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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13-06-04 10:44
   (08) 놀음의 철학
 글쓴이 : njsmyrna
    조회 : 6,220  




'논다' 는 말의 명사형은 '놀음' 입니다.
'놀음' 이 '노름' 이라는 말로 쓰여지면서 그 놀음의 의미가 퇴색되어 버렸습니다.
엄밀히 말해서, 놀음과 노름은 그 시사하는 내용이 다릅니다.
놀음과 노름의 차이를 말하자면,
노름은 승부에 이기기 위해 어떠한 수단과 방법을 다 동원해서라도 그 승부에 몰두하는 것이라면,
놀음은 그야말로 그 놀이 자체를 즐기는 것입니다.

오늘날의 그리스도인들은 노는 방법을 잃어버린 것 같습니다.
대신에 모든 일을 노름처럼 하고 있습니다.
무슨 일을 하든지 거기에서 커다란 수확을 거두지 못하면 실패라고 합니다.
그래서, 자유롭지 못합니다.
기도회를 하건, 찬양을 하건, 거기서 가슴 뭉클한 은혜를 못 받으면 조바심을 내기 일쑤입니다.
 
수련회를 가서도 자신을 구원하신 하나님을 즐기기 보다는,
거기서 무언가 자신에게 도움이 되는 것을 얻기 위해 안간힘을 씁니다.
그렇게 해서 자신이 기대했던 결과가 맺혀지지 않으면, 누구를 원망해도 원망을 합니다.
그건 놀이를 잃어버린 노름의 열매입니다.

중고등학교 때 학기가 끝나갈 무렵,
진도를 부지런히 나간 선생님이 마지막 몇 시간 남는 시간을 어떻게 사용했으면 좋겟냐고 물으시면,
우리는 저마다 "놀아요" 하고 대답을 하곤 했습니다.
선생님께서 "그래, 그럼 놀아봐라" 하고 대답하시면,
우린 몇 분 안 가서 "선생님, 심심해요" 하고 야단법석을 부리곤 했습니다.

그렇게 우리는 놀음을 잃어버린 것입니다.
어떻게 잘 놀아야 할지를 모릅니다.
고작 수학여행 가서 노는 것이라고는,
친구들 자는데 얼굴에 치약 발라놓고 아침에 일어나서 그 친구가 괴로워하는 모습을 보며
깔깔거리며 박장대소했던 그런 추억밖에 놀음에 대한 기억은 없습니다.

혹시나 여학생들과 수영장에라도 가면,
싫다고 애원하는 여학생을 수영장에 빠트려 놓고 허우적대는 모습을 보며 즐거워하는
그런 유치한 놀음에 머물러 있습니다.
남을 괴롭혀서 희열을 얻는 가학적인 형태의 놀음,
과정을 즐기기 보다는
결과를 얻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그런 갬블(gamble, 노름) 같은 놀음,
저는 거기서 탈피한 참 자유인으로서의 놀음을 추구합니다.

우리는 종종 '자유' 를 '자율' 과 혼동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자율(自律)은 '스스로 법을 만들어 자기 맘대로 살고 싶으니 말리지 마라' 는 것이고,
자유(自由)는 그것과는 다른 것입니다.
자유가 제대로 보장된 민주주의 국가일수록 지켜야 할 법이 많은 법입니다.
하지만, 그 법은 그 법을 지키는 사람의 유익을 위한 것이지 속박을 위한 것이 아님을
우린 이미 알고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자유는 자기가 하고 싶은 것을 하면서 사는 것을 말하지도 않습니다.
자기가 하고 싶은 것을 마음대로 하는 것은,
오히려 그 하고 싶은 것에 자기가 속박 당하고 있는 것입니다.

자유(自由)라는 것은,
반대로 자기가 하고 싶은 것들을 놓아 버리는 것을 말합니다.
우리가 어떤 것을 너무나 하고 싶을 때, 우리는 그 일에 종속이 되어 버린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을 놓아 버렸을 때, 우리는 진정 자유할 수 있는 것입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성경이 말하는 성도의 자유,
기독자의 자유는 탐심에서 비롯된, 자기가 하고 싶은 것을 놓아버리는 자유를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참 자유는 죄에 매이지 않을 수 있는 자유,
하늘의 원리로 살아가기 위해 하나님의 편을 드는 자유를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한 자유를 이해하는 사람들의 자유로운 놀음, 그것이 제가 추구하는 놀음의 철학입니다.

우리는 제대로 놀 줄 아는 실력을 키워야 합니다.
남을 괴롭혀서 즐거움을 얻는 그런 놀음이 아닌,
승부에 매여서 무언가를 달성해 내야만 하는 갬블(gamble, 노름) 같은 놀음이 아닌,
하나님을 즐기는 놀음,
놀면서 나도 기쁘고 상대방도 기쁘고 서로 기뻐서 어쩔 줄 모르는 놀음,
한 쪽은 즐거운데 다른 한 쪽은 소외감을 느끼는 그런 놀음이 아닌
서로를 격려하며 높여주고 상대방이 기쁨으로 내가 기쁜, 그런 놀음을 배우자는 것입니다.

그것이 천국에서 우리가 벌려야 할 어린양의 혼인잔치의 모습이며,
우리는 그림자로서 그런 놀음을 연습해야 하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아직도 영지주의의 영향을 벗어나지 못하여 이원론에 머물며
교회 생활은 영적인 것이고, 가정 생활이나 직장, 사회 생활은 속된 것으로 여겨,
교회 안에서는 경건하지만, 교회 밖에만 나가면 엉망으로 살아버리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래서, 교회는 이렇게 많은데 세상은 여전히 어둡습니다.

아닙니다.
거룩한 거래가 있는가 하면, 속된 대표기도가 있다는 것을 왜 모르십니까?
거래를 하면서 자기의 유익만을 위함이 아닌,
그 거래를 통해 바르고 깨끗하며 공정함을 보여 상대방이 우리의 하나님을 궁금해 한다면
그처럼 거룩한 행위가 또 어디 있겠으며,
기도를 하고 선교를 다니면서도 자기 자랑이나 유익을 위한 행위에만 머무른다면
그 얼마나 속된 일이겠습니까?

그래서, 저는 예배당 안에서 팝송을 부르기도 합니다.
일 년에 한 번씩 하는 중국 조선족 학생들 선교를 위한 입맞춤 콘서트에서 트로트도 부릅니다.
트로트를 부르는 목사, 조금 어색하지요? 왜 그게 어색해졌나요?
우리는 더럽고 추한 자신을 감추는 위장술에 너무 익숙해져 있기 때문입니다.

저는 흥청망청한 대학 동문회 망년회에서 마치 찬물을 끼얹듯 찬송가를 부르기도 합니다.
왜 교회에서의 나의 종교 행위와 세상에서의 나의 삶이 달라야 합니까?
우리는 예배당에서 하는 만큼 세상에서도 살아내야 합니다.
세상에서 그리스도인으로서 거리낌 없이 행한 일이면, 교회에 와서도 자신있게 해 보십시오.

어디에서건, 무슨 노래를 하건,
자기 자신이 당당하게 참 그리스도인으로서 살아내고 있다면
그건 참 아름다운 놀음인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참 놀음을 잘 연습한 사람만이 표리가 동일한 삶을 살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 놀음을 이해하려면 성경을 모르고는 안 됩니다.
성경을 통해 우리에게 요구되는 수준이 어떤 것인지 제대로 알아야 하고,
그 하늘의 풍성함이 어떤 것인지를 알아야,
우리는 그 그림자로서의 이 땅에서의 천국 잔치를 신명 나게 놀 수 있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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