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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13-08-03 21:06
   (20) Tree of Life (생명 나무)
 글쓴이 : njsmyrna
    조회 : 6,731  




영화에 대한 정보가 전무한 상태에서 시작했습니다.
나의 감상법은, 특히나 지정해서 골라 볼 때는 그 영화에 대한 정보를 미리 챙깁니다.
진의를 알기 위해 여러 번 보는 수고를 줄이기 위함입니다.
그런데, 지인의 소개로 서둘러 보기 시작했습니다.

먼저, 제목을 봅시다.
'The tree of life' 생명의 나무? 생명나무? 여기서부터 해석은 보는 자의 몫입니다.
물론, 영화는 철저히 감독의 표현이라는 것에는 동의합니다.
하지만, 그 의도를 알아차리고 받아들이는 부분을 관객에게 맡기지 않을 바에야
이런 류의 영화는 감독 개인의 사유로 끝나야 합니다.

제가 이런 류의 영화라고 부르는 것은,
철학과를 나와 평생에 삶의 철학적 고민을 내어 놓은 감독 특유의 고집을 이번 영화에서도 본 것이고
그것이 십 여 년 전의 그의 전작 'The thin red line' 에서부터
제겐 조금씩 동의되지 않았기 때문에 하는 표현입니다.
40년 가까운 세월 동안 겨우 다섯 편의 영화로 스스로에게 던지는 질문을 계속해대는
칠십을 바라보는 감독의 인생 결론이 저와는 많이 다름을 확인하기 떄문입니다.

영화는 사람들이 떠들어 대는 것 만큼 어렵지 않습니다.
오히려 예전에 그가 만든 영화 '천국의 나날들' 을 보고 난 후의 묵직함엔 비할 수 없는
빠른 답을 찾게 됩니다.
신 앞에 서 있는 인간의 삶에 대한 고민은 그 신의 존재에 대한 바른 앎과는 상관없이
인간들의 가치 찾기 라는 또 다른 종교의 형태가 되어버리는 것임을 알기 때문입니다.

절대자 앞에서의 고민은 결국엔 나의 신격화 라는 내용을 띄겠지만,
그것이 철학의 옷을 입고 사유의 분장을 하면 칭송을 받고 동의를 얻어냅니다.
신을 배제하고 도달한 결론에 신을 초대하여 자리만 지키라는 인간의 강요는
얼핏 고급한 삶의 결국 같겠지만, 사실 처음부터 틀린 답을 품고 있습니다.

그로부터 20 년이 지나 내어 놓은 'The thin red line' 에선 세상이 알지 못하는 답을 가진 우리이기에
그의 고민이 조금 과장되었거나 복음에 대한 이해가 참으로 미천했는데도 말입니다.
그리고, 이제 십 년도 더 지나 감독이 내어 놓은 영화가 칸느에서 황금종려상을 받았다는 이 영화입니다.

영화는 엄마의 독백으로 시작합니다.
삶에는 두 가지 길이 있다.
'the way of nature' 그리고 'the way of grace' 선택은 우리의 몫이라고 말합니다.
그런가요? 전 여기서부터 또 다른 질문을 가지기 시작합니다.
은혜의 길을 선택했을 때 갖게 되는 삶에 대한 안목에는 동의합니다.
영화 내내 완벽한 사랑의 대변자 같은 엄마는
그러니까 은혜의 길을 가는 사람으로 표현되고 육체의 길을 가는 삶을 설명하며,
영화 속에서 완고함, 그러나 자기 방식의 사랑을 표현하는 아버지의 축복 기도가 의도적으로 섞여 나오며
한 집안에 은혜와 육체의 두 길을 부부로 묶어 설명합니다.

그들에게서 난 삼형제에게 일어나는 일들은
두 가지 삶에서 나올 수 있는 삶의 여러 정황들로 여기 저기 에피소드로 툭 툭 던져집니다.
영화를 보면서 이것이 인간의 보편적 삶이겠구나 했습니다.
조금 고급하거나 조금 남루하거나, 이해가 되기도 하거나 받아들일 수 없게 분노가 일거나,
객관화가 되거나 주관화에서 벗어나지 못하거나, 그런데 머리로 아는 것과
그것이 내 삶에서 날 것의 질문으로 던져졌을 때의 반응은 어떠합니까?

내가 만들어 놓은 제한선을 어느 날 무자비하게 치고 들어오는 신의 간섭은 어떻게 받을 것입니까?
신애 대한 이해 (우리의 용어로는 '믿음' 이라 합시다) 에 따라 달라지는 답을 가진 인간은
그런 삶 속에서 어떤 답과 순종을 말할 수 있습니까?
 
바로 이 영화의 의도처럼 말입니다.
'난 당신에게 충실할 것입니다. 무엇이 오든 간에 말입니다.' 라는 독백에 바로 이어져
둘째 아들의 사망 소식이 편지로 배달됩니다.
벽면이 모두 창으로 지어져 햇살이 가득 쏟아져 들어오는 거실에서,
머릿결 한 올 한 올에도 하늘의 은총이 실루엣처럼 반짝이는 그 순간 아들의 사망 소식이 전해집니다.
그리고, 흔들리는 하이 앵글로 (아래에서 위로 쳐다보는 로우 앵글이 영화 전반에 넘치는데
드물게 여기선 반대의 시선을 느낄 수 있습니다) 신의 시선을 표현하는 그 장면에서
신은 우리에게 되묻습니다.
 
'이래도 너는 충실할 수 있는가?'

아마 감독은 그 답을 찾고 싶었던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질문은 바로 시작했는데 답은 어떠합니까? 전 거기서 동의가 안됩니다.
동생의 죽음과 지나치게 엄격했던 아버지에 대한 상처(?)는 중년의 큰 아들에게
여전히 악몽을 꾸게 하는 원인이 됩니다.

영화 시작부에 성경 욥기를 인용하며 하나님의 답을 쥐고 시작한 감독은
내도록 고민을 내어 놓다가 신에게 드디어 아들을 보낼 수 있는 엄마의 고백과 함께
이제사 맺히는 아들 입가의 옅은 미소로 자신의 답을 내어 놓습니다.
그 곳엔 어린 시절부터 그에게 의문을 던졌던 모든 사람의 인생이 한 곳에 모여 화목하는 것으로
결론지어지고, 그 곳에서 아버지와 어머니 그리고 죽은 동생과의 화해도 이루어집니다.

전 좀 씁쓰름합니다.
'자식을 잃음' 이라는 하나님이 던진 걸림돌에 결국 드러나는 것은
그 자식으로 명명되었던 '나' 라는 존재의 상실에 대한 절망입니다.
그렇다면, 내도록 신에게 질문을 던지는 엄마의 독백은 기실 나 스스로의 상실에 대한 의문인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 '내가 아들을 보내 드립니다' 로 답이 나옵니다. 결국 '나' 입니다.

보면서 우린 하나님의 은혜가 개입되지 않고서는 아무리 머리를 짜고 고민을 하고,
죽을 듯이 괴로워도 '나' 라는 답 외엔 내어놓을 수 없는 존재인 걸 확인하게 됩니다.
하나님으로 답을 내는 것은 나의 사유나 고민의 결과가 아닙니다.
그것조차 하나님이 던져 주셔야 우린 먹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과 우리는 그렇게 멉니다. 너무 멉니다.
 
이 삶이라는 역사 속에서, 그리고 오늘이라는 내 삶의 모습으로 당겨진 곳에서
하나님은 보이지 않습니다.
그 먼 묵시의 세계에 이미 완성되어 살고 있는 '나' 라는 존재가 내겐 정말이지 전혀 감지되지 않습니다.
내가 지금 느끼는 고통, 기쁨, 그리고 이제는 신 앞에서 자유할 수 있다고 고백하는 그 순간의 거짓됨만이
참 내 것인 양 느껴집니다.

결국, 내 고민의 결과로 내어 놓은 답이라고 주장하는 그 생각조차
부패하고 거짓된 것이라는 걸 알지 못합니다. 도무지 사유할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그런데, 보이고 만져지고 소유되는 것 같습니다. 세상은 거기까지만 봅니다.
그래서, 그 고민에 대해 열광하고 그 답에 대해 상을 줍니다.
인간들이 모여 지들끼리 동의하며 상벌을 매기는 법칙에 적용된 것이라면,
결국 그것은 이 땅의 결론입니다.
그래서, 전 세상이 환호하는 이 답에 동의할 수 없는 것입니다.

신을 부르는 감독이 기껏 삶의 기원을 대폭발이나 진화 그리고 생뚱맞게 다큐멘터리처럼
끼어든 공룡 시대의 화면으로 풀어내려 했다 해서 뭐라 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 의도가 많이 의아하지만, 그렇게 잡아 당겨 인간의 삶으로까지 와서 추적을 시작했다면
차라리 인간적인 결론으로만 갔으면 안타깝지 않았을 수 있겠습니다.

왜 자꾸 신을 들먹입니까?
신(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자들의 신적 개념은 정말 여기까지입니까?
신에 대해 고민하지 말고
차라리 인간에 대한 고민으로 갔다면 좀 가까이 가는 답을 낼 수 있진 않았을까요?
밀리언 달러 베이비의 클린트 이스트우드 처럼 말입니다. 뭐 그도 결국 제한적이긴 하겠지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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