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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14-04-30 12:15
   요한복음 64 유다야, 유다야(I) 에서...
 글쓴이 : admin
    조회 : 16,069  


왜 유다는 그 예수님의 ‘끝까지 사랑’에서 제외가 된 것일까요? 
앞서 말씀드린 대로 그는 창세전에 유기되기로 작정이 된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왜 주님은 유다를 굳이 당신의 제자로 삼으셨습니까?
주님은 처음부터 그가 마귀라는 것을 아셨잖아요?
그러면 그냥 싹을 잘라 버리시지 왜 제자로 받아들였다가 발까지 다 씻어주시고는 밤으로 가도록 놔 
두셨냐는 말입니다. 오늘 본문18절에 그 답이 나와 있습니다.
 
(요13:18) 내가 너희를 다 가리켜 말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나의 택한 자들이 누구인지 앎이라 
그러나 내 떡을 먹는 자가 내게 발꿈치를 들었다 한 성경을 응하게 하려는 것 이니라

 
이미 성경에 유다라는 존재와 그 유다가 할 일이 기록이 되어 있기 때문에 주님은 유다를 제자로
받아들이신 것이고 그가 그의 뜻대로, 밤으로 나가는 것도 허용하신 것입니다.
이 시편 41편의 인용구절에 대해서는 제가 다음 주에 자세하게 설명을 해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우선은 지금 설교의 맥을 잘 좇아오시기 바랍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이 역사 속에서의 모든 것은 우발적이고 즉흥적으로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작정과 계획하심에 의해 통제되고, 제한받고 있는 것임을 확실하게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계획하시고 예정하신 대로 역사는 흘러간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또한 이러한 구절들을 통해서 마귀도 하나님의 구속사 안에서 하나의 역할을 담당하고 있는 것이고,
그러한 구속사 속에서의 마귀의 열연도 반드시 필요한 구속사의 완성 요소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마귀인 유다가 십자가가 서는 데에 결정적인 역할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마귀까지도 하나님 나라의 완성에 도구로 쓰여 지고 있다는 것을 여러분은 절대로 놓치시면 안 됩니다.
 
왜 주님께서 교회에 들어와 있는 가라지를 뽑지 말고 놔두라고 말씀을 하셨는지 아시겠지요?
가라지들도 다 하나님의 작정 속에서의 역할이 있단 말입니다.
그렇게 유다는 알곡들의 천국입성에 쓰여지는 가라지의 역할을 맡아서 열심히 자기 일에 충실하게 살다가 간 
것입니다. 심지어 마귀인 유다는 전도의 도구로도 쓰임을 받았습니다.
주님은 사역 초기부터 유다라는 자가 마귀의 세력을 대표하여 예수님을 대적할 것임을 아시고 계셨습니다.
 
(요6:70~71)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가 너희 열둘을 택하지 아니하였느냐. 그러나 너희 중에 한 사람은 
마귀니라 하시니. 이 말씀은 가룟 시몬의 아들 유다를 가리키심이라 저는 열 둘 중의 하나로 예수를 팔 자러라
 

그런데 그러한 유다를 삼년 반 동안 곁에 두시면서 제자들을 파송하실 때나 전도 여행을 하실 때, 기적을 일으키실 
때, 모든 순간에 유다를 동참 시키셨습니다. 심지어 그에게 능력까지 더하셔서 그가 귀신도 쫓아내고, 병도 고치며, 
전도도 하게 하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에게 돈궤까지 맡기시고 모든 재정의 출납을 맡아보게 하셨습니다.
그러나 그는 유기된 자였습니다. 그런데 재미있는 구절이 바로 그 밑의 20절입니다.
 
(요13:20)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나의 보낸 자를 영접하는 자는 나를 영접하는 것이요
나를 영접하는 자는 나를 보내신 이를 영접하는 것 이니라
 

유다의 이야기가 흥미진진하게 진행되는 가운데 갑자기 나의 보낸 자를 영접하는 자는 나를 영접하는 것이라는 
말씀을 하십니다. 그 말은 비록 유다가 유기된 자, 즉 마귀의 편이라 할지라도 예수님은 그를 들어 당신의 전도 
도구로 사용하실 수 있으셨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유다 자신은 유기된 자이고, 마귀의 편이었지만 하나님은 그러한 자까지도 당신의 도구요 수단으로 쓰실 수 있는
만물과 만사의 주관자이심을 밝히시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유다를 보내셨을 때 유다를 통해 예수가 전해지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보낸 자를 영접하는 것이 주님을 영접하는 것이라 기록이 되어 있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보내신 
‘자격 있는 자’가 아닙니다. 세상적 관점으로 볼 때 도저히 자격도 없고, 가치도 없어 보이는 어떤 이들을 통해서도 
복음은 전해질 수 있는 것입니다. 
애굽의 바로나, 페르시아 왕 고레스, 대 제사장 가야바 등도 하나님의 도구로 쓰여 구속사에서의 한 역할씩을 해 내지요?
 
(요11:49~52) 그 중에 한 사람 그 해 대제사장인 가야바가 저희에게 말하되 너희가 아무 것도 알지 못 하는도다. 
한 사람이 백성을 위하여 죽어서 온 민족이 망하지 않게 되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한 줄을 생각지 아니 하는도다 
하였으니. 이 말은 스스로 함이 아니요 그 해에 대제사장이므로 예수께서 그 민족을 위하시고, 또 그 민족만 위할 
뿐 아니라 흩어진 하나님의 자녀를 모아 하나가 되게 하기 위하여 죽으실 것을 미리 말함 이러라

 
보시는 바와 같이 하나님은 예수님을 죽이는 데에 결정적 역할을 하는 대 제사장의 입도 사용하셔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의미를 정확하게 설명을 하게 하십니다. 저는 지금 아무나 복음을 전할 수 있다는 것에 초점을 두고 말씀을 
드리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능력은 마귀까지도 도구로 쓰실 수 있을 만큼 전지전능한 것임을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렇게 당신의 일을 성취하시는 데에 있어서 그 어떤 것도 들어서 사용하실 수 있으신 분입니다. 
따라서 겉으로 보기에 하나님께 쓰임을 받고 있다고 해서 그들이 모두 하나님의 택한 자일 수는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마틴 루터나 스펄전 목사님 같은 분들이 ‘하나님, 혹시 저를 이렇게 사용만 하시고 나중에 지옥에 보내시려고
하는 것은 아니지요?’라고 일기를 쓰셨던 것입니다. 사도 바울도 자신이 그렇게 하나님께 쓰임을 받다가 나중에 
버려지게 되면 어떻게 하나 하는 경외감과 두려움을 가지고 신앙생활을 했던 사람입니다.
 
(고전9:23, 27) 내가 복음을 위하여 모든 것을 행함은 복음에 참예하고자 함이라. 내가 내 몸을 쳐 복종하게 함은 
내가 남에게 전파한 후에 자기가 도리어 버림이 될까 두려워함 이로라
 

이 말은 사도 바울이나 루터나 스펄전 같은 사람들이 구원의 확신이 수시로 흔들렸다는 말이 아니라 그러한 경외와 
두려움의 긴장감 속에서 진지한 신앙생활을 했다는 증거인 것입니다.
따라서 여러분과 저도 사도 바울과 같은 경외감과 두려움으로 신앙생활을 해야 마땅한 것입니다.
바로 내가 유다가 될 수 있고 바로 내 곁의 친구가 유다일 수 있다는 긴장감을 가지고 신앙생활을 하자는것입니다.
그래서 사도도 두렵고 떨림으로 구원을 이루라고 권면을 했던 것입니다. 
너희 자신에 대해 너무 과신하지 말라는 말씀인 것입니다.
 
유다는 그렇게 성경에 예언된 하나님의 말씀을 한 점 가감 없이 성취하는 인물로, 그리고 그 과정에서 하나님의 
도구로 쓰여, 복음을 전파하는 데 쓰임을 받는 자로 하나님에 의해 선택이 된 것입니다.
 
그러한 마귀, 유다의 제자단 합류 사건에 의해 우리가 배울 것이 많이 있습니다.
우리는 그러한 유다의 선택을 통하여 마귀에게까지 인정을 받은 주님의 순결함과 거룩함을 확인 할 수 있었습니다.
성경이 말씀하기를 유다는 마귀라고 했는데 그 유다가 ‘그는 무죄한 자다’라고 증언을 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유다의 그 증언을 통하여 예수님의 도덕적 무흠함이 완전히 입증이 된 것입니다.
마귀가 예수님 편을 들어 거짓말을 할 리는 없으니까요.
 
또 한 가지 우리가 배운 것은 하나님에 대한 예수님의 완전한 복종입니다.
예수님은 처음부터 그 유다로 말미암게 될 결국이 어떤 것인지 알고 계셨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뜻에 따라 그를 택하심으로 하나님을 향한 완전한 순종의 모습이 어떠한 것임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유다의 제자단 합류는 죄의 흉악함을 우리에게 알려 주기도 했습니다.
유다는 하나님이신 예수님과 삼년 반을 교제를 했고, 함께 먹고, 함께 마시며, 그 분의 모든 강화나 가르침을
다 들었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비열하게 그 스승을 팔아버렸습니다.
죄인은 그렇게 스스로의 힘으로는 절대 구원의 길로 들어설 수 없는 것입니다.
그렇게 유다의 구속사 속에서의 역할을 보면서 우리는 하나님의 지혜가 우리의 제한된 지혜를 뛰어넘는 깊고 크고
높은 것임을 배우게 됩니다. 이렇게 우리는 왜 유기된 자의 표본인 유다가 예수님의 제자단에 합류하여 있었는지에
대해 살펴보았습니다.
 
 
그렇다면 우리에게 이런 질문이 생깁니다.
그렇게 하나님의 계획하심 속에서 어떤 역할을 맡기로 작정된 자가 그 작정과 계획에 의해 죄인의 역할을 한 것을
가지고, 하나님은 그것을 근거로 그들을 심판 하실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성경에 이미 그의 존재와 그의 역할이 기록이 되어 있다는 것은 그의 존재와 역할이 하나님의 계획 속에서 예정
되었다는 말이잖아요? 그런데도 하나님은 유다를 처벌하실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심지어 오늘 본문을 보면 유다는 자신의 의지대로 예수님을 판 것이 아니라 유다 속에 들어간 마귀가 유다를 조종한 
것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요13:2, 27) 2 마귀가 벌써 시몬의 아들 가룟 유다의 마음에 예수를 팔려는 생각을 넣었더니 27 조각을 받은 후 
곧 사단이 그 속에 들어간지라 이에 예수께서 유다에게 이르시되 네 하는 일을 속히 하라 하시니

 
그렇지요? 유다의 마음에 예수를 팔려는 생각을 집어넣은 것도 마귀이고 그 생각을 실행에 옮기도록 유다 안에서 
움직인 자도 마귀입니다. 그렇다면 유다는 무죄 아닙니까?
세상 법정에서도 자의에 의한 범죄가 아닐 경우에, 그리고 어떤 세력의 사주를 받고 저지른 범죄의 경우에는 
정상참작이 되지 않습니까? 그렇다면 유다의 범죄는 충분히 정상 참작이 되어야 하지 않나요?
유다가 예수님을 파는 사건에 마귀가 등장하는 것은 십자가 사건이 단순히 정치적 사건이 아니라 영적인 사건임을
암시하는 것이지 유다에게 면죄부를 주고 있는 것이 아닌 것입니다.
그것은 바로 유다의 행위가 마귀의 사고방식에서 나온 행위임을 보여주는 것이란 말입니다.
 
여러분, 마귀가 뭡니까? 마귀는 실존하는 실체입니다.
그러나 마귀는 어떠한 세력을 상징하고 있는 거라 했지요? 마귀는 하나님의 은혜를 떠난 모든 도덕적 피조물의 
상태와 특징을 모두 담고 있는 상징적 존재이면서 실체인 존재인 것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은혜 밖에 있는 유다
자신이 바로 마귀인 것이고 그러한 유다의 생각과 행위 또한 마귀의 것인 것입니다.
그러니까 마귀가 들어간 유다의 모습은 바로 예수를 믿기 전의 죄인들의 모습이며, 예수를 믿고 난 뒤에도 옛 사람
이라는 형태로 여전히 성도에게 남아있는 죄의 잔재(macula)의 모습인 것입니다. 
 
그렇게 가룟 유다는 민족적 이스라엘의 다른 이름인 유다, 그리고 그 유다라는 나라가 상징하고 있는 죄인들,
그리고 그 죄인들의 대표인 아담, 바로 구원받기 전의 우리를 뭉뚱그려 상징하고 있는 인물인 것입니다.
바로 내가 유다란 말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팔아먹은 자의 이름이 바리새인들로 대표되는 민족적 ‘이스라엘’ 즉 
‘유다’인 것입니다. 그 모두의 특징이 뭡니까?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불가능함과 무력함을 인정하지 못하고, 자신이
속해 있는 이 육의 세상에서의 부귀영화, 입신양명, 소원성취를 꿈꾸는 것입니다.
 
진정한 행복과 만족, 그리고 진정한 강함은 바로 하나님으로부터만 말미암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나’라는 우상을 
만족시키기 위해 세상적인 힘을 동원해서라도 이 세상의 행복과 쾌락을 추구하는 것입니다.
그게 아담이었으며, 유다였으며, 가룟 유다였으며, 바로 우리 자신인 것입니다.
 
그럼 구체적으로 가룟 유다의 죄가 어떤 것인지 간단하게 짚어 보겠습니다.

( 중  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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