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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14-01-07 13:45
   (87) 화차
 글쓴이 : njsmyrna
    조회 : 7,341  




기다리던 영화 '화차' 를 봤다.
동명의 일본 원작을 바탕으로 감독 변영주가 각본까지 썼다.
결혼을 앞두고 시댁으로 인사를 가던 도중 여자가 갑자기 사라졌다.
남자는 여자를 찾기 위해 애를 쓰고,
그러는 과정에서 드러나는 여자의 정체는 남자가 알던 그 여자가 아니다.

원작이 1993년에 발표된 걸로 보면,
비슷한 모티브로 1991년에 만들어진 헐리웃 영화 "Deceived" 의 모방으로도 의심이 가지만,
이런 소재가 던지는 화두로 그냥 생각을 모아보자.
요즈음 내 머릿속의 화두는
'인간에 대한 이해 또는 예의', '믿음', 그리고 그럼에도 부어지는 '구원' 이다.

메스컴에선 어떻게 평하는지 솔직히 이번만큼은 보지 않았다.
굳이 이 영화가 보고 싶었던 것은,
바로 그 이슈가 되는 모티브에 대한 나 스스로의 확인 작업이 우선이었고
영화를 보는 내내 답을 얻었으니 그걸로 만족이다.
 
먼저 '믿음' 이라는 것을 보자.
감독은 시댁을 향하는 차 안의 첫 장면에서 남자와 여자가 주고받는 대화로 먼저 이 질문을 던진다.
전작 이후 6년의 시간 동안 갈고 다듬으며 각본까지 세세하게 신경 썼을 감독은
그 대화에서 이미 질문과 답을 모두 던져 놓고 있다.

너무 쉽게 가려 했나? 아니다.
두 사람 사이에서 정상적인 대화는 영화 내내 그 때 뿐이었음을
영화가 끝난 다음에야 애써 기억할 수 있다.
지극히 정상적으로 보이는 상황에서도 이미 믿음은 실종되어 있었다.
정작 서로에 대한 진실한 대화는 영화 말미에 가서야 가능해진다.
그러니 우리가 생각하는 정상과 비정상의 경계와 믿음에 대한 근거는 도대체 어디인가?

준비한 선물을 시어머니가 마음에 들어 할까, 염려하는 여자에게
남자는 분명 좋아하실 거라고 안심을 시킨다.
어떻게 그렇게 잘 아느냐고 묻는 여자에게 남자는 '나 못 믿어?' 라고 묻는다.
'
믿어 ...' 여자의 힘없는 대답에
남자는 ', 좀 믿고 살자 우리~' 라는 말을 하며 여자에게 장난을 걸고 둘은 웃는다.

내가 믿고 있는 사실에 대한 붕괴가 여자를 찾아 헤매는 남자에게만 일어나는 일인가?
밝혀지는 여자의 과거 하나하나에 믿음이라는 것은 원래 그 여자에게 존재하지 않는다.
그것이 전적 타의에 의한 것이라는 이유로 사회고발로 가면 차라리 잠입 르포 수준의 다큐를 보는 게 낫지, 이런 영화에까지 흥분할 필요는 없다. 나 그저 인간에 대한 이해를 바라는 거니까.

암튼 이럴 때 꼭 믿음의 동아줄처럼 건드려지는 부분이 대부분 종교라는 모양새일 텐데
부쩍 요즘 영화에 기독교 (영화에선 성당으로 나오지만) 색깔을 띠는 게 많다.
시종 짜임새 있고 허투는 구석 없는 영화에서 한 가지 감독에게 마뜩잖고 거슬렸던 부분이 거기다.
너무 상투적이잖아, 밀양의 기억이 아직 생생해서 그럴 수도 있고 ...

여자는 단순한 거짓말이나 사기 수준이 아닌 살인자로까지 밝혀진다.
그즈음 남자는 도움을 청했던 전직 형사 사촌 형에게 찾기를 그만 두겠다고 한다.
여자와의 행복했던 기억과 밝혀지는 실제 사이에서 패닉 상태에 빠져버리는
남자의 소극적 선택은 결국 거기까지다. 더는 자신이 없는 거다.
진즉에 접자는 형의 말을 듣지 않고 파고들던 남자는 자신의 한계에 다다르자 손을 놓으려 한다.
그러니 인간의 한계는 거기서 거기다.
조금 더 용감하거나 조금 비겁하거나, 보통의 경우 여기까지다.

그러니까 인간은 자신에게 오는 공격의 최대 지점을 알고 있다는 말이다.
'마지노' 선이 어디서 무너질지를 본능적으로 안다. 그래서, 살 수 있는 방법을 택한다.
더러는 덮고 더러는 잊고, 그 선택의 찬반에 굳이 끼고 싶지 않다.
나 같은 사람이야 끝까지 알아야 하지만, 그 바람조차 주어질 떄가 있고 아닐 때가 있다.
그러니 산다는 것도 자의가 아닌 타의가 대부분이다.
삶에 대한 자의적 선택으로 고민하는 동생 앞에 형의 말은
'
사람 죽이는 것들, 우리랑 종자가 달라, 그러니 잊어.'

그럼 이제 사람, 그 인간에게로 가보자.
결국 또 다른 범행을 계획하는 현장에서 남자는 드디어 여자와 만난다.
그리고 간절하게 묻는다. '너 누구야! 너 아니지? 니가 그러고도 사람이야?'
표정 없이 남자를 보던 여자가 말한다.
'
나 사람 아냐, 쓰레기야. 그런데 내 주위엔 아무도 없었어.'

난 여기서 답을 얻는다.
요 며칠 머릿속을 떠나지 않던 인간에 대한 믿음이나 예의에 대한 고민의 근거가
어디서부터 시작된 것인지 알았다.
여자의 반대편에 서서 잣대를 쥐고 시작하는 이들과 동일한 근거였다.
난 이미 선과 악을 내가 정하고 있었다.

사회 규범적 기준을 허물자는 말이 아니다. 죄가 죄가 아니라는 말도 아니다.
'
적어도 인간이라면 ...' 이라는 생각 자체가 우리에겐 허락되지 않는 화두임을 알았다는 것이다.
어설픈 연민으로 여자에 대한 동정을 말하는 것도 아니고,
끝까지 여자를 사랑한 남의 선택에 대해서도 보는 이의 몫으로 남겨 두자.

문제는 인간이 아니라 하나님이다.
이 영화에 신적 구원이 담겨있다는 말이 아니다.
사람에 대해 머리 터지게 고민하는 내 앞에 지금 내가 받는 답이 이거다.
'
그럼에도 불구하고' .

영화 자체적인 감상은 재쳐두고 보면서 내도록 내 머리를 떠나지 않던 생각은
'
도대체 인간은 뭐냐' 는 거였다.
그러고 얻은 답이 '하나님의 은혜가 없으면, 너나 나나 모두 쓰레기' 라는 것이다.
반대편이라고 별반 다르지 않는데 처음부터 나 왜 거기에 속했다고 여기는 거지?

'화차' 의 뜻이 '지옥을 향해 달리는 불수레' 라고 한다.
일본 만담에 등장하는 '악인이 올라타면 절대로 내릴 수 없는 지옥행 수레' 라고 한다.
선인과 악인의 기준조차 하나님에 의해 내려지지 않으면,
모호한 세상에서 타의에 의해 그 열차에 올라 타 있는 여자나
자신의 한계를 넘어 사실을 알고자 뛰어든 남자나
누가 선인이고 악인이며 그들이 향하는 곳이 지옥 어디란 말인가?

시종 선한 웃음과 안정된 사회적 삶으로 평온했던 과거의 남자와
드러나는 현실 앞에 무방비로 삶의 철퇴를 맞고 있는 지금과
그 모두를 떠안고 살아가야 할 남자의 앞 날, 그 어디가 천국이고 지옥인가?
인간은 무엇이고, 구원은 어디에 있는가?

죽어도 이제 안 되고 안 되는 일 앞에 확인을 하자고 드는 마음이,
결국 나 살고 싶어서다.
납득을 하든 이해를 하든 진위여부를 밝히든
그래서 분노를 하든 용서를 하든 뭐라도 해야 할 것 같거든.
여자를 찾아 헤매는 남자의 마음이 이랬을 거다.

그런데, 주시는 답이 '넌 뭐 좀 다르냐? 사실이면 어떻고 아니면 어떡할 건데?
그럼에도 내가 그에게 구원을 허락한 거면 너 할 말 있냐?' 이다.
아무 할 말이 없어졌다. '인간이면 그럴 수 없느니라' 를 외치고 싶은 거, ?
싸이코 패스? 연쇄살인범? 그렇지 그건 도무지 납득 안 되지.
그런데, 그도 하나님이 맞다고 하시면 난 할 말이 없어야 맞다.

'하나님이 뭐 답답하셔서 그런 인간까지?' 그도 내 생각이다.
내가 선악을 정해 심판자도 되고, 주관자도 되면, 그때부터 그 속은 지옥이다.
모두들 스스로 정해놓은 인간쓰레기의 기준을 다르게 가지고 있는 거다.
그리고, 그 기준이 건드려지면 다들 입에 거품을 문다.
땀 닦은 휴지나 오물 닦은 휴지나 ... 여즉 내가 어디서부터 왔는지를 모르는 자들이다.

그러면서도 마음의 분탕질은 여전하다.
주신 생각으로 맏은 이 원리적 결론이 내 삶에서 내도록 그 힘을 발휘하면 얼마나 좋겠나?
자꾸 묻는다. '그래도 하나님, 이건 아니잖아요.'
그 생각 끝에 위로처럼 주시는 말이 그 대사다.
'
니가 쓰레기 맞아. 그런데 내가 널 사랑했어. 그거면 됐잖아.' 이다.

결국 나 숨 좀 쉬고 살자고 내린 결론이면 어떡하나 싶은 걱정이 아직 있다.
하지만 또 알아간다.
내 원래의 자리와 지금 하나님의 사랑으로 얹혀 가는 자리,
이 관계 속에서 주시는 생각에 대한 믿음을 안다. 사람에게서 오는 것 아닌 참 믿음 말이다.

난 자꾸 나를 잊는다.
멀쩡한 얼굴로 얼마나 말도 안 되는 일을 저지를 수 있는 자인지 자꾸 잊는다.
여즉 그러고 살아와 놓고, 난 좀 다르다 싶은 것이다.
멀쩡하게 살라고 주신 이 자리에서 그냥 살자.
주시는 모습에 감사하고,
그 허락하심이 아니었으면 어떤 자리로 폭로될 자였는지 제발 좀 잊지 말자.

그래서, 난 분명 그 화차를 탄 자 같은데
어느새 다른 곳을 향하고 있는 이 은혜에 얹혀있음을 알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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