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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13-06-02 14:31
   (04) 양복 입은 무당들
 글쓴이 : njsmyrna
    조회 : 6,947  




무당이 굿을 합니다. 신명나게 한 판 노네요.
걸쭉한 목소리로 호령합니다.
정성이 부족하다고, 정성이 부족하면 복을 받지 못한다고,
사람들은 복을 받기 위해 연신 돼지 머리에 퍼런 돈 다발을 안깁니다.
그러고는 손바닥이 아려올 때까지 열심히 빕니다.
무당은 자기에게 강림한 신의 목소리를 흉내 냅니다.

사람들은 더욱 신기해합니다.
행여 신이 땡강이라도 부릴까 봐 돼지 머리에 정성을 더하고, 이제 허리까지 요동을 치며 빕니다.
다른 소리에 잡 생각이 들까봐 소리를 크게 내어 기도를 올립니다.

무당은 열이 올랐습니다.
무당은 이 시점에서 맹한 구복자들에게 최후의 일격을 가합니다.
날이 시퍼런 작두를 펼칩니다.
그 작두 날 위에 머리카락을 한 올 올려봅니다.
머리카락은 서늘하게 두 동강이가 나고, 사람들의 마음은 더욱 주눅이 듭니다.

그 때 무당은 맨발로 그 작두 위를 걷습니다.
심지어 그 날 선 작두 위에서 덩실 덩실 춤도 춥니다.
이제 그 곳에 모인 불쌍한 중생들은
그 작두 위에 선 무당과 그 위에 강림했다는 귀신에게 꼼짝을 못하게 됩니다.
이제 그들은 자신들이 원하는 복을 위해서 무당의 종이 되는 것입니다.

예배당 앞 강단에 어떤 이가 섰습니다.
탁자를 치며 목소리를 높여 무언가를 외칩니다.
때때로 노래도 불러줍니다. 우스갯소리로 웃겨주기도 합니다.
신명나게 한 판 놉니다.

그의 이야기는 언제나 복 이야기로 마무리합니다.
그리고는 자신이 이야기하는 복을 얻기 위해서는 정성이 필요하다고 협박합니다.
헌금이 부족하다, 봉사가 부족하다, 기도가 부족하다.
사람들은 복을 받기 위해 열심히 헌금을 합니다.
자기가 한 만큼 몇 배로 돌려받을 수 있다는 그 강대 상 앞의 무당의 말을
철썩 같이 믿고 있기 때문입니다.

열심히 기도도 합니다.
오로지 자신에게 떨어질 복에 관해서만 기도를 합니다.
다른 잡 생각이 들까봐 큰 소리를 내어 자신의 귀에 자신의 목소리만 들리도록 기도합니다.
행여 다른 이보다 목소리가 작으면 정성이 부족하다 신이 노하실까봐 목소리를 높여야 합니다.

무당이 작두를 타듯
강대상 앞에 또 다른 무당은 가끔씩 사람들을 쓰러 뜨려 보이기도 합니다.
때로는 거품을 물고 쓰러지게도 합니다.
은 이빨을 금 이빨로 바꿀 수 있다고 너스레도 떱니다.
자기 말만 잘 들으면,
모든 소원이 이루어지고 모든 일이 만사형통으로 풀릴 거라 반복해서 외칩니다.
삶을 긍정적으로 생각하고 자신을 사랑하라는 추임새를 넣습니다.
사람들은 이제 그 강대 상 앞의 또 다른 무당에게 자신들의 정신을 빼앗깁니다.

거기에 십자가에서 죄인들의 죄를 짊어지고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는 없습니다.
그들도 예수의 이름을 부릅니다.
그러나, 그들이 부르는 예수는 복만 내려주면 되는 그런 예수입니다.
자신들에게 복만 내려준다면, 그는 예수여도 좋고 몽달귀신이어도 상관없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얼마나 추악한 죄 덩어리인지 전혀 모릅니다.
아니, 알고 싶어 하지도 않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그 무서운 지옥에서 구원을 받기 위해서는
예수 그리스도가 이 땅에 내려오셔서 인간의 몸을 입으시고 죽을 수밖에 없었다는 사실이
그다지 감동적이지 않습니다.

비록 이 세상의 복이 자기에게 주어지지 않더라도 보이지 않는 하나님 나라를 소망하며,
자신의 삶 속에서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소망하는 믿음을 가진 자들을 찾아보기가 힘이 듭니다.
그렇게 소란스러운 예배당 안에서의 굿판은 주일인 오늘도 여기저기서 신명나게 벌어지고 있습니다.
양복에 넥타이까지 맨 무당들의 부소리에 맞추어 ...

이렇듯 예수의 이름을 걸고 풍요의 신 바알을 전도하고 있는 바알의 전도자들이 득세를 하고 있는 것은,
하나님의 도움으로 성공하고 싶어 애를 태우는 청중들과
그러한 청중들의 속마음을 꽤뚫고 있는 설교자들의 '악어와 악어새' 같은 공생 관계가
죄 성 속에서 견고하게 구축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한 바알의 전도자들이 가장 좋아하는 성경 인물이 '요셉' 입니다.
비전을 품고, 긍적적 사고로, 그 비전을 향해 매진하여 꿈을 이루어낸 요셉 말입니다.

우리는 이 역사를 인간의 꿈이 성취되어 생산해 낸 인간의 발자취로 보고 싶어 합니다.
인류의 역사는 하나님의 꿈이 실현되어 가는 장이지,
인간의 꿈이 성취되어 널리 인간을 이롭게 하는 홍익인간의 발전 과정이 아닙니다.

우리는 요셉의 이야기 속에서도 우리 인간의 계획과 의도를 뛰어넘어 활동하시는
하나님의 구원 활동을 발견해 내야 하는 것이지,
요셉의 위대함을 부러워하고 본받아 요셉과 같은 풍요로운 인간 세상의 복을 받아내야겠다는
절치부심(切齒腐心 대단히 분하게 여기고 마음을 썩임)을 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7 년 간 풍년이 들었을 때, 요셉은 곧 흉년이 닥칠 것을 알았습니다.
그는 그 정보를 가지고 혼자 흉년에 돈을 벌 수 있는 계획을 세웠습니다.
신앙관은 차치(且置)하고라도, 올바른 도덕성을 가진 사람이라면,
요셉은 이집트 백성들이 흉년에 미리 대비하도록 정책을 수립하고 준비를 했어야 했습니다.
그러나, 요셉은 일인지하 만인지상의 자리를 얻기 위해 바로(Pharaoh) 한 사람을 부자로 만드는
잔머리를 쓴 것입니다.

요즘 간혹 뉴스의 화제가 되고 있는, 자신들의 지위를 이용해서 얻은 고급정보로
부동산 투기나 주식 투자를 하는 관리들과 요셉이 뭐가 다릅니까?
그는 요즘 말로 표현하면 매점매석하는 악덕기업가 정도밖에 안 되는 사람입니다.

게다가 그는 '사브낫 바네아' 라는 이집트 이름으로 창씨개명까지 했던 사람이지요.
그는 이방인과 결혼을 해서는 안 되는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이집트의 제사장 보디베라의 사위가 되었습니다.
 
도대체 어떤 점에서 요셉을 본받자는 말입니까?

이러한 집단 최면 현상은 목회(牧會)적 효율성을 재고하기 위해
요셉이 하나님의 도움으로 이집트의 총리가 되었다는 사실만 부각하려는 바알의 전도자들이 만들어 낸
'성공과 출세가 곧 선이다' 라는 말도 안 되는 등식의 주입에 근거한 것입니다.
정말 우리는 예수의 이름만 들이밀면 천민자본주의도 괜찮은 것입니까?

독일의 사회과학자 M. 베버는 근대 자본주의의 특징인 합리성과 시민정신을 결여한 낡은 자본주의를
'천민자본주의(Pariakapitalismus)' 라고 명명 했었습니다.
'paria' 는 '천민' 이라는 의미의 'pariavolk' 에서 따온 것이지요.
베버는 자신들을 'pariavolk' 로 비하하면서까지 제도권에 기생해 온 유대인들이
오로지 돈벌이에만 매달려 열등감을 씻으려했던 것에 착안하여 그런 용어를 만들어냈지만,
오늘날 'Pariakapitalismus' 는 물질적 가치관을 우선하여 정신적 가치관을 짓밟는 금전만능주의를
비웃는 용도로 쓰입니다.

천하다는 게 무엇입니까?
흔히 '천민(賤民)' 을 '천박한 사람' 쯤으로 알고 있지만 천만의 말씀.
천박(賤薄)은 '학문이나 생각이 얕고(淺) 엷은(薄) 것' 을 뜻하는 반면,
'천민(賤民)' 은 '가진 게 돈밖에 없는 놈' 을 말합니다.
돈을 상징하는 조개 패(貝)와 창 과(戈) 두 개가 겹친 쌓일 전(戔)이 붙은 천할 천(賤)의 본래 의미는
'작은 토막' 또는 '값이 싸다' 입니다.

전쟁이 끝나 쓸모없어진 창들을 쌓아놓고 팔아봤자 제값 못 받는 건 당연하여
그런 의미가 생겨났을 것으로 짐작되지만,
전(戔)은 '남은 것' 이라는 의미로도 쓰이므로 '돈(貝) 밖에 남은(戔) 게 없다' 는 뜻도 됩니다.

요즘 '가진 게 돈 밖에 없다' 고 폼 잡는 사람들이 많지요?
그것은 '나 천민이야' 라는 고백에 지나지 않는 바,
그것도 모르고 돈 자랑하는 꼴이야말로 기관이라고 하겠습니다.

살벌한 현실 속에서 늘 생존의 불안을 느끼는 사람들이
요셉의 이야기를 통해 대리만족을 느끼기 원한다는 것은 저도 십분 이해를 합니다.
그러나, 생명의 본질에 천착(穿鑿)해야 할 설교자들이
복음을 노골적으로 거인문화와 맘모니즘과 소유지향성 세태와 성공주의와 일치시켜
청중의 비위를 맞춘다는 것은,
참 생명과 가치를 전혀 알지 못하는 행태라 아니할 수 없습니다.

설교자는 바알 숭배 사상과 성공 신화 이데올로기로 청중의 비위를 맞추어
자신의 세력을 늘리려는 의도에서, 자신의 인식론적 정직성을 포기해서는 안됩니다.
성경의 내용이 지식에서만 머물러 있어서는 안됩니다.
지식은 하나의 정보에 불과합니다.
성경이 지식으로 끝나면 아무리 박사 아니라 박사 할아버지를 지니고 있다 해도
복음을 제대로 설명해 낼 수가 없을 뿐 아니라
억지 견강부회(牽强附會 이치에 맞지 않는 말을 억지로 끌어 붙여 자기 주장의 조건에 맞도록 함)로
사람들을 지옥으로 몰아가고 있는 좀비(Zombie) 같은 일을 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이러한 복음의 기복화와 말씀의 도구화는 목회자들의 세상적 욕심에 기인한 것입니다.
그것은 순진하고 순종적이라고 표현이 되는 어리석고 우매한 청중들의 책임인 것입니다.

여러분이 공부하셔야 합니다.
그리고, 여러분이 판단하실 수 있어야 합니다.
공부하십시요.

그렇게 과거 지향적 복고주의와 역사적 불안으로부터의 도피를 이야기하는 자들이 있거든
가차 없이 분별해 내셔야 합니다.
언제까지 양복 입은 무당들 앞에서 박수와 환호를 보내고 있을 작정입니까?

'십자가 지고 걸어가는 예수의 등 뒤엔
영원히 죽어야 하는 죄인들에게 부어질 은혜가
저리도 애절하게 흐르고 있는데
사람들 외면한 체 어디를 그렇게 바라보나

눈에 보이는 지금 손에 잡히는 화려한 세상 바라보며
언제까지나 이곳에 남아서 살 수 있을 것 같지만
눈가에 깊게 패인 주름이 오늘도 서러워라

보이지 않는 하늘나라 내 눈에 보이기에
지금의 내 모습 어떠해도 난 두렵지 않아
이 땅의 삶이 끝나는 날 갈 곳이 있기에
풍요한 삶에도 빈곤해도 난 행복하게 산다오.

저기 하늘에 두 팔을 벌리신 내 아버지의 따뜻한 품
지금이라도 그 품에 안겨 이제 그만 쉬고 싶은데
그 날을 그리며 오늘을 힘껏 달려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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