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이신, 그 진리를 담고 오신 주님께서도 육신이라는 외투를 입고 이 땅에 오신 거예요. 내가 바로 진리다! 내가 알레떼이아야, 라고 "아이 엠 에고 에이미", 이건 신이 자기를 가리킬 때 쓰는 말이거든요.
나는 진리야! 라고 말씀하신 그분이 그 인간 언어라는 인간 아래의 말이라는 외투를 입으시고 그 진리를 흘려주셨죠? 뭘로? 아래의 말로요. 분명 그 안에는 하늘의 말인 진리가 담겨 있었어요. 그런데 아무도 그 말을 진리로 받지 못했죠? 자, 인간들의, 유한적 존재들의 한계가 폭로된 겁니다.
바울은 그 상태를 질그릇이라는 아주 적절한 예를 설명을 해준 거예요. 이 세상 모든 만물이 바로 그러한 상태로 역사에 존재를 해요. 보물이라는 내용을 담고 있는데 그 보물을 볼 수 있는, 인식할 수 있는 눈을 가진 존재가 없어요. 그들이 가진 잘못된 말, 비 진리가 그들의 눈과 귀를 가리고 있는 거예요. 그래서 인간들은 엉뚱한 것을 욕망하게 되는 거죠?
그 상태에서 그 질그릇이라는 그 땅의 세상 안에 들어 있는 그 보물,오늘 본문에서 말하는 그 보물이 드러나기 위해서는? 그 질그릇의 파괴와 부정이라는 그 극단적 방법 이외에 달리 해결책이 없어요.
그래서 진리를 품은 그 육신의 예수 있죠? 그 역사 속에서의 ‘그 예수‘, 그 예수가 언약의 기둥 위에서 질그릇으로 깨져버렸다는 거예요.
다시 살아난 건 그 질그릇이 아니라니까요. 그 안에 있는 보물이 드러난 거란 말입니다.
그걸 그리스도의 영,
진리라고 이야기하는 거예요. 예수가 율법이라는 나쁜 말이 되어서 언약의 기둥 위에서 소멸되어 버리는 거예요. 그랬더니 그 예수가 담고 있던 진리라는 내용이 그리스도의 영으로 반짝 하고 드러난 거예요.
마찬가지에요. 유한의 존재들의 그 왜곡된 관점 있죠? 무엇이든지 그냥 두 마음으로 갈라버리는 그 에피뚜미아의 그 관점은 철저한 해체와 파괴의 과정을 통과해야 되는 거예요. 그게 바로 존재의 부정이라는 거예요. 그래서 우리의 상식으로 이해했던 기독교가 진리의 말이 떨어지면서 이게 해채 되고 파괴되기 시작하는데, 이 때 사람은 굉장히 공허함? 뭐라고 얘기해야 되나? 이걸? 그 상실감을 견딜 수가 없다니까요. 내가 여태까지 믿고 있었던 거가 그럼 뭐야?? 이렇게 되는 거예요.
모든 인간들은 나면서부터 욕망으로 상징되는 그 땅의 언어, 즉 선악과 패러다임에 함몰되어 태어나요. 그러한 땅의 언어 그 욕망의 언어 비 진리에 연루된 그 유한 존재의 그 숙명적인 그 고리를 끊어버리는 그런 역정 해체와 또 궁극적인 그 영적 연합의 이 과정을 통과하지 않고는 절대로 하늘에 보물을 쌓는 자가 될 수 없는 거예요.
그 텍스트, 우리에게 주신 말씀의,
그 텍스트의 본질의 의미. 그 생명차원의 참여로써의 그 텍스트를, 그 본질을 잃어버리고 그 텍스트의 그 땅 적 표현인 뭐 무엇을 하라,
무엇을 하지 말아라, 이렇게 살아라,
저렇게 살아라,
이렇게 되어라 이런 Doing의 패러다임의 노예가 되어버린 이들은 그냥 생명을 읽은 그 박제, 그것들 안에서 그냥 관념으로써의 땅 적 보물을 계속 쌓아가고 있는 거예요. 근데 그건 생명이 없는 것들이라고요. 성경은 그러한 위험성을 여기저리에서 경고해줍니다. 대표적인 거 하나 예를 들어드릴 게요.
(왕하 18:3-4) 히스기야가 그 조상 다윗의 모든 행위와 같이 여호와 보시기에 정직히 행하여 여러 상당을 제하며 주상을 깨뜨리며 아세라 목상을 찍으며 모세가 만들었던 놋 뱀을 이스라엘 자손이 이때까지 향하여 분향하므로[예배함으로, 섬김으로] 그것을 부수고 느후스단이라 일컬었더라
하나님께서 하늘로부터 쏟아부어주셨던 하늘양식의 의미도 모르고 우린 그거 싫어요!
그랬거든요. 그게 뭔지도 몰라서 만나라고 지었고 만이
What is this 니까. 그리고 심지어 싫어하기까지 했던 그 이스라엘을 물어버린 불 뱀과 그 불 뱀의 의미를 니들이 알면 산다, 라고 달린 놋 뱀 이거를 내용으로, 텍스트, 그 텍스트의 본질로 알지 못하고 그냥 물질적인 의미의 그 기둥에 달린 놋 뱀 '그것이 우리를 예전에 살려줬다', 라는 그런 기억 그런 소문만 가지고 그걸 그냥 섬겨버렸단 말에요. 거기서 소원을 들어주세요,
병이나 고쳐주세요,이랬다는 말이 아니라. 그게 옛날에 우리 조상들을 고쳐줬대~ 죽음에서 건졌대~. 라고 소문으로 듣고 그걸 섬기는 거예요.
그게 오늘날 십자가에 달린 예수라니까요.
그냥 소문으로 듣고 그 예수가 이천 년 전에 골고다에 매달려서 인류를 살렸대,
인류의 죄를 대속했대, 라고 소문으로 듣고 그렇다면 우리도 살려주지 않을까? 라고 열심히 섬기면 그게 느후스단이라니까요. 그 불 뱀과 놋 뱀의 의미를 알지 못하고. 그러니까 우리는 바로 그 유물론적 관점의 십자가와 그 놋 뱀인 예수를 죽이란 얘기에요. 그걸 파괴하지 못하면 이 느후스단과 아무런 차이가 없는 거예요.
오늘날 우리가 믿는 예수는. 그것이 의미가 되어 내 안으로 들어와야 된다니까요. 그래야 그게 하늘 안에 쌓이는 보물이 되는 거예요. 그분이 보물이잖아요. 그리스도가 보물이라면서요? 근데 그 보물이 내 안에 들어와 있다 며요? 그럼 내가 하늘이라는 얘기 아닙니까? 주님이 지금 그렇게 얘기하고 계시잖아요. 그 이야기를 하는 거란 말에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경은 그렇게 끊임없이 그 역사 적 예수에서 벗어나라고 이야기하는데 오늘 날도 어떻게 하면 당신처럼 예수를 사랑할 수 있어요?를 묻는 사람들이 있다니까요. 아니, 그 예수를 사랑하면 안 된다니까요. 근데 이게 무슨 대단한 신앙인 것처럼 어떻게 하면 내가 예수를 더 사랑할 수 있어요? 이러고 앉아 있는 거예요, 지금. 그런 십자가는 당장 걷어 치워야 되는 거예요. 껍데기 속에 들어 있는 생명의 텍스트를 길어올려서 그것을 자기 마음으로 가질 수 있을 때 그걸 하늘에 보물을 쌓는 자라고 하는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