즐겨찾기 | 메인 로그인 | 회원가입 |  사이트맵 |  41 (회원 0)  

Home >  칼럼/책 >  수필집-집으로 가자
 
작성일 : 13-06-02 14:29
   (01) 집으로 가자
 글쓴이 : njsmyrna
    조회 : 8,551  




다섯 살 무렵부터 시작된 예배당 왕래는 유년 주일학교와 중고등부, 대학부로 이어졌습니다.
저희 어머님과 아버님은 예수를 믿는 분들이 아니었습니다.
 
굳이 가르자면, 저희 아버님은 유교에 가까우셨습니다.
질서와 예의범절을 중요시 여기시는 아버님은 그야말로 자타가 공인하는 호인(好人)이셨습니다.
어떤 사람도 저희 아버님을 향하여 손가락질하거나 험담을 하지 않았으니까요.
그래서, 예수님의 은혜로 숨어야 하는 복음 별로 달갑지 않으셨을지도 모릅니다.
 
어머님은 독실한 불교신자셨습니다.
어머님의 종교에 대한 정성과 성실은 어린 제가 옆에서 보기에도 남달랐습니다.
때가 되면 언제나 방생(放生, 생명을 놓다)과 보시(普施, 넓게 베풀다)에 힘을 쓰셨지요.
그런 집안에서 시골에 계신 할머니 혼자 예수를 믿기 시작하셨고,
그 할머니의 가장 귀한 손자였던 저도 자연스럽게 예배당 출입을 하게 된 것입니다.
 
어린 시절 어머님은 당신이 불교신자셨음에도 불구하고 제가 예배당에 가는 것을 말리지 않으셨습니다.
그 때에는 딱히 아이들이 가서 놀만한 곳도 없었고,
다정한 선생님들이 나누어 주는 계란이며 알사탕 같은 것을 오물오물 물고 오는 아이들에게
그다지 손해 가는 일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저는 그렇게 수월하게 예배당 출입을 할 수 있었습니다.
 
고등학생이 되자 점점 교회에서 보내는 시간이 많아졌습니다.
고등부 전도사님께서 집으로 심방도 오셨습니다.
저는 그 때마다 집 안에 있는 작은 불상들을 장롱 속에 감추곤 했습니다.
그렇게 되니까 어머님은 슬슬 걱정이 되셨나 봅니다.
그리고, 내심 어머님의 종교를 부끄러워하는 자식이 서운하셨겠지요.
 
어머님은 공부를 핑계로 교회 출입을 막으셨습니다.
그래도 일주일에 한 두번은 꼭 교회에 가서 찬송을 부르고 예배를 하고 기도를 했습니다.
지금 생각해도 그 때는 제가 참 열심이었습니다.
그렇게 대학에 입학을 했고,
대학에 가서는 본격적인 성경공부 반에 들어가 교리와 성경을 차근차근 공부해 나가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열심히 공부를 했음에도 이상하게 시간이 지날수록 믿음이 깊어지는 것이 아니라
제가 믿고 있는 것에 대한 의심이 깊어지고 있었습니다.
'정말 예수만이 구원의 길일까? 하나님은 정말 살아계신 것일까?
만일, 다른 종교에도 구원이 있다면, 지금 내가 하고 있는 이 수고는 모두 허사가 되는 걸까?
정말 천국은 있을까?'
꼬리에 꼬리를 무는 질문들에 저의 신앙은 '예' 라는 대답을 쉽게 내 놓을 수 있을 만큼 성숙하지 못했습니다.
 
예배당에 가면 누가 봐도 성실한 신앙인이었습니다.
가난한 빈민촌 아이들을 모아 야학까지 하는 아주 보기 드문 청년이었지요.
그런데, 교회 권사님들이 입에 침이 마를 정도로 칭찬을 해 대는 그런 사람이
집에만 오면 몸을 비틀며 자신의 위선에 괴로워하는 혼돈과 공허의 시간을 보낸다는 것은
그리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자괴감에 불안감까지 겹쳐 저는 점점 하나님의 부재를 증명해 보고 싶다는 유혹에 빠지고 있었습니다.
 
만일, 하나님만 안계시다면,
이렇게 하고 싶은 것도 마음대로 못하고, 하지 말아야 할 것들을 몰래 해 가며,
거짓과 위선의 삶을 살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처음 잡은 책이 노자(老子)였습니다.
노자의 도덕경은 성경을 쏙 빼닮은 좋은 윤리(倫理)책입니다.
노자를 읽으면서 성경과 흡사한 부분이 발견이 될 때마다 저는 마음 속으로 쾌재를 불렀습니다.
'이거 봐, 이렇게 비슷한 내용을 가진 책이 이렇게 버젓이 있는데
어떻게 성경만이 진리를 담고 있다고 우기는 거야, 내가 반드시 성경만이 진리가 아님을 밝히고 말아야지'
하고 더욱 더 동양철학 공부에 박차(拍車)를 가했습니다.
 
그런데, 노자와 장자, 즉 도가 사상의 아버지격인 완적, 완함, 혜강, 향수 등의
죽림칠현(竹林七賢)의 삶을 전기로 찾아 읽으면서 동양 사상의 한계를 보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당시의 공자, 맹자의 유교를 귀족의 종교요 현실성이 결여된 형식적 학문으로 맹렬하게 비판을 하고
죽림에 들어가 청담(淸談, 맑은 말)을 나누며 도가 사상의 진리 됨을 설파하려 했습니다.
그들의 상궤(常軌, 일상의 수레바퀴)를 벗어난 발언과 기발한 행동은
유의경(劉義慶)의 <세설신어(世說新語)>에 잘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도가 사상의 달인들의 말로는 청말 참담했습니다.
유부녀를 강간하다 들키기도 하고, 세상과 화합하지 못하고 살해당하기도 합니다.
제가 보기에는 그저 현실비판과 술과 거문고를 좋아하는 한량들의 호기(呼氣)로 밖에는 안 보였습니다.
도가 사상을 죽도록 공부하여 말로가 그들의 것처럼 허무하게 끝난다면
도가에는 구원이 없는 것이라는 결론을 내리게 되었습니다.
 
그러다가 주역 책을 잡게 되었고, 천지(天氣)를 읽어보려 무수한 밤을 팼습니다.
같은 학교의 선배들과 친구들 몇 명이서 작은 모임을 만들어서
인도철학과 동양철학을 비교하며 공부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그 어느 곳에서도 나는 어디서 왔으며, 왜 이렇게 태어났으며,
주어진 이 인생 속에서 무엇을 하다가 어디로 돌아가게 되는 지에 관해 속 시원히 설명해 주지 못했습니다.
 
강증산의 증산교, 대순진리회에도 찾아가 보았고,
외계인의 실재를 믿고 구세주마저 외계인이라 주장하는 라에리안교의 한국 지부에도
열심히 드나들었습니다.
어머님을 따라 절에도 찾아가고, 고승들을 만나기 위해 삼천배도 마다하지 않았습니다.
그럼에도 저는 갈수록 깊은 미로 같은 나락을 빠져들었고,
인생의 해답은 이생에서 절대록 찾을 수 없다는 불가지론(不可知論)자가 되어 가는 듯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습니다.
그 날도 깊은 고민 끝에 선잠을 자고 있었습니다. 그 밤에 꿈을 꾸었지요.
저를 아시는 분들은 제가 얼마나 꿈이나 환상같은 신비주의적 현상들을 경계하는지 잘 아실 겁니다.
그런데 사실입니다. 저는 그 밤에 꿈을 꾸었습니다.
 
마태복음에 나오는 한 장면이 꿈 속에서 그림으로 그려지고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수많은 성도들과 함께 하늘에서 저를 내려다보고 계시는 꿈이었습니다.
제가 잊고 있었던, 바로 제가 돌아갈 집이 그곳에 있었습니다.
그 모습을 보면서 저는 울며 울며 밤새 노래를 불렀습니다.
 
'집으로 가자, 집으로 가자,
이런 눈물 흘리지 않는 곳
집으로 가자, 집으로 가자,
내 아버지 기다시는 그곳에
 
안녕, 친구여 곰곰히 생각해 봐
그대는 지금 자유로운지
안녕, 친구여 감추지 않아도 돼
애써 웃는 모습 안 보여도 돼
 
구원받은 몸이라 안심하고 있었나
끊임없이 생기는 어둔 죄 감춰둔 채,
의인은 믿음으로 살리라 하셨는데
친구 넌 그 뜻을 진정으로 아는가,
 
집으로 가자, 집으로 가자,
이런 눈물 흘리지 않는 곳
집으로 가자, 집으로 가자,
내 아버지 기다리시는 그곳에'
 
마치 집나간 자식을 오래 오래 기다리고 계셨던 아버지께서
방황하는 아들을 향해 외치는 안타까움 같았습니다.
잡에서 깨어 저는 그 꿈을 다시 떠올려 보았습니다.
그토록 생생하게 기억에 남아있는 꿈은 지금까지 한 번도 꾸어 본 적이 없었습니다.
 
제가 밤새도록 꿈 속에서 불렀던 노래도 다 생각이 났습니다.
저는 얼른 종이를 꺼내어 악보를 적고 가사를 붙였습니다.
그게 바로 '집으로 가자' 라는 곡의 탄생 배경입니다.
 
그 후로 저는 성경을 통해 어떻게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서만 살게 되는지,
그리고 성경이 말하는 진정한 자유가 무엇인지,
그리고 왜 나는 십자가에서 죽으신 예수만을 의지해야 하는지 알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우리 성도가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며,
이 땅에서는 무엇을 하다가 가야하는지도 알게 되었습니다.
그 어느 경전에서도 찾아내지 못했던 인생의 해답을 성경을 통해 하나님께서 알려주신 것입니다.
 
여러분, 이곳은 우리의 집이 아닙니다.
우리의 집은 하늘에 있습니다.
하나님은 이 죄 많은 세상에서 어서 눈을 돌려 아버지가 계시는 하늘의 집을 바라보라고
우리 성도들에게 오늘도 경고의 나팔을 불고 계십니다.
 
많이 힘드세요?
그 때 하늘의 집을 바라보세요.
억지뿐인 이 세상 오늘이라도 접고 싶은 분들 계시나요?
네, 그 때 하늘의 집을 바라보세요.
 
그렇지만, 포기는 하지 마세요.
우리는 집으로 돌아가고 있는 나그네요, 순례자이기 때문에 절대 포기할 수 없어요.
돌아갈 집이 없는 부랑자들은 폭풍이 일고 파도가 넘실거릴 때 두려움에 떨게 되지만,
아버지가 기다리시는 따뜻한 집을 목표로 하고 걸어가는 나그네들은
소망을 힘으로 삼아 힘들 때마다 지친 무릎을 일으켜 세울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 집으로 갑시다.
우리 아버지 기다리시는 집으로 갑시다.
 
여러분이 잠시 지나가는 이 세상을 바라보지 마세요.





 
 
 

모임소개  |  로그인 
Copyright ⓒ 2023 뉴저지 교회 NJ Church, All rights reserved. Comment to nj.smyrna@gmail.com (T)201-658-376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