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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ome >  칼럼/책 >  그런 기독교는 없습니다
* 본 설교는 2004년도 개척 첫해에 기초교리 공부 내용입니다
 
작성일 : 13-04-16 08:49
   32. 죽음으로 나타나는 성도의 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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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글쓴이 : njsmyrna
    조회 : 4,343  


(고후4:10-12)
 10    우리는 언제나 예수의 죽임 당하심을 우리 몸에 짊어지고 다닙니다. 그것은 예수의 생명을,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11    우리는 살아 있으나, 예수를 위하여 늘 몸을 죽음에 내맡깁니다. 그것은 예수의 생명이 우리의 죽을 몸에 나타나게 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12    그래서 우리에게서는 죽음이 힘을 떨치고, 여러분에게서는 생명이 힘을 떨칩니다.
 
 
오늘은 부활주일입니다. 성탄절은 언제인지 정확히 알 수 없지만 부활절은 정확하게 닛산월 유월절 다음 첫 안식일 다음날입니다. 안식 후 첫날 우리 주님께서 부활하신 것을 기념하는 것입니다. 오늘이 바로 유대인들의 달력으로 닛산월 유월절 안식일 다음 날입니다. 성탄절도 마찬가지이지만 부활절도 어떤 특정한 한 날만을 정해서 유난을 떠는 것은 자칫 형식주의로 흐를 수 있어 제가 별로 유난을 떨지 않는 것입니다. 사실 우리 성도들에게는 1년365일이 부활절이 되어야겠지요. 그러나 잘 잊어버리는 우리 현대인들에게 일 년에 한번이라도 부활의 참 의미를 되새기는 시간이 된다면 아주 의미 있는 시간이 될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오늘은 부활 신앙이라는 것이 무엇인지를 확실하게 정리를 하는 시간을 갖도록 하겠습니다.
 
죽음이라는 것은 모든 인간에게 두려움과 공포를 가져다주는 것임이 확실합니다.
지난주에 우리 새 가족 환영 팀 팀장이신 강 성화 집사님 아버님께서 돌아가셨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함께 기도하던 암으로 투병중이시던 황재희 집사님도 돌아가셨습니다. 지난 목요일에는 저와 아주 친했던 대학 동기가 과로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서울대학 안에서도 아주 뛰어난 천재 소리를 들었던, 모든 것을 다 가졌던 친구였는데 그렇게 황망히 가고 나니까 제가 참 서운했습니다. 예수를 안 믿고 죽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지난주 내내 죽음에 대해서 참 많이 생각을 했습니다.
 
모든 인간은 죽습니다. 인간은 죽는 즉시 천국과 지옥으로 나뉘어져 살게 됩니다. 어떤 영혼도 하나님의 불꽃같은 눈을 피해서 구천을 떠돌 수는 없습니다. 구천을 떠도는 원귀 이야기, 장화홍련이야기 같은 것은 다 허구입니다. 인간의 영혼은 죽는 즉시 하나님의 백성들은 천사가 수종을 들어 하나님 나라로 모시고 올라가고 죄인들은 지옥으로, 멸망의 불길 속으로 들어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몇 년 전에 죽은 귀신을 본다든가 가위를 눌린다든가 하는 것은 지금 사탄에게 속고 계신 것입니다. 그런데 참 안타까운 것은 살아있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자신의 죽음에 대해서 깊이 생각해 보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인간은 반드시 죽습니다. 그런데 왜 그렇게 죽음에 대한 생각을 회피하는가? 인간은 죽음을 나쁜 것이고 어떤 의미에 있어서는 형벌이고 악한 것이며 공포를 느끼게 하는 무서운 것이라고 무의식중에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제가 오늘은 심리학을 많이 인용하여 설교를 할 것입니다. 어떤 분은 평소에 기독교 안에 들어온 심리학에 대해 과잉 거부감을 보이던 우리 목사가 왜 갑자기 심리학 이야기를 하는가하고 의아해 하실 분도 있으실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오해는 마세요. 제가 평소에 심리학이나 철학을 몰매를 친 것은 성경을 심리학이나 철학으로 풀려고 하는 어떤 분들의 몰지각한 행동을 비난한 것이지, 심리학이나 철학 자체가 나쁜 것이라고 말씀드린 것이 아닙니다. 그러한 학문은 다분히 하나님의 일반 은총에 들어 있는 것입니다. 그러한 학문들은 우리의 삶을 풍성하게 하는데 큰 도움이 됩니다. 오해하지 마시고 열심히 공부하세요.
 
심리학이 이야기하는 바에 의하면 인간에게는 의식과 무의식이 있습니다. 의식은 무의식이라는 빙산의 한 조각이라고 말할 정도로 인간이 인식할 수 없는 무의식은 큽니다. 사실 인간은 그 무의식에 의해 더 많이 지배를 받습니다. 그런데 이 무의식은 사실(실제행동)과 소원(wish)의 식별을 못합니다.
 
그래서 마음에 음흉한 생각을 품으면 그 사람의 무의식은 이미 간음을 한 것만큼의 죄책감을 느낍니다.  그리고 저 사람이 죽었으면 좋겠다는 마음이 들면 이미 무의식은 그 사람을 죽인 것만큼의 죄책감을 무의식 속에 저장합니다. 히브리인들이 참 대단한 것이 심리학이나 의학이 오늘날처럼 발달하지 않았을 그 옛날부터 그들은 자신의 생각과 행동을 따로 떨어뜨려서 생각하지 않는다고 했지요? 그래서 예수께서 오셔서”마음에 음흉한 생각만 품어도 너는 이미 간음한 것이다“라고 하신 의미가 그들의 이러한 사고 때문이라고 우리는 배웠습니다.
 
아기 때는 무의식이 자아의 대부분을 차지합니다. 그래서 아기 때는 엄마 아빠가 자기가 원하는 무엇인가를 안 해주면 아기는 엄마 아빠를 미워하게 됩니다. 아이가 자라서 철이 들면
왜 부모가 자기의 요구를 들어주지 않는지 이해를 하게 되지만 아기는 그 이해력이 없기 때문에 무조건 미워하는 마음이 먼저 들게 되는 것입니다. 그 미워하는 마음은 죽이는 것과 같은 맥락의 죄책감을 그 무의식 속에 저장합니다. 그러다 어떤 이유로든 부모가 죽으면 자기 때문이라는 생각이 무의식 속에 죄책감으로 새겨집니다.
 
철이 들고 커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인간은 다른 이들을 변함없이 사랑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닙니다. 오히려 타락한 인간에게 자기 이외의 모든 인간은 미움의 대상입니다. 그래서 자기 주위에서 부모나 일가친지의 죽음을 보면 모든 인간이 무의식 속에서 죄책을 갖게 된다고 합니다. 어떤 사람이 죽었을 때 그 사람을 가장 미워했던 사람이 제일 괴로워하게 됩니다. 그것은 무의식 속에서 그 사람의 죽음에 대한 대가를 반드시 살면서 자기가 받을 것이라고 생각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거기에 대한 책임 모면을 위해 무의식은 그 죽었던 사람이 다시 살아나기를 간절히 소원하게 된다고 합니다. 그래서 이집트에서는 미이라를 만들어서 시체를 썩지 않게 보존했던 것이고 인디언들도 사람이 죽으면 그 사람이 평소에 쓰던 것들을 부장품으로 함께 묻었던 것입니다. 얼마 전에도 황금 미이라가 거의 300구 가량 발견되었지요?
아울러 그 죽음에 자기의 책임이 있다고 무의식이 움직이기 때문에 인간들은 죽음 앞에서 자기에게 스스로 형벌을 가합니다. 한국 사람들은 베옷을 입고 머리에 새끼줄을 두릅니다. 재를 뒤집어쓰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서양 사람들은 검은 옷을 입고 여자들은 베일을 씁니다. 베일은 수치를 가리는 것입니다. 때로는 물과 음식을 먹지 않기도 합니다. 이 모든 것이 자기에게 처벌 (punishment)을 가하는 행위입니다. 이 죽음에 대한 업보를 내가 받을 텐데 미리 이렇게 내게 처벌을 가해서 그 업보를 모면하려는 의도가 그 많은 장례 예식에 숨어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좀 지나면 이제 인간은 분노하게 됩니다. 슬픔과 죄책감을 넘어서 이제 자기를 그렇게 괴롭게 만든 그 죽음에 분노하게 됩니다. 그 분노는 그 죽은 자를 악하게 인식하게 되고 그 죽은 자는 살아있는 자에게 악한 영향을 끼치는 자로 인식을 하게 됩니다. 이러한 생각이 거의 동시 다발로 인간의 의식과 무의식 속에 일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인간은 죽은 사람을 보면 무섭습니다. 시체를 보면 공포를 느끼게 되는 것입니다. 이 모든 것이 바로 우리 죄 때문입니다. 그 인간의 죄 성이 죽음을 두려워하게 하고 망자를 무서워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가만히 생각해 보세요. 똑같은 사람인데 왜 여러분은 영혼이 떠난 시체는 무서워하지요? 여러분은 왜 그 고깃덩어리를 두려워해요? 영혼이 떠난 육체는 그야말로 고깃덩어리에 불과합니다.
 
제가 군에 있을 때 저희 내무반에서 제 바로 밑의 상병 일병이 술을 마시다가 싸움이 붙어서 상병이 일병을 대검으로 목을 찔러 죽였습니다. 군대에서는 하극상은 큰 죄이지만 상급자가 하급자를 때리거나 죽인 것은 사실 크게 취급하지 않아요. 그 때 그 죽은 친구 부모들 성화로 부검을 하게 되었습니다. 국립과학 수사연구소에 시체 부검을 위해 그 부모님들과 부대에서 참관인으로 저와 본부 대장님이 갔었습니다. 마스크를 하나씩 줍니다. 복도에 부검을 대기하고 있는 시체들이 정육점 고깃덩어리처럼 즐비하게 놓여 있습니다. 부검의들이 4명이 들어와서 아무렇지도 않게 그 시체의 배를 배꼽 아래까지 가릅니다. 그리고 양쪽으로 그 살을 쫙 벌려놓고 내장을 하나하나 꺼내서 저울에 답니다. 그리고 머리껍질을 벗기고 전기 톱으로 해골을 쪼갭니다. 그리고 뇌를 꺼내서 저울에 답니다. 그야말로 고깃덩어리에 불과합니다. 전혀 저항능력이 없어요. 그런데 왜 인간은 무기력한 고깃덩어리인 그 죽은 자들을 두려워하지요?
 
바로 이런 심리 때문에 두려운 것입니다. 그 사자에 대한 슬픔이 분노가 되고 “악한 자”라로 여기게 되고 그 부정하고 악한 존재는 나에게 피해를 입힐 수 있다고 생각되기 때문에 두렵게 여기는 것입니다. 그래서 인디언들은 죽은 사람의 장례식에 부족 남자들이 줄을 서서 하늘에 대고 화살을 쏩니다. 그들은 장례 때 영혼이 하늘에서 내려다본다고 생각하고 그 악한 영혼을 죽이는 의식을 하는 것입니다 군대에서 누가 죽으면 일렬로 서서 하늘에 대고 조총을 쏘는 것도 이러한 인디언의 의식에서 나온 것입니다. 
 
죽음은 이렇게 모든 인간의 인식체계 안에 두렵고 악하고 부정하며 형벌로 각인 되어 있습니다. 성경에서도 죽음은 형벌의 의미로 많이 쓰여 지고 있습니다.
창세기에서 하나님께서 아담과 하와에게 “선악과를 따먹으면 정녕 죽으리라“는 말씀을 하셨고 그로 말미암아 창세기 5장 죽음의 장에 아담과 셋과 에노스, 므두셀라 등 많은 이들이 죽었다는 것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아간과 고라도 그들의 범죄로 죽임을 당했고 이스라엘도 여호수아와 갈렙을 빼고 광야에서 죄의 대가로 죽습니다. 아나니아와 삽비라도 죄의 결과로 죽습니다. 그래서 죽음이라는 것은 성경에서도 어떤 형벌이라든지 타락하고 죄에 빠진 인간이 궁극적으로 맞이하게 될 운명으로 나타납니다.
 
그런데 신약에 보면 어떠한 구별된 무리에게는 그 죽음의 의미가 조금 달라집니다.
 
(계14:13) 나는 또 하늘에서 들려 오는 음성을 들었습니다. "기록하여라. 이제부터 주님 안에서 죽는 사람들은 복이 있다." 그러자 성령이 말씀하셨습니다. "그렇다. 그들은 수고를 그치고 쉬게 될 것이다. 그들의 업적이 언제나 그들 뒤에 남아 있기 때문이다."
 
죽음은 형벌과 업보로만 알았는데 여기서는 복이라고 합니다. 예수님께서도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마16:25)
25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코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찾으리라
 
게다가 바울은 죽는 것을 자랑거리로 삼습니다.
 
(고전15:31)
31 형제들아 내가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안에서 가진바 너희에게 대한 나의 자랑을 두고 단언하노니 나는 날마다 죽노라
 
어떤 사람들에게는 죽음이 두렵고 무섭고 악한 것이 아니라 자랑스럽고 좋은 것이 되기도 하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도 죽음은 복된 것으로 나타납니다.
 
(고후4:10-12)(표준새번역)
10 우리는 언제나 예수의 죽임 당하심을 우리 몸에 짊어지고 다닙니다. 그것은 예수의 생명을,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11 우리는 살아 있으나, 예수를 위하여 늘 몸을 죽음에 내맡깁니다. 그것은 예수의 생명이 우리의 죽을 몸에 나타나게 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12 그래서 우리에게서는 죽음이 힘을 떨치고, 여러분에게서는 생명이 힘을 떨칩니다.
 
우리가 죽는 것이 어떤 유익이 있다는 것입니다.
 
(시116:15)
15 성도의 죽는 것을 여호와께서 귀중히 보시는도다
 
왜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죽음이 복되고 귀한 것인가?
 
엘리자베쓰 퀴블러 로스라는 의사가 수십 년간 죽음 일보 직전의 사람들을 인터뷰하고 그들의 체험을 종합해서 쓴 dying and death라는 책을 보면 임사 체험자들(near death experience)의 이야기가 많이 나옵니다. 거의 죽음에 가까이 갔다가 살아난 사람들이나 죽음 직전의 사람들이 그들의 인격과 사고에 어떤 변화를 가져오는가에 대한 연구 결과입니다.
 
보통 임사체험 하면 유체이탈이나 천국에 갔다 왔다는 엉뚱한 체험 같은 것을 이야기합니다만 그런 것은 많은 부분 환상이나 뇌의 측 두 엽에서 일어난 환각일 가능성이 많습니다. 일본의 다치바나 다카시같은 작가가 전 세계의 뇌 생리학자와 심리학자 정신과 의사들의 임상 노트를 종합 취재해서 기록해 놓은 “임사 체험”같은 책들이 그러한 종류의 책들입니다. 그렇지만 그러한 책들을 읽어보면 우리가 죽음을 좀 더 진지하게 생각해 보는 데에 많은 도움을 주는 것도 사실입니다.
 
제가 지금 말씀드리려고 하는 것은 그러한 류의 임사체험이 아니라, 죽음이 선고되고 죽음까지 도달하는 시간까지 그 과정에서 인간의 심리와 인격이 어떻게 반응하는가에 대한 연구결과입니다. 이 단계는 거의 모든 뇌 생리학자나 의사들이나 심리학자들이 공통적으로 동의하는 결과입니다.
 
첫 번째로 인간이 죽음의 선고를 받게 되면 거의 모든 사람이 그 것을 “부인”(denial) 합니다. “아닐 거야, 그럴 리가 없어, 오진일거야” 그래서 거의 모든 말기 암 환자들이 한 병원에 진득하니 있지 않는다고 합니다. 여기 저기 계속 진단을 받으러 다닙니다.
 
두 번째로 그 죽음에 대한 선고가 확실해 지면 인간은 분노하게 됩니다. (anger stage)로 이동합니다. “왜 하필 나야? 나보다 저 사람이 더 못 된 것 같은데 왜 나만 이렇게 죽어야 하나?” 하는 분노의 단계에 이릅니다.
 
그 다음 세 번째로 거래(deal stage)단계로 갑니다. “내가 이렇게 된 것은 내가 너무 다른 사람들 돌보지 않고 혼자 잘 먹고 잘 살려고 했기 때문에 그럴 거야” 하고 선행을 하기도 하고 “기도를 열심히 하면 낫게 해 줄 거야” 하고 신유은사 집회 같은데 좇아 다니면서 기도를 열심히 하기도 합니다. 그리고 가족들에게 더욱더 친절하고 다정하게 대 해주면 천지신명이 나를 좋게 봐줘서 병을 낫게 해줄 것이라 생각하고 거래를 하는 단계로 간다는 것입니다.
 
그 거래에 실패를 하고 나면 사람은 극심한 우울증과 자포자기를 하게 됩니다.
그리고 맨 마지막 단계가 acceptance stage 수용 단계입니다. 그것을 받아들이는 단계입니다. 이제 그 죽음을 겸허히 받아들이고 지금까지 살며 짊어지고 왔던 인생의 무거운 짐들을 다 내려놓고 용서할 것 용서하고 사랑 못한 사람 사랑해 주고 하면서 죽음을 준비합니다. 그래서 죽음을 받아들이게 되면 그 사람의 인격이 아주 급격하게 큰 폭으로 성숙해 지는 것을 경험한다고 합니다. 이렇게 final stage가 되면 급격한 인격의 성숙이 일어난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런 마지막 단계까지 가서 아주 아름답게 죽음을 맞는 사람은 매우 드물다고 합니다. 이 final stage에 가서 아름다운 성숙의 죽음을 맞는 사람들은 대부분 신앙을 가진 사람들이더라는 것입니다.
 
죽음은 이렇게 한 인간이 살아생전에 못 다 이룬 인격의 성숙을 이루는 “클라이맥스”이더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들에게 죽음은 귀하고 아름다운 것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이 이 땅에서 인생을 살아내야 하는 유일한 목적이 무엇이라고 했지요?
거룩입니다. 바로 성숙한 삶을 배우기 위해 이 땅을 사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성숙의 클라이맥스가 죽음입니다. 그래서 성도의 죽음은 귀한 것입니다. 물론 죽음을 통과한다고 해서 우리 인간의 성숙이 완성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 죽음을 통과한 후에 하나님의 손에 의해 완전한 성숙이 마무리 될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장성한 분량의 성숙이 죽음에서 이루어진다는 것입니다.
 
지난주에 세상을 떠나신 황재희 집사님이 하늘나라 가시기까지 곁에서 지켜보았습니다. 정확하게 이 과정을 지나가시더라고요. 처음에는 받아들이지 않으십니다. 같이 암 걸렸던 다른 사람들은 지금 건강하게 사는데 왜 나만 이렇게 전이가 되어서 죽어야 하는가? 하고 분노하셨습니다. 그러다가 미국의 신유 은사를 받았다는 어떤 목사에게 전화를 걸어서 전화 기도도 받고 하시면서 “deal"을 하시는 것을 보았습니다. 돌아가시기 5일 전에 집으로 찾아갔을 때는 정말 다른 사람이 되어 있었습니다. 어떻게 하면 저렇게 죽음에 대해 삶에 대해 초연해 질 수 있는가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제가 의아할 지경이었습니다. 그동안 기대하고 의지했던 자기 자아는 완전히 부서지고 오직 절대자의 도움만 바라시면서 편안하게 죽음을 기다립니다. 그리고 그 아픈 사람에게 사기를 쳤던 어떤 아줌마를 용서하시면서 오죽 힘들면 그랬겠느냐고 눈물을 흘리셨습니다. 그리고 남아있는 사람들 걱정을 합니다. 그들이 꼭 구원을 받게 되기를 소원하셨습니다. 죽음 직전에 그 분은 아신 것입니다. 우리 인간들이 좇아가는 그 많은 소원들과 기대들과 비전들과 꿈들과 분노와 이기심이 얼마나 부질없는 것이라는 것을 아신 것입니다. 죽음을 받아들인 한 사람의 인격과 사고가 그렇게 급격하게 변하게 된다는 것을 저는 실감을 했습니다.
 
(엡4:13)
13 우리가 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르리니
  (공동번역)
  마침내  우리 모두가 하느님의 아드님에 대한 믿음과 지식에 있어서 하나가 되어 성숙한 인간으로서 그리스도의 완전성에 도달하게 되는 것입니다.
 
마침내 우리 하나님의 백성들은 완전히 성숙한 자가 되기 위해 사는 것입니다.
이것을 다른 말로 거룩한 자, 순종하는 자라고도 이야기합니다. 죽음은 그 성숙의 과정의 클라이맥스 인 것입니다.
여러분이 잘 아는 스캇팩 박사는 인간은 인생 속에서도 똑같이 무수히 많은 이 죽음의 단계들을 통과한다고 이야기합니다. 우리의 삶에 닥쳐오는 작은 아픔들, 고난들, 핍박들, 그리고 자신의 죄와 악을 통해 인간은 작은 죽음을 경험하고 조금 전에 말씀드린 다섯 단계를 거쳐 성숙하게 된다고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러한 성도의 성숙을 위해 그의 죄를 자꾸 들춰내십니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이 자기의 죄를 남에게 떠벌리고 다닙니다.
처음에는 완강히 부인을 합니다. “아냐, 난 절대 그런 사람이 아냐, 그리고 절대 그 사람이 그랬을 리가 없어” 그런데 알아보니까 진짜입니다. 그러면 이내 “아니, 나만 그러냐?”하며 분노의 단계로 넘어갑니다. 분노를 하다가 이제 세 번째로 “거래 단계”로 넘어갑니다. “내가 평소에 그 사람한테 잘못해줘서 그런 걸 거야” 그러면서 잘 대해 줍니다. 그런데 계속 욕을 하고 다닙니다. 그러면 그 사람은 극심한 우울증과 자포자기에 시달립니다. 그러다가 결국에는 받아들입니다. “맞아, 내가 이런 면이 참 잘못 되었지, 고치자” 그렇게 자신을 성찰하고 반성을 하며 성숙의 단계로 넘어간다는 것입니다.
 
물론 자기의 잘못을 인정하고 남에게 지적을 받고 하는 것이 힘듭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의 성숙을 위해서 우리의 죄를 자꾸 들추어내는 것입니다. 거기서 우리가 자신에 대해 절망하지 않고 좌절하지 않을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은 우리의 죄나 악까지도 선용하셔서 우리를 성숙하게 만들어 가시는 분이시라는 것을 놓치면 안 됩니다. 그런 의미에서 여러분은 부부싸움을 여러분의 성숙에 선용할 수 있습니다. 부부야 말고 상대방의 잘 못된 점이나 죄를 정확하게 집어 낼 수 있는 관계입니다. 아내나 남편이 상대방의 잘 못을 지적하면 우리는 먼저 분노하게 됩니다. 그러나 신앙인들은 부인의 과정과 분노의 과정과 거래의 과정과 실망과 자포자기의 과정과 수용의 과정을 거쳐서 조금씩 성숙되어 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너무 좋은 사람하고 결혼하는 것은 그리스도인에게는 유익이 아닙니다.
 
개리토마스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죄는 무서운 것이지만 죄에서 나오는 겸손은 선하다. 하나님께서 이 때문에 죄를 허용하셨다. 교만한 마음으로 우리의 허물을 돌아보면 비통하고 걱정스럽고 씁쓸한 일이지만 회개하고 겸손하게 되면 하나님께 돌아오는 영혼은 침착하고 평화롭고 확신에 차게 된다. 하나님께서는 가장 헌신된 사람들의 마음속에도 선과 악이 함께 있도록 허락하신다. 그들 속에 남아있는 그러한 불완전함은 그들로 하여금 겸손하게 하고 그들로 하여금 자신들을 객관적으로 보게 하며 자신의 약점을 깨닫게 해서 하나님께 더욱 열심히 달려가게 한다.’
 
이렇게 성령 하나님의 인도 아래 있는 자들은 자신의 죄를 통해서도 한 단계 높은 성숙의 단계로 올라가게 됩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은 우리 자신의 죄까지도 우리에게 유익입니다. 이 역설이 여러분에게 꼭 이해가 가시길 바랍니다.
 
그리고 두 번째로 죄는 아니지만 우리 인간이 도저히 핸들 할 수 없는 고통의 문제들이 있지요? 그러한 것들을 통해서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성숙을 만들어 가십니다.
우리 주변의 사랑하는 사람이 죽는다든지 병에 걸린다든지 사업이 망한다든지, 여러 가지 내 힘으로는 어떻게 해 볼 수 없는 그런 어려움이 닥칠 때 우리는 그 상황에서 내가 아무 것도 할 수 없다는 것 때문에 고통스러워합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그 무기력감의 많은 부분은 인간의 교만 때문에 나오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인간은 한 사람도 빠짐없이 자기 삶의 상황을 스스로 조정하겠다고 하고 그러한 힘이 있다고 착각을 하고 삽니다. 그게 아담의 최초의 죄 아닙니까? 하나님을 하나님의 자리에서 끌어내리고 자신이 그 자리에 앉아 자신의 삶을 스스로 개척해 나가겠다고 결정하고 그리고 자신에게 그러한 힘이 있다고 믿는 것, 그것이 죄의 definition 아닙니까?
 
하나님은 인간의 그러한 교만을 깨시기 위해 인간 스스로 핸들 할 수 없는 일들을 그들의 인생에 자꾸 던지십니다. 그래서 그 상황을 통과하면서 작은 죽음을 경험하는 것입니다. 성도들은 그 작은 죽음을 통과하면서 인간의 한계를 느끼고 배우게 되는 것입니다.
 
군에 있을 때 팀 스피릿 훈련에 나갔다가 제가 탄 차하고 미군 탱크가 정면충돌을 했었습니다. 그 때 충격으로 차 밖으로 튕겨져 나갔습니다. 얼굴로 땅에 떨어졌는데 그 뒤로 6개월을 눈을 못 떴습니다. 그 때 사고로 이 멋진 눈이 이렇게 찌그러졌습니다만 멀쩡한 사람이 앞을 못 보게 되었다고 생각해 보세요.
 
얼마나 두려웠는지 모릅니다. 처음에는 완강히 부인했습니다. “아닐 거야, 내일이면 보일거야” 그런데 한 달이 가도 두 달이 가도 안 보입니다. 수술은 계속 실패입니다.
 
점자를 가르치고 안마를 가르치는 사람이 와서 재활교육을 한다고 했을 때 침대를 다 엎어버렸습니다. 분노가 불일 듯 일어났습니다. 그리고는 하나님께 죽자 사자 매달렸습니다.
deal을 한 것이죠. “하나님 저 눈만 보이게 해 주시면 제 전 인생을 하나님께 바치겠습니다.” 그런데도 안 보입니다. 정말 극심한 우울증에 빠졌습니다. 그리고는 5개월쯤이 지나니까 그 현실이 받아들여졌습니다. 눈이 안 보이니까 그 때까지 제가 가지고 있던 꿈들이나 소원들이 하나도 소용없고 부질없다는 것이 몸으로 체감되었습니다. 그 때 참 많은 것을 배웠습니다. 나중에 사단장님께서 서울대학 병원으로 옮겨 주셨습니다. 그러고 나서 눈을 떴는데 정말 그 전처럼 막 살지 못 하겠더라고요. 하나님께서는 제 삶에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인생의 교훈을 허락하신 것입니다. 그 일은 제 인생의 방향을 많이 바꾸어 주었습니다. 아마 그 때 하나님께서 도와주시지 않았다면 저는 그 작은 죽음을 통과하지 못하고 좌절감과 자괴감에 스스로 목숨을 끊어 버렸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는 그리스도인들은 그러한 작은 죽음들을 통해 성숙한 자로 지어져 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이기적인 자아를 깨기 위해서 자기하고는 아무 관계가 없는 일들을 책임으로 의무로 어깨에 얹어 주시기도 합니다. 그것이 바로 예수님께서 하신 일입니다.
그 것이 성숙의 최고봉입니다. 그래서 우리 삶에 때로는 우리 문제가 아닌 타인의 문제로 내가 아프게 하시고 고민하게 하십니다. 그러한 과정을 통과한 사람들은 그 삶에 그리스도의 향기가 물씬 풍깁니다. 예를 들어 저는 오지에 있는 이름도 모르는 부족들의 언어를 배워서 그들의 성경을 번역해 주는 사역을 하시는 위클리프 선교회 소속 선교사님들을 만나면 절로 고개가 숙여 집니다. 동남아나 중앙아시아, 몽골의 어떤 이름 모를 부족, 아마존의 원주민촌 이런 곳에 들어가셔서 그들의 언어를 처음부터 배워서 그들이 읽을 수 있는 성경을 10년, 20년에 걸쳐서 만드시는 분들입니다.
 
굳이 그 일을 안 해도 자기 먹고살기에는 아무 걱정 없는 분들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다른 이들을 위해 자신의 일생을 사심 없이 바치는 분들을 만나 보면 정말 그 몸에서 알 수 없는 예수의 향기가 전해집니다. 바로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하신 일이 그것입니다. 예수님은 굳이 십자가를 지고 죽지 않으셔도 되는 분입니다. 그런데 자기를 향해 돌을 드는 원수들의 죄를 짊어지고 “내가 다 책임지겠다.“고 분연히 나서신 것이 십자가입니다. 때로 우리 성도들에게 남의 문제로 고민하고 걱정하고 책임을 지는 일이 생겼을 때 우리는”아, 하나님께서 이제 나를 이렇게 까지 인정해 주시는 구나“ 하고 감사하셔야 하는 것입니다. 물론 힘이 들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 일들을 통해 더욱더 예수를 알고 하나님의 마음을 배우며 성숙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모든 것들이 성도들의 인생에서 일어나는 작은 죽음들입니다. 신앙인들은 그러한 작은 죽음들을 통해 점점 성숙한 인격으로 자라게 되는 것입니다.
 
 
(약1:2-6) 2    나의 형제자매 여러분, 여러분이 여러 가지 시험에 빠질 때에, 그것을 더할 나위 없는 기쁨으로 생각하십시오.
    3    여러분은 믿음의 시련이 인내를 낳는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4    여러분은 인내력을 충분히 발휘하여, 조금도 부족함이 없이 완전하고 성숙한 사람이 되십시오.
5    여러분 가운데 누구든지 지혜가 부족하거든, 아낌 없이 주시고 나무라지 않으시는 하나님께 구하십시오. 그러면 받을 것입니다.
6    조금도 의심하지 말고, 믿고 구하십시오. 의심하는 사람은 마치, 바람에 밀려서 출렁이는 바다 물결과 같습니다.
 
이러한 작은 죽음들은 우리를 성숙케 하는 하나님의 따뜻한 배려인 것입니다.
 
그런데 작은 죽음들이 한으로 남지 않고 성숙으로 가기 위해서는 지혜가 필요하다고 하지요?
지혜가 뭡니까? 어떤 지혜지요?
 
(잠8:11-30) 11    참으로 지혜는 진주보다 좋으며, 네가 갖고 싶어하는 그 어떤 것도 이것과 비교할 수 없다.
12    나 지혜는 명철로 주소를 삼으며, 지식과 분별력을 가지고 있다.
13    주님을 경외하는 것은 악을 미워하는 것이다. 나는 교만과 오만, 악한 행실과 거짓된 입을 미워한다.
14    내게는 지략과 건전한 지혜가 있으며, 명철과 능력이 있다.
15    내 도움으로 왕들이 통치하며, 고관들도 올바른 법령을 내린다.
16    내 도움으로 지도자들이 바르게 다스리고, 고관들 곧 공의로 재판하는 자들도 올바른 판결을 내린다.
17    나는, 나를 사랑하는 사람을 사랑하여 주며, 나를 간절히 찾는 사람을 만나 준다.
18    부귀와 영화도 내게 있으며, 든든한 재물과 정의도 내게 있다.
19    내가 맺어 주는 열매는 금이나 순금보다 좋고, 내가 거두어 주는 소출은 순은보다 좋다.
20    나는 의로운 길을 걸으며, 공의로운 길 한가운데를 걷는다.
21    나를 사랑하는 사람에게는 내가 재물을 주어서, 그의 금고가 가득 차게 하여 줄 것이다.
22    주께서 일을 시작하시던 그 태초에, 주께서 모든 것을 지으시기 전에, 이미 주께서는 나를 데리고 계셨다(히, '카나니'. 아퀼라역과 심마쿠스역에는 '나를 소유하고 계셨다'. 칠십인역과 시리아어역과 타르굼에는 '나를 낳으셨다'. '나를 창조하셨다').
    23    영원 전, 아득한 그 옛날, 땅도 생기기 전에, 나는 이미 세움을(또는 '형성되다' 또는 '만들어지다') 받았다.
      24    아직 깊은 바다가 생기기도 전에, 물이 가득한 샘이 생기기도 전에, 나는 이미 태어났다.
25    아직 산의 기초가 생기기 전에, 언덕이 생기기 전에, 나는 이미 태어났다.
26    주께서 아직 땅도 들도 만들지 않으시고, 세상의 첫 흙덩이도 만들지 않으신 때이다.
27    주께서 하늘을 제자리에 두시며, 깊은 바다 둘레에 경계선을 그으실 때에도, 내가 거기에 있었다.
28    주께서 구름 떠도는 궁창을 저 위 높이 달아매시고, 깊은 샘물을 솟구치게 하셨을 때에,
29    바다의 경계를 정하시고, 물이 그분의 명을 거스르지 못하게 하시고, 땅의 기초를 세우셨을 때에,
30    나는 그분 곁에서 창조의 명공이 되어, 날마다 그분을 즐겁게 하여 드리고, 나 또한 그분 앞에서 늘 기뻐하였다.
 
지혜가 누구입니까? 예수 그리스도,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아셔야 합니다.
그 예수 그리스도가 누구이시며 어떤 일을 하셨으며 어떻게 살아가셨는가가 여러분의 작은 죽음들을 성숙으로 승화시켜낼 수 있는 것입니다.
 
(히5:8-9) 8    그는 아드님이시지만, 고난을 당하심으로써 복종을 배우셨습니다.
9    그리고 완전하게 되신 뒤에, 자기에게 복종하는 모든 사람에게 영원한 구원의 근원이 되시고,
 
비천한 목수의 아들로 태어나셔서 가난하게 자라시고 모욕을 받으시고 배반을 당하시고 수난을 당하시고 하는 작은 죽음들을 수없이 겪으시면서 나중에 죽음을 통과하시는 것으로 순종함을 배우셔서 온전하게 되셨습니다. 예수님의 삶은 우리 성도들의 삶의 모범입니다.
예수님께서 그러한 작은 죽음들을 경험하시고 결국에는 죽으심으로 성숙을 완성하셨고 다시 부활하신 것처럼 우리 성도들도 인생동안 우리에게 닥치는 작은 죽음들을 통과하면서 성숙을 배우고 결국에는 육체의 죽음을 통해 성숙의 단계의 클라이맥스에 도달하고 결국에는 예수님과 같은 새 몸으로 부활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의 인생에 작은 죽음들을 계속해서 허락하시는 것입니다.
그러한 많은 경험 중에 가장 강렬하고 가장 최종적인 것이 바로 인간의 육체적인 죽음입니다. 그 죽음이 의식에서 수용이 되면 그 이기적인 자아가 급속하게 붕괴되는 것입니다. 죽게 된 마당에 무엇이 더 필요하겠습니까? 그래서 그리스도인의 죽음은 복된 momentum인 것입니다.
그래서 여러분은 죽음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이어야 합니다. 죽음이 칙칙하고 음울하고 불쾌하고 무섭고 어둡고 두렵게만 느껴지는 것은 사탄의 속임수입니다. 죽음이라는 것이 내 모든 존재가 파괴되고 모든 의미가 상실되는 그런 것으로만 인식이 되어 있다면 여러분은 아직 “사망아 네가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 하고 외칠 준비가 안 되신 분들입니다.
 
그것은 사탄의 속임수입니다. 여러분, 왜 죽음이 두려우세요? 왜 시체가 무섭습니까? 왜 가위를 눌리시죠? 그것은 사탄의 속임수입니다. 여러분 속지 마세요. 다음 주 수요일에 제가 귀신 론을 다루면서 자세히 설명해 드리겠지만 우리는 마귀의 세력을 너무 과소평가해서도 안 되지만 너무 과대평가 할 필요도 없습니다. 구천을 떠도는 귀신은 없습니다. 다 사탄의 속임 수입니다. 여러분이 거듭나신 분이 맞다 면 여러분 안에는 성령 하나님이 계십니다. 거기에 귀신이 범접을 한고구요? 그런 터무니없는 속임수에 속지 마세요.
 
여러분은 죽음과 친해지셔야 합니다. 그리고 늘 여러분의 죽음을 생각하셔야 합니다. 내게도 곧 그 죽음이 도적처럼 닥칠 것이라는 것을 항상 인식하세요. 그럴 때 여러분은 참 인생의 의미를 찾게 될 것입니다. 그 죽음이 결국 나의 성숙을 완성할 것이라는 것을 알게 되면 그 죽음 뒤의 삶이 나의 오늘을 이끌어갈 것입니다. 죽음은 성도들의 삶의 모든 의미가 최종적으로 완성되는 지점입니다. 그 죽음의 자리에서 거꾸로 여러분의 인생을 바라보세요. 그러면 여러분의 인생의 의미가 살아나실 것입니다. 왜 살아야 하는지 무엇을 하며 살아야 하는지 여러분의 죽음의 자리에서 거꾸로 바라보십시오.
그 죽음의 자리에서 나의 인생을 거꾸로 내려다 볼 때 어떤 것이 바른 삶이고 무엇을 추구하며 살아야 할지를 알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삶을 통해 죽음을 알아가야 하고 죽음을 통해 인생의 의미를 깨달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러분 주변에 하나님께서 죽음을 자꾸 보여 주시는 것입니다.
 
찰스디킨스의 크리스마스 캐롤에 보면 그 인색한 스크루우지 영감이 갑자기 착해지는 장면이 나옵니다. 계기가 있습니다. 그는 꿈속에서 자기가 죽은 후를 봅니다. 너무 구두쇠였기 때문에 사람들이 하나도 슬퍼하지 않는 것을 보고 꿈에서 깨어난 뒤 사람이 바뀝니다. 그렇게 자기의 죽음을 자꾸 바라보게 되면 삶의 의미를 찾을 수 있게 됩니다.
 
여러분, 성도의 죽음은 그렇게 암울하고 비참하고 무서운 것이 아니라는 것을 이제 아셨습니다.
이제 여러분도 사도 바울처럼 매일 매일 죽으십시오. 매일 매일 우리의 이 이기적인 자아의 붕괴를 소원하세요. 오히려 아무 일이 없을 때 불안해 하셔야 합니다. 오히려 내 삶이 너무 편안하거든 여러분의 영적 상태를 다시 한 번 점검을 하십시오.
이러한 작은 죽음들이 성숙에 필요한 것인 줄 아는 사람은 그러한 어려움이 닥쳐 올 때 담담하게 받아들입니다.
 
그러나 아직 신앙의 철이 덜 든 사람은 그런 작은 죽음들을 무서워하고 싫어합니다.
마치 아이가 주사를 싫어하듯이 그렇게 싫어합니다. 사실은 자기에게 유익한 것인데 무조건 그 순간의 아픔을 피하고 싶은 것입니다. 그러나 어른들은 일부러 주사 맞으러 갑니다.
어른은 안 아픈가요? 어른도 아픕니다. 그러나 자기에게 필요하기에 수용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숙한 사람은 잘 참습니다. 성숙하지 못한 아이들에게 계속 아픈 주사를 놓으면 그 아이는 한이 맺힙니다. 그러나 성숙한 어른들은 오히려 간호사의 노고에 감사를 합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신앙 안에서 성숙한 사람들은 고난을 당할 때 아프지만 아픈 것으로 끝나지 않고 소망으로 시선을 돌립니다. 아픈 주사를 한 대 한 대 맞으면서 완치의 소망을 갖는 환자처럼 성숙한 신앙인들은 고난에 대해 그렇게 반응을 합니다. 힘들지만 소망을 갖습니다.
그리고는 이런 고백을 하겠지요.
 
(시39:5-7) 5    주께서 나에게 한 뼘 길이밖에 안 되는 날을 주셨으니, 내 일생이 주님 앞에서는 없는 것이나 같습니다. 진실로 모든 것은 헛되고, 살아 있는 사람일지라도 한낱 입김에 지나지 않으니, (셀라)
6    걸어다닌다고는 하지만, 그 한평생이 실로 한오라기 그림자일 뿐, 재산을 늘리는 일조차도 다 허사이니, 장차 그것을 거두어들일 사람이 누구일지는 아무도 모르는 일입니다.
7    그러므로 주님, 이제, 내가 무엇을 바라겠습니까? 내 희망은 오직 주님뿐입니다.
 
그리고 오늘 우리가 택해서 읽었던 본문의 말씀을 이해하게 될 것입니다.
 
(고후4:10-12) 10    우리는 언제나 예수의 죽임 당하심을 우리 몸에 짊어지고 다닙니다. 그것은 예수의 생명을,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11    우리는 살아 있으나, 예수를 위하여 늘 몸을 죽음에 내맡깁니다. 그것은 예수의 생명이 우리의 죽을 몸에 나타나게 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12    그래서 우리에게서는 죽음이 힘을 떨치고, 여러분에게서는 생명이 힘을 떨칩니다.
 
매일 매일 죽으세요. 그러나 여러분은 하나님의 백성입니다. 죽음이 끝이 아니라 우리 예수께서 그 죽음을 이기고 부활을 하셨듯이 여러분은 매일 매일 부활하시게 될 것입니다.
그 부활은 어떨 때는 눈에 보이지 않는 작은 인격의 성숙으로 나타나겠지만 그 작은 부활들이  궁극의 부활로 달려가는 길이라는 것을 잊지 마세요. 힘을 내십시오.



njsmyrna 14-09-05 09:58
    
2005년도 부활절 설교 (죽음 그리고 작은 죽음들)의 원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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