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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13-06-06 07:05
   관 념
 글쓴이 : njsmyrna
    조회 : 17,081  


<대구 황용환님 글입니다>
              
신앙이 관념화되어 우리의 머리속을 맴돌고 있다면 아마도 삶에서의 일과 그 관념을
계속 대조해보는 그런 과정을 겪을 것입니다.
그렇기에 많이 고되죠.
 
죄의 자각이 관념에 담겨 있으면 그 관념으로 분명 계시된 표적을 붙든 것인데
이게 실체를 정확히 모르기에 희미한 겁니다.
 
말씀으로 알고 있는 것은 그냥 관념입니다.
그 관념화된 죄로 인해 그 관념의 영역이 침범받게 되게 되지요.
그게 부인됨입니다. 그 관념의 주체가 부정당하는 것이 자기부인입니다.
근데 관념상에서만 되뇌이고 있어요.
 
삶과 또 비교해 보면 그 관념으로 되뇌이는 죄를 대입해보고는 그게 맞지 않음에 더 놀랍니다.
아니 삶이 이 관념이 아는 정도의 수준으로 가야하는데 그게 안되더란 겁니다.
결국 죄의 의미를 깨닫고 더욱 부자유하게 된거죠.
근데 은혜도 이런 관념에 붙들어 놓으면 죄랑 같습니다.
즉 실체적 은혜를 모르기에 희미하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은혜가 관념으로 남아서 그 죄의 속량이 오직 관념에서만 남아있는 것입니다.
또 삶에 대입해보면 이건 너무 차이가 커서 무슨 짐을 진것 같을 것입니다.
 
결국 그 관념에 담은 신앙, 이게 표적에 묶여버린 신앙입니다.
 
물론 관념으로 이해하는 것은 반드시 필요합니다.
근데 이 역사속에서 한 사람을 묶어놓을 만큼 큰 함정과 올무정도로는 충분하다는 거죠.
관념으로 그 복음을 담으면 일종의 과정적 신앙으로 깨달음의 진리추구가 됩니다.
하나님 은혜를 관념이 이해하지 못한다면 은혜로 안받아들이겠다는 것이죠.
죄도 관념에 담아 이해하지 못하면 죄로 못받아 들이는 겁니다.
근데 관념이 어떻해서든 받아들였으면 반대로 삶과 대조작업에 들어가게 되는데
이게 일치가 안되는 겁니다.
그 괴리감에 쌓여서 이걸 어떻게 해결해야 하는지가 문제가 되는 거죠.
 
때로는 이런 관념화된 개념에서 은혜로 자유함으로 이끌린 사람들을 종종 봅니다.
근데 이게 관념의 상태에서만 알게된 것이기에 실상은 그렇게 자유하지 못합니다.
즉 관념은 자유한데 실체는 자유함을 누리지 못하죠.
 
근데 이게 설명을 해도 전달이 잘 안되는게... 저는 이 부분을 은혜로 끌려가보면 다 안다고 했는데...
사실 그 전에 알았던 말씀의 내용이나 복음의 내용은 이미 관념화의 상태에서는
오래전에 알았던 것이지만 결국 그 괴리감에 자유하지 못했습니다.
결국 저에게 있어 관념화된 복음과 하나님 사랑은 그냥 허상인거죠.
그러나 은혜로 끌려가는 것을 알고나니 그건 제 관념화된 허상의 형태가 아니라 실체라는 것입니다.
 
사실 성도 여러분이 관념화로 이해하고 있지는 못하지만 그리로 살고 계신분들이 있습니다.
반드시 하나님은 그리로 끌고 가시거든요.
이것을 성경은 빛이 비추었으되 어둠을 사랑하여 그 빛을 깨닫지 못한 상태...라고 부르는 것인데
이것을 관념으로 받아들이면 그 빛이 뭔가....라고 생각하고
그 빛을 설명을 듣고 아~ 그런 뜻이구나를 알았다고 해서 그 빛을 안다고는 말할 수 없습니다.
 
결국 삶에서 말씀이 뚫고 들어와 관념부터 해체하고 바로 삶에서 실체로 대면하게 되십니다.
저는 이것을 은혜로 끌려간다라고 표현을 하는데...
여기서 관념화된 앎은 거의전부가 부정당합니다. 그게 허상이라는 것이죠.
 
우리가 말씀을 서로 나누고 누군가를 권면하고 가르치고 아는 것을 공유하는 것이
일종의 이 허상을 주고 받는 것입니다.
진리를 전하시던 목사님이 이 허상을 던지고 가신 것이 아니시라면
무언가 의미를 담아 실체로 던지고 가셨다는 것쯤은 아실 겁니다.
그러나 설명은 관념화된 것으로 밖에는 전달이 안되죠.
근데 빛은 분명히 비춰지고 있습니다.
그 관념이든 표적이든 이미 비추인 것인데 못알아 듣는 것은 관념으로만 묶고 있는 것입니다.
 
제가 은혜로 끌려가야 한다고 하니까 어떤 분은 그 끌려감이 올때까지 기다려 보겠다는 답변을 듣고
좀 허탈했습니다.
 
무섭죠? 아마도 다들 관념에 오래 묶여있다보면 이 상태가 될것 같습니다.
 
예를들어,
오늘 나의 죄됨에 대하여 배웠다고 합시다.
죄인의 고백은 관념상의 이해입니다.
이게 이 역사모형에서의 삶과 비교해보게 되는데 관념과 많은 괴리가 있는 겁니다.
어렵게 이해하지 마시고... 그냥 안되더란 겁니다.
죄의 자각은 존재적 부정으로 이끌립니다.
즉, 그 관념이 부정당한 겁니다.
고로... 나의 죄인의 고백이 부정당한 겁니다.
 
이것을 다시 관념에 담습니다.
이게 제대로 안되었다면 복음, 십자가 은혜와 아무 상관이 없다는 관념이 자리잡고 있기에
다시 그 삶과 비교해봅니다.
근데 무슨 짓을 하고 무슨 말씀을 보아도 안되더란 겁니다.
이에 그 관념이 아... 나는 복음과 아무 상관 없는 자인가.
재차 그 관념이 부정당합니다.
 
성경의 가르침은 어린 아이라도 이해할 수 있을 만큼 쉽게 설명합니다.
근데 우리는 어린 아이가 아니라 뭐든 꽈서 이해하는 관념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안보이는 겁니다.
관념에 담으니까.
 
사실 한번의 설교로도 그 관념상의 내용은 충분히 인지 가능합니다.
근데 그 관념을 자꾸 곱씹는것이지요.
왜냐... 나를 이해시켜야 하니까요.
나를 이해시키지 못하면 나는 안받아들일테니까요.
내가 안받아들이면 그 복음과 아무 상관없게 되니까요.
결국 그 나를 꼭 붙들고 나를 달래가고 있는 겁니다.
내가 나를 위안해주고 달래주고 하는 겁니다.
그러니 어려운거죠.
 
계속해서 죄라는 것이 관념상에 존재하는 분들은 그 죄만 말하게 되어 있습니다.
위의 과정에서 그 관념상과 삶에서의 괴리가 자꾸 들통나는 자신을 보게 되는데
고통스럽고 이 고통스러움의 의미를 아주 조금씩 알아가는 겁니다.
즉, 그 관념이 균열이 가기 시작하는 거죠.
결국 그 관념은 부정당할 것입니다.
 
그럼 실체적인 죄인인 면목없는 나만 남게 됩니다.
신앙의 관념으로도 철저하게 부정된
자기신앙이라는 가식이 까발려진 그 나라는 존재... 아 이 존재가 죽음이구나... 없음이구나...
그럼 나는 어떻해요...
 
이게 완전히 되지 않으면 또 이것을 관념에 담습니다.
또 부정당하겠죠.
계속 반복하는 것은 일단 걸려든겁니다.
함정에... 아마도 이 쳇바퀴 릴레이에 걸려든 분들이 많으실 겁니다.
 
뭐 적당히 멈추신 분들도 계실 겁니다.
그 관념과 실제 삶에서의 괴리부분을 일정부분 타협하는 것으로...
 
제가 은혜를 말하는 것은 이 때문입니다.
우선 이 죄에 대한 것부터 한번 시작해보시기 바랍니다.
단번에 어린아이처럼 알게 되시는 분이 계시다면 바로 은혜와 대면하게 되실 것입니다.
이미 내주하고 계시거든요.
 
몇번이고 반복하실 수 있습니다.
관념이 단단하고 부셔지지 않으시는 분일수록 더 고통스럽고 피폐해지고
죽고 싶어질 수 있으실 것입니다.
그러나 그 관념이 그 관념적인 신앙이 결국은 부서지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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