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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13-12-12 11:17
   (79) 조금씩만 더 자유하세요
 글쓴이 : njsmyrna
    조회 : 7,110  




사사기를 읽다가 감당할 수 없는 은혜 속에 빠졌습니다.
사사기의 내용 중에 가장 많은 지면이 할애된 인물이 삼손과 기드온입니다.
그 중에서도 삼손의 이야기는, 예수를 믿지 않는 사람들도
옛날 이야기나 만화 영화를 통해 자주 접할 수 있을 만큼 유명한 이야기 입니다.
저도 이미 삼손의 이야기를 소재로 하여 여러 편의 설교를 했습니다.
삼손의 이야기에서 예수 그리스도가 어떻게 나타나고 있는 가를 주로 살펴 본 설교였지요.
 
오늘 새벽 유난히 일찍 잠에서 깼습니다. 황홀한 꿈을 꾸었지요.
우리 교회 성도들과 제가 교수대 앞에서 순교의 교수형을 기다리는 그런 꿈이었습니다.
섬뜩하신가요?
그런데, 제가 익히 아는 그 얼굴들이 전혀 두려움 없이 찬송을 부르며 순교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꿈 속에서 시계를 보며 초조해하던 사람은 유일하게 저였던 것 같습니다.
다른 게 두려운 게 아니라
목에 밧줄이 감기고 몸이 아래로 떨어지는 순간 참 많이 아프겠다는 생각 때문이었습니다.
꿈 속에서도 제가 얼마나 유치하던지 ...
 
그런데, 우리 어린 청년들을 비롯해서 집사님 장로님들은
그 자리에서 기쁘게 찬송을 하시면서 하늘나라 입성을 기다리고 계셨습니다.
꿈 속이었지만, 그 모습이 정말 황홀했습니다.
그렇게 잠이 깨어 사사기를 읽으면서 삼손의 이야기에 다다랐을 때
저는 그야말로 감당할 수 없는 은혜 속으로 빠져 들었지요.
 
삼손은 참으로 흠과 결점이 많은 사람입니다.
평생을 자기가 하고 싶은 대로만 하고 살았고, 자신의 능력을 과신했던 사람입니다.
게다가 그는 여자에게 너무 쉽게 빠지는 사람이였으며,
하나님과의 비밀스런 계약을 여자의 닦달에 폭로를 해 버리는 철없는 사람이었습니다.
겉으로 보기에 삼손은 믿음이 결핍된 천방지축의 망나니로 밖에 보이지 않습니다.
 
그런데, 사사기의 삼손의 이야기를 보면 그 첫머리가
'삼손이 태어나자 하나님께서 그에게 복을 주셨고, 여호와의 영이 그를 움직이기 시작했다' 라고
기록이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이 복을 주시고 성령이 움직이는 사람의 일생이 왜 그리 실수와 약점과 결점으로 점철이 되는 걸까요?
 
그 첫머리에서 저의 복된 의문이 시작되었습니다.
'그렇다면, 삼손의 삶은 하나님의 손에 의해 철저하게 짜인 각본이란 말인가?'
'만일 그렇다면, 하나님의 손에 의해 성실하게 움직인 삼손이 무슨 죄가 있는가?'
또다시 인간의 자유의지와 하나님의 주권에 대해 혼란이 왔습니다.
 
사사기를 잘 보시면,
사사들이 용맹을 떨칠 때마다 그들에게 성령이 성령이 임하셨다는 말이 꼭 붙어 다닙니다.
삼손도 마찬가지입니다.
나귀 턱뼈로 블레셋 사람 수천 명을 때려 죽일 때도 그에게 성령이 임했었고,
심지어, 혼인잔치에서 수수께끼를 놓고 내기를 했다가 자신의 아내에게 그 답을 알려주는 바람에
내기에 진 삼손이 옷 삼십 벌을 구하기 위해 아스글론에 내려가 무고한 사람들 삼십 명을 때려 죽일 때에도
성경은 삼손에게 성령이 임했다고 기록을 하고 있습니다.
 
아니 굳이 하나님의 율법을 적용하지 않더라도
사회법이나 도덕, 윤리에 근거해서도 무고한 학살은 범죄입니다.
그런데, 그러한 범죄의 현장에 하나님의 성령이 임하셨다는 표현은 사뭇 이해가 가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사사들은 성령 하나님의 도움으로 그들에게 맡겨진 사명을 이루어 내었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이 다 시키신 것 아닙니까?
여러분은 어떻게 대답을 하시겠어요?
성경은 분명 하나님은 죄의 조성자가 아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 모순을 어떻게 해결해야 할까요?
 
성경이 그러한 사건들을 통하여 성경의 독자들에게 주고자 하는 메시지는,
하나님은 인간의 약점과 결점과 실수와 죄까지도 그 분의 주권적인 섭리로 선용하셔서
성도 각자에게 맡겨진 개별적 소명을 성취하고야 마신다는
하나님의 집요하고 고집스러운 성도를 향한 관심을 나타내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개인의 삶에서 일어나는  더러운 욕구와 사건들이
하나님의 뜻에 어긋나는 행동이요, 하나님께서 기뻐하지 않으시는 것들임에도 불구하고
그러한 것들마저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일에 쓰시는 전지전능하신 분이라는 것을
우리는 그 속에서 읽어내야 하는 것입니다.
 
인류의 역사는
인간들의 자유로운 행위와 하나님의 주권의 묘한 상호작용에 의해 이어져 가고 있습니다.
그 비밀을 누가 설명할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 한가지 분명한 것은,
우리는 끝없이 실패하고 실수하고 범죄하여 하나님 일을 방해하고 있는데
하나님께서 계획하시고 이끄시는 역사의 경륜은 한 번도 실패한 적이 없이 그 길로 가더라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오해해서는 안될 중요한 진리가 있습니다.
혹 지금까지의 이야기를 들으시고
'그렇게 우리의 실수나 죄까지도 하나님의 주권적 섭리 속에서 그 분의 뜻을 이루시는데 사용된다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징계하시거나 심판하실 수 없는 것이 아닌가?' 하고
자신의 실수나 범죄를 정당화하고 싶은 생각이 안 드십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분명 우리가 저지르는 실수나 범죄가 하나님의 일을 수시로 방해를 하고 있음에도,
하나님께서 그것들을 선용을 하셔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데에 사용하고 계시지만,
하나님은 우리의 죄에 대해 반드시 징계를 하십니다.
 
삼손은 자기가 하고 싶은 대로 하면서 산 부러운 사람입니다.
그 누구도 그의 행보에 딴지를 걸 수가 없었습니다.
그는 나실인이었음에도 부정한 사자의 시체에서 꿀을 떠 먹었고,
창녀에게 들어가는 것도 서슴없이 행했던 사람이었습니다.
그가 정말 행복했을까요?
 
성경을 보다 보면, 삼손은 참 외로운 삶을 살았다는 것이 보여집니다.
그가 첫 눈에 반해 결혼을 한 첫 번째 아내는 다른 사람의 아내가 되었고,
자식 하나 없는 외톨박이였습니다.
그는 언제나 혼자 블레셋을 오가며 창녀집이나 드나드는 그러한 외로운 삶을 산 것입니다.
결국에는, 두 눈이 뽑히고 블레셋의 감옥에서 맷돌이나 돌리는 처절한 노예의 삶을 살다가
다곤 신전에 깔려 죽는 처참한 신세로 자신의 생을 마칩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범죄와 성도답지 못한 실패와 실수의 삶에 반드시 징계를 하십니다.
우리는 누구나 과거에 범죄나 권모술수나 옳지 못한 임기응변등으로 우리의 욕심을 채운 뒤에도
들키지 않고 무사히 넘어 갔던 기억들이 있을 것입니다.
우리는 그러한 때에 하나님의 눈을 피해 불로소득을 챙긴 듯한 착각에 빠집니다.
그러나, 제 경우에는 항상 그러한 사건들로 인해 전신적 육체적 피폐와 자괴감과 죄책감등으로 인한
우울한 날들이 제 시간을 채우고 있었음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
 
결국, 우리는 우리의 꾀로 하나님마저 속이고 완전범죄를 저질렀다고 했을 그 때에도,
하나님의 징계 속에 있었던 것입니다.
 
자기 동생을 애굽에 팔아 버린 요셉 형들의 속임수와 악함이,
하나님의 구원사역에 쓰이고, 요셉의 성도됨을 완성해 가는 데에 유익하게 사용되었다고 해서,
그들의 죄가 하나님의 칭찬의 대상이 될 수 없는 것처럼 말입니다.
그 형들이 요셉을 만나는 장면에서
그들이 얼마나 평생을 죄책감과 두려움에 시달렸는지 우리는 보지 않았습니까?
 
하나님은 우리 성도들이 하나님의 성품을 닮은 거룩하고 아름다운 자녀들로 살기를 원하십니다.
그리고, 그렇게 살기 위해 애쓰고 노력하는 자들에게
하늘의 행복과 만족과 기쁨과 평안과 안식을 누리게 해 주십니다.
그러나, 그와 반대로
여전히 하나님의 명령과 뜻에 반하는 삶을 사는 이들에게는
머리를 밀고 두 눈을 뽑은 후 적국의 맷돌을 돌리게 하시는 광야를 허락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광야는 저주의 광야가 아닙니다.
화 조차도 복으로 바꾸시는 우리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나는 복된 광야인 것입니다.
우리 성도는 그렇게 징계의 맷돌을 돌리면서
그 맷돌 속에 우리의 모난 성품과 더러운 탐욕과 여전한 범죄의 욕구들을 갈아 버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도의 광야는 축복이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썩은 냄새가 나는 자신의 모습을 확인하며
'나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없었다면 나는 과연 어떻게 되었을 것인가?' 하고
하나님의 은혜를 찬양하며 하나님의 그 축복된 설복에, 그 강요된 은총에,
두 손 들고 반응하는 이들이 모인 곳이 바로 교회입니다.
그래서, 교회는 악취나는 죄인들의 모임인 것입니다.
 
우리가 신앙 생활을 하면서 교회에서 많은 상처를 받았다는 사람들을 종종 만납니다.
당연합니다.
그곳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끌고 가시는 인간들이 모여있는 곳이기 때문에
더럽고 악취나는 모습들이 여전히 보이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 속에서 예수의 관용을 배우는 것입니다.
'나처럼 고고한 이는 이렇게 악취나는 곳에서 함께 지낼 수 없어, 더 깨끗하고 더 순결한 곳을 찾아 갈테야'
라고 그들을 거부하는 이들은
아마도 아직 자신이 어떤 존재인지에 대한 정의조차 내리지 못한 풋내기임이 틀림없을 것입니다.
 
분명, 교회는 세상의 빛이 되어야 합니다. 교회는 세상의 소금이어야 합니다
천국의 완성된 교회는 성경이 말하는 바로 그 빛과 소금의 역할을 완벽하게 해낼 수 있는 교회입니다.
그러나, 지어져 가고 있는 이 지상의 교회는
이 세상의 죄와 악이 폭로되고, 성도에게 하나님의 자비와 사랑과 용서와 관용을 강의하는 장이어야 하기에
어떤 때는 세상의 다른 공동체보다 더 악취가 날 때가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러한 더러움 속에서도 하나님의 선한 뜻을 이루어 내시니까요.
그렇게 하나님의 은혜를 조금식 경험하면서 우리는 성경에 그려져 있는 이상적인 교회를 추구하게 되고,
먼저 자기 자신이 하나님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교회로의 한 발 전진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우리는 서서히 지어져 가는 것입니다.
 
성경은 분명 '선 줄로 생각하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하라' 했습니다.
만일, 자신이 이제 섰다고 생각하는 성도가 넘어질 가능성이 없다면,
하나님께서 성도들에게 이러한 권고의 말씀을 하실 필요가 없으셨을 것입니다.
 
그러나, 성도라는 이들은
이 땅에서 옛 몸을 벗고 하늘의 새 몸을 입기까지 끊임없이 넘어지는 존재이기에
하나님께서 자주 넘어지지 않게 조심하라고 권고를 하신 것입니다.
그렇게 넘어진 이들에게 '저들에게서는 악취가 나네' 하고 등을 돌리신다면,
여러분이 넘어지셨을 때에 여러분은 어디로 가실 것입니까?
 
만일, 여러분이 온전하신 분이라 죄인들과 함께 거하는 모멸감을 참으실 수 없으시거든
어서 죄인들이 없는 곳을 찾아가십시오.
그러나 명심하세요.
죄인들이 없는 곳에는 예수가 안 계시다는 것을 ...
 
예수 그리스도는 죄인들의 친구가 되고 죄인들을 구하러 오신 분이지,
당신같은 바리새인들은 관심도 없으시니까요.
교회는 상처를 주는 죄인들이 용서를 받아 치료되고 있는 병원입니다.
그런데, 또 어디로 가시겠다는 것입니까?
 
오늘 아침,
삼손의 범죄와 어리석음으로 삼손의 머리털을 밀어 버리신 하나님이
그를 그대로 버리지 않으신다는 사실 앞에 저는 감당할 수 없는 자유를 만끽했습니다.
삼손은 일순간 적국의 노예로 전락해서 맷돌을 돌리며 자신의 처참한 현실에 고통스러워 했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삼손의 고통은 그를 뼈 아픈 회개의 자리로 이끌었습니다.
삼손은 하나님만을 의지하고 하나님의 뜻만을 좇아야 하는 나실인의 사명을
철저한 회개 속에서 깨달았을 것입니다.
 
그게 바로 성도의 삶이며, 하나님께서 이 땅에서 하시는 유일한 하나님의 일입니다.
하나님의 일은, 하나님의 백성들을 하나님의 자녀답게 만드시고 성숙시키시는 일입니다.
그렇게 하나님의 백성들이 모두 하나님게 돌아오는 일이 바로 재창조의 날이며,
하늘 위의 것과 하늘 아래의 모든 것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새롭게 통일되는 날인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의 징계의 시간과 광야의 시간은 복되고 복된 축복의 시간인 것입니다.
 
혹시, 여러분, 지금 어두운 광야를 걷고 계십니까?
머리를 깍이고 두 눈이 뽑혀서 맷돌을 돌리고 계시지는 않으세요?
그 시간을 저주하거나 원망하지 마세요.
지금 하나님은 하나님의 일을 열심히 하고 계신 것입니다.
모든 것을 합력시켜 선을 이루고야 마시는 우리 하나님께서 여러분의 삶 속에서
열심히 당신의 일을 하고 계신 것입니다.
 
그 때도 찬양하십시오. 
이 맷돌을 지나면 정금같이 나오게 될 우리의 새 성품과 새로워진 인격을 기대하시면서
하나님을 찬양하십시오.
아울러, 우리가 그동안 습관처럼 저질러 왔던 수많은 실수와 범죄들을 회개하십시오. 그러면 됩니다.
여전히 악취가 나세요?  괜찮습니다. 아직 갈 길이 머니까요. 조금만 자유하세요.
 
성경은 말합니다. '그러나 그의 머리털이 밀린 후에 다시 자라기 시작하니라'
이 얼마나 흥분되는 반전입니까? 그 '그러나'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바벨론 포로로 보내시기도 하시고,
수많은 적국의 공격에 무방비로 당하게 하시면서 이스라엘을 훈련하셨듯이,
우리 성도들을 바벨론으로 블레셋의 감옥으로 광야로 내모시기도 하십니다.
 
'그러나'
바로 그 자리가 복된 성도로의 완성을 향한 지름길임을 놓치지 마시고, 우리 절망하지 마십시다.
하나님께서 미신 머리털은 반드시 자라게 됩니다.
아니, 자랄뿐 아니라  더 강력한 하나님의 백성으로 성장하는 계기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다시 자란 머리털을 가진 삼손이
한 번에 그가 평생 죽인 블레셋 사람보다 더 많은 이들을 죽이고 하나님 품으로 가게 된 것입니다.
 
우리가 성도가 맞다면, 우리는 이래 저래 수지 맞은 인생입니다.
여러분 다들 힘내시고,
주변에서 악취를 내는 사람이 있다면,
상처받거나 손가락질 하지 마시고 그를 오히려 축복해 주세요.  그는 잘 자라게 될거예요.
 
지금 블레셋의 감옥에서 맷돌을 돌리고 계신 분이 있으신가요?
힘을 내세요. 함께 기도하겠습니다.
여러분은 대반전 '그러나' 의 드라마를 반드시 쓰실 분들이니까 힘내세요.
 
교회는 그렇게 관용과 사랑 속에서 한 발 한 발 자라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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