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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13-03-22 05:21
   할머니를 부탁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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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글쓴이 : njsmyrna
    조회 : 9,021  




일본 작가 다자이 오사무의 글을 인용하며, 신경숙의 ‘엄마를 부탁해’라는 소설을 ‘귀신의 궁시렁’으로 평가를 해 버린 어떤 이의 글을 읽은 적이 있다.
잘 모르는 이가 참고하라고 보내 준 글이어서 찬찬히 내려 읽다가 확 짜증이 일었다.
그 글을 쓴 이의 주장은 엄마의 희생을 먹고 자라는 그 엄마의 자식들은 궁극적으로 엄마의 무덤일 수밖에 없는 고로 ‘엄마를 엄마의 자리에서 놓아주자’는 것이었다.
이 세상 모든 엄마들에게 암묵적이며 생래적으로 요구되는 희생과 비움의 삶이 공평하거나 정당할 수 없다는 것이다.
 
물론 인간들은 누군가의 희생으로 ‘나’라는 존재의 유익을 챙겨 가지려 하는 본능적 죄 성을 보편적 속성으로 갖고 있는 악한 존재들이다.
그리고는 선악과 따 먹은 타락한 양심으로 그 희생 앞의 면목 없음을 ‘찬양과 칭찬’이라는 도구로 얼버무리려하는 사악한 경향을 갖고 있다.
그건 희생에 대한 찬미가 아니라 다른 이의 희생을 즐기는 엽기라 했던가?
그렇다. 그건 엽기다. 상대방의 희생의 피가 묻어 벌겋게 되어 버린 흡혈귀의 입으로, 자신이 막 빨대를 뽑은 먹이의 훌륭함을 칭찬하는 꼴이 아닌가...
 
그러나 그가 모르는 것이 있다. 바로 그러한 바보 같은 희생들이 이 역사를 이만큼이나마 지탱하게 하고 있다는 것을... 그것이 바로 이 역사의 에너지라는 것을....
자기 어머니의 희생을 자기 아내에게서 찾으려 하면서, 자기 딸 만큼은 그렇게 살지 않기를 바라는, 모든 보편적 아담군상들의 이율배반적 모순 속에서
이 세상 어머니들의 희생의 피는 그 역사 속 흡혈귀들의 갈증을 지금도 채워 내고 있다.
 
할머니...
김성수라는 사람의 자전적 이야기 속에서 늘 친 할머니의 그늘 뒤로 숨겨져 버린 우리 외할머니.
90이 훨씬 넘은 연세에 이제 인공호흡기만을 의지해서 하루하루를 그저 연명하고 계신 우리 할머니...
그 할머니가 위독하시다. 할머니가 계신 대구로 내려갔다. 중환자실의 그 음산하고 구역질나는 분위기...
많은 이들이 인류가 생산해 낸 억지 숨 도우미에 매달려 겨우 숨만 쉬고 있다.
 
그게 살아 있는 거 맞나?
 
그렇게 얼기설기 엮여있는, 살아있다고 하나 이미 죽은 자들의 생명줄은 그것을 보는 이들이 체감하고 있는 삶의 고통의 무게를 한층 더해 준다.
그 사람 들 속에서 할머니를 찾을 수 없었다. 내 기억속의 할머니는 그 속에 없었다.
 
할머니는 참 정갈하고 깨끗한 분이셨다.
할머니가 사는 집은 늘 반질반질 윤이 났고, 부엌이나 화장실, 거실, 안방, 할 것 없이 할머니가 지나간 자리는
그 어떤 강력한 새니타이저로도 흉내 낼 수 없는 청결함이 있었다.
옷차림새며 매무새는 어떤가? 할머니가 당도한 세월의 계단 각 층에서 할머니는 단연 우월했다. 패션리더...
안경에 지팡이, 스카프 하나하나까지, 할머니는 색이며 모양새를 맞추어 입으셨다.
독립운동을 하시다 돌아가신 외할아버지를 그대로 닮으셔서 늘 여 장부같은 포스로 좌중을 압도하셨다.
할머니가 살던 마을에서 할머니 땅을 밟지 않고 지나다닐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재산을 가지셨던 할머니...
그래서 늘 주변에 사람이 많았다.
어디에 앉기만 하면 그 주변 사람들을 순식간에 당신의 청중으로 만들어 버린 입담과 재기가 항상 할머니 주변을 시끌벅적하게 만들었었다.
장고며 꽹과리에 능숙하셨고 노래 실력도 일품이었다. 난 아마 외탁을 한듯...
 
그런데 그 할머니가 없다. 중환자실 한 켠에서 마른 장작처럼 가늘고 연약해져 버린, 혼자서는 숨도 제대로 쉴 수 없는 할머니를 발견했다.
이게 인생의 결국인가?...
할머니는 내 기억 속의 그 분이 아니었다.
난 할머니를 불렀다. 어린 시절 늘 내 곁에서 그림자처럼 날 챙겨주던 그 할머니에게 투정이나 부리던 그 목소리, 그 톤으로 할머니를 불렀다.
놀랍게도 할머니가 눈을 뜨셨다.
그리고는 초점이 맞추어진다. 한동안 ‘이게 누군가?’ 생각을 하시더니 이제 더 이상 소리를 낼 수 없는 입을 한껏 벌리며 우신다.
분명 통곡인데 소리가 안 난다.
그 눈에 흐를 눈물이 아직도 남아 있었던가?
 
 
할머니가 운다.
애써 눈물을 참았다. ‘할머니, 우리 천국가면 금방 만날 건데 뭐, 할머니 좋지? 이제 천국 가니까 좋지?’
 난 웃으며 할머니에게 다시 예수의 이야기를 조곤조곤 해 댔다.
할머니와 목사인 손자의 마지막 예배랄까...
‘할머니 내가 기도해 줄게’ 난 핏기 없이 차가워져 버린 우리 할머니의 손을 잡고 오랜만에 간절한 기도를 했다.
옆에 있던 누군가가 이야기했다. 이제 그토록 보고 싶어 하던 큰 손주 보셨으니 편안히 가시겠다고...
입만 열면 '왜 우리 귀한 장손이 그 힘든 목사 일을 해야 하냐'고 안타까워 하셨다는 할머니...
 
한 손으로도 들 수 있을 것 같은 마른 노구에 90년의 역사가 고스란히 담겨 있다. 그리고 그 역사는 이제 무덤을 향해 행진할 준비를 하고 있다.
아무 것도 남겨진 것 없고, 아무 것도 보이는 것이 없다. 그 화려한 여인의 향기도, 늘 그녀를 향해있던 세간의 이목과 인기도 더 이상 보이지 않는다.
하나님 앞에서의 모든 인간의 결국이 그렇다.
 
아무 것도 가진 것 없이 핏덩이 아기로 와서 자신의 힘과 지혜와 의지를 발동하여 ‘하나님처럼’의 삶을 열심히 추구하다가 ,
결국 다시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핏덩이 아기가 되어 간호사들의 반말 지꺼리를 들어내며 쓸쓸히 무덤으로 떠나야 하는, 그것이 인생이다.
핏덩이 아기에서 다시 핏덩이 아기로...
그건 하나님 앞에서의 인간들의 실존을 너무나 잘 설명해 주는 모형이다.
그래야 하나님 나라의 백성일 수 있는 게다. 천국은 어린 아이들의 것이다....
 
그래서 그런가? 할머니가 오래 전, 손주가 선물해 준 곰돌이 인형을 안고 계시다.
아흔이 넘은 나이에도 여전히 고운 손, 예쁜 손톱. 그 손으로 내가 산 인형을 안고 있다.
그러한 할머니의 비움의 삶, 희생의 삶이 오늘 날 나를 있게 한 것이다.
그런데 우리가 엄마를 놓아주어야 하나?
아니다. 오히려 우리는 이 세상 모든 이들의 엄마 화, 를 꿈꿔야 하는 것이 아닐까?
비록 꿈일지라도... 거기가 천국이 아닌가?
 
 
할머니에게 마지막 허그를 했다. 그리고 귀에 대고 조용히 이야기 했다.
 
‘할머니, 잘 가. 이제 이 땅에서는 다시 못 볼지 몰라. 그러니까 할머니 잘 가..’
 
그런데 그 때까지 참았던 눈물이 터져 버렸다. 주체 할 수 없는 눈물이 흘렀다.
할머니가 나를 바라보신다. 그리고는 또 그 소리도 나지 않는 입을 열어 무언의 통곡을 하신다.
 ‘울지마, 내 손주. 울지마. 우리 천국에서 만날 건데 뭐...’ 하시는 것 같았다. 아니 분명 그 소리였다.
 
결국 소리도 나지 않는 그 입에서 토해지던 통곡은 할머니의 바튼 기침이 되어 간호사들이 뛰어왔다.
할머니가 계속 나를 보신다. 그 눈이 계속 나를 응시한다. 그 눈에 눈물이 자꾸 맺힌다.
난 그 할머니를 두고 나와야 했다. 나오면서 다시 이야기 했다.
‘할머니 울지마, 할머니 잘 가...’
 
그렇게 모두 비워 내고 아버지께 갈 날을 가슴 깊이 소원하며 하나님께 기도했다.
‘하나님, 할머니를 부탁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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