 
요즘은 대담해져서 속옷패션으로 거리를 활보한다지만, 그래도 가릴 데는 가리더군요. 
  
벌거벗음이 죄라면, 사람을 제외한 모든 생물들은 죄로 시작해서 죄로 끝이 나겠지요. 
그런데, 사람들조차도 벌거벗고 있는 동물을 볼 때 그 벌거벗음을 죄로 여기지 않아요. 
그러나, 자기가 키우는 애완동물에게는 굳이 옷을 입히곤 하지요. 
  
처음 창조된 사람도 
그 벌거벗음이 죄와는 전혀 관계 없는 살아가는 방식 그 자체로 주어진 것입니다. 
그 상태가 처음 사람 아담에게는 더 없이 좋고 완전한 상태였을 겁니다.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좋게 창조하셨으니까요. 
  
그러나, 만약 그 벌거벗음을 사람 중심으로 창조하신 거라면, 
완전하고 가장 아름다운 상태인 그 자리에 가만히 두어야 합니다. 지금의 동물처럼 말이지요. 
  
하나님께서는 그 벌거벗음을 부끄럽게 보이게 하는 죄를 동원하셔서 
그리스도의 옷 곧 그리스도의 의 곧 그리스도로 덧입는 그 것이 '선' 이라는 것을 가르치십니다. 
다시 말하면, 그 벌거벗은 상태가 무언지를 알게 하셔서, 
두 번 다시는 그 벌거벗은 그 자리로는 돌아가지 않도록 그리스도로 덧입는 곧 그리스도 안에 하나로 연합된 그 상태를 
온 맘을 다해 정성을 다해 뜻을 다해 순전히 자발적인 마음으로 인정하고 시인하는 새 창조를 종착점으로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벌거벗은 옛 하늘과 옛 땅은 죽고, 새 옷을 입은 새 하늘과 새 땅이 새롭게 사는 것이지요. 
그래서, 히브리서 12장 2절을 보면, 
'나' 라는 죄의 짐을 예수님께서 대신 지시고 죽으셨는데, 
그 예수님께서 언약의 기둥에 벌거벗은 채로 못 박힌 것을 부끄러움으로 여기지 않으셨다고 말합니다. 

요한복음에는 예수님을 '그 말씀육신 (호 로고스 사륵스)' 이라고 이름합니다. 
거기에 따라 이야기를 이어 가겠습니다. 
  
예수님이 바로 그 벌거벗은 그 처음 상태로 그 육신이 죽으셔야 
그와 똑같이 벌거벗은 처음 상태로 죽어 있지만 자기가 죽어 있다는 것을 모르는 그 육신인 '나' 가 
죽은 것으로 여겨지는 것이고, 
그리스도, 그 옷, 그 진리, 그 말씀을 알게 하기 위해 주어진 목적이 다해 그 육신이 멀리 던져 버려진 후에는 
그 벌거벗은 처음 자리로는 두 번 다시 절대로 되돌아 갈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나'인 그 육신은 이미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것으로 '나' 가 이미 알아버렸기 때문입니다. 
어떻게요? 
'나' 가 '나' 를 죽은 것으로 인정하기까지 너무나 엄청난 고통 곧 출산의 고통을 겪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여기까지 내가 한 게 그 어느 것 하나라도 있습니까? 
벌거벗어 태어난 것도, 
자기 잘난 맛에 살아가는 것도, 
그런 내가 실상은 죽어있던 거라는 것도, 
그런 죽어있는 나를 알게 되기 까지 엄청난 고통을 받고 견디고 이겨내는 것도, 
마침내 그 벌거벗어 죽어 있는 '나' 를 그리스도 안에서 새롭게 태어난 '나' 로 되어지게 하는 것도, 
그 어느 것 하나라도 내가 한 게 아무 것도 없습니다. 

그러니까 은혜인 거고, 그러니까 사랑인 거죠. 
  
하나님의 열심으로 하나님의 긍휼로 덮어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시는 하나님의 작품입니다. 
그저 '나' 는 그 하나님을 찬송하는 아들로 그리스도 안에 가만히 서 있을 뿐입니다. 
그게 에베소서 1장에서 말하는, 하나님의 백성을 향하신 창세 전 언약입니다. 
  
그러한 하나님의 작정과 섭리와 경륜을 알아가게 되는 역사 속 '나' 는 
여전히 나밖에 모르고, 
내가 잘못 알고 입은 옷을 나 스스로 벗을 수 있다고 너스레를 떨고 있습니다. 
그런데요. 
하나님과 원수인 그런 나를 하나님은 먼저 사랑하셔서, 
하나님께서 손수 헌 옷을 찢어 발기시고 새 옷을 입혀 주십니다. 
이제는 그리스도 밖에서 벌거벗은 채로 있지 않고, 그리스도 안에서 그 말씀 그 진리를 즐거이 누릴 수 있습니다. 
그 어느 것 하나라도 내가 한 게 아무 것도 없습니다. 
  
그러니까 은혜인 거고, 그러니까 사랑인 거죠. 
  
그럼에도, 내가 나를 볼 때 여전히 죄로 인해 부끄럽게 여기는 것은, 
나만 바라보는 나에게서 돌이켜, 하나님만을 찾고 구하고 향하고 바라보게 하시는 배려인 것입니다. 
'아들아, 어디에 서 있니? 내가 여기 있다, 나만 바라봐, 나하고만 이야기해' 라는 사랑의 표시인 것입니다. 
그럴 때마다 
'아버지, 내가 여기 있습니다. 아버지를 떠나 어디로 갑니까? 나는 이제 갈 데가 없습니다.' 라고 
그냥 그 아버지와 말하시면 되요. 그게 삶인 거고, 그게 기도인 거죠. 

그래서, 빌립보서 1장 29절에서 말씀하는, 
'믿음' 과 '고난' 이 하나님의 선물이라고 진정으로 이해가 되는 것은, 
죄를 몰라 죽음을 모르는, 그래서 그 죽음이 마냥 두려워 피할려고만 하는 하나님의 백성에게 
죄의 자각으로 이끄시는 고난을 선물로 주셔서 그 죽음을 똑바로 바라볼 수 있게 이끄십니다. 
그래야만, 그 믿음에 의해 그 죽음으로 내려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믿음의 주체요 창시자이신 예수님께서 이 세상 곧 '허영의 시장 (vanity fair)' 에서 죽으신 것처럼 말이지요. 

우리 그리스도인은 그렇게 
하나님과 반대편에 서 있는 죄를 직시하게 되면 그리스도를 떠나서는 존재가 아니라는 죄인의 절규가 나오게 되고, 
죄인의 그 절규는 곧 그리스도 안에 하나된 의를 직시하게 되어 그리스도 안에 있는 의인의 존재를 바라보게 됩니다. 
다른 말로, 죄로 인해 죄인의 상태인 악을 알게 되면, 악의 심판 곧 의 안에서의 구원을 선으로 알게 됩니다. 
그러므로, 죄의 자각은 구원의 완성으로의 출발점인 것입니다. 

이제는 죄를 통해 의를 알게 되었고, 악을 통해 선을 알게 되었고, 
'나는 구원을 받았다, I am being saved' 라고 말할 수 있는 그 놀랍고 위대한 신분 앞에 
죄인도 의인도 아닌 아들로서 '나' 라는 존재는 깡그리 부인되어 지는 것입니다. 
그것을 '자기부인(self-denial)' 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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