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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13-06-14 14:43
   (13) "사막이 아름다운 건, 어디엔가 우물이 숨어 있어서 그래"
 글쓴이 : njsmyrna
    조회 : 8,204  




"사막이 아름다운 건, 어디엔가 우물이 숨어 있어서 그래"
'생택쥐베리' 가 어린 왕자의 입을 통해 소년 시절 제 가슴에 던진 말입니다.
삭막한 사막도 어딘가에 있을 오아시스로 인해 아름다울 수 있다는 것이지요.

고은 선생의 저서 '화엄경' 에서도, 짠 물로 가득 찬 바다 가운데 솟는 민물에 관한 묘사가 있습니다.
그래서, 목마른 뱃사람들이 갈증을 해갈하기 위해 찾아가곤 하던 그런 바다 가운데의 오아시스,
그래서 그 바다는 더 이상 공포의 바다가 아닌 아름다운 바다일 수 있었던 것입니다.

작금의 세상을 보노라면, 군사 독재 시절 어떤 이가 자주 썼던 단어 '총체적' 이라는 말이 떠오릅니다.
'총체적 타락, 총체적 왜곡, 총체적 어둠'
그런데도 우리는 '참 아름다워라 주님의 세계는' 이라는 찬송을 부릅니다.
아름다울 것이라고는 조금도 없는 것 같은 이 세상에서
참 아름답다는 노래를 부를 수 있는 사람들은 우리 성도들밖에 없습니다.

우리는 이 총체적 어두움이 세상 속에 간간이 비추는 빛이 있음을 알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 총체적 싱거움 속에
간혹 짠 맛을 더하는 소금의 삶을 사는 이들이 있다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 세상은 아름다울 수 있는 것입니다.
사막이 작은 우물에 의해 아름다워질 수 있는 것처럼 말이지요.

객관적 시각으로 교회라는 집단을 바라볼 때마다 참으로 암담할 때가 많이 있습니다.
세상의 죄를 드러내고 그들의 살 길을 제시하는 태풍 같은 예수의 음성은 사라진 지 오래 이고,
하나님의 추상같은 말씀 앞에서도 코웃음을 치며
자신들의 힘과 이익만을 위해 예수를 종 부리듯 부리고 있는 이 시대의 교회를 어떻게 할 것인가?

교회 안에서도 저는 플라톤의 국가 정체 속의 '트라시마코스' 를 봅니다.
'정의란 더 강한 자들의 이익' 이라는 괘변이 왜 예배당에서 통용되어야 하는 것일까요?

=> 트라시마코스 :
플라톤의 대화편 <국가> 1 권에서  “정의는 강자의 이익이다”라는 주장을 편 소피스트,
그것은, 힘에 의한 자기 이익의 달성이자 '군사 패권 주의' 즉 아테네 제국의 근본 이데올로기였다.
절대 권력가일 수록 비난은 커녕 부러움과 존경의 대상이 되듯이
오늘 날의 패권 국가 또한 모든 나라의 부러움과 존경의 대상이 된다.
국가 차원에서 약소 국가가 패권 국가를 비난하거나 덤비는 일은 거의 찾아보기 힘든데,
패권 국가가 부당하지 않아서가 아니라 그들로부터 주어질 폭력이 두렵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사람들이 목숨 걸고 사랑하라고 주신 자신의 동료들을
'프루크루스테스의 침대' 위에 올려놓고
자신의 견해와 주장에 맞추어 머리를 자르고 다리를 난도질하고 있습니다.

=> 프루크루스테스 :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인물로서, 그의 집에는 철로 만든 침대가 있었는데
지나가는 행인을 붙잡아 자신의 침대에 누이고는, 행인의 키가 침대보다 크면 그만큼 잘라내고
행인의 키가 침대보다 작으면 억지로 침대 길이에 맞추어 늘여서 죽였다고 전해진다.
그의 침대에는 침대의 길이를 조절하는 보이지 않는 장치가 있어
그 어느 누구도 침대에 키가 딱 들어맞는 사람은 없었다고 한다.
'프로크루스테스의 침대' 라는 말은 바로 이 프로크루스테스의 이야기에서 유래된 말로
자기 생각에 맞추어 남의 생각을 뜯어 고치려는 행위,
남에게 해를 끼치면서까지 자신의 주장을 굽히지 않는 횡포를 말한다.

유사 이래로 교회는 계몽의 주체였습니다만,
이제 교회는 계몽의 객체로 전락을 해 버린 것입니다.
예수를 따른다고 하는 자들은
그 예수의 머리에 금관을 씌우고 그 태풍 같은 예수의 입을 막아 버렸습니다.

당신은 입 닥치고 우리가 주는 금관에 만족하며
우리가 하는 일을 멀찌감치에서 지켜보다가
우리가 도움이 필요할 때 우리를 도우면 된다는 것이지요.

예전에 제가 존경하는 선배께서 폴란드 출신 미국 작가 저지 코진스키의
'무지개 빛 까마귀' 에 관한 글을 어느 신문에 소개하신 적이 있습니다.
그 책에 등장하는 새 장수 '레흐' 는, 욕구불만이 생기면
자기가 소유하고 있는 새들 중에 한 마리를 골라 온갖 화려한 색으로 색칠을 합니다.

그리고는 그 새와 같은 종류의 새들이 사는 들판으로 나가 그 새의 머리를 살짝 비틉니다.
새는 아파서 소리를 지르게 되고,
그 새와 같은 종류의 새들은 그 색칠해진 새의 주위로 모여듭니다.
그 때 레흐는 그 형형색색으로 색칠해진 새를 하늘로 날려 보냅니다.

자기 동료의 목소리를 듣고 모여든 새들은 순간 당황합니다.
자기들과 같은 색깔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색칠해진 새는 자기가 그들의 동료임을 알리기 위해 애를 씁니다.
그러나, 결국 그 색칠해진 새는 동료들에 의해 죽임을 당합니다.
래흐는 그렇게 자신이 색칠해 놓은 새가 하늘에서 땅으로 떨어지는 모습을 보며
욕구불만을 해소하는 것이지요. 죽일 놈입니다.

그런데, 예배당 안에서도 그러한 레흐들이 간혹 보입니다.
그들의 공통점은 '말이 많다' 는 것입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죽이고 싶은 어떤 이를 선택하면
그 때부터 자신들의 세치 혀로 그 사람에게 온갖 색칠을 해 댑니다.
그 불쌍한 색칠해진 새는 영문도 모른 채 이리 채이고 저리 채이다가, 결국 자폭을 하게 됩니다.

왜 이 참담한 세상의 아름다움의 이유가 되어야 할 교회가
어두운 세상의 흉내를 내고 있는 것일까요?
자신을 드러내기 위해 자기의 인기와 자랑을 위해
그렇게 누군가에게 색칠을 해서 추락을 시켜도 되는 것입니까?
왜 하나님의 아들이 피를 흘려 세우신 교회 안에서 우리가 수많은 레흐를 보아야 합니까?

21 세기의 교회는 이제 회개하고 하나님 앞으로 돌아와야 합니다.
태풍 같은 예수의 말씀을 다시 귀 기울여 들어야 합니다.
이제 그 분의 머리에서 금관을 벗겨내고, 그 분의 입을 틀어막은 마스크를 벗겨 드려야 합니다.
그리고, 귀를 기울입시다.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

우리가 정말 예수로 인해 하나님의 아들들이 된 것이 맞다면,
이제 우리는 새상을 아름답게 만들지언정
더욱 더 어둡게 만드는 자들이 되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제 레흐의 자리를 박차고
오히려 우리의 이웃을 위해 내가 죽는 예수의 제자들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제 여러분의 마음 속에 있는 프루크루스테스의 침대는 부수어 버리십시오.
그리고, 모든 이를 품어 안으셨던 예수의 품으로 그 안을 채우십시오.

거기서 오는 행복이 우리를 가득 채우기를 기도하면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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