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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17-02-05 07:13
   자유 자유 자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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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글쓴이 : njsmyrna
    조회 : 14,759  




수요일
설교를 해야 하는 날,
하루 종일 원고와 씨름하며 설교를 하러 올라가는 그 시간까지
피가 마르는 작업을 해야 하는 날이다.
그런데 난 설교원고를 작성하는 일을 뒤로 미루고
이렇게 간증을 하고 있다. 그래, 간증이다.
이 감동을 빨리 나누고 싶어 설교 원고도 뒤로 미루고 이렇게 글을 쓴다.
작년 한 해, 참으로 다사다난한 경험을 한 한 해였다.
극한의 외로움과 어두움과 절망을 경험한 한해였다고나 할까...
교인들이 수백 명씩 늘어나고 인터넷에 올라가 있는 설교의 조회 수는 수천 명씩 늘어나고 있었다.
그런데 정작 설교를 하는 사람인 내가 신명이 나지 않았다.
주님이 함께 하신다는 설교를 하면서 정작 본인은 외로웠고,
주께서 이기게 하신다는 설교를 하고는 처절한 절망의 시간을 보내기도 했다.
하나님이 도대체 계시긴 계신건가, 하는 불경한 생각이 수시로 나를 덮기도 했고,
그러한 나의 믿음 없음을 들키지 않기 위해 더욱 더 설교를 열심히 했다.
그런데 하나님은 말씀 앞에서 나를 갈기 갈기 찢어 내셨다.
내가 설교하고 있는 그 내용들이 내 삶에 경험되기 시작한 것이다.
아니 그 일은 이미 시작되고 있었는데 내 삶을 향한 열심이 그것을 감지하지 못하게 만든 것이리라.
내가 근사하게 감추어 두었던 진짜 ‘나’를 직면하게 되는 건, 차라리 죽는 것만 못하다.
그건 고통이요, 아픔이며, 그야말로 환난이다.
매일같이 설교를 그만두어야 한다는 강박에 시달렸다.
내가 이 고통과 외로움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설교를 그만 두는 길밖에는 없다는 생각이
머릿속에 가득 차 있었다.
후배들이 자리를 잡고 있는 지리산 산자락에 작은 집을 짓고
가족들과 함께 조용히 살고 싶었다. 그곳에서 그 작은 무리들과 성경을 공부하고
삶을 나누며 그렇게 소박하게 살고 싶다는 것이 최고의 기도제목이었고 처절한 희망이었다.
설교를 하는 자는 반드시 그 설교를 살게 되어있다는 구약의 진리가 나에게는 너무 고통이었다.
그래서 난 수시로 탈출을 꿈꾸었다.
남들은 이야기 한다. 도대체 어떤 사명감이 저에게서 저러한 열심과 강단을 발출시켜 내었는가?
천만에, 난 사명감으로 설교를 하지 않았다. 굳이 다른 단어로 이야기를 하라면 ‘정’이었다.
하나님에 대한 ‘정’, 교인들에 대한 ‘정’, 그 정은 애정이나 사랑 같은 것과는 사뭇 다른 것이라는 걸 독자들도 알리라.
아무튼 인터넷을 통해 서머나 교회의 이름은 계속 알려지고 있었고, 좋은 평이든, 나쁜 평이든 여기저기에서
수많은 평가들이 쏟아지고 있었다. 난 그런 것이 못내 불편했다.
이런 저런 사이트에 우리 교회 설교를 녹취해서 올리거나, 오디오 파일을 올려놓고,
그 아래 수많은 댓글들을 열리게 하는 이들이 참으로 못마땅했다.
어차피 보이지 않는 묵시는 무한의 하나님께서 계시해 주신 만큼만 보게 되어 있다.
그리고 닫으시면 언제든지 소경이 되는 것이 유한의 실존이다.
그런데 인터넷 안에는 너무나 많은 무한의 계시자의 자리에 앉아 있는 듯한 이들이 있더라...
자기가 가지고 있는 교리와 신학의 틀을 사용하여 우리 교회 설교를 가지고 이런 저런 요리를 만들어 내고 있는
그들의 모습이 참 악하다고 느꼈다.
인터넷을 차단해 버릴까? 여러 번 생각했다. 그럴 때마다, 목사님, 이제 살아났습니다, 저는 이제 자유 합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찬송합니다, 등등의 메일들 속에 있었던 그들이 생각났다.
아무튼 난 지난 한 해 하나님 앞에서 완전히 나 자신을 폭로당하는 삶을 살았다.
유약하고, 더럽고, 사명감도 없고, 여전히 자기만을 위하는, 그런 자...
맞다. 다른 이들의 공격이나 조롱이나 모함이나 거짓말이나 배신 등보다 더 나를 괴롭힌 것이
‘나’라는 존재에 대한 실존 자각이었다. 보다 못한 지인들이 우울증 치료를 권하기도 했다.
그만큼 강대상 위의 나의 모습과 강대상 아래의 나의 모습이 달랐던가보다.
그러한 아빠를 보며 아이들이 많이 우울했으리라. 며칠 전 냉장고에 붙어있는 아이들의 성적표를 보게 되었다.
1년 내내 아이들이 받아 온 성적표를, 난 단 한 차례도 확인 한 적이 없었다. 아이들의 성적에 그닥 관심이 없었으니까.
학교 성적보다는 올바른 신앙인이 되라고 늘 가르쳐 왔던 터였다.
그런데 올바른 신앙인에 대한 정의조차 헛갈리는 상태에서 아이들의 상태가 내 관심의 대상이 되었을 리가 없다.
참 못난 아빠다.
그런데 아이들의 1년 성적표가 전부 A+로 채워져 있었다.
‘우리 애들이 원래 이렇게 공부를 잘했나?...’ 아니었다. 적어도 내 기억으론 이 정도는 아니었다.
정신이 번쩍 들었다. 아이들에게도 이렇게 관심을 못 가질 정도로 내가 무엇에 그렇게 힘들어 하고 있었는가...
아이들을 불러 아이들에게 물었다. 아빠 앞에 오면 여전히 밝은 막내로 변해 버리는 우리 바다,
사춘기에 접어들어 말은 많이 없어졌지만, 아침 저녁으로 늘 ‘아빠 사랑해요’를 잊지 않는 우리 하늘이,
아빠보다 더 아빠를 챙겨주고 걱정해 주는 우리 영민이. 아이들을 앉혀 놓고 물었다.
‘어떻게 이렇게 일 년 동안 공부를 열심히 했어? 아빠만 몰랐네’ 아이들이 이구동성으로 대답했다. ‘아빠, 힘 내세요.’
난 그 말 한 마디에서 아이들이 하고 싶은 이야기를 다 읽어 낼 수 있었다. 언젠가부터, 집에서도 교회에서도 설교에 찌들어,
사람들에게 찌들어 웃지 않는 아빠, 밥 먹을 때에도 수시로 한 숨처럼 숨을 몰아 내 쉬는 아빠,
웃을 일도 없고 웃겨 주는 사람들도 없는 것 같아 늘 슬픈 것 같은 아빠를 기쁘게 해 드리기 위해 셋이서 약속을 했단다.
우리라도 말썽 부리지 말고 열심히 공부해서 아빠를 기쁘게 해 드리자고....
얼마나 아이들이 고마운지 눈물이 났다. 나의 아픔이 아이들에게 거름이 되어 이렇게 훌륭한 아이들로 변화시켜 낼 수 있다면
이보다 더 큰 고통도 마다하고 싶지 않다는 생각까지 들게 되었다.
그랬구나. 하나님은 여전히 하나님의 일을 하고 계셨구나.
철부지 아이들을 아빠를 위로하는 아이들로, 다른 이에게 행복을 전해 주고 싶어 하는 아이들로 바꾸고 계셨구나...
어제 밤 꿈을 꾸었다. 하얀 독사 두 마리가 나를 노려보고 있는 그런 꿈...
나의 손엔 성경이 들려 있었다.
난 사람들에게 치이고 일에 치일 때, 달리 숨을 데가 없었다. 그럴 때마다 난 성경으로 숨었다.
작년처럼 성경을 열심히, 그리고 깊게 읽었던 적이 있었나?... 아니 없었다. 난 수시로 말씀 속으로 숨었다.
그래야 숨이 쉬어졌으니까...
그래서 꿈속에서 성경을 들고 있는 내가 그리 생경치 않았다.
뱀들은 날 비웃듯 노려보고 있었다. 난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성경을 펴서 뱀 대가리를 눌렀다.
말씀의 무게에 뱀 대가리 둘이 박살이 났다. 난 성경을 다시 집어 들었다. 그리고 편 곳이 히브리서 12장이었다.
그 순간 꿈에서 깨었다. 오늘 새벽 설교 본문이 히브리서 12장이었다.
난 어제 밤 오늘 새벽 설교를 위해 히브리서 12장을 계속 묵상하며 잠자리에 들었었다.
그래서 꿈속에서 펴들었던 성경에 히브리서 12장이 나왔었나보다.
난 요즘 새벽 두시면 교회 사무실에 나와 앉아 공부를 한다. 새벽 설교에 좀 더 신경을 쓰기 위해서이다.
세 시간 반을 꼬박 묵상하고 공부를 하여 새벽 설교를 한다. 하루 중 정신이 제일 맑을 때...
난 새벽 설교를 하면서 참 많은 것을 얻는다. 그리고 그 시간에 많은 인사이트를 얻는다.
그래서 새벽 설교는 죽을 때까지 할 요량이다.
그래서 그런지 요즘 새벽 설교 시간에 사람들이 많이 몰린다.
오늘도 새벽 설교를 하기 위해 어김없이 두시부터 히브리서 12장을 펴고 앉아 본문을 읽고 또 읽고, 묵상하고 또 묵상하고 했다.
그런데 히브리서 12장 안의 그 많은 말들이 다 사라지고 그 안에서 ‘사랑’이라는 단어만 남아 있었다.
히브리서 12장은 히브리서 11장의 믿음의 선진들이 믿음에 의해 끌려가는 삶을 살면서
왜 그러한 고난을 통과할 수밖에 없었는지를 아주 잘 설명해 주는 부분이다.
그 삶이 얼마나 힘이 들었으면 성경 번역을 하는 이도 그 삶을 ‘징계’라고 번역을 했을까...
그런데 아니었다. 그 ‘징계, 파이데이아’라는 단어는 ‘아들 만들기’라는 단어이다. 그런데 그 아들 만들기 작업은
하나님의 사랑에서 발출이 된다는 것이 히브리서 12장의 핵심이다.
난 정확히 감지했다. 나를 둘러싸고 있던 어두움과 외로움이 걷히고 있는 것을...
말씀의 힘... 이게 말씀의 힘이구나... 나도 모르게 중얼 거렸다.
그리고 그 사랑으로 요약되는 지난 한 해가 주마등처럼 지나갔다.
‘그렇다면 내 주변의 사람들도, 사건들도, 일상도, 모두 다 하나님의 아들 만들기의 재료였다는 것인가?’
답은 ‘그렇다’였다. 갑자기 찬송이 터졌다. 난 큰 소리로 찬송을 불렀다.
‘주님의 높고 위대하심을 내 영혼이 찬양하네...’
모든 것은 하나님의 일하심의 결과이며 그것들은 다 합력되어 ‘선’으로 향한다는 하나님의 말씀이 가슴 속에서 튀어 나왔다.
그리고 그게 너무 감사해서 계속 찬송을 불렀다.
그런 거구나.. 우리의 삶의 모든 것은 그렇게 하나님께서 우리의 육을 죽여 내기 위해 마련해 두신 사랑의 재료들이구나...
갑자기 내가 미워했던 사람들이 불쌍해졌다. 아니, 감사하기까지 했다. 나의 아들 만들기의 재료로 사용되어 준
그들의 삶이 고마워졌다. 그리고 우리 서머나 가족들이 너무 사랑스럽게 느껴졌다. 그리고 그들 모두에게 진심으로
큰 절을 올리고 싶어졌다.
난 그렇게 강대상으로 뛰어나가 그 어느 때보다 열정적으로 설교를 했다.
아마도 3월에 한국으로 떠나게 되면 그 3월 한 달 간 동영상으로 새벽 설교가 나갈 때, 그 설교도 나가겠지...
자유, 안식, 평안... 그래 이거다. 우리에게 간섭하셔서 결국 우리에게 만들어 내실 하나님의 열매,
그래서 우린 안전한 거다. 하나님의 열심이 있으므로...
엄마와 함께 우리 세 아들이 내 앞에서 무릎을 꿇고 한 말이 떠오른다. ‘아버님, 우린 아버님이 어디에 있든,
어떤 상황에 처해지든 아버님이랑 함께 살 거예요. 그러니까 우리도 한국에 데려가 주세요.’
우리 아이들은 이 곳 미국에서 태어나 미국에서만 자란 아이들이다. 한국이라는 낯선 나라, 낯선 문화, 낯선 사람들,
다 생경한 터... 그런데 아이들은 그런 거 다 괜찮으니까 아버님이랑만 함께 살게 해 달라고 울더라...
거기 가서도 여기처럼 일등만 할 수 있으니까 함께 데려가 달라고...
그래, 함께 가자. 어디든, 무엇을 하든, 너희들을 지켜주마. 그리고 지금까지 너희가 아빠를 사랑해 준 것처럼 이제부터는
아빠도 너희들을 그렇게 사랑해 주마...
비로소 사명감이라는 게 무엇인지 알았다. 그렇게 내 천국 가족들을 사랑하는 거다.
사랑이라는 이름의 예수를, 내가 받은 그 하나를 내 가족에게, 그리고 천국 가족들에게 전하는 거다.
이제 나의 두 번째 사역지로 나를 떠나보내며 하나님은 나에게 그 사랑을 가르쳐 주신 것이다.
하나님 감사합니다. 제게 허락해 주셨던 합력되어 선이 되는 '모든 것, 모든 사람'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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