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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13-09-19 09:10
   (31) 이미지냐 내용이냐
 글쓴이 : njsmyrna
    조회 : 7,483  




흔히들 오해하는 것 중의 하나가 눈으로의 확인입니다.
내 육의 오감을 동원하여 그 제한적 감각에 아귀가 맞아야 믿어도 주고 만족도 하겠다는 것입니다.
인간에 대한 이해는 대부분의 사람들마다 그렇게 미천한 것이어서
스스로의 일차적 자각이 전부인 양,
위장하고 들어오는 감각 확인의 공격을 정작 공격으로 인식하지 못하고
대단한 자기 주장쯤 되는 줄 압니다.
그러니 어떻게든 눈으로 봐야 하고 손으로 만져야 하고 맛을 봐야 하겠다는 겁니다.

깃털 펜에 잉크 찍어 파피루스로 옮기는 고전까지는 아니더라도
아날로그식의 흰 종이에 만년필 연서로도 전해질 감정의 교류는 충분했습니다.
방법의 문제가 아니라 언제고 이슈는 내용의 문제였지 않습니까?
그런데, 썸네일 이미지의 홍수에 쉴 새 없이 깜빡여대는 포털 사이트의 플래쉬 이미지도 모자라
손아귀를 가득 채우는 '메탈 덩어리' 에 기어이 서로의 얼굴을 비춰봐야 얘기를 하겠다는 것 아닙니까?
뭘 그렇게 자꾸 보자고 합니까?
 
그런데, 내 것으로 감각하여 소유하자는 이 욕구 뒤에 또 다른 얼굴이 감추어져 있는 것이
정작 얼굴 보고 목소리 들어봐야 상호간에 채워질 내용이 없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인간의 감성은 시대의 변화처럼 그렇게 다양하지 않습니다.
창조된 그 날 부터 인간의 '희로애락' 은 거기서 거기 입니다.
그 때나 지금이나 인간이 정한 기준의 행복은
객관화된 문명의 발달로 조금씩 다른 옷을 입었을 뿐, 그 네 가지 감정을 벗어나지 않습니다.
그러니 갑자기 '문화' 라는, '문명' 이라는 자기네들이 만든 작품 앞에
정작 한 가지 원리로 지어진 인간 본연의 내용은 겉돌게 됩니다.

용 써서 보고 만지고 확인하자 했는데 서로 내어놓을 게 없는 것입니다.
그 내용은 피조물의 자기 자리 확인입니다.
처음부터 이 기능이 주어지지 않은 자들은
역사를 통해 끊임없이 던져지는 유사 행복의 모습에 자기를 투영합니다.
내용이 없는 이미지의 확인입니다.

참 복의 수여자인 창조주 앞에 불리워 간 자만이 누리고 감각할 수 있는 복은
이미지가 아닌 내용입니다.
그 복은 믿음입니다.
내가 감각하여 확인하는 객관적 실체가 아닌
처음부터 내 것이 아니었던 내 안의 또 다른 감각 체계의 동력입니다.
 
저는 그것을 본 적이 없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내 안에 자리한 그 중력감을 압니다.
육의 감각을 넘어서는 믿음이라는 것의 무게감에 완전히 장악될 때 희미하게 보이는 그 무엇입니다.
이미지와 내용이 합체되어 비로소 '본다' 라고 말할 수 있는 영적 개안의 순간입니다.
그것이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인 믿음의 실체입니다.
내가 정작 보아야 하고 감각해야 하는 것은 이것입니다.

그러니 뭘 자꾸 보이라는 것입니까?
무슨 감각을 원하십니까?
오늘 날처럼 정보와 이미지의 공격 (저는 공격이라고 표현하고 싶습니다.
이미 선택의 단계는 넘어 섰습니다.) 앞에 행복을 말하는 인간들의 환호는 왜 그렇게 공허합니까?
현란한 타임 스퀘어의 광고판 앞에서
정작 생명을 뽐내는 것은 인간 폭탄의 잔해처럼 뿌려져 서성이던 사람들이 아닙니다.
인간이 만든 이미지의 가짜 생명력 앞에
창조 본연의 모습을 차압당한 좀비 같은 인간들의 꿈틀거림만 보였을 뿐입니다.

아이러니 하지 않습니까?
간절히 보기를 원했고, 그래서 온갖 이미지를 만들었는데
정작 보아야 할 것은 점점 더 감추어지고 있는 때 입니다.
사실, 그들도 막연히 인식은 합니다. 이게 아니구나 ... 하고요. 하지만, 인정할 순 없습니다.
이건 모두 발전이고 나아짐이라 합의한 것에
누구도 먼저 그들의 또 다른 실패라는 진실을 말하려 하지 않습니다.
공멸로의 달콤한 유혹일 뿐입니다.

그러니 유사 이래 인간 세상이 합의하지 못하는
창조의 기원이나 복의 실체에 대한 갈증이 토해내는 배설물 앞에 이젠 좀 냉정해집시다.
솔직히 너무 많은 것들이 쏟아져 나와 있습니다.
선택의 문제가 아니라 폐기의 수순을 밟아야 할 지경입니다.
버리고 묻어야 할 것들의 끊임없는 생산이 현대화요 역사의 족적입니다.
금송아지에서 부터 금이빨 은이빨로 이어지는 믿음의 실체를 향한 이미지의 공격,
참 내용을 담지 못하는 그런 이미지의 유혹 앞에
사랑의 실체를 아는 자들은 이제 좀 처연해집시다.

오직 허락된 자에게만 보이고 고백되는 그 내밀함을 시끄러운 세상은 알지 못합니다.
그러니 눈을 감고 생각을 합시다. 기억을 떠올립시다.
이미 서로에게 주고받은 사랑의 내용을 인간의 제한적 시력은 닫고 보자구요.

사랑을 아십니까?
그 안에서 누리는 충만함으로 영혼이 적셔지는 기쁨을 아십니까?
그 사랑의 관계가 한시적 세상에서 별리라는 모습으로 드러날 때
말라가는 마음 밑바닥의 가뭄은 또 경험해 보셨습니까?
정말 연합된 사랑의 관계 속에 있다면,
그 때 위로가 되는 것은 물리적 거리의 제한성 속에 궁핍하게 확인되는 서로의 얼굴 보기가 아닙니다.
그 확인 작업이 무의미하다는 건 아닙니다.
문제는 언제고 내용입니다.
시간을 견디고 살아야 하는 내용의 공유가 제한적 상황에선 우선입니다.
그것은 충만한 사랑의 관계에서 먼저 누린 자만이 요구할 수 있는 서로의 기억입니다.
그 내용은 믿음이요 예수 그리스도 입니다.

손잡고 마주 보는 날의 기쁨은 약속으로 주어져 있습니다.
이미지와 내용이 하나로 묶여 원래 존재하던 자리에서 확인될 실체인 것입니다.
그러니 지금 좀 안 보여도 됩니다. 못 봐도 괜찮습니다.
아는 자들은 서로 아는 관계의 감각이 있습니다. 그러니 자유 합시다.

지금 내 눈에 보이는 것이 전부가 아니라면, 내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이 전무도 아닙니다.
세상은 알 수 없는 시각으로 보아내는 우리만의 이미지요 내용 ... '믿음'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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