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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13-06-02 14:30
   (03) 이 복에 환장한 기독교인들아
 글쓴이 : njsmyrna
    조회 : 8,686  




인간은 처음부터 전적인 하나님 의존으로 창조되었습니다.
그런 인간이 선악과를 따 먹은 후
'난 더 이상 하나님께 의존하는 존재가 아닌 하나님처럼 되고 싶어' 라고 선언하며
하나님을 하나님의 자리에서 직위 해제시켜 버렸습니다.
그 후로 인간들은
인간의 영혼에 부어지는 하나님의 생명력인 '복', 히브리말로 '바라크' 를 상실해 버렸고,
채워지지 않는 그 '복' 의 자리를 스스로 채우려는 시도들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다른 이들의 자원을 빼앗아 그 공허함을 채우려고 시도했고,
교육과 훈련과 수도를 통해서 그 빈자리를 메워 보려 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그 공허함은 채워지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인간은 원래 독립적인 존재가 아닌 하나님 의존적인 존재로 창조되었기 때문에
누군가에게 의존하려는 종교심이라는 것이 본능적으로 잠재해 있습니다.
죄인의 표상으로 불리우는 가인이 제사를 드린 것을 보면 알 수 있지요?
그렇게, 스스로 자기를 보호하겠다는 인간의 교만과 종교심이 혼합되어 만들어 진 것이
바로 '샤머니즘(Shamonism)' 이라는 것입니다.

이 세상의 중심이 되어 버린 '나' 가 가슴 한 쪽의 비어 있는 곳을 채우고 행복하게 살아야겠는데
'나' 자신에게는 그 자리를 채워 줄 힘이 충분하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된 인간은,
알지 못하는 어떤 힘 있는 존재의 능력을 빌려 자신을 보호하고 스스로의 행복을 채우려는
시도들을 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자신을 도와줄 힘 있는 존재와 자신 사이를 중재해 줄 어떤 존재가 필요했습니다.
 
그게 바로 '샤먼(Shamon)' 입니다. 우리 말로는 '무당' 이라고 하지요.
그 샤먼은 직접 신과 접촉을 하고 교류를 해서 신의 뜻을 전달하기도 했고,
인간의 정성을 신에게 전달하기도 하며, 신의 도움을 빌어 병을 낫게도 하고,
예언도 하기도 하는 존재입니다.

이러한 '샤머니즘' 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처럼
고대시대나 시베리아, 아프리카의 오지 같은 곳에만 있던 것이 아닙니다.
우주의 중심인 '나' 가 어떤 중재자의 도움을 받아,
어떤 힘 있는 존재로부터 복을 얻어내는 것을 내용으로 하는 이 '샤머니즘' 은
타락한 모든 인간의 내면(內面) 속에 잠재해 있는 죄의 뿌리인 것입니다.

그래서, 아무리 무식하고 잔인한 밀림 속의 부족들에게도 모두 '종교' 라는 것이 있는 것입니다.
'샤머니즘' 에서는 자기다 도움을 청하고 있는 '신' 의 정체에 대해서는 사실 별로 관심이 없습니다.
어떻게 해서든지 그 힘센 신을 달래서 자기가 원하는 것을 성취하고 '복' 만 받아내면 그만입니다.

오로지 현세의 '복' 이 목적인 것이지요.
그 샤머니즘은 인류의 죄가 존재하는 한 인간에게서 떠나지 않고 존재하게 됩니다.
그래서, 그 샤머니즘은 인간의 모든 종교를 먹어 버립니다.

그렇게 모든 인류가 본능적으로 추구하고 있는 샤머니즘 속으로 불교가 들어왔습니다.
원래 불교는 '무아(無我)와 몰아(沒我)' '색즉시공(色卽是空), 공즉시색(空卽是色)' 을 깨닫고
해탈(解脫)을 하는 종교입니다.
이 땅의 모든 것들은 단지 'Illusion(환상)' 일 뿐이라는 것이지요.
그러니까 자신의 육신을 비롯한 이 땅의 것들에서 자유롭게 되는 깨달음을 얻는 것이 불교입니다.
그렇게 깨달음을 얻은 자들을 불교에서는 '부처' 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불교가 샤머니즘과 섞이게 됩니다.
'샤머니즘' 은 인간 죄악의 뿌리이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복에 대한 추구는 하나님께서 다시 부어주시기 전에는 절대 없어지지 않습니다.
그래서, 아무리 훌륭한 고등종교가 들어와도 인간 내면에 여전히 뿌리깊이 존재하고 있는
'샤머니즘' 위에 얹히게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불교가 샤머니즘과 섞이게 되면,
'몰아와 무아, 색증시공 공즉시색' 의 깨달음을 추구해야 하는 절에서 중이 점을 쳐줍니다.
나중에 커서 부귀영화, 입신양명 하여 잘 살라고 이름도 지어줍니다.
복 받는 방법으로 연등도 팔아 먹습니다.
복 받는 방법으로 절간의 기와도 팔아 먹습니다.
절에 소원을 들어주는 '칠월성군, 북두칠성' 을 모신 '칠성당' 이 들어서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대웅전이나 명부전은 한산한데,
유독 사업이나 자식들에 대한 소원을 비는 '삼성(參星)각' 에만 사람들이 바글바글합니다.

잘 생각해 보세요.
불교는 이 땅의 것들이 모두 'Illusion' 불교 용어로 '황' 헛 것이라는 것을 깨닫고
훌훌 털어 버리는 종교입니다.
그런데, 오늘날의 불교는 석가모니의 불력을 빌어 '나' 가 색에 속한 것들을 풍성히 얻어
잘 먹고 잘 살게 되는 잡탕 종교가 되어 버렸습니다.

오늘날의 불교는 '색즉시공 공즉시색' 이 아닙니다.
'색(色) = 모든 것' 이 오늘날의 불교가 되었습니다. 아닙니까?
그래서, 고승들이 죽으면 제자들이 나무젓가락 들고 '사리' 를 찾는 것입니다.
스승은 '모든 것이 황이다' 라는 것을 깨닫기 위해 정진하다 갔는데
제자들은 그 '없음' 을 추구하던 사람의 몸속에서 '있음' 을 찾는 것입니다.

여러분, 불교에 '찬불가' 가 있다는 것 아세요?
우리 기독교에 '찬송가' 가 있듯이 불교에서도 '찬불가' 가 있습니다.
'찬송가' 라는 것은 전적인 타력 종교인 기독교에서
'영원히 타락하고 무기력한 나를 도와주신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 이 '찬송가' 입니다.
그런데, 스스로 수도를 해서 해탈을 목적으로 하는 전적인 자력 종교인 불교에
부처님께 감사를 드리는 '찬불가' 가 있습니다.

부처는 앞으로 나올 많은 부처의 본보기일 뿐이지,
다른 이들이 부처가 되는 데에 도움을 주는 존재가 아닙니다.
그런데, 그러한 불교에서 '고마우신 부처님, 복 주시는 부처님' 이라는 찬불가를 부릅니다.
이건 완전히 코미디죠.
불교가 뭔지도 모르는 사람들이 불교를 믿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인간들의 목적은 부처가 되는 것에 있는 것이 아니라
오로지 이 현세에서의 복에만 관심이 있는 것입니다.

오죽하면 휴암 스님이라는 분이 '한국 불교의 세 얼굴' 이란 책에서
'이 복에 환장한 불교인들아,
너희 스승은 너희들이 구하는 왕궁을 버리고 진리를 찾아 고행의 길을 갔는데
너희는 지금 그 스승에게서 무엇을 구하고 있느냐?
오늘의 이 병든 복 사상에 저항하다가
설사 불교 신자가 천삼백 만에서 백 삼십 명으로 줄어들지라도
이 타락한 불교의 기복주의는 깨어져야 한다.
이 복에 환장한 불교인들아' 라는 글을 썼겠습니까?

이것은 불교의 무당화를 안타깝게 호소하고 있는 글입니다.
그 분은 그의 글에서 '내 조국 이 대한민국에 과연 불교가 존재하기는 하는가?' 라고
안타까운 결론을 맺으셨습니다.
불교의 외면적 형태는 남아있습니다.
예불도 하고, 수도도 하고, 보시도 하는데 정작 진짜 불교는 사라졌다는 것입니다.

샤머니즘 위에 유교가 들어와 얹혔을 때는 어떤 일이 일어났습니까?
유교의 핵심은 '군사부일체(君師父一體)' 같은 '상하 질서(秩序)' '예의(禮義)' 입니다.
그래서, 내가 예의로 섬겨야 하는 분이 돌아가시면 '제사' 를 지내어
그 대상이 죽은 뒤에도 '예의(禮義)' 를 표하는 것이 유교입니다.

그런데, 유교가 샤머니즘에 얹히면서 '제사' 가 마치 죽은 조상의 도움으로
'액운' 을 면하게 해주고 '복' 을 받게 해주는 의식이 되어 버렸습니다.
그래서, '제사' 를 지내는 이유가 '제사를 안 지내면 조상의 귀신이 삐져서 복을 안 줄까 봐' 입니다.

아닙니다. 유교의 제사는 죽은 조상이 주는 복과는 아무 상관없이
후손으로서 조상에 대한 예의를 갖추는 것이 제사입니다.
그런데, 유교가 샤머니즘과 섞이면서 제사도 '복' 을 받는 하나의 방법이 되어 버린 것입니다.

왜 조선의 초기 기독교 교회에서 순교자가 그렇게 많이 나왔는지 아세요?
예수를 믿는 사람들이 '제사' 를 거부해서 식구들이 내쳤기 때문입니다.
'저놈이 예수 믿고 제사를 안 지내면 나까지 조상들에게 봉변 당할까 봐'
일가 종친들이 고발한 것입니다.

급기야는 유학을 공부한 선비들이
조상의 복을 더 받기 위해 '묘자리' '명당자리' 를 찾아 나서기 시작했습니다.
'명당자리' 를 써야 후손이 복을 받고 그 후손 중에 큰 사람이 나온다는 것이지요.
명당을 써서 조상의 묘를 이장하면 후손이 복을 받는다는 집념은
조상의 시신이 훼손이 되건 말건 자신들의 복을 위해 조상의 시신을 이리저리 굴립니다.

거기에 충효와 예절이 있습니까?
이건 원래 유교가 아닙니다. 유교 역시 잡교가 되어 버린 것입니다.
역시 제사도 지내고 예절도 갖추고 하는 유교의 외면적 형태는 남아 있는데
진짜 유교는 사라진 지 오래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종교라는 것들이 전부 '샤머니즘' 에 먹혀버리고 있습니다.
그러면, 샤머니즘에 기독교가 얹히게 되면 어떤 것이 되는가?
역시 모양은 기독교처럼 변하는데
내용은 여전히 '샤머니즘' 에 머무르는 엉터리 무당 잡교가 되는 것입니다.
예를 몇 가지 들어 드리겠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첨단의 전자 장치로 움직이는 비행기나 배의 진수식 때 꼭 고사를 지냅니다.
첨단 과학의 결정체 앞에서
돼지 머리에 절하고 돼지 코에 돈을 꽃아 액운을 막고 복을 비는 것이 인간입니다.

사업을 시작할 때, 영화를 찍을 때 어김없이 고사를 지냅니다.
젊은 사람이 제 명을 채우지 못하고 억울한 죽음을 당하면 항상 무당을 불러다가 굿을 합니다.
원혼을 달래는 것이지요.
이 모든 것들이 다 '샤머니즘' 의 내용들입니다.

그럼 한 번 보자고요.
어떤 사람이 예수를 믿게 되면, 적어도 집안에 고사를 지내거나 '굿' 은 안 합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기독교인으로서 지탄을 받아 마땅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 대신에 목사를 불러다가 '예배' 를 드립니다.

솔직히 터놓고 이야기 해 보자고요.
사업을 시작할 때 혹은 이사를 갔을 때 왜 목사를 불러 예배를 드리는 것입니까?
혹시 그 예배를 통해 마귀가 주는 액운을 막고 하나님이 주시는 복을 얻기 위해서 아닙니까?
만일 그렇다면,
'돼지머리나 무당' 이 목사로 바뀌고, '고사' 나 '굿' 이라는 이름이 예배라는 이름으로
둔갑한 것 이외에 뭐가 다릅니까?

우리가 어떤 일을 시작할 때 예배를 드리는 것은,
'이 땅에서 나에게 주신 모든 것은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시기 위해
나에게 맡기신 것이므로 내가 최선을 다해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것에 동참하겠습니다'
라는 고백으로 예배를 드리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 사업이 망하고 흥하고에 관심이 있는 것이 아니라
이 사업을 통해서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바라면서 이 사업을 통해 하나님의 영광이
그러나게 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사업이 시작될 때 예배를 드리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사엄이 망했을 때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그 사업이 망함으로써 '내가 낮아지고, 이 땅의 것들의 무상함을 발견하고,
하나님께 더욱 의존하는 존재가 되었다면' 거기서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진 것입니다.
만일, 그러한 인식이 있다면, 망했을 때 더욱 기쁜 마음으로 예배를 드려아지요?
저는 지금까지 사업 망해서 감사의 예배를 드렸다는 말을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습니다.

사람들은 예수를 믿는다고 하면서도 하나님의 뜻이나 하나님의 영광은 전혀 개의치 않고,
오직 '나의 유익' 에만 관심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 글을 읽는 학생들 중에 시험 보기 전에 꼭 기도하는 사람들이 있을 것입니다.
하지 말라는 것 아닙니다. 당연히 기도해야지요.
학업이라는 것은 지금 이 시간에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주신 사명이니까요.
그 학업이라는 사명을 통해 하나님은 여러분의 삶 속에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가고 계십니다.
그러니까 이 학업을 통해서도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나게 해 주십사 기도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 저 좀 도와주세요. 잠 자느라고 공부를 제대로 못했습니다.
지금부터 찍겠습니다.
하나님이 연필에 성령을 부어주셔서 찍는 대로 맞게 해 주십시오' 라고 기도한다면,
그건 정한 수 떠놓고 칠성당에서 만사형통을 기원하는 사람과 뭐가 다릅니까?
그런데, 대부분 그런 의도로 기도하지요? 내 능력보다 더 잘 보게 해달라고 말입니다.

겉은 기독교적인데, 속은 여전히 샤머니즘적인 내용을 담고 있는 것 중에 이런 것도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주일을 거룩하다고 하십니다.
그래서, 주일날에는 짜장면이라도 사먹으면 큰 일 나는 줄 알아요.
어떤 분은 우리 교회 청년들이 주일날 볼링 치러 가는 걸 목사가 묵인했다고
교회를 나가신 분들도 있습니다.
마치 유대인들이 안식일을 지킬 때에 행했던 것들을
우리가 이 시대에도 그대로 행해야 하는 것처럼 사시는 분들이 있습니다.

좋습니다. 이왕이면 하루만이라도 거룩하게 구별되게 살아보는 것도 나쁘지 않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따 그 날만 그렇게 유난을 떨고 나머지 날은 엉터리로 사는 사람들이 문제입니다.
그것도 바로 샤머니즘에서 나온 것입니다.

무당이 굿을 할 때 그 집 식구들이 목욕을 하지 않고 오거나 혹여 딴 생각을 품으면
무당은 곧 '부정탔다' 고 외칩니다.
'다른 날은 몰라도, 오늘만큼은 목욕재개하고, 허튼 생각 품지 말고,
오직 천지신명께 정성을 다해 빌어야 하는데
어떻게 오늘 목욕도 안 하고 천지신명 앞에 서느냐' 는 것이지요.
 
그래서, 굿을 하는 사람들은
다른 날은 자기가 복을 비는 신과 전혀 상관없이 살아도 괜찮습니다.
그러나, 굿 하는 당일날 만큼은 목욕재개하고 정갈한 생각과 행동을 해야
액운이 막아지고 복을 받을 수 있다는 생각을 합니다.
그게 샤머니즘의 내용입니다.

샤머니즘에는 '샤먼' 이 굿을 하는, 샤먼이 의식을 행하는 그 시간과 공간이
다른 시간과 공간과 구별된 곳이라는 의식이 있습니다.
그래서, 다른 때는 몰라도 적어도
샤먼이 집례 하는 의식이 행해지는 그 공간과 시간 속에서는 정결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샤머니즘이 기독교와 합쳐지면서
예배당이 성전으로 둔갑해서 '거룩한 장소' 화 되어 버렸습니다.
그래서, 어떤 교회는 강대상에 절대 신을 신고 올라갈 수 없습니다.
거기는 거룩한 장소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종교의식이 행해지는 주일날은 짜장면도 안 사먹고 거룩하게 살려고 노력합니다.

왜? 그 의식이 행해지는 시간과 공간이 부정을 타게 되면 나에게 액운이 생기고
'복' 이 오지 않을 것이라는 기복사상에서 그렇게 하는 사람들이 아주 많이 있습니다.

예배당은 하나님의 백성들이 모이는 그냥 여는 '집' 입니다.
주일이라는 것은 그냥 거룩한 하나님의 백성들이 한 날을 정해 모이는 여느 '날' 인 것입니다.
주일은 구약의 안식일과 다른 것입니다.

여러분, 성경에 '주일' 이라는 말이 나옵니까?
요한 계시록 1장 10절에 나오는 '주의 날' 은 '심판의 날' 이지, 오늘날의 주일을 가리키는 게 아니지요?
그렇다고, 주일을 거룩하게 지키라는 명령도 없습니다.
성경은 '어느 한 날이 거룩한 날이니까 그 날은 꼭 모여라' 라고 이야기 한 적이 없습니다.
오히려 '어떤 한 날 뿐 아니라 날마다 모이기를 힘쓰라' 고 말씀하셨습니다.

어떠한 한 날의 거룩은 예수님 오시기 전에 국한되는 것입니다.
유월절, 초막절, 칠칠절, 대 속죄일 등의 절기와 안식일은 모두가 쉬어야 하는 거룩한 날이었습니다.
이 날을 거룩하게 지키지 않으면 이스라엘 백성은 돌로 쳐 죽임을 당했습니다.

안식일은 이스라엘이 애굽의 종으로 있으면서 아무리 땀 흘려도 얻을 수 없었던 안식,
인간의 힘으로는 도저히 이루어 낼 수 없는 창조 이후의 안식,
그 안식을 하나님 혼자 이루어 내셨다는 것을 주지시키기 위해 그 안식일이라는 날을
거룩하게 지키라고 하신 것입니다.

절기도 마찬가지입니다. 유월절, 오순절, 장막절 모두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주어질 참된 안식의 징표였기 때문에,
그 날은 거룩하게 구별해서 쉬라고 하신 것입니다.
그것은 '나' 하나님이 홀로 이루어 내는 것이라는 것을 알라는 것이지요.
참 안식, 구원이라는 것은 우리의 열심으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열심으로 주어지는 것이니
너희는 그 날 일을 하지 말고 쉬라는 것이 안식일이 담고 있는 내용인 것입니다.

그런데, 이제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셔서 십자가를 지시고 참 안식을 이루어 주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십자가에서 ' 다 이루었다' 라고 공개적으로 확언을 하시고 죽으셨습니다.
그래서, 이제 안식일이라는 것은 없어진 것입니다.
안식일로 예표 되던 그 참 안식이
실제로 우리 인간의 공로가 아닌 하나님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공로로만 이루어졌으니까요.

사단(Satan)은 자꾸 기독교의 본질을 옆으로 밀어놓고 비본질적인 것에 몰두하도록
교회를 미혹하고 있습니다.
기독교의 본질은 오직 십자가 앞에서 내가 자꾸 낮아지고, 부인되고, 해체되어,
하나님과 이웃을 기꺼이 기쁘게 섬길 수 있는 자로 성숙해 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러한 본질에서 벗어나 '내 감격, 내 자랑, 내 열심, 내 열매' 를 추구하게 함으로 해서
자꾸 기독교를 관념화 시켜 버리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예수를 믿는다고 하면서, 체험도 하고, 감동도 받고, 열심을 부리기도 하는데
결정적인 순간에는 비기독교적인 행동을 서슴치 않고 하는 것입니다.

독자 여러분에게 묻겠습니다.
비가 부슬부슬 내리는 날, 공동묘지에 가면 무섭습니까? 안 무섭습니까? 왜 무섭지요?
성경에 의하면, 모든 인간은 죽어서 영원이라는 시간 속으로 들어간다고 나와 있습니다.
창세 전에 택해진 한 무리는 영원하신 하나님 곁으로 가게 되고,
나머지는 지옥으로 들어가게 되어 있습니다. 어떤 사람도 그냥 구천을 떠돌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원한을 품은 귀신, 처녀 귀신, 총각 귀신, 동자 귀신이 구천을 떠돌다가
심신이 허약한 사람을 괴롭힐 수 있나요? 그런데, 우리는 왜 무서워하죠?
성경의 내용이 관념으로 떠돌 뿐 나와는 전혀 상관이 없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정말 지옥을 믿으시나요?
그런데, 사랑하는 여러분의 가족이 아직 예수를 믿지 않고 있는데, 그렇게 한가하실 수 있나요?
정말 지옥이 있다는 것을 믿는다면 말입니다.
오늘날 기독교는 지옥조차도 관념으로만 동동 떠다닙니다.

아이들 입시 때 아무렇지도 않게 미역국 끓여 주시는 엄마가 몇 명이나 됩니까?
이왕이면 찹쌀떡이나 엿 먹이고 싶지요? 철썩 붙어야 하니까요.
누가 빨간 색으로 자기 이름 쓰면 기분 나쁩니까? 안 나쁩니까?
아직도 아이들이 문지방에 올라서면 재수 없다고 혼내는 분들 계시지요?
왜 교회의 엘리베이터도 4층이 F로 표기되어 있지요?

사단은 인간의 죄의 뿌리인 '샤머니즘' 적인 종교심에 껍질만 기독교로 바꾸어 버린
엉터리 기독교를 만들어서 진짜 기독교의 주위를 포위해 버렸습니다.
그래서, 여전히 속은 무당종교인데 겉모양만 기독교인 척하는 가짜들이
예수의 이름을 부르며 사람들을 미혹하게 만들어 버린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를 믿는다고 하면서도
십자가 앞에서의 자기부인과 자아의 해체를 추구하고 경험하기는 커녕
여전히 이 세상의 중심에 '자기 자신' 을 올려놓고 자기의 행복과 자기 자랑과 자기의 높아짐, 재수에
예수를 이용하는 거짓 기독교가 참 기독교처럼 둔갑을 해 버린 것입니다.

거기에도 예배가 있고 찬양이 있습니다.
봉사가 있고, 헌신이 있습니다. 감격도 있고, 눈물도 있습니다.
그런데, 십자가가 없습니다.
낮아짐이 없습니다. 섬김이 없습니다. 세상을 향한 죽음이 없습니다.
오히려, 펄펄 살아서 자랑과 교만과 거들먹거림이 흘러넘칩니다.
그건 가짜 교회인 것입니다.

명심하십시오,
우리는 이 땅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 되는 훈련을 하는 사람들입니다.
'스티그마타 투 큐리오 예수, 둘로스 투 크리스토' (주 예수의 흔적들, 그리스도의 종)
예수 그리스도가 만 왕의 왕이시고 예수 그리스도가 만 주의 주이십니다.
절대 우리가 하나님 나라의 주인공이 아니며, 이 땅에서도 여러분이 주인공이 되어서는 안됩니다.

하나님이 왕이십니다.
그래서, 그 분이 하라는 대로 하는 것이며, 살라는 대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설사, 그 삶이 조금 내 마음에 들지 않더라도 하나님이 살라 하시면 살아내겠다는
옹골찬 답을 하는 자들이 바로 그리스도인인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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