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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13-06-02 14:33
   (06) 물질과 공간 속에 숨어 있는 가련한 죄인들
 글쓴이 : njsmyrna
    조회 : 8,357  




우리는 시간과 공간이라는 두 영역 속에서 살아갑니다.
공간은 감지가 가능할 뿐 아니라 눈에 보이는 물질로 채워져 있습니다.

반면에 시간이라는 영역은
우리가 감지할 수도 없을 뿐더러 눈으로 볼 수도 없습니다.
게다가 시간이 흐르면 흐를수록 물질을 낡게 하고, 늙게 하며, 썩게 합니다.
그리고, 결국에는 죽음으로 몰고 가지요.
그것이 우리 우매한 인간들이 인식하고 있는 시간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모두 은연 중에 시간을 두려워 합니다.
시간을 두려워 하는 인간들은 당연히 공간과 물질 속으로 숨게 됩니다.
시간에 의해 두려워진 마음을 공간과 물질로 달래는 것입니다.

돈을 많이 모으고, 멋진 집을 사고 싶어 합니다.
그 안에 불안한 자신을 숨기기 위함입니다.
자신의 외모를 아릅답게 가꾸어 보기도 하고,
남들은 쳐다 보지 못할 값비싼 것들로 자신을 치장하기도 합니다.
최선을 다해 공부를 하고 몸이 부서져라 일을 합니다.
그도 물론 자신이 숨을 공간과 물질을 확보하기 위함입니다.
시간을 두려워 하는 이들의 전형적인 모습입니다.

그러나, 인간의 역사는 그러한 공간과 물질의 영역에서
공간과 물질만으로 자신의 행복을 찾았다고 하는 사람을 한 사람도 내어놓지 못하고 있습니다.
당연합니다.
인간의 복은 공간과 물질의 영역이 아닌 시간의 영역 안에 흐르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천지를 창조하시고, 하나님의 백성인 인간과 일곱째 '날'에 공히 복을 부으셨습니다.
사람과 시간에다가 동일한 하나님의 복을 부으신 것입니다.
그 말은 하나님의 창조의 목적에 맞게 지어진 인간,
즉 하나님의 백성은 시간 속에서만 하나님이 주신 행복을 느낄 수 있다는 의미를 담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날' 이라는 시간에 복을 부으시고, 그 '날' 이라는 시간을 거룩하다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니까 시간 속에 복되고 거룩한 어떠한 것이 감지 될 수 있다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바로 그 시간의 영역 속에 존재하십니다.
그래서, 물질과 공간의 영역 속에서는 그 분이 보이질 않는 것입니다.
 
따라서,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되어 이 물질과 공간의 영역 속에서도 행복을 느낄 수 있는 사람들은
당연히 시간의 영역에 대해 고민하고 공부하고 깨닫고 인식한 사람들이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 인간의 행복은 하나님과 하나님 나라를 알고 소망하는 것에서만 가능한 것이기 때문이지요.
 
그런데, 그 하나님과 하나님 나라는
이 공간과 물질의 영역이 아닌 시간의 영역에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그의 편지인 로마서에서
'또한 너희가 이 시기를 알거니와 자다가 깰 때가 벌써 되었으니' 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시기와 때' 가 바로 '카이로스', '호라' 곧 '시간' 입니다.
바울은 시간의 영역을 모르고 물질과 공간의 세계에만 집착하고 있는 자들을 '잠자는 자' 라고 부르고,
시간의 영역을 깨닫고 시간의 영역에서의 삶을 추구하는 자들을 '깨어있는 자' 라고 일컫습니다.
바울은 성도들에게
'제발 이 소멸될 물질과 공간의 영역 속에 갇혀서 엉뚱한 허비를 하지 말고,
눈을 들어 시간의 영역을 바라보라' 고 간곡히 권고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 눈에 보이는 이 물질과 공간은 시간의 영역에서
배태(胚胎, 어떤 현상이 일어나거나 사물이 발생할 원인을 속으로 가짐) 되어 탄생된 것들입니다.
그래서, 히브리서는 '보이는 것은 나타난 것으로 말미암은 것이 아니라' 고 말하는 것입니다.

이 땅의 모든 보이는 것들은 보이지 않는 시간이 창조해 놓은 것들인 것입니다.
그래서, 창세기 1장 1절에서도 천지의 창조 이전에 '태초에' '레쉬트' 라는 단어가 등장하는 것입니다.
히브리어 '레쉬트' 는 '시간이 창조되었을 때에' 라는 의미입니다.
즉 시간이이라는 것은 어떠한 목적을 위해 보이지 않는 세계에 의해 보이는 것들이
창조되는 것임을 제한된 이성을 갖고 있는 인간들에게 가르치기 위해
어떠한 것의 모형으로 창조가 된 것입니다.

그렇다면, 시간이라는 것은 도대체 무엇일까요?
우리가 성경을 통해 알다시피,
영원에서 튕겨져 나온 이 물질 세계의 모든 것은 하늘의 것들을 그림자처럼 닮아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창조하셨습니다.

창세기 1장 1절의 말씀 '태초에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셨다' 는 말씀을 기억하시나요?
우리말 개역성경에서 '천지' 라고 번역이 된 히브리어 원어는 원래 '하늘들과 땅' 입니다.
하나님께서 태초에, 그러니까 시간이 창조된 그 때에
우리가 보는 대기권의 하늘과 우주와 하나님이 거하실 천국의 하늘을 그 때 만드셨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천국을 원형으로 하여 땅을 창조하신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 땅에는 천국의 모형이 그득한 것입니다.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지어졌고,
에덴 동산도 하나님 나라의 성전을 그림자처럼 담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시간은 하늘의 어떤 것을 원형으로 하고 있는 걸까요?
바로 '영원' 이라는 것을 제한된 물질세계 속에서 그리고 있는 것이 시간이 것입니다.
시간은 그렇게 영원을 담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바로 우리가 시간이라고 부르는 영원 속에 존재하시는 것이고,
하나님 나라도 바로 그 영원 속에 존재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영원에서 물질과 공간이
어떠한 목적과 계획을 지니고 잠시 이 우주를 이루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 성도가
물질과 공간에 갇혀 물질과 공간 안에서의 삶만을 추구하며 살지 않고,
시간을 산다는 것은 무슨 의미일까요?
사도 바울을 비롯한 많은 신앙의 선배들이
우리 성도들에게 권고하는 시간의 삶이라는 것이 무엇입니까?

잘 생각해 보세요.
우리가 '시간이 지나간다' 라고 말을 하지만, 정말 시간이 지나가는 것입니까?
시간이 지나간 다음에 우리에게 남는 '기억' 이라는 것을 한 번 더듬어 보세요.
시간은 지나간 것이 아니라
그 시각에 일어난 어떠한 사건들과 영원한 현재로 남아 있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골고다의 십자가는 시간을 따라 썩어지고 사라진 것이 아니라
영원한 현재로 그 자리에 서 있는 것입니다.
이 땅의 시간 속에서 일어나는 모든 사건들은 전부 현재로 남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예수의 십자가는
지나가 버린 과거의 십자가가 아닌 오늘도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유효하게 되는 것입니다.

내가 저지른 파렴치한 일들, 잊고 싶은 추악한 사건들,
그 모든 것들은 시간 속에서 현재의 영원한 존재로 남아 있습니다.
그것을 우리는 기억이라 부르지만,
바로 그것이 시간과 시간 속에 담겨 있는 우리의 '현재' 인 것입니다.

그래서, 그렇게 시간 속에 담겨 있는 우리의 현재들이
마지막 날 하나님 앞에 심판 거리로 모드 드러나게 되는 것이지요.
이렇게 우리의 모든 행위들은 일 분 일 초, 아니 매 순간 시간 속에 담기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시간을 잘 살아야 하는 존재인 것입니다.

그런데, 그 시산이 두렵고 귀찮아 공간과 물질 속에 숨고자 하는 이들은
시간을 살지 못하고 오로지 공간과 물질에 얽매여
시간 속에 담기게 될 자신의 행위를 챙기지 못하게 되는 것입니다.
남이야 어떻게 되든 말든 나의 유익만 챙기면 된다는 식의 사고방식을 가진 사람은,
자신이 얻고자 하는 공간과 물질 속에서의 풍요는 얻을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그의 시간 속에 새겨진 그 자신의 행위는 영원히 지워지지 않는 추악한 존재로 남게 되는 것입니다.

아무리 잘 생기고 예쁜 사람이라 할지라도
시간 속에 새겨진 그의 행위가 어둡고 더러운 것이라면,
그 역시 공간과 물질 속으로 숨기에 바빴던 죄인일 뿐입니다.

이렇게 우리 성도는 시간을 살아야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은혜를 입은 신앙의 선배들은 '시간' 이 무엇인지,
시간을 어떻게 살아야 하는 지를 가르쳐 달라고 하나님께 매달렸던 것입니다.
모세가 그랬고, 바울이 그랬으며, 어거스틴이 그랬고,
제임스 보이스 목사님과 로이드 존스 목사님이 그러한 기도를 올렸던 대표적인 사람들입니다.

모세가 시편 90편에서
'하나님 우리에게 우리 날 계수함을 가르치사 지혜의 마음을 얻게 하소서' 라고
기도한 것을 기억하시나요?
모세가 거기서 말한 '날', '욤' 은 '시간' 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계수하다' 라고 번역이 된 '마나' 라는 히브리 동사는 '수를 세다' 라는 뜻과 함께
'예비하다' 라는 뜻을 담고 있는 단어입니다.
모세는 시간이라는 것을 하나님의 뜻에 맞게 잘 예비하고, 아끼고 세면서 살 수 있기를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한 것입니다.

또한 위대한 사도 바울도
성도들에게 제발 시간을 잘 살아내라고 안타깝게 권고를 하는 것을 여기저기서 볼 수 있습니다.
그 대표적인 곳이 서두에 언급했던 로마서 13장입니다.
'또한 너희가 이 시기를 알거니와 자다가 깨 때가 되었으니'
이 구절을 이해하기 쉽게 잘 번역을 하면 이렇습니다.
'여러분은 지금이 어느 때인지를 알아야 합니다.
잠자고 있는 여러분은 깨어나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시간입니다.'

바울은 로마 교회의 성도들에게 '사랑하라' 는 하나님의 대강령을 전달하면서
'너희가 그 사랑의 삶을 살기 위해서는 시간을 잘 살아내야 한다' 라고 설명을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어지는 수많은 도덕적 윤리적 권고들을 보십시오.
시간을 살아낼 준비가 되어 있는 자들에게만 가능한 목록들입니다.

십계명에서도 '살인하지 말라' '간음하지 말라' '도둑질하지 말라' '부모를 공경해라' 라는
계명의 맨 앞에 '안식일을 지키라' 는 명령이 나오지 않습니까?
안식일은 당시 사람들이 '시간의 지성소' 라고 생각했던 그런 날이었습니다.
하나님은 그들의 그런 지적 배경을 들어서 십계명을 주시는 것입니다.

'너희가 살인하지 않고, 간음하지 않고, 도둑질하지 않고, 부모를 공경하고,
네 이웃의 것을 탐내지 않기 위해서는 시간을 사는 방법을 알아야 한다' 는 것을 가르치기 위해
그 모든 계명의 맨 앞에 안식일이라는 '시간' 을 거명 하시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지금 시간을 살고 계십니까?
아니면 언젠가 하나님 앞에 낱낱이 까발려질 시간을 사는 대신에
공간과 물질 속에 열심히 숨고 계십니까?
공간과 물질 속에 열심히 숨고 있는 사람들은
자신의 거하는 공간에 자신이 원하는 만큼의 물질이 채워지지 않을 때 견딜 수 없는 고통을 겪게 됩니다.
공간과 물질을 열심히 추구하는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에게 보여지고 만져지는 물질이 자신을 충분히 화려하게 가려주지 못할 때
조바심을 내고 속상해 합니다.

그러나, 시간을 사는 사람들은 공간과 물질에 연연해 하지 않습니다.
공간과 물질은 시간을 사는 사람들에게는 생존에 필요한 부수적인 것들에 지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최소한 살아있을 만큼의 공간과 물질이면 어떠한 상황 속에서도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다' 는 고백을 합니다.

남들이 보기에는 곧 굶어죽을 것 같은 구질구질한 삶 속에서도
그들은 하나님이 보실 나의 현재의 시간들을 거룩하게 채우는 것에 매진하고 있기에
그 일이 제대로 진행되고만 있으면 어떠한 상황과 사건도
자신에게는 부족함이 없는 하나님의 섭리로 받아들여지게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은 물질과 공간을 설명용 모델로 사용하셔서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영원을 설명하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시간을 추구하도록 하는 것이 성도를 향한 하나님의 뜻임에도 불구하고
물질과 공간의 세계에서의 만사형통을 기독교의 목적지인 냥 가르치는 이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성도들에게 이 물질과 공간의 영역 속에서 일등이 되라고 가르칩니다.
하나님께 치성을 드리고 잘 만 보이면
그 분은 이 물질과 공간의 영역 속에서 우리 성도들을 폼나게 만들어 주신다는 것이지요.
그들은 성도들을 이 세상의 죄악이 만들어 놓은 경쟁구도 속으로 다시 몰아넣는 것입니다.

물질과 공간은 영원을 설명하기 위한 무대 세트일 뿐입니다.
그럼에도, 시간의 삶에는 전혀 관심을 두지 않고 이 역사의 드라마가 끝나게 되면
모두 철거가 되어버릴 무대세트에 금칠을 하고 있는 이들을,
우리는 그리스도인이라 부를 수 없습니다.

여러분, 기독교의 천국은 헬라철학의 이원론처럼 공간적 개념이 아닙니다.
기독교의 천국은 시간적 개념으로 애햐가 되어져야 합니다.
지금 여러분의 시간이 천국의 것들로 채워지고 있지 못하다면,
여러분은 절대 공간적으로 여러분이 만족할 만한 그런 낙원에 이룰 수가 없습니다.

맛 좋은 냉면을 맛 본 적이 없는 아마존 밀림 속의 어떤 원주민에게
냉면의 시원함을 설명할 수 있을까요?
그리고, 그렇게 냉면을 한 번도 먹어 본 적이 없는 이들이
과연 냉면을 먹고 싶은 욕망을 가질 수 있겠습니까?

여러분이 바로 지금 이 곳에서 영원히 현재로 남아
여러분의 영원 속에 각인인 될 시간을 사셔야 합니다.
뼈를 깎는 고통 속에서도 우리 오늘부터 그렇게 '시간' 을 살아 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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