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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16-04-20 22:20
   에피타프 - 서울 조규만님 글
 글쓴이 : admin
    조회 : 25,963  



요즘들어 젊은 친구들의 입에 회자되는 단어중에 듣기 거북한 말이 하나 있는데 그건 '교회 오빠'라는 단어입니다. 저도 중고등학교때는 공부 안하고 교회 뻔질나게 드나드는 동네 교회 오빠 중 한명이었기 때문에 그런지 영 그말이 거슬리는게 사실입니다. 그때 학교에서 교회 다닌다고 하면 무슨 연애박사 쯤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었는데 아마 남녀공학 학교도 별로 없었고 이성교제의 기회도 흔치 않았기에 교회 다닌다고 하면 연애하러 다니는 걸로 이해되던 시절이라 그러지 않았나 싶습니다. 
그래서인지 아닌게 아니라 그 당시 학교친구들에게 제가 연애상담으로 좀 유명하기는 했습니다. 봄바람 살살 부는 날이나 가을바람 실실 부는 날에는 이런 부탁을 많이 받고는 했었거든요.
"규만아, 야....나 좀 살려주라...내가 이번에 우찌우찌 해볼라고 하는 여자애가 하나 생겼는데, 내재주로는 도저히 잘 안된다.....뭐 좀 방법이 읍겠냐? 내가 빵사줄께......노하우 좀 알려줘......제발......"
헐...제가 뭘 알겠습니까. 제코가 석자인데...연애는 개뿔 여자친구 한번 사귄적이 없었는데 말이죠. 하지만 그럴 때마다 딱 하나의 비결을 알려주곤 했는데 제기억으로 그 방법이 거의 백발백중이었습니다. 제 인생은 늘 그렇듯 이론만 강했거든요. 그 비결은 이랬습니다.
"음....니가 아마 그 여자애랑 얘기를 하다보면 분명히 좋아하는 노래에 대한 얘기가 나올꺼야....그러면 너한테 제일 좋아하는 곡이 뭐냐는 질문을 분명히 던질거라구. 그러면 잠깐 생각하는듯 여백을 뒀다가 목소리 쫘악 깔고 이렇게 얘기해. '혹시 '킹 크림슨'의 '에피타프'라는 노래를 아시나요? 저는 그 노래를 들으며 깊은 생각에 잠기곤 합니다..' 라고 말이지. 그러면 둘중에 하나야...그곡을 아는 여자애와 모르는 여자애....만약 아는 여자애라면 니 수준을 다시 보고 좋아라 할것이고 모르는 여자애라면 그노래를 집에 가서 들어보고 아마 너를 다시보게 될꺼야....풉....그러면 그걸로 게임오버야. 빵은 천천히 사렴.....음하하핫~"
곰곰히 생각해보니 수작을 부렸던 여학생은 몇몇 있었던거 같습니다만, 중은 원래 제머리를 못깎는 법인지라 말로만 그렇게 연애박사가 되어 온동네 제과점 빵 좀 얻어 먹고 다녔던 기억이 새롭습니다. 나중에 보면 세상에 연애질만큼 피곤한게 또 없는건데 하여간 그때 그 시절에는 왜 그렇게 연애를 못해서 안달이었는지 참 웃깁니다. 하여간 저의 단순무식한 비결을 전해 듣고 시도한 아이들은 모두 나중에는 환한 얼굴로 저를 맞이하며 빵 먹으러 가자고 제 어깨를 감싸던 기억이 나는군요. 그때의 그 화려한 봄날같던 청춘들이 지금은 전부 아저씨, 아줌마들이라니..ㅠㅠ

당대의 명곡 '에피타프'(Epitaph)를 기억하시나요? 우리말로는 '묘비명'이라는 을씨년스러운 단어입니다만 모두가 노래가사의 뜻도 제대로 모르면서 하여간 그 노래 좋아 한다고 하면 웬지 좀 있어 보이던 그때 그 시절이었습니다. 어린 그때도 도무지 가사가 뜬구름 같았는데 나이 먹어 다시 들어 봐도 개 풀뜯어 먹는 소리로 밖에 보이질 않습니다. 그런 이 노래가 오늘 문득 떠오른 이유는 아내 때문이었습니다. 
연애 기간까지 포함하면 몇년 후에는 삼십년이 되는 제 아내를 언제든 깔깔거리고 웃게 만드는 비결이 저에게 하나 있습니다. 아내는 제가 이한마디만 하면 꺄르르~ 웃어대며 저에게 한마디 하거든요. 오늘 아내가 묻더군요.
"무슨 일 있어? 표정이 왜 그래?" "음....나....몸이 안좋아....." "푸하하하..아이구..오늘 몸이 안좋아요? 언젠 좋았나? ㅋㅋ 당신 죽으면 내가 묘비명에 새겨줄껴.....'몸이 늘 안좋던 한 남자 여기 잠들다'.....이렇게....꺄르르르르......오늘은 또 어디가 안좋은데??....어느 참신한 부위야??..."
닝기리....이여자 내마누라 맞아? 삐뚫어 질테다....그런데 이상하게 아내가 꺄르르 웃으면 안좋던 몸이 다시 좋아지는 것 같습니다. 그러고 보면 아내의 웃음만큼 훌룡한 보약은 없는 것 같아요. 아내의 얘기를 듣고 생각에 잠겨 봅니다.
그래, 언젠가는 분명히 나도 죽겠지....그럼 내 묘비명에는 진짜 뭐라고 새겨 볼까나....하고 말이죠. 전에 김성수 목사님 소천하셨을 때 '집으로 가자' 노래가 장례식장에서 내내 들려 오던걸 생각해서 저도 음악은 생각을 하고 있었습니다. 내 장례식장에 들려질 노래는 내가 정해야지 하고 말이죠. 아직 최종 확정은 아니지만 모든 분들이 익히 아시는 '워싱턴 스퀘어(Washington Square)'로 잠정적으로 정했습니다. 특별한 이유는 없구요, 웬지 저의 삶과 죽음에는 이 음악이 제일 적당할 것 같다는 생각을 했거든요. 아마 제 장례식장에 오시면 귀에 익은 이 음악을 들으며 제 영정사진을 보실지도 모르겠습니다. 영정사진도 생각 같아서는 리플레이되는 비디오로 계속 돌리고 싶은데 그건 너무 파격적이고 조문객들 꿈자리가 뒤숭숭 할 것 같아서 제일 꽃다운 나이 때의 사진으로 한장 준비하려고 합니다. 늙어 죽은 사람은 꼭 늙었을 때의 사진으로 영정사진을 올려야 되는건 아닌듯 싶어서요. 
그런데 아무리 생각해도 마땅한 묘비명은 아직 찾지 못했습니다. 뭔 대단한 사람 왔다 갔다고 묘비명을 쓰나 싶은 생각도 들고 해서 저는 그냥 화장해서 커다란 나무 밑에 묻어 주기를 바란다고 했기에 묘비명을 세운다는게 좀 그렇기는 하지만 그래도 웬지 묘비명은 마음 속에라도 하나 새겨 놓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내마음 속에 아로 새겨진 묘비명...그건 뭐가 좋을까.....아직도 고민중입니다. 그래서 혹시나 해서 이름 꽤나 알려진 유명인사들의 묘비명을 다 읽어 보았는데 딱히 맘에 드는 묘비명이 없더군요. 복음을 알지 못한자들의 묘비명이라는게 참 뻔하더군요. 지나치게 냉소적이거나 해학적이고 잘난 척하는 내용들 뿐입니다. 
그나마 맘에 드는 묘비명은 에밀리 디킨슨의 "Called Back"이 마음에 좀 남더군요. '돌아오라는 부름을 받았다' 좀 멋지지 않나요. 조금 맘에 듭니다.

희극을 보고나면 꼭 즐거운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비극을 보고나면 꼭 슬픈 것도 아닌것 처럼 장예모 감독의 '인생'이라는 영화를 보고 나면 내용은 좀 쓸쓸하지만 기분이 꽤 좋아집니다. 영화가 부분부분 다소 비극적이라 기분이 좋아지는 영화라는 평이 좀 안어울리기는 합니다만, 동서고금 산다고 하는 것은 다 그렇고 그런 것이구나 싶은 생각이 들기도 하고, 지금 우리네 사는 형편보다도 훨씬 어려운 상황에서도 웃으며 살아가는 영화 속의 부부를 보고 있으니 다소 위안이 되어서 그런게 아닌가 싶기도 합니다. 온통 먼지나는 회색빛으로 가득한 영상이지만 신기하게도 그 안에서 촉촉하고 따뜻한 인간들의 사는 맛이라는게 뜨거운 만두 위의 김처럼 우러나와 참 좋은 마음으로 본 영화입니다. 
장예모감독의 영화이니 당연히 여주인공은 '공리'인데 그의 남편 '부귀(후꿰이)'와의 평생의 삶이 영화에 담겨 흐릅니다. 영화는 도박에 빠진 부귀의 모습으로 시작됩니다. 이름처럼 부자집 도련님이었던 그가 도박을 마치고 새벽에 자가용 운송수단으로 웬 아줌마의 등에 업혀 퇴근하는 우스꽝스러운 모습을 보면서 대충 영화가 어떻게 흘러갈지를 관객들이 짐작하기에 충분합니다. 그리고 예상대로 부귀는 도박으로 집을 팔아 먹고 온식구들을 거리에 나 앉게 만드는데, 그러면서 중국의 격동기 역사가 그의 인생에 접붙여 지면서 파란만장한 가족의 역사가 시작됩니다. 한가족의 부침과 중국역사의 거대한 소용돌이가 한 영화속에서 펼쳐지게 되는 것입니다.
부귀와 공리는 전쟁에 휘말려 생이별도 하고 오랜 고생도 하며 바닥 인생을 살게 되는데 그러면서도 사랑하는 딸 아들과 함께 어렵지만 행복한 삶을 살아 갑니다. 하지만 어느날 끔찍이도 아끼던 아들이 당 간부가 된 친구의 차에 치여 죽게 됩니다. 그리고 말을 하지 못하는 장애를 가진 딸은 역시 다리를 저는 장애를 가진 사위에게 시집을 보내서 행복하게 사는가 싶더니 그만 그 딸도 아이를 낳다가 죽고 마는 슬픔을 맞이하게 됩니다. 카메라는 그렇게 젊은 부부의 모습이었던 두사람이 자식 둘을 잃은 노인이 되어 가는 모습을 차분하게 뒤따라가며 마무리합니다. 
그런데 저는 남자 주인공인 부귀의 지나간 세월에 대한 두번의 회한이 유독 마음에 깊이 남습니다. 한번은 젊은 시절 그에게서 도박으로 집을 빼앗아간 '롱에루' 대한 것입니다. 도박으로 부귀의 집을 차지하게 된 롱에루는 문화혁명 때 그 집을 당에 바치지 않고 불에 태워 버렸다는 이유로 총살을 당합니다. 그때 부귀가 집으로 뛰어 들어와 아내에게 얘기하죠. 내가 그에게 집을 빼앗기지 않았더라면 오늘 내가 그 대신 죽게 되었을거야....라고 말이죠. 
또 한번의 회한은 그의 딸이 아이를 낳다가 죽을 때입니다. 홍위병들이 세상을 독차지하여 대학병원도 교수들은 쫒겨나고 젊은 대학생 홍위병들이 차지하게 됩니다. 그런데 공리의 딸이 난산으로 고생을 하자 사위는 거리에서 인민재판을 받고 있던 의사인 왕교수를 데리고 옵니다. 아내의 난산을 책임져 줄 의사가 필요했으니까요. 그때 부귀는 배가 고파 기진맥진하고 있는 굶주린 왕교수에게 주먹보다 큰 찐빵을 몰래 7개나 사다 줍니다. 굶주려 있던 늙은 왕교수는 찐빵을 모조리 먹어 버리고 그만 정신을 잃고 맙니다. 그래서 결국 부귀의 딸이 과다출혈로 죽어가는 동안 정작 왕교수는 아무런 도움을 주지 못하게 되고 가엾은 부부의 딸은 죽게 됩니다. 참 어이없는 헛웃음이 나오는 장면입니다. 훗날 아들과 딸의 무덤에서 늙은 부귀는 이런 이야기를 합니다. 
"내가 그때 왕교수에게 찐빵을 많이 주지 않았더라면....우리딸이 살아 있을텐데......모든게 내잘못이야......"
 
얼마 전부터 군대에서 야간 보초를 설때 이후로 지나간 세월들에 대한 생각들을 가장 많이 하고 있습니다. 특히 그중에서도 후회스럽고 한스러웠던 순간순간의 기억들이 머릿 속을 헤집고 다닙니다. 
그때 나는 왜 그랬을까....
그때 그일보다 저일을 선택했었더라면....
그때 그사람 말을 듣지 않고 저 사람 말을 들었었더라면....
그때 회사를 그만두지 않고 남았었더라면....
그때 그 돈으로 이걸 하는 것 보다 저걸 했었더라면......
그런 식으로 꼬리에 꼬리를 무는 후회들.....
아쉽게도 즐거웠고 다시 생각해도 미소가 머금어지는 그런 순간들은 하나도 안떠오르고 온통 잘못된 선택들로 인해 어긋났었던 순간들의 회한 만이 가슴에 가득했습니다. 그리고 그런 생각들에 이어지는 또 다른 생각들......
하나님은 왜 그때 그 순간 지켜보고 계시기만 하셨던 걸까.... 짱돌이라도 던져서 못하게 해주셨더라면......

바둑 이야기를 다루는 한국영화 '신의 한수'에는 눈이 먼 재야의 고수 '주님'(酒님)으로 안성기가 출연합니다. 그가 영화속 사람들에게 그 특유의 목소리로 묻습니다. 
"만약 자네에게 인생을 되돌릴 수 있는 신의 한수가 있다면 자네는 어디로 돌아가고 싶나.....?" 
흔히들 해보는 생각이긴 하지만 어차피 되돌릴 수 있는 시간이라는 것이 존재하는 것이 아니기에 쓴웃음으로 덮어 버리곤 합니다. 그런데 아주 조금, 아주 조금 십원어치 정도 진지하게 이런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진다면 저는 어떤 신의 한수로 저의 삶을 되돌리고 싶을지 생각해 봅니다. 수많은 선택의 기로에 섰던 기억들이 서로 자신을 좀 봐달라고 고개를 디밀어서 그중에 하나를 딱 집어 얘기 하기란 쉬운일이 아닙니다. 그런데 사실은 이런 고민이나 생각이 좀 허망하죠. 어차피 돌이킬 수 없다는걸 알아서 허망하다는 것이 아니라 우리 믿는자들에게는 매 순간순간의 선택에 대한 그 어떤 결과나 열매들 모두 우연이 아닌 하나님의 계획 안의 필연이라고 배웠기 때문입니다. 
김성수 목사님이 그러셨죠. 성도의 삶에 마이너스란 없다고 말이죠. 모든 것이 합하여 선을 이루시는 하나님의 손길이 함께 하는 성도들에겐 모든 것이 감사할 뿐이라고 말입니다. 그러니까 결국 저의 후회도 아쉬움도 아무런 의미가 없는게 아닐까요. 그러면 후회나 반성이라는 말은 우리에겐 전혀 어울리지 않는 단어인 걸까요? 모든것은 하나님의 뜻이니 말입니다. 자신의 삶을 돌아 보면서 무엇이 잘못이었고 어떤 선택이 잘못된 선택이었다고 얘기 하는 것이 우리 성도들에겐 어떻게 판단 되어져야 되는지 저는 아직 잘 모르겠습니다. 내가 그때 무엇을 잘못해서 하나님의 뜻에 어긋 났었는지는 알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그것으로 인해 하나님이 우리를 고생 시키기 위해서 말도 안되는 엉뚱한 길을 가게 하심으로써 벌(?)을 주시는 것은 있을 수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물론 그 길이 다소 어둡고 추운 외로운 길이 될지는 몰라도 그것은 그것 자체로 하나님의 뜻이 있으신 것이지 그저 징벌을 위한 징벌은 아닐 것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옳으시고 언제나 좋으신 하나님이시니까요.
 
'인생'이라고 알려진 이 영화의 원제는 '활착(活着)'입니다. 활착이라 함은 접붙여진 가지나 뿌리가 자리를 잡고 잘 살아가게 된다는 의미입니다. 아마도 장예모 감독은 부잣집의 도련님이었던 망나니 부귀와 착하기만한 그의 아내가 역사의 광풍 속에서 살아가며 두 아이를 낳았다가 다시 인생이라는 우여곡절의 풍랑 속에서 두 아이를 잃고 힘들어 하며 방황하기도 하지만 결국은 어떻게든 살아가게 되어 있으며 그것이 자신들에게 남겨진 손자를 통해서 다른 모습으로 삶에 뿌리를 내리고 그렇게 질기게 살아간다는 의미로 제목을 그렇게 한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하지만 우리에게 활착이란 참으로 다르게 들립니다. 우리가 무엇이고 우리가 누구이길래 우리를 이렇게 사랑하셔서 우리를 서로 사랑하게 하시고 때로는 죽어라 다투게 하시고 그 안에서 다시 좌절하고 인내하며 그러다 돌감람 나무가 참감람 나무에 활착하듯 결국 예수님의 발위에 내발 살짝 얹어 한걸음 한걸음 살아가게 하시는지, 하나님의 그 놀라우신 은혜에 감사를 드릴 뿐입니다. 그렇게 따지고 보니 저의 묘비명에 무언가를 기어코 새기고 말겠다는 작은 욕심은 저멀리 사라지게 되네요. 묘비명에 거창한 말 한마디 올렸다고 해서 하나님이 괘씸히 여기고 자시고 하실 것 같지는 않지만 암만 생각해도 저의 있지도 않을 묘비명의 내용은 그저 '나는 없음'일 뿐이 아닌가 싶습니다.

솔직히 저는 하나님의 신의 한수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나는 특별해...나는 달라...하나님이 끝까지 나에게 이렇게 하실 수는 없는거야...그래 기다리자 신의 한수가 곧 내 역사의 바둑판에 놓이는 순간 알파고 같이 무서운 세상이 꼼짝 못하고 항복하게 되는 하나님의 크고 놀라우심이 드러날테니 말이야...하고 말이죠. 하지만 저의 미련하고 못된 착각을 주께서 오늘도 여지없이 깨뜨려 주시니 얼마나 감사한지요. 알고보니 저를 향하신 하나님의 절묘한 한수는 이미 놓여져 있었습니다. 예수님이 세상을 창조하시기도 전에 이미 그돌을 놓으셨다고 하는군요. 그렇게 저는 신비롭고 놀라운 신의 한수 속에 살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니 더 무슨 후회를 하고 무슨 아쉬움을 머금을 것이며 더 이상 상대할 상대도 없는 이미 이긴 싸움을 자꾸 이겨보겠다고 덤비는 것일까요. 참 어리석음입니다. 제가 세상에 내리고자 했던 뿌리가 뽑혀 말라 죽고 예수님에게 접붙여짐으로 영원한 천국의 삶을 살 수 있게 되기를 간절히 기도해 봅니다. 솔직히 그게 어떤건지 얼마나 좋은것일지 아직 감은 전혀 안잡히지만 말입니다.
이런 얘기 하는거....좀 걱정되는 표현이지만.....저에게 향하신 하나님의 놀라운 신의 한수는.....
김성수 목사님을 만나게 해주심.....이었습니다.
"살아계신 나의 하나님....만약 안계실지라도 감사했습니다."
이는 오늘자 저의 묘비명입니다.



최미숙 16-04-23 08:04
    
무한 감사~~
김미숙 16-04-23 20:56
    
목사님을 만나게 된 것을 생각해 보면,
그건...
나의 삶에서 참 희한한 '별일'이라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밑에서 세 번째 줄에 많(^^)번 동감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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