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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15-06-22 06:37
   주님을 본받는 삶이란?
 글쓴이 : admin
    조회 : 19,791  


(서울 노요한님 글)"


이를 위하여 너희가 부르심을 받았으니 그리스도도 너희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사 너희에게 본을 끼쳐 그 자취를 따라

오게 하려 하셨느니라"(벧전2:21)

 

2013년에 대한불교 조계종 총무원장 자승 스님은 이날 성탄축하메세지를 발표하며 이웃을 네몸같이 사랑하라는 예수님의

가르침이 더욱 절실할 때 다양한 이웃의 존재를 인정하고  존중하며 공동의 선을 향해  함께 나아가도록 노력합시다는

축하메세지를 발표한적이 있어요

 

이처럼 불교의 스님까지도 주님 남기신 말씀은 우리 모두가 본받아 살아야하는 최고의 가치임을 인정하고 함께하자고

격려할 정도입니다. 그분을 본받으려는자 인간의 열심과 노력으로 주님이 사신 그 삶을 본받아서 우리가 그리스도를

닮아갈수 있다고 믿고 있는것 같은데 이는 대단한 착각의 시발점입니다.

 

이런 믿음은 결국 예수를 위대한 성인군자 중 하나를 만들뿐, 우리의 믿음엔 전혀 도움이 되지 않아요. 근사하게 포장된

옛 성현들의 위대한 삶을 본받겠다는 사상과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 구속 사역을 같은 차원에 놓게되는 누를 범하게

되는 겁니다.

 

  <찬송가 455장>

  '주님의 마음을 본받는 자'

주님의마음을 본받는자 그 맘에 평강이 찾아옴은
험악한 세상을 이길힘이 하늘로부터 임함이로다
주님의마음  본받아 살면서 그 거룩하심 나도 이루리

 

개인적으로 너무나 좋아하는 찬송 중에 하나입니다.

이 찬송을 부를때만큼은 뭔가 숙연해지고 경건해지면서 그래 주님의 마음을 본받아 살아야지 다짐을 하게 되는데.

그러나 이내 그런 다짐은 물거품이 되곤하죠. 언제나 거룩엔 근처도 못가고 무너지곤 할때가 많잖아요.


당신은 성화를 부정하는가?

이런 질문을 받을때가 있어요. 물론 성경엔 성화란 단어는 언급되어 있지 않지만 그렇다고 부정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지금 우리가 생각하고 있는 그딴식의 성화는 아니라 생각하고 있을 뿐입니다.

 

만일 주님을 본받는 삶이 우리 노력으로 이루어진다면.

그럼 기독교의 본받는 성화적 신앙이나 타종교의 옛성현들의 가르침을  본받아 귀감이 되는 그런 삶을 살자는

그것과 뭐가 다른겁니까?  이리되면 기독교의 필요성이  없어지잖아요. 그래서 종교는 결국 하나다 이런 헛소리가

나오는 겁니다.

 

그것이 사실이라면.

아마도 '뜨레스디아스의 교육'이나 '대천덕신부의 영성강의'나 예수의 삶을 그대로 살고 있다는 시골 나무꾼 농부

엘리야로 지칭되었던 박아무개의 가르침을 받는 길이 더 빠를 것입니다.

그분의 말씀을 듣고 있으면 양심이 맑아져서 '아우렐리우스의 명상록'보다 '슈바이처의 회고록'보다 '노자 도덕경'에

버금가는 그런 사람을 변화시키는 말씀을 그리고 삶을 그대로 실천하고 있다고 하지 않습니까.(자기네 주장이지만)

 

여기서 본은 우리가 따라야 할 어떤 모형이요. 샘플처럼 앞에 세워놓고 다들 따라해봐 하듯이 부대장이 멋진 시범을

보여준 것이 아니라는 겁니다. 서로 코드가 같으면 자연스레 통하게 되어있고 같은 작용이 나타나게 되어 있잖아요.

이는 어떤 모형답안을 제시한다기 보다는 마치 컴퓨터의 버전(version)이 같으면 동일한 프로그램이 작동하게

되어 있는 것처럼 말입니다.

 

아들됨의 기초가 되었고. 복음의 핵심인 진리의 실체가 되었다는 그런 의미일 겁니다.

즉 그리스도 안에서 성령과 말씀으로 새롭게 아들로 태어난 자들은 주님과 같은 운명을 갖게 되어 있다는 뜻입니다.

같은 증거와 표징이 나타난다는 것인데 그것이 고난과 핍박이라는 거에요.

너희가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자들은 반드시 핍박이 나타나리라고 한 것처럼 말입니다.(딤후3:12)

 

복음의 핵심은 십자가인데 그것이 고난으로 제자들의 삶에 그대로 나타난다는 그런 의미이겠죠.

마치 공식처럼 말입니다. 이는 어떤 이단종파에서 처럼 핍박받을 짓만 골라 하면서 이것봐 우리가 참종교라는 증거가

핍박인데 이처럼 박해와 모욕을 받고 있지 않는가? 이런 속보이는 주장을 하는 자들도 있는데 내가 잘못하여 받게되는

모함이나 모욕을 스스로 자초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인이기에 어쩔 수 없이 받게되는 고난을 지칭하는 것입니다.

 

애당초 택자인가? 유기된 자들인가?  즉 알곡이냐 가라지냐의 문제인것입니다.

그래서 같은 성향이면 특질이 같아지겠고 가치관이 같아지면 지향성이 같아지게 되어 한방향으로 나가게 되어있잖아요.

이런 것을 본을 끼쳤다. 그리고 본을 보여 줬다고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자나 다 한 성령으로 세례를 받아 한 몸이 되었고 또 다 한 성령을 마시게

하셨느니라"(고전12:12)

 

그리스도 안에서 한 성령을 받은 성도들은 한 지체이기 때문에 같은 운명체가 된다는 것이지요.

성도들에게만 이런 반응이 나타나게 되어있는데. 하나님의 작정과 섭리안에서 그렇게 되어지도록 셋팅 되었다는

그런 의미에서 본을 받으라는 것은 우리가 따르고 지켜낼 어떤 명령이나 지문으로 보고 우리가 본받아야 할 덕목이나

지켜낼 규례로 보게되면 반드시 고급한 성화주의에 빠지고 맙니다.

 

그렇게 되면 기독교의 은혜성이 없어지고 모든 종교가 다 하나를 이야기하는 것이란 결론에 도달하게 되는 것이죠.

그럼 절간이나 예배당이나 다 같은 말이네요. 그럼 난 봉덕사에가서 스님 설법을 듣는것이 더 낫겠네요. 이렇게 되지 말라는

법이 어디 있겠어요. 증산도에가서 도를 배우는 것이 더 나을 것 같다고 하지 말라는 법이 어디 있겠냐는 그런 말입니다.

 

우리의 본받는 삶은.

택자가 아니라면 아무라도 따라갈 수 없고 어떤 위인도 흉내낼 수 없는 우리 기독교만이 가진 유일무이한 것이어야 합니다.

그것은 예수의 십자가 밖에 없어요. 그래서 바울도 난 오직 십자가만 자랑한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갈6:14)

 

예수의 행하신 일을 본받겠다는 생각은 그분을 인간의 반열로 끌어내리는 것입니다. 

예수그리스도를 성인군자의 반열에 놓고 우리가 노력만하면 그 분이 가신 길을 나도 따라 갈 수 있다며 그렇게 작심하면

따를 수 있는 그런 삶으로 오해하게되면 기독교는 아주 무색하게 되는 것입니다.

 

주님가신 그 길을 목숨걸고 따르겠다는 베드로에게 주님은 무어라 하십니까?

다 주를 버릴지라도 나는 언제든지 버리지 않겠나이다”(마26:33)라고 힘주어 말할 때 주님은 이렇게 말하고 있어요.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밤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 베드로가 가로되

내가 주와 함께 죽을지언정 주를 부인하지 않겠나이다 하고 모든 제자도 이와 같이 말하니라

(마26:34, 35)

 

너는 닭울기 전에 세번이나 나를 부인하게  되어 있어 그렇게 정해진 것이란다. 그것이 나를 따르는 자들에게

나타나야 할 제자됨의 확실한 증거란다. 그 때는 그 의미가 무엇인지 잘 몰랐으나 그 배신의 경험을 통하여 예수의 믿음은

내 결기로 지켜지는 것이 아니구나, 나의 다짐과 결단으로 되는 것도 아님을 배우게 되었다는 거죠.

 

사도 바울도 매맞고 조롱당하고 고난당하는 그 길로 끌려간것처럼 주님에 의해 자신도 모르게 질질 끌려가는

아고의 삶이 진정 주님을 본받아야 할 자들에게 나타나는 유일한 표징이라면 여러분은 그 고난을 본받기 위하여

무엇을 할 수 있나요? 그 고난으로 점철된 삶을 살았던 바울은 자신있게 내가 그리스도를 본받은 것처럼 너희는 나를

본받는 자들이 되라고 말합니다.(고전11:1)

 

우린 고난의 길을 자청하여 이것이 자기부인이라고 선택하며 그 길을 가기는 쉽지않아요.
그런 일을 당하게되면 당황하거나 놀라지말고 이것이 주께서 본을 보이시고 그렇게 끌고가겠다는 아고의 삶이구나?

이것을 배우고 주안에서 평안을 누리라고 그분이 본으로 먼저 그 길을 가셨다는 것을 믿으라는 그런 뜻입니다.

 

사람들이 주를 본받는 것은 제일 먼저 그 고난에 동참하는 것, 그리고 주의 이름으로 핍박을 받게 될 것임을 진작 알고

있었다면 섣불리 주를 본받겠다 나서지 않았겠죠. 하지만 지금도 주님의 온유를 본받고자 하는자들, 오래참으심을 본받고자

하는자들, 기도하시며 아버지께 순종하신 그 믿음을 본받고자 하는 자들 주님의 마음과 그분이 하신 일들이 그리 쉽게 본받아

진다면 아마 그렇게 말하는 그분은 하나님이거나 예수의 속죄가 필요없는 완전한 인간일겁니다. 예수그리스도를 믿을 필요조차

없는 그런 자라는거잖아요. 본받겠다고 너스레를 떠는 자들에게 피할 수 없는 결정적인 오류입니다.

 

나를 심판하시려는 그 주님을 우리는 믿지 못하고, 내가 아버지 앞에 이쁨받을 수 있는 행위를 해야 직성이 풀리는 자들

뭔가 행위로 나의 나됨의 증거를 내놔야 하고 그렇지 않으면 불안해서 못 견뎌하는 자들이 있어요.

그래서 철야기도를 쉴 수 없데요. 가끔씩 금식하지 않으면 허전하데요. 기도도 부르짖지 않으면 한거같지 않고요.

뭐 이런 것이 대단히 믿음인양. 그리 알고 있다면 언제나 본 받아야 할 주님의 일을 찾아 계속 헤매이게 되어있어요.

 

그래도 본받기를 원하신다고요.

진정 주님말씀대로 순종하며 그분 뜻대로 살아 보기라도 하실건가요?

그래서 남이 오리를 가게하면 억지로 십리를 동행하고 왼쪽 빰을 때리면 오른쪽 빰을 돌려 대줄만큼 그리 베알도 없이

살아야 한다는 건가요. 그렇게 살아 보시지요. 그러면 내가 주님말씀대로 살고 있다는 그  의는 하늘을 찌르겠죠.

하지만 그 뿌듯함은 그리 오래가지 못할겁니다.

 

그리고 이내 그리 못사는 자들을 향하여 '왜 난 하는데 넌 못 하는거야 그렇게 막살아도 된다는거야' 이렇듯  비판과

정죄의 칼을 마구 휘둘러 대겠죠. 언제나 교회에서 큰소리로 주도권 다툼에 앞장서는 자들은  새벽기도 철야기도 때 목소리

높여 기도했던 자들이에요. 성경 많이보고 성경에 능통한 자들이 그건 성경적이 아니다 하며 남을 평가하고 판단하며 자신이 

잘못가고 있다는 생각은 아예 안하는 자들을 저는 많이 보아 왔습니다.

 

그들의 기도는 오로지 자기 힘을 키우는데 올인했다는 증거 아니겠어요. 차라리 새벽기도도 못하고 철야기도도 못 나가서

 '에고 이래가지고 내가 뭔 예수를 믿겠다고 주여 불쌍히 여겨주소서!'하는 자들에게 더욱 은혜가 임하는 것이 아닐까요.


주님은 네가 나를 세번 부인할거야 베드로의 자신감에 아주 초를치며 확실하게 배신자로 쐬기를 박는겁니다.

그러나 절대 그러지 않겠다고 맹세했던 베드로의 그 다짐은 너무도 쉽게 무너져 버립니다.

그때 그는 아직 자신의 실존을 알지 못했으며 너무 과신한 거였죠. 내가 얼마나 주님을 사랑하는지 그리고 내가 얼마나

주님을 믿고 의지하고 있는데, 그것이 무너질 수 있다는 것은 생각조차 못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너무도 처참하게 그 결기는 꺾여버리고 맙니다. 베드로는 예수를 부인하고 저주까지 했잖아요.

주님이 베드로를 그런 자리로 몰아 세운 것입니다. 네 처음자리를 거기서 확인하라는 것입니다.

 

너는 확실하게 날 부인하고 저주하고 나서...

그 후 난 철저하게 예수 부인한자로 심판받아 마땅한 그 자리로 낮아지라는 것입니다.

 

주님이 이 땅에 오셔서 아버지께 순종하는자로 말씀에 순응하는자로 살았던거는 너희도 이대로 살아야하느니라

이렇듯 종교지도자들처럼 그런 본을 보여주기 위함이 아니라 그 반대로 너희는 이렇게 살수 없는 자들이란다.

 

'그래서 내가 네가 되어 말씀을 지키다 맞아 죽는자로 그렇게 본을 보이고 십자가를 지는거란다.'

'너희는 죽었다 살아난다해도 불가능한 일이란다. 누가 대신 해 주지 않으면 구원은 영원히 요원한 길이란다.'

'그래서 내가 네 대신 살아주는거야~'

'이것이 너희에게 덧 입혀져야 돠는거야, 내 공로로 덮어쓰기 하기 위해선 네가 잘못 되었다는 결론이 나야하는거야'

'잘 된 것은 삭제할 필요가 없잖아 그리고 수정할 필요도 없잖아 그러니 네가 삭제 당할 자로 증명되어야 하는거란다.'

 

그렇게 예수안에 있는 자들에게 동일하게 나타나는 한가지 표징(본)이 있는데...

그것은 핍박과 조롱과 주를 부인할 수밖에 없는 나의 한계성으로 인한 고난 아픔 애통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수시로 나의 믿음 없음이  발각되어야 하고 이로인해 나는 없음으로 폭로되는 것이 성도의 표징이래요.

그래서 나는 매일 죽은자임이 확인되야 하며 죽은자라는 자각이 내가 예수안에 산자라는 증거라네요.

 

이런 처절한 경험들이 내 몸에 예수의 십자가 흔적이라는 고난의 길 그 예수의 본을 따르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이 후로는 누구든지 나를 괴롭게 말라 내가 내 몸에 예수의 흔적을 가졌노라"(갈6:17)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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